[밀리의 서재로 📙 읽기] 11. 아우스터리츠

D-29
Wurzelbürste (Wurzel 식물뿌리, bürste 빗, 솔) 이건 실제로 나무뿌리로 만든 솔인데 이런 단어가 왜 이런 반응을 나타나게 만들었을까..했는데 단어가 뿌리와 빗으로 이루어져서 그런 게 아닐까..했어요. 마치 유대인들을 뿌리 채 빗질해서 제거하려던 아버지가 속해 있던 독일 나치군이 연상되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전 여기에서 얼마전 본 존오브인터러스트 영화에서 나치 장교가 토하는 장면이 수많은 신발과 옷들이 남아있는 장소에서 청소를 하는 장면과 겹치는 게 기억나는데..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는 그곳이 그저 평화롭고 즐거운 집이었을 텐데 실은 그들이 학살하던 이들에게는 완전 다른 느낌으로 와닿았던 곳이었죠. 장소와 물건들은 아무 말도 아무 기록도 없는데 이것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남을 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네요.
그 어둠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머릿속에서 더 짙어져서, 세상이 마치 스스로를 텅 비운 것처럼 지워져 버린 삶과 함께 모든 것이, 줄곧 얼마나 많은 것이 망각 속에 빠져 버렸는지 우리는 거의 붙들 수 없고, 그 시간 이후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처음으로 다시 생각나는, 예를 들면 그림자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나무 선반 위의 짚이 든 자루나 그 속에 들어 있는 겨가 수년이 지나는 동안 삭아서 가늘어지고 짧아지고 수축되어, 마치 한때 여기 이 어둠 속에 누워 있던 사람들의 시체처럼 스스로는 어떤 기억의 능력도 갖지 않은 수많은 장소와 물건 속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은 이전에 그 누구에 의해서도 말해진 바도, 기록된 바도, 전해진 바도 없었다.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이 요새에 있던 날 이미 희미해진 것은 그곳에서 본 것을 나는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이 요새 안에 몇 개 안 되는 램프의 희미한 불빛으로만 비추어지고 자연광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세계가 사물의 윤곽을 흩어지게 한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인간의 최선의 계획들은 실현되는 과정에서 언제나처럼 정반대로 흘러갔다고 말했다.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아름다운 외양의 환상과 일찍 찾아온 소멸의 위험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과, ... 영원히 뭔가를 쓰고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풀려나 윤곽이 없이 오로지 희미한 색깔만을 인식할 수 있는 세계에 둘러싸인 채 정원의 대나무 소파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는 환상으로 차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떻게 나 자신의 상황과 연결했는지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다.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나온 psychoanalysis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느낌이네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모디아노의 소설들도 생각납니다.
공간 상상해보려고 벨기에 안트베르펜 중앙역 검색해봤다가 너무 멋진 건물이라 여행기들 둘러보는 즐거움에 잠깐 빠지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ㅎㅎ 웅장하면서도 우아함이 가득한 공간이라 가보고싶단 느낌이 절로 드네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으로 꼽히기도 했다네요. 옆에 있는 동물원도 읽으면서 한 상상과 달리 규모가 아주 크고 진귀한 동물들로 가득한 곳이더라구요. 어쩐지 등장하는 동물들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참, 녹투라마'는 고유명칭인줄 알았는데 야행성동물들을 모아둔 동물원 구역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와 정말 멋진 사진인데요! 물에 비친 모습도 근사하네요.
이런 웅장하고 멋진 건물들도 실은 화려한 외양이나 인간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오히려 더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고 최선의 계획이 결국엔 쓸모없어지거나 폐허가 될 거라는 허무함을 아우스터리츠는 대화에서 계속 내비칩니다. 그만큼 그가 이런 것에 집착하는 계기가 될 만한 그의 과거가 있겠죠? 아마 2차 세계대전의 Kindertransport 계획에 의해 나치 독일에서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등으로 이동된 아이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합니다. 이런 그의 이야기는 그 자신도 스스로 무의식 속에 억누르고 있었던 것 같네요. 반면 아버지가 나치 독일 군이었던 화자는 장 아메리, 클로드 시몽, 가스토네 노벨리처럼 나치에 의해 고문당하고 괴로워하는 그들의 글과 그림에서 생각이 맴돌고 그 기억이 마치 자신의 기억인 양 무의식이 흔들리고 겹쳐지는 듯 합니다. 차라리 못 알아차리고 귀를 막고 눈이 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자신도 죄책감과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지만 그런 그이기에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아우스터리츠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었고 그렇기에 아우스터리츠가 자기 자신에게조차 터놓지 못하는 무의식 속에 묻혀버린 기억의 파편을 끄집어내는 듯합니다.
