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시 하루키의 연애 소설이다. 나와 가장 잘 맞는 문체다. 요즘은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어 문해력과 상상력이 점점 떨어진다. 거기에 나는 역행하고자 한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D-29
Bookmania모임지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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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야 진정한 자기 생각이 된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자기 글로 표현해야
진정으로 그 생각이 자기 것이 되어 남한테
온전한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글만 읽어도 자기 생각이 만들어지긴 한다.
그러나 그 남의 생각들이 속에서 무르익어
진정한 자기 것으로 체화(體化)된 생각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선
자기 생각들을 적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다.
그렇게 되면 남의 생각이라도 자기를 거쳐 그 생각들이
자기 입에서 힘있게 뻗어 나오게 된다.
아니면 마치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글이
생명력을 잃고 무미건조하게 들릴 수 있다.
내 글을 통과한 생각은-실은 남의 생각과 내 사색이
접목된 것이지만-온전한 내 것으로 들리지만,
아닌 것은 어디서 주워들은 걸 다만 내 입을 빌려
내뱉는 것처럼 영혼 없이 들릴 수 있다.
남의 생각을 내 입을 통해 빌린 것은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하게 여겨 말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생각인 양,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으로
자기기만으로 생각되어 자신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자기 글을 통과한 자기 말을 들은 상대는 뭔가 일상에선 접하기
쉽지 않은 말을 들은 것으로 나를 다시 인식한다.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지경이지만.
자기화된 말은 꾸밈이 없고 자연스럽게 나온다.
빌린 게 아니라 온전한 자기 것이 이미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에게 내 말을 들려주면서도
“아, 이것은 언젠가 내가 글로 쓴 그 내용을
지금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구나.” 하고 새삼 놀라곤 한다.
작가를 포함 누구나 그렇다고 보는데,
나도 글을 쓰는 것보다 확실히 읽는 양이 더 많지만
그래 읽는 내용 중에서 남과의 대화에서 꺼내놓기도 하지만
그것을 내 것으로 체화한 내 글로 옮긴 내용에
확실히 힘이 더 많이 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게 더 온전한 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리라.
적는 것이 자기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아니, 안 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적으면서 자기 생각을 정확히 집어넣으려고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혹시나 자기 생각을 읽는 사람이 오해할까,
조사 하나 어미 하나에도 신경 쓰고 시간을 두고 묵힌 다음에
다시 읽으면서-기록은 남는 것이고, 논리, 모순, 통일성,
옆길로 새지는 않는지 이런 건 배제하더라도-자기 글을
좀 떨어져서 차가운 머리로, 뜨거운 가슴으로
다시 읽으면서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퇴고(推敲)를 거듭하기 때문이리라.
이러니 자기 것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할 지경에 이른다.
일반적으로도 자기 손때가 묻은 것에
애착이 안 갈 수도 없다.
이런 게 자꾸 반복되니까, 역시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경험, 독서, 사유)을 글로 다시 되새김질해야만
진정한 내 생각이 되는 거고,
그게 무위(無爲)하게 표출되어 내 말을 듣는,
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어떤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흐리고 불명료한 생각들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점점 말에 군더더기가 빠지면서 가운데 핵만 남는
진정한 내 생각으로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거듭 다듬어진 내 말이, 단 한 줄에 불과하더라도
거기엔 엄청난 함의(含意)가 포함되는 것이리라.
적어도 나에게만은, 그 글이.
내 글을 통해 진정한 내 생각이 창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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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자기 글처럼 소설 쓰는 사람의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소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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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현실과 이상 동시 살기
주인공은 자기에게 맞는 걸 열심히 한다.
깊이 파고 있다.
그러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
그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지 의문이고,
실제 또 정상으로 하지 못한다.
그러나 화자나 그걸 지켜보는 인물인 나는
그와 비슷하게 파긴 하지만 절대 현실적인 것을
놓지 못하고 거기에 발을 걸쳐놓고 떼지 못한다.
그런 나는 현실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인공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 전개가 소설의 주류를 이룬다.
실은, 화자인 나는 그 주인공처럼 되고 싶어 한다.
내가 겁이 나서 현실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대리만족으로 주인공을
그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밀어 넣어버리는 것이다.
어둡고 깊은 우물 속으로.
그러나 그는 거기서 아주 편안한 시간을,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세상 사람들은 뜬구름 잡는, 이상 속에 사는 주인공을
비웃고 비난하지만, 현실을 떨치고 벌떡 일어나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루려는
그 주인공을 나만은 존경하고 떠받든다.
그를 우상으로까지 추앙(推仰)한다.
내가 갈 길을 그는 용기를 내서 당당히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이고 그 주인공은 내 이상인 것이다.
