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만을 향해
요즘 <굿파트너>가 그렇듯이 불륜 드라마가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고 여자들끼리 싸운다.
남편은 더 못된 짓을 한다.
모든 국민에게 지탄받는 빌런일수록 그는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미증유의 인기를 누린다.
욕과 비례해서 그것도 급상승한다.
욕하면서 보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이 싫어할 것 같은 것만 골라,
(드라마 시청률 끌어올리려 스태프들이 모여 앉아
이 심리와 그 정서에 대해 심히 모의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혼신을 다해 연기에 임할 수밖에 없다.
연기하는 연예인으로서 마다할 이유가 없다.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아내를 편드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그래도 그 둘은 가정조차 뛰어넘은 사랑이라며,
-이렇게 말하면 그 아내도 국민도 코웃음만 친다-
오로지 그들 입장에서만 보면 억울할 것 같기도 하다.
자기들 사랑은 내로남불이 아니라 순수했노라며.
하여간 시청자들에게 이들은 죽일 연놈들에 불과하지만.
설령 드라마지만 불륜 남편으로 전국민의 공공의 적이 된
김지상은 대국민 사과를 하고,『수유천』으로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김민희와 홍상수가
(갑자기 내 개인적 생각의 흘러넘침(범람, 氾濫)이지만,
나는『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유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홍상수,
『詩』의 이창동 감독, 찐팬이다.
나는 이들의 영화를 적어도 2~3번 이상은 봤고,
이들 모두 시인 등 작가 출신 감독이라 그런지
뭔가 작품에 무게감이 있고 울림 있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는 것 같아, 반복해서 봐도 흥미를
잃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만 유독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국민 모두의 욕받이가 되는 것을 보면
(가족과 자식, 의리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이데올로기의 힘은 그 누고도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막장이고 막 나가도 그 어린 자식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고, 그 어린 자식은 끝까지 보호할 대상이다.
그것에 감히 도전하는 인간은 존재하더라도
천벌을 면치 못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 어떤 가치를 들고 와 덤벼도
감히 대적할 수 없다.
한국은 확실히 부부 중심적인 가정이랄 수 없고,
자기가 전력을 다해온 좋아하는 직업도 결국은 아니고,
(이 드라마가 시청자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공중파이고, 아직은 중반이라 어떻게 결론 날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이게 인간 사회에선 흔들리지 않는
거의 절대 가치에 가깝기에 그렇게 결론 날 것도 같지만,
사회에서 잘 먹히진 않지만 그래도 너무 중요해
자꾸 언급하는 가치가 있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다.),
어쨌든 지금까지 전개되는 이야기를 갖고 보자면,
나는 이걸 무엇보다 가장 우선적 가치로 두고 있었는데,
이것조차 자식에게 굴복해 밀리는 것 같아,
그래서 사회 통념에 백기를 드는 것 같아
“역시, 막장은 어쩔 수 없어.” 라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작품을 대하는 사람이 100명이면 그 느낌도
100가지라고 생각하는 게 ‘내 삶의 지향’이지만,
“이 이상야릇한(Weird) 인간은 이걸 또
이렇게도 읽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 버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이 드라마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 짚고 있더라도
나의 지금의 한계로는 그렇게 느꼈다.
물론 나도 한국 생활인이라 자식 앞에선 무릎 꿇겠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드라마는
그래도 정치적 올바름(이상적 사회 모습)을 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자아실현이라는 거창한 기치(旗幟)가 아니더라도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자신의 힘이 작용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닐 때 결국 돌아오는 게 허망함이고,
그게 자기 자신으로 향한 게 아니라서
-자기를 채운 게 아니라서-그걸 채우려고 보상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원망 섞인 물음에,
부모는, 자식에게 “누가 그렇게 키우랬어?”라고
얼마든지 되물음 받을 수 있다는 거다.
이 물음에 반박할 수 있겠나.
힘이 자기를 향했던 거라면 그걸 하는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채워졌기(보상받았기) 때문에
남으로부터 따로 받아 채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남으로부터의 보상은 진정한
자기 채움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왜냐면 여전히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신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일터에서, 승객이 가고자 하는 역에 대해
자신이 착각해 길을 잘못 들은 거면 기꺼이 감수하지만,
같은 손해라도 직원이 잘못 안내해서 생긴 손해에 대해선
반드시 응분의 책임을 묻는다는 거다.
자기가 아닌, 남에 의한 거면 보상이나
대가를 받으려고 한다.
그 승객은 실제 찾아와서 굳이 자기 손해에 대해
보상하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아닌 ‘직원의
잘못’에 대해 속으로라도 꼭 간직하며 지하철을
앞으로도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손해가 남에 의한 거면
보상과 그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는 게 인간이다.
자신에겐 너그러워도, 남에겐 한없이 가혹하다.)
자식을 중심으로 부부의 끈이 이어지는 구조다.
그 부부라도 자식의 가치에 도전하면 얼마든지 파괴된다.
이때 부부는 원수로 전향된다.
자신이 아니라 모든 게 기승전 자식에게만 향해 있는
한국적 환경과 자식에게 모든 걸 승부 거는 구조이니
어디 겁나서 애를 낳겠나?
애를 기르려면 남들과 비슷하게는 길러야 하는데
그걸 생각하면, 머리에 갑자기 두통이 일면서
자동으로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리는 것이다.
아무튼 불륜을, 뭔가 조마조마하고 그 위기에도
가정을 지키려는, 어떤 어려움이라도 뚫고
가족과 자식을 지키려는 그 힘이 작용해서
인기가 그칠 줄을 모른다고,
지금으로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지 바람이 있다면,
드라마가 ‘이상적 사회를 향한’ 모습으로
끝맺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하고 싶다.