저는 원서를 참고해가며 읽고 있는데요, 확실히 을유문화사 번역이 많이 아쉬운 것 같아요. ㅠㅠ 쉼표로 끝없이 이어가며 길게 늘어뜨리는 문장은 독일어의 특성이고 또 그것이 좋은 독일어 글쓰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걸 한국어로 그대로 옮기는 데는 문제가 있고, 그렇게 해서는 사실상 좋은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내기가 불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ㅠㅠ 처음에 화자의 대사인지 아우스터리츠의 대사인지 헷갈렸던 문제의 경우에는, 저는 혹시라도 원서에는 어떤 특정 문법적 장치(인용할때 쓰이는 Konjunktiv 1)를 사용한 것인데 번역 시 그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인 줄 알고 찾아보았더니, 그렇지 않고 원서에서도 똑같이 헷갈리게 써 놓았더라고요. ㅎㅎㅎ 다만 책이 진행될수록 아우스터리츠가 거의 화자의 역할을 넘겨받게 되면서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습니다. 녹투라마도 저는 동물원 이름이 "녹투라마 동물원"인줄 알았어요! ㅎㅎㅎ 그런데 원서로 읽어보니 읽는 즉시 바로 속시원하게 해결이 됐습니다. 이런 부분에는 각주라도 달아 주셨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ㅠㅠ
아, 길게 늘어지는 문장인 건 독일책들 (또는 프루스트같은 완연체의 책들)에서 익숙한데요, 그걸 제대로 한글로 옮기지 않으면 주술도 헷갈리고 일단 독일어가 아닌 부분들 (중간 중간에 있는 프랑스어 등)에서도 좀 문체가 매끄럽게 해석이 안 된 부분은 있더라구요. 하지만 지금 전 그의 다른 작품들과 스테판 츠바이크의 작품들을 번역해서 좋은 평을 받고 있는 Anthea Bell의 영역본도 같이 읽고 있는데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제발트의 다른 작품들(현기증, 이민자들, 토성의 고리, 등등) 은 번역이 잘 되어있다는 평입니다. 그리고 초반에는 좀 헷갈리지만 다시 아우스터리츠와 재회하고부터는 거의 아우스터리츠의 성장기를 따라가며 아주 술술 읽힙니다.
맞아요 ㅎㅎ 번역이 뭐랄까 엄청 꼼꼼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잘 안든달까요. ㅠㅠ 저도 아우스터리츠 이야기 나오면서부터는 그냥 다른 성장소설들 처럼 잘 읽히는 듯 합니다:)
레인딘의 홍수참사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네요. 여기 나온 사진들이 다 실제 사진들같아서 이게 소설인지 실화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아우스터리츠를 입양했던 일라이어스가 보여준 앨범 속에 강아지와 소녀의 사진은 마치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 속의 무슨 심령사진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의 어릴 적부터 이렇게 얄궂은 운명의 장난 같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인간의 생명과 문명의 위태로움이 여기서도 느껴집니다.
질병과 죽음을 시험과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과 죄와 결부시키던 일라이어스와는 반대로, 에반은 적절하지 않은 때 죽을 운명을 가졌던 망자들이 자신들의 몫을 받을 때 속은 것을 알고는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를 엿보고 있다고 말했어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그리고 저도 파리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 이 책 제목을 보자 Gare d'Austerlitz(파리 13구의 기차역), 그리고 그 기차역이 이름을 따온 나폴레옹의 Austerlitz 전투가 생각났어요. '전쟁과 평화'에서도 정말 인상깊게 나왔죠. 또한 웬지 앞에서 나온 SS요원들의 고문장면 때문인지 아우슈비츠도 생각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고 스스로 가장 사소한 것까지 주목했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주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 소도구 역할을 하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힐러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이미 완성되어 새겨진 그림들을 다루는 것으로, 진리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 누구에 의해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그 그림들을 응시한다는 거예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사진 작업에서는 현실의 그림자가 무에서부터 감광지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항상 나를 사로잡았는데, 그것은 한밤중에 내 속에서 떠오르다가 붙잡으려 하면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리는 기억처럼, 오랫동안 현상 욕조에 담가 둔 인화지와 다름없었어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그것은 그런 비현실적인 현상에서, 말하자면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 세계에서 번쩍이거나, 우리 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서 특정한 빛이 효과를 발하거나, 우리의 깊숙한 감정에 불을 붙이거나 어쨌거나 우리가 그렇게 믿는 것이라고 알폰소가 말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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