나는 현실에 살지만 실은 이상에 사는
그 주인공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게 결국 글에서 말하고자 함이다.
누구나가 특히 작가는 이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 고민해 왔다.
자기는 두려워 현실에 발을 더 많이 디디고 있지만
주인공을 이상 쪽으로 더 기울게 해
그 주인공을 통해 내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자인 나와 주인공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국 하나의 몸이다.
나는 현실을 살면서도 또 하나의 나인 주인공은
내가 생각한 이상을 용기 있게 살고 있다.
이래서 작가를, 현실에선 좀 불편하지만
얼마든지 자기 글을 통해 자기 분신인 주인공으로
하여금 속에 품고 있는 꿈과 이상을 이루게 함으로써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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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오히려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아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모르는 게 약일 수 있다.
이왕 알려면 완벽하게 전부 알아야 하는데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그게 가능하지도 않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이게 좋을 수도 있다.
잘 모르고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 “좀 모자라.”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웃고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젊은이일수록 더 잘 웃는다.
아직은 세상 경험(제약)이 적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희망이 더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아 그런 것이다.
희망(가능성)과 웃음이 사라져간다는 말은
자신과 타인이 만든 틀에 갇혀간다는 말과 같다.
가능성을 얘기하고 실없이 웃고 그러면 타인이 제지하고
그래서 그걸 하는 것에, 자꾸 눈치를 보게 된다.
세상의 굴레에 얽매여 가는, 철이 들어간다는 말은
상상의 나래가 자꾸 꺾여간다는 말과 같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그 틀이 구성원의 상상력을
갉아먹어서는 안 된다.
지하철 신입도 처음 들어와 호기심에서 자기 관점에서
지하철에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디어를 내면 지하철 인이 아닌 순수한, 아직은
시민의 눈으로 아이디어를 낼 줄 알아 나는 지하철에
물들기 전에 지금 상태에서 개선 아이디어가 있으면
얼른 제안하라고 그들에게 권고한다.
지하철 틀에 우리처럼 갇히기 전에.
전에 매표실 있을 때, ‘표 파는 곳’에서 ‘표 사는 곳’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내선, 외선, 개표, 집표 이런 말들은
모두 지하철 입장에서만 쓰는 용어들이다.
이들에게 이런 용어들이 아직은 생소할 때.
아이들은 엉뚱하고,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갑자기 한다.
그게 끝없이 이어진다.
주변 공기나 맥락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직은 주변 지식을 모르는, 아직은 사회에 물들지 않아
순수해 그런 것이다.
어른들은 이미 이게 안 되니까 그것 자체를 듣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의 해맑은 생각이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기 때문이다.
긴장된 몸과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어느 정숙하고 적막하기만 한 도서관에서,
아이와 엄마가 서가에 들어와 왔다 갔다 하다가 갑자기 아이가
장소에 구애 없이 “엄마, 나 똥 마려워.”하는 것이다.
주변 지식 없음으로 인한 그 애의 용기로 인해
모처럼 순수한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이 어린이에 의한 이 말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 애는 거침이 없다.
자기 생각을 제약받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 조직에 갇히고 그것의 지식에 물들면 무식하지
못해 용감해지지 못한다.
고정된 틀에 갇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꼼짝달싹 못 하는 것이다.
자타가 만든 틀에 스스로 갇혀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래, 하는 말이 다 거기서 거기고, 그것의 외부에서
내려다볼 줄을 모른다.
안에서 하는 말만 되풀이한다.
시민의 눈을 잃는다.
상상력이 떨어지고 순수한 웃음이 사라진다.
그 안에서,
자기 생각의 확장에-지식에 의한 걸림돌이 많아-
제약을 받는다.
틀에 갇히지 않기 위해선 거기서 나와 전체를 조망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나무뿐 아니라 숲을 볼 줄 아는.
요즘은 검사나 의사 등 전문가들이 자기들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그것이 전부이고 옳은 일인 양
양보할 줄 모르고 자기 고집만 부리는 바람에
지금의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틀에 갇히면 그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알량한 그 지식으로만
모든 현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틀에 갇힌다.
그게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위험천만한 일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자기 전공만 제일이라고 생각해 타 분야는
무시하고 저평가한다.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안배하고 조율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못한다.
그런 스페셜리스트에서 벗어나 제너럴리스트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협의할 줄 아는 능력이 다시 필요한 시대다.
전문 분야를 모두 아우를 줄 아는 자질이.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모순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책을 한 권만 읽으면 위험하다는 말이다.
차라리 백지상태가 낫다.
그래야 덜 위험하고 본인도 행복하다.
