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함께 읽기] 두 번째 시간 - 숨(테드 창)

D-29
이번에 테드 창의 소설집을 읽으면서 전에는 몰랐던 바를 느끼고 있습니다. 테드 창이 상당히 계몽주의 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실은 이러할지라도 실망 말고 희망을 가져라’ 식의 메시지를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과 <숨>에 이어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도 말하고 있네요. 이 작품에도 역시 운명론이 깔려 있습니다. ‘혹자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바가 진실이므로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있죠. 비록 5쪽에 불과한 짧은 소설이지만 이 주제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예측기라는 기상천외한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데 얼마나 걸렸을지 궁금해집니다. 소설 속에서 자유의지하면 생각나는 작품을 테드 창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백경(Moby-Dick 또는 The Whale)>을 쓴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죠.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중얼거리며 저항의 자유의지를 표명하던 바틀비 이야기입니다. 바틀비와 함께 저는 이문열 작가님의 <사람의 아들>이 생각났습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부여했다는 자유의지를 대놓고 의심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리고 테드 창이 쓴 문장인 ‘인간의 논리 체계를 망가뜨리는 괴델식 문장’을 읽는 순간 쓰디 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고 <괴델, 에셔, 바흐>를 쓴 저자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1000쪽이 넘는 벽돌책은 몇 번이나 읽다가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별별 추억을 다 소환한 셈입니다.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겠죠. 하하.
와… 이렇게 짧은데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네요. 와… @밥심 님은 이 소설에서 ‘계몽주의적 태도’를 발견하셨네요. 저는 왠지 그 이면에 허무주의적 혹은 냉소적 태도가 숨어 있는 듯이 느껴졌어요.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처방이 표면적으론 인간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비책을 알려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의지를 믿고 쌓아올린 인간의 문명을 비웃고 그 허상을 폭로하는 것 같달까요?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 있다. 어쩌면 줄곧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는 문장이 왠지 그 느낌을 뒷받침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구요. 마지막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그래서 왠지 소름이 돋습니다. 예측기가 불러온 인간의 비극을 미리 피할 수 있도록 경고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결정되어 있기에 피할 수 없고 심지어 이 경고 행위조차 자유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기에 행해지는 것이니까요.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효화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보여주면서도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 해도 실제로 수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게 된다’는 서술을 통해 인간의 행위가 무의미의 영역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 반대인 것 같아서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지금껏 읽은 테드 창의 소설들은 냉소적이지 않았기에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인가… 싶은데, 그래도 위와 같은 감상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네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짧았던만큼 마지막 문장이 총알처럼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관한 흥미로운 세계관 속에서 ‘믿음’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결말에, 희망적인 동시에 얼마간 체념도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좋았네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있다. 어쩌면 줄곧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p. 95,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해 평상시 관심이 많아서 아주 흥미롭게 읽었어요. 길이도 짧아서 부담 없었고요. 이 짧은 글에 이토록 큰 사유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테드 창의 천재성인 것 같아요. 저는 지금 트레바리에서 '선택력'이라는 클럽을 진행하고 있어요. 저는 종종 '한 인간의 삶은 그가 내린 선택의 총합'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건 거짓말이에요. 정확히는 인간의 삶은 그가 선택하지 않은 것과 그가 선택한 것의 합이겠지요. 저는 저의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얼굴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 '생'을 선택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선택하지 않는 것들이 내 삶을 너무 많이 좌지우지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엄청난 무력감이 온 몸을 파도처럼 덮치고 손가락 하나를 드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져요. 그러다 내가 그나마 선택했다고 느꼈던 것조차 과연 내 선택이 맞았을까 의심이 시작되면... 이러한 감각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오늘도 마치 자유의지가 있는 척, 내가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척 하곤 합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 진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달리 어쩌겠어요.
'내가 그나마 선택했다고 느꼈던 것조차 과연 내 선택이 맞았을까 의심'하는 마음, 너무 알 것 같아요. 이미 답의 범주가 주어진 오지선다형처럼,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이미 한정적이니까요. 결국 내 삶의 나의 선택의 결과라는 말은, 때로는 나에게 온전히 책임을 지우기 위한 핑계로만 느껴지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런 생각들이 저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주지는 못하죠. 그러므로 어쩌면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자기기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래서 '정신승리'를 폄하하지 않는 편이에요. 정신승리로 내 멘탈을 잡아야 삶을 이어갈 수 있을 때도 있으니까요.
운명이 이미 정해져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데요...어찌되었든 미래는 알 수 없으니까 그냥 현재를 잘 살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 단편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네요.
저 역시도... 어떻게 해도 알 수 없다면 그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생각한답니다ㅎㅎ
화제로 지정된 대화
3.2.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 인상 깊은 문장을 남겨주세요!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인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 94-95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저도 @별사탕777 님과 같은 문장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95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것은 진심으로 믿기 전에는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93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수집한 문장을 두고는 ‘어떤 믿음이 해가 되는 것일까’하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깨어 있는 혼수상태’가 되게 하는 믿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한편 화자의 메시지에 따르면 무동무언증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고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으므로, ‘그렇다면 어떤 믿음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라고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를 굴복하지 않게 만드는 믿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당장 답을 내리긴 어렵네요...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p. 8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하지만 이제는 알아버렸습니다.”
94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우리가 해야 할일 이 소설상, 네거티브 딜레이 회로가 중추인 예측기는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증적 증거이고, 추후에는 일년 뒤 미래에서 이 회로를 이용해 과거로 장문의 메세지를 보내는 설정인데, 마지막 문단조차 빠져 나올 수 없는 듯이 표현되어 있어서 숨이 막힐 수도 있다고 여겨 집니다.(흰벽님 말씀처럼) 이미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정한 이상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 버리는 순환고리에 빠져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소설을 현실에 대한 비유로서 해석을 해 보았어요. 일단, 자유의지가 없을지라도,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 해 보았습니다.( @별사탕777 님이 수집해 주신 문장을 여전히 다시 읽으면서요.) 그렇지만, 자유의지가 있냐, 없냐의 논점으로 들어가면, 결국 순환고리에 빠져 버려 생각 전개가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계속 자유의지가 없는데 무슨 소용인가 인 거죠.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은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 있다. 어쩌면 줄곧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나의 선택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점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에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가장 확실하고 완벽한 선택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고, 그저 어쩔 땐 아무런 근거 없이, 어떤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선택하기도 하고요. 인간은 어떤 완벽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데 서슴 없어 하기도 했고요.(지금 현실도 그러죠.) 오히려 나의 선택이 자기기만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결국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우리가 해야 할일은 여기서부터입니다.
‘나의 선택이 자기기만임을 아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부터’라는 말씀에 (박수가 절로 나오며) 동의합니다. 메타인지가 보다 중요해진 시대가 온 것 같고, 그에 따라 깊이 있는 독서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믐이 그걸 도와주고 있는 것 같고요ㅎㅎ
화제로 지정된 대화
오늘부