자기를 향한, 채우는 일을 우선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아닌 평범한 인간인지라 가능하기 힘들겠지만,
내가 바라지 않을 정도로만 남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원할 때만.
(그러나 대개는 보면, 상대가 바랄 때가 아니라 자기가
주고 싶을 때 주고, 주는 것도 상대가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주고 싶은 걸 줘서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 주고받음의 효과가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받은 사람은 고마움도 잘 모르고(아예 잊기도 하고,
심지어 슬며시 버리기까지),
이러니 준 사람만 준 것을 너무 생생히 기억해 그 반대급부가
돌아오기만을-서운함을 감춘 채-학수고대하는 것이다.)
적당히 주는 거, 준 걸 잊는 거, 상대가 원할 때만.
이 세 가질 실천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역시, 노력만이라도 해보는 게.
그런 중에도 자신의 삶을 놓치지 않는다.
사는 모습
바라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준다.
바라지 말고, 준 걸 잊는다.
상대가 원할 때만
의중
내 삶을 놓치지 않는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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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 때문에 기후 위기가 와서 요트에 폭풍우가 일고 있다. 배에서 이상한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다 환경 때문이다. 부자 인 간들이 다 그렇게 만든 갓이다. 그래 깨끗한 음식만 먹는데 이젠 그게 한계에 이르렀다. 내 몸에서 서서히 안 좋은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간이 만든 환경 때문에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 다 자업자득이다. 인간의 짊어져야 할 업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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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하려면 그가 내 앞에서 하는 말을 믿고 하는 게 아니라 평소 그 인간이 하고 싶어하는 걸 알아내고 그걸 하는 게 빠르다. 앞에서 하는 말은 그냥 접대성 멘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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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많이 돌려서 말하면 잘 쓴 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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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Tyranny) 박정희 시대엔 하도 떠들어서 국군의 날과 6.25가 가장 큰 명절인 줄 알았다. 어릴적 세뇌가 이렇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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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금을 주로 쓴다. 카드를 쓰면 빚을 달고 사는 것 같아 몸이 무겁다. 빨리 떨쳐내고 싶어 그런 것이다. 카드를 긁을 때도 그냥 일시불로 해서 빨리 나에게 달라붙는 것을 떨어내고 싶어 그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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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 오래 해먹으면 그 막무가내가 표준이 되어 그걸 버리는데 시간이 아니 고정될 우려가 있어 하루빨리 끌어내려야한다고 생각한다. 국격의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더는 미개해지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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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잡대 나오면 엄청나게 글을 잘 써야 인정해 준다. 그러나 스카이를 나오면 그냥 그런대로 써도 인정해 준다. 이게 한국의 냉엄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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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별로 안 사랑하는 것 같은데 결국 그들보다 더 사랑하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왜 작가는 이런 글을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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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간의 진짜 모습이 그런 것이지만 작가들이 너무 인간에 대해 다룰 때 뭔가 한 가지에 마음을 붙이는 그런 게 없다. 아마도 자기 글을 세련되게 하려고 그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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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여러 인생을 간접 경험하고 그리고는 그 현실에서 벗어나서 조망하니 더 일반인보다 통찰력이 뛰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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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주로 흐름에, 주류에 생각없이 휩쓸려 가는 인간들을 안 좋아고 그거서 나와 지긋이 응시하는 자를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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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설 주인공은 너무 사는 게 적당히 사는 것 같고 절대 성실하지 않다. 꼭 작가가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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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양가(兩價,) 중층적이고 그들이
사는 세상이 답이 따로 없다는 것이.
“이제 더는 안 나오겠지.” 해도
새로운 문학 작품은 계속해서 나온다.
알려고 다가가 뭔가 해서 아는 듯하다가도
결국 실패하고 만다.
찾아냈다고 말하는 자가 나타나 글로 뭔가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지만, 그것은 결론이 아니라
새로운 의문만 양산할 뿐이다.
아무리 해도 결국 미지로 남기에,
이번엔 내가 해보겠다며 덤벼드는 문학 작품은
또 자신의 한계와 편견만 확인할 뿐
그 작품으로 모두 인간을 아울러 설명하진 못한다.
인간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인 양 마구 개발해
기후 위기를 불러왔고, 자기가 좋아하는 가축만 편애하고
대신 다른 가축은 그야말로 작살내는 자기 편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하는 등
이기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문학의 끝없는 생산을 위해서
알 수 없는 인간이 그래도 이런 면에선
문학에 조금은 기여하고 있다고 안 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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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에 인간은 지배를 받는 것 같다
인간 중에서 젊을 때는 여자가 더 잘 자살하고
늙으면 여자는 잘 자살을 안 하는데 남자는
여성 호르몬 작용 때문인지 TV 드라마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등 자살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젊을 때 여자가 많은 것도 아마 그때는
여성 호르몬이 많아 그런 것 같다.
다 호르몬의 농락(籠絡)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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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소설은 어릴 적 부모에게 사랑을 듬뿍 받지 못해 애정 결핍으로 사람을 믿고 깊이 순수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걸 길고 아주 교묘하게 늘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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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는 이미 세계적인 감독이라서 그냥 먹고사는 것에 초연해 느긋하게 배우를 시켜 그런 삶을 사는 것도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 을 수 없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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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리에 고무줄 달린 바지와 치마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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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남에게 피해만 안 가면,
그가 그러는 것은 그럴만해서 그러는 것이다.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자기가 지금 그러는 걸,
존 중받고 싶듯이.
누구나 다,
자기만의 모양의 그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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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팬티에서 이제 지린 내가 자주 난다. 그래 바로 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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