책을 한 권만 읽고 모든 걸 판단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겸손한 자세로 한 권을 뛰어넘어 보다 더 많이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많이 읽을수록 자신이 뭘 모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 매사에 늘 겸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벌써 지하철을 생각하면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
빠져 이제 상상력이 떨어져 가고 있다.
이미 지하철이라는 틀에 갇혀 버렸다.
더이상 쓰면 그저 그런 글, 뻔한 글이 될 것 같아,
더이상 나가지 못할 것 같아 여기서 멈춰야겠다.
중간에 지하철이라는 말을 괜히 넣었다.
너무 후회된다.
내 용감함을 돌려받고 싶다.
다음엔 내 글에 가능하면 지하철을 넣지 않을 것이다.
내겐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전엔 안 그랬는데 이젠,
내 책 프로필에도 ‘지하철 재직 중’이란 말은 넣지 않는다.
내가 어디 가서 떳떳하게 내세울 것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인지라 그런 것도 분명 있지만
그 틀에 영영 갇힐 게 두려워 그러는 것이다.
그게 겁이 나서 ‘헤어질 결심’을 미리 해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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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점쟁이들을 아주 무시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그저 한다는 말이 현실에서 잘 살 궁리만 가르쳐 준다는 거다. 다 획일 화시키는 주범들이다. 사회적 출세만 부르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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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파편화되어 있다. 개인주의가 강하다. 한국은 둘이 서로 자기 편으 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쓴다. 둘이 그렇게 하다가 배신하면 그가 인간 말종으로 변할 수 있다. 사로 똘똘 뭉친다. 그래 불륜하면 끝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개인주의가 강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 얘기를 다 터놓고 말을 안 한다. 그건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 불륜이 많고 그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끝장으로까지 되는 경우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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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글에서 화자는 평범하다. 잘생겼거나 그러지 않고 별로 특이한 게 없다. 그러나 먼저 접근하지 않는데도 여자들이 그 화자에게 달라붙는다. 그러는 특별한 이유도 또 없다.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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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은 생(生)과 사(死)
내 인생 목표는 일 년에 한 권씩 출간하는, 내 책에
변하고 고정된 내 생각을 집어넣는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책을 누가 볼 것인가는 고려해 넣지 않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 고정되고 변하는 생각을
내가 쓴 책에 계속 집어넣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누가 그것을 볼 것인가에는 신경 쓰지 않고.
글에 집어넣는 그 고정되고 변하는 생각은
아마 내 타고난 기질 때문에 그럴 것이고,
그것은 또한 내 삶의 이력과 독서 편력,
글쓰기로 인한 내 생각의 정리, 그리고 사유(思惟)로
인한 것일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 나는 생을 마감할 예정이다.
그리고 한가지 소원이라면 나는 내 고정된 생각과
변하는 생각을 내 글에 옮길 수 없다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꾸물거리지 않고
바로 생과 이별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고 싶다.
내 남은 생의 목표
▶ 1년에 책 한 권씩 내는 것
▶ 거기에 내 고정되고 변하는 생각을 집어넣는 것
▶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지체없이 죽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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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흐름을 따라가지거 벅차다. 요즘은 개나 고양이를 안 좋아하면 뭔가 겸함이 있고 심지어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세상이다. 큰 흐름이 사람을 옥죄고 있다. 심지어 개를 먹는 사람은 사람도 아닌 것이다. 사실 나는 그양이에게 기분 나쁜 기억밖에 없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마치 애가 우는 소리를 내는 고양이가 싫었다. 그리고 시골에서 개끼리 교미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는데 사람들이 보고 있어도 빼지 않았다. 그래 짓꿎은 사람은 그 사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들은 그럼 곧 떨어졌다. 이런 기분 나쁘고 더러운 기억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좋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좋아해야 하는 지금의 시류가 나를 고통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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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길 것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른 때가 있다.
나는 확실히 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여자들은 도대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더 이해가 안 갈 때가 많다.
“무슨 이유 같은 게 뭐 있어. 그냥 산목숨이라 사는 거지.”
그런 것도 물론 있겠지만.
어찌 보면 미래는 없고 그냥 현재만을 즐기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 같은데, 그걸 보면 건방지게 내 입장에선
뭔가 빈털터리 같게 느껴진다.
이걸 진지하게 묻고 싶다.
“인간이니까 뭔가 먹고사는 거 말고 인간만이 하는 거?”
“그거 아니면 뭔가 헛헛하지 않아?”
“이런 걸 갖는 게 인간의 숙명 아닐까?”
남자인 나는 나이가 들수록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뭔가 내가 사라진 다음에도 나를 조금이라도
대신할 것을 남기고 싶은 본능 같은 게 있다.
물론 자식이 있고 그들이 잘 살기를 바란다.
이건 인간이면 누구나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더 나를 대변할 글 같은 걸 남기고 싶다.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것도 있지만 이것은
자신의 진짜를 대변하기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자기의 내면과 그 생각의 변화를 가장 잘 대변하는 마치
자기 분신 같은 건 그걸 누가 읽으나 안 읽으나
나는 글 같다.
그래 나의 현재를 계속 기록 중이다.
그냥 나는 그러고 싶다.
그래야만 나는 빈털터리를 모면할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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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본 중국
한국은 개인의 열정이 넘친다.
일본이나 중국은 개인이 어떻게 하는 게 없어 안 그렇다.
일본은 자연재 해가 많아 그런 것 같고 중국은 대륙이라
개인이 어떻게 해도 안 되어 개인 열정, 주체가 등한시 된다.
일본은 속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자기 카드를 다 내주면
사무라이에게 죽임을 당하니 그에게 뭔가 이익이 되는 걸
남겨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개인 간의 친밀감이나 온정 같은 걸
갈구한다.
현실적으로 그게 충족이 안 되니 남편에게
못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받으려는 불륜이
만연한 것 같다.
한국은 개인이 신에게 복을 빈다.
기복 신앙이다.
어떻게 보면 스케일이 작은 것이다.
중국은 통치자가 대륙을 다스려야 해서 스케일이 크다.
그러나 국민 한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어
개인주의, 자기가 우선인 그런 게 성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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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 대한 지나친 환상은 금물이다. 그들도 여자이기 이전에 나 같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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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에서 인간이 할 일
주로 불교에서 과거나 미래에 살지 말고
지금 밥 먹는 것에 집중하라고 한다.
“밥 먹으면서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는 것에만 집중해.”
그러나 이것도 결국 알고 보면 과거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삶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져 있다.
서로 떼어서 하나로 생각할 수 없다.
지금 충실히 먹는 것도 다 과거부터 먹어왔고
미래를 위해 먹는 것이다.
인간 말고 그게 가능한 존재에게나 주문하라.
인간인 이상-생각 때문에-이것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욕망, 집착(Adhere), 미래에 대한 걱정(희망),
뭔가를 미래에 남기고자 하는 것(자기 흔적),
현재←과거의 내 궤적들.
나는 그냥 “거기에 매여 사는구나.” 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는 게 낫다고 본다.
인간의 한계로 인해 안 되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보단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것에 에너지와 정열을
쏟는 게 낫다고 본다.
여러 위대한 문학작품을 보라.
“안 되는 걸 억지로 극복하느니 차라리
그 힘으로 좋아하는 것에 빠져 즐겨라.”라고 말하고 있다.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도 집착 아닌가.
그냥 놔둬라.
인간에게 일상(Mundane)이 아닌 건 다 지나가게 되어 있다.
“아, 나는 지금 이것에 집착하고 있구나.” 하고
깨달아 느끼고 있으면 그만이다.
생각이 없는 동물은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집착이 없다.
아예 전자의 집착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희한하게 인간만이 전자의 집착이 있다.
마음의 작용으로 요동치는 인간의 특성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기대도 금물이다.
그러다가 뜻밖의 것을 하면 오히려 더
호의적으로 변하는 것에 기대를 걸어보기 위함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사실 인간 자체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의 본질이 욕망이고 집착인데 감히
거기서 벗어나려고?
너무 과한 욕심 아닌가.
그게 사라지면 사실 인간도 아닌데.
인간이길 포기할 건가.
평생 그것만 하다 말 건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그래 좀 벗어나는 듯하다가
인간이기에 다시 제자리로.
이것의 반복이다.
그렇게 인간의 운명(계속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실패의 반복)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인정하고
자기가 진정 바라는 것으로 소중한 자기 인생을
수놓는 게 어떤가.
인간의 한계를 깨끗이 인정하고 진정 자기가
하고 싶은 것으로 현실에서 자기를 실현하자.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을 자기의
가상 공간이라도 만들어 거기서 그 극복을
실현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현실에선 애초에 글렀다.
이승에선 자아실현, 저승에선 인간의 욕망 극복이
진정 내 할 일이다.
할 일
이승
(육신)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과도한 기대는 금물,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엉뚱한 짓 집어치우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나 하기
자아실현
저승
(영혼)
인간의 한계인 욕망을 마음대로 다스려 속 시원하게 극복하기. 현실에선 꿈도 못 꿀 일이기에
이상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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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순수한, 육체적인 것이 빠진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랑엔 반드시 육욕적인 게 항상 가미된다. 그게 빠 지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외치는 것 같다. 한국 여자들이 들으면 벌떼처럼 달려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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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환상 속으로 밀어 넣은 여자들
내 친구는 첩의 아들이었다.
첩인 친구 엄마와 자식들은 본가에서 떨어져
가난한 동네인 우리 동네에서 외따로 살았다.
본처와 그 자식들이 자기 집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해서
할 수 없이 우리 동네에서 살게 된 것이다.
친구에게 누나가 있었는데, 그녀는 내 이상형이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는 첩이지만 그래도 부자이고
자기 아버지에겐 피붙이 딸이라서 읍내에서
하숙을 허용해 주었다.
우리 집은 하숙할 형편이 못 되어 나는
자전거로 30리가 넘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한번은 친구가 자기 하숙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때 방에서 막 나오는 그녀를 보고야 말았다.
다리는 매끈하고 허리가 개미허리에다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습에 나는 그만
숨이 막히고 더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재벌 회장님을 모시는,
너무 아름다워 뭇 남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시달릴 것 같은
그래, 반드시 팔자가 기구한, 그런 불행한 생을 살 것만 같은
아리따운 여비서가 연상되는 외모였다.
아침에만 잠시 피었다가 해가 들자마자 곧 시들고 마는 나팔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
이 대목은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서울 소녀가 시골 소년에게 한 말인데,
소녀는 도라지의 보랏빛을 좋아한다.
나팔꽃도 보라색으로 이 소설에서 보라색은,
앞으로 소녀의 불행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쓰인다.
도라지꽃과 나팔꽃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녔다.
친구 누나도 『소나기』의 그 서울 소녀 같았다.)
이슬을 머금은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였다.
가냘파 보이는 작고 얇은 턱에 짧은 머리를 고무줄을 이용해
하나로 묶고 뭔가 찾고 있는 모습에 나는 그만 넋이 나갔다.
앞으로 불행만이 그녀를 기다릴 것 같은,
단 하루도 그녀의 얼굴에서 수심의 그늘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그래서 그녀에게 내가 환한
햇살이 되어 이제 그만 그늘지게 하지 않겠다는,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여자는 내가 지켜야겠다는 이상한
사명감 같은 게 생기기도 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외모를 지녔다.
만화에서나 볼 것 같은 그런 모습을
실제 세계에서 내가 목격한 것이다.
그야말로 만찢녀(만화를 찢고 금방 튀어나온 여자)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무슨 용기에서인지 그 집의 담을 넘었다.
마당 빨랫줄에 널려 있던 누나의 속옷을 집으로 가져와
내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놓고 거기에
내 속에서 흘러넘치는 뜨거운 것을 마구 뿌려댔다.
그녀의 체취가 사라질까 나는 한 번도 그걸 빨지 않았다.
이 여자도 이웃 동네 친구의 누나였다.
얘는 아직 나와 같이 초등학생이고 그 누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친구 아버지가 술이 말술이라 아마 술김에
늦둥이로 친구를 나은 것 같았다.
우리는 학교가 파하고 아래 동산에서 놀고 있었다.
놀이에도 싫증 나 쉬고 있는데, 그 누나가 친구를
부르는 것이다.
“종수야, 뭐해? 누나하고 이제 집에 가자.”
나는 그 모습에 하마터면 눈이 멀뻔했다.
몇 번이나 눈을 문지른 후 다시 봤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저런 여자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는 금방 사랑에 빠질 거야.”
떠진 눈이 누나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감히 눈을 다시 감을 수가 없었다.
그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암흑이 너무 아까웠다.
이상적인 여자를 볼 때 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 깜박도 할 수 없는 것하고 그 순간이 비슷했다.
여자는 하얀 학생복에 검은 치마를 입었는데
가슴에서 아래 엉덩이까지의 라인이 내가 태어나
처음 보는 환상적인 선이었다.
깨끗하게 세탁해 잘 다려 티 하나 없이 새하얀 교복
상의를 더는 용서하지 않겠다며 위로 봉긋 솟은 가슴이
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했고 그 라인에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주름을 보면서 나는 순간 침을 꿀꺽 삼켰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변 친구들에게 들킬까 봐
겁이 덜컥 날 정도였다.
위로 힘차게 솟은 능선에 깊이 파인 골짜기로 이어지는 선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그 주름에 나는 그동안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걸, 그녀가 몸으로 내게 손수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황홀한 순간도 잠시,
친구는 누나 손을 잡고 유유히 우리가 함께 놀던
장소를 너무나 서운하게 벗어나고 마는 것이었다.
아, 내게도 저렇게 예쁜 누나가 있으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좋을까, 하고 그 애가 마냥 부러웠다.
아버지가 술김에 나은 그 애가 그 누나에겐 하나의
선물이었던 것 같다.
그 후에도 그녀는,
놀고 있는 우리에게 자주 나타나 그 애만을 쏙 빼서
우리만 남겨놓고 홀연히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우리에게서 빼낸 게 나라면...”
그래도, 그 친구 바람에 나는 또 동네에서 환상적인
그녀의 굴곡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즐기며 자랐다.
세월은 흘러, 나는 청주로 고등학교에 갔다.
청주 내덕동에서 자취를 했다.
그 당시, 주변에 내 이상형이 둘이나 살아
나는 한시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한 명은 주인집 딸인데, 나보다 한 살 어렸다.
그녀는 그때 내가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일 여배우나 일본 기생인 게이샤를 닮아 나는
그녀를 훔쳐보는 재미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멀리서 집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실루엣을 볼 때면
나는 흥분의 도가니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꿈에서 몽정 상대나 마스터베이션의 대상으로
삼는 여자들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색기 넘치는
일본 여배우의 상징, 얼굴이 좀 말상으로 길고
이마가 반질반질 윤기 나고 광대뼈가 솟고 말할 때
콧소리가 약간 심하고-이건 남자와 절정에 다다를 때
여자의 신음 섞인 교성을 연상시켰다
(할 때는 저 콧소리가 더 심하게 나겠지 하는)-
웃상에다가 눈웃음을 치는, 한 마디로 끼가 넘치는 여자였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널어놓은 그녀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걷어다가 내 공부방에서 거기에 입을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그것들을 찢어지지 않게 겨우 내 몸에 걸치고
반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변태가 되어
마구 자위행위를 해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담 너머에 주인집 딸과는 이미지가 상반된
청순가련형의 여자, 주인 딸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가
남동생과 같이 자취를 하며 살았다.
나는 또 나름대로 이런 여자도 내 이상형으로
가슴에 품고 있었다.
주인집 딸은 육욕적인(에로틱) 이상형,
이웃집 여자는 내 심리적인(플라토닉) 이상형이었다고나 할까
하여간 나는 틈만 나면-공부에 싫증 나면-창문을 열고
담 넘어 이웃집 그녀를 훔쳐보았고,
그건 지친 공부에 무더운 여름 한줄기 소나기였고
끝없는 사막의 목을 축이는 시원한 오아시스였다.
한번은 그녀가 동생과 마루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역시 그녀는 내 이상형의 모습을 고수한 채,
라면을 아주 우아하게 먹고 있었다.
나는 라면을 그렇게 우아하게 먹는 인간을 처음 보았다.
뒤로 반만 묶은 머리가 가볍게 부는 바람에 찰랑거리고
사슴 같은 긴 목과 오목하게 패인 앙상한 쇄골을 드리우고
라면을 능숙하게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작은 입에 넣어
오물거리는 게 사람이 살기 위해 밥 먹는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남동생에게 더 먹으라고 라면을 덜어주기도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에 나는 그만 아래가
불뚝하고 솟아올랐다.
그녀의 라면 먹는 입 모양이 마치 남자와 할 때 흥분해서
벌렁거리는 조개가 연상되어 나는 그녀를 훔쳐보며
아래의 불기둥에 불을 활활 붙였다.
어느 날, 그걸 들키고 말았다.
내가 주인집 딸과 그녀를 동시에 생각하며(하나는 색녀,
하나는 요조숙녀를 번갈아 생각하며)
무료한 공부에서 탈출해 그날도
방에서 마구 손을 놀리고 있었는데
-너무 몰두해 창문 닫는 것도 잊은 채-그녀가
장독대에서 고추장인지 뭐지 퍼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내가 방에서 그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녀는 순간 발걸음을 멈칫했고, 나와 그만 눈이 마주치고
나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뒤 언제부턴가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아한 청순가련형 그녀가 사라졌으니 나는
일본 게이샤 닮은 주인집 딸만 내 곁에 두고
그녀만을 생각하며 그녀와 한 공간에서 같이 숨 쉬며
우울한 고교 시절의 나머지를 소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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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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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사랑이 쉽지 않은 이유
마지막 사랑, 끝물 사랑이 쉽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걸 알고 덤벼야 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더 현실적으로 된다.
뭔가 환상이 없다. 살아갈 나이도 점점 줄고 몸도
점점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이상도 줄어든다.
자기 꿈을 생각해 현실을 극복하는 그런 게 점점
나이가 들수록 사라진다.
이러니 20대 때 너끈히 하던 것을 현실에서 50대는 못 한다.
더 속물이 되어 가고 세속적으로 변한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상대에게 받을 게 없다 생각되면 과감히 돌아선다.
자기가 주는 것 이전에 내가 과연 상대로부터
뭘 받을 것인가부터 생각한다.
계산적이고 속물적으로 바뀐다.
이해관계를 더 잘 따진다.
순수한 그런 사랑보단 현실적으로 되어
순수 그런 게 많이 사라진다.
노력도 덜 한다.
20대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기희생을 50 하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25 정도만 한다.
그렇게 해서 성사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50대 끝물 사랑이 실은 받을 것만 생각하고
아직은 섹스 등 환상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현실적으로 걸림돌이 더 많다.
20대엔 자기 몸만이라 홀가분한 것도 50대엔 없다.
딸린 것도 많다.
자식이라도 있으면 내 자식을 왜 상대 자식처럼 안 대하나
자꾸 서운해한다.
하여간 혼자뿐인 그리고 처음인 20대보다
더 큰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실은 그 반만
노력해도 다행이다.
이래서 끝물 사랑이 성사되기 더 어려운 것이다.
마지막 사랑의 어려움
▶ 더 현실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릴 때보다 더 열악하다.
▶ 나이가 들수록 순수보단 더 계산적으로 나온다. 자기에게 손해라면 바로 갈라선다. 전보다는 그 유대감이 더 약하기 때문이다. 이어주는 끈이 더 약하다.
▶ 줄 것보단 먼저 자기가 받을 게 뭔가부터 생각한다.
▶ 현실이 더 열악하지만 또 어릴 때보다 자기희생을 덜 한다. 그럴 필요나 분명이 더 약하기 때문이다.
▶ 서로 자식이라도 있으면 그 자식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자기 친엄마나 친아빠를 더 자주 만난다. 자기 한쪽 부모가 없는 집안 생활이 아이에겐 더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 역시 섹스 등 환상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이 더 열락하고 더 현실적이어서 지탱하던 그 환상은 바로 깨진다. 그럼 다시 헤어지는 일만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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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겐 자존심이 중요해
지금 검사(대통령실)와 의사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중간에서
국민만 죽어나고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걸까?
그들도 실은 그렇게 하면 사회가 엉키고 안 돌아간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데도 그 고집을 꺾지 못하고 고수하는 이유가 뭘까?
아마 이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태극기 부대는 ‘없는 사람들’로 주를 이루는데
그들은 끝내 보수를 찍는다.
그 보수는 대놓고 자기들, 없는 사람들 편이
아니라고 하는데도-실질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대신 진보는, 언제나 없는 사람들 편이라고 하는데도
그들은 진보를 안 찍고 보수를 찍는다.
다른 건 몰라도,
약자는 연대가 유일한 힘인데도,
없는 주제에 자기 편이 아닌 쪽을 찍는다.
이건 어떻게 해도 설명이 안 되는데,
한 가지 설명되는 게 있다.
본전 생각이 나고 지금까지 그 보수를
지지해 왔기 때문이다.
본전, 지금까지 쌓은 것, 이게 그들의 전부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기가 고수한 것, 그걸 가능하면
끝까지 지키려 한다.
그게 자기를 설명하고 말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이고 그것은 곧 그들의 자존심이다.
이걸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와서 갑자기 진보 편을 들면 자기가 지금껏 해 온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넌 지금까지 뭐 한 거니?”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날이 없길 바라는 것이다.
산업 역군으로서 자기를 희생해 왔고
월남전에 참전해 목숨까지 바쳤다.
이들에겐 이게 거의 전부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게 무너지면 자기 손에 남는 건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지는 모래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자기 손바닥을 바라보는 게
두려운 것이다.
알고 보면 쥐뿔도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은 건
사실 자존심밖에 없을 수 있다.
솔직히 그들에게 지금 뭐가 남아 있나?
자존심밖에 남은 게 없어 마지막으로 그거라도 끝까지
움켜쥐려고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보수를 찍는 것이다.
이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금껏 그래왔기 때문이다.
사이비 교주 JMS 신도, 뺑소니범 김호중 팬의
비상식적인 행동들도 이것으로 설명되는 것 같다.
검사와 의사들도 그것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즉 그것밖에 아직은 없어 그걸 지키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게 자기들에게 아직까진 가장 큰 비중(比重)을
차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중점은, 타협하고 조율하는 정치가 아니다.
자기 자존심 지키는 것이다.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그걸 잃으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말일 세월이 흐르고-주변이든 자기 자신이든-상황이 바뀌어
그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지금 하고 있는 이것이 어쩌면
그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전 것에 그런 고집을 접고 지금 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둬
오히려 지금은 남과 조율하고 타협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둘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이 바뀌는 방법은 그들이 더 중점(重點)
두는 것이 바뀌면 된다.
인간은 지금 자기에게 가장 중요해, 자기에게 그게
가장 큰 비중인 것에 자존심을 부린다.
만화만 그리면 그것이 평생 그에게 자존심을 부릴 건더기이고
그가 예능으로 전환하면 그전보단 덜 만화에 비중을 둘 것이다.
뉴스만 하면 뉴스가 그에게 자존심 부릴 건더기이지만
MC를 하면 그 비중이 MC로 전환되어 MC가 그에게 자존심
세워 지킬 분야로 바뀔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금 차인표에게 탤런트로 불리고 싶은지 운동마니아로 또는
작가로 불리고 싶은지 물은 다음 만일 작가로 불리고
싶다고 하면 그는 작가라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탤런트로서
좀 연기를 못하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들어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소릴 들으면서도 작가라는 명예를 지킬 수만 있다면.
왜냐면 그는 지금 비중을 작가에 더 두고 있기 때문이다.
탤런트나 몸에 대한 게 좀 훼손되어도 그는 지금은
글만 잘 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존심 비중에 따라 언제 다시 탤런트나
몸만들기로 바뀔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절대 굽히지 않던 미혼 여자가
엄마가 되면 자존심을 어느 정도 내려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중점이 이젠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존심이 아이를 보다 잘 키우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누구나가 다 지금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자존심을 부리고 고집을 피운다.
지금은 그에게 그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장 끝까지 지금 상태에서 끌고 갈 것을 놓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그걸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내가 고집 피우고 자존심 세우는 게
과연 그렇게까지 할 만한가, 하는 생각에 이를 수도 있다.
그 생각까지 이른 인간이라면 그는 앞으로 진정 자기를
더 잘 발현할, 보다 좋은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 앞으로 자기에게 비중을 둘 게 바뀔 수도 있다고
믿는 인간은 바로 희망 있는 인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에서 자기 전문 분야에 고집을 부려 문제가
생기면 그들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그들이 진정 자존심을
부릴 만한 것으로 그들을 유도하면 된다.
그러면 그들은 예전의 그것에서 벗어나 전체 사회를
아우르는 것에 자존심을 부려 사회가 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대통령은 협치(協治)보단
법치(法治)에 더 중점을 둬
대통령으로서 무능하다는 소릴 듣고 있다.
왜냐면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법치보단
협치(Governance)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하라고 시켜놓았더니 법만 만지작거리는
검사 역에서 아직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그에게 법리보단
정치에 더 중점을 두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건, 스스로 깨달아 바뀌는 게 관건인데,
과연, 어느 세월에?
인간은 자기 자존심(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지금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
인간은 마지막까지 자기와 함께하고 자기를 살릴
-자기가 끝까지 놓지 않고 움켜쥐고 있을-것이
진정 무엇인지 감지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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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그리고 글
나는 광막한 텅 빈 벌판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외로운-몸은 없고 시리도록 푸른 눈을 한-늑대이고자 한다.
땅으로 흐르는 눈물조차 쪽빛이다.
심연의 애수(哀愁)와 고독에 포위당했다.
불필요한 동작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급소를 그어 거구를 쓰러뜨린다.
이게 사는 방식이다.
깔끔하고 아주 심플하게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고
비축해 놓았다가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그 힘을
한군데에 집중해 적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단 한 방이면 끝이다.
볼록 렌즈로 빛을 모아 종이에 불을 붙여
거기에 드디어 구멍을 내는 것이다.
그 구멍을 통해 꿈을 본다.
이런 식으로 나는 목적을 달성하길 원하고,
그렇게 하려고 한다.
지극히 포커스적 삶이다.
죽을 때가 되면 주변의 자질구레한 것을
미리미리 정리하고 아주 단순한 상태에서
가벼운 몸으로 이승을 표표(飄飄)히 떠나는 것이다.
이승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우주에서, 내 삶은 한낱 먼지에 불과했노라.”
죽음을 감지하면 이미 주변엔 불필요한 건 없다.
이부자리, 앉은뱅이책상, 읽던 책, 창 없는 환한 방.
방 한복판, 영혼이 떠난 육신뿐.
“이것 외에,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빚도 없고 그렇다고 돈을 싸놓고 가지도 않을 것이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상태에서 아주 산뜻하게(Clear) 해놓고
이승과 영원한 석별의 정을 고하는 것이다.
이승을 빈털터리 벌거숭이가 되어 온 것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저승을 통과하는 것이다.
떠날 때는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
이승은 나그네로 잠시 머문 곳이었다.
단 하나,
글만 남긴다.
다른 건 필요 없다.
글에 거의 전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거면 차고 넘친다.
나머진 다 군더더기일 뿐.
남겨진 글은 주인 없는 이승을 정처 없이 떠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손에 잡히면 다행,
안 잡혀도 할 수 없는 일.
그게 삶의 진리인 것을, 팔자인 것을.
다만 자연의 순환에 순응할 뿐.
삶
쓸데없는 데 힘을 쓰지 않는다.
죽음
남김없이 간다, 인간적 빚이든 재산이든.
글
현재 것과 변하는 것을 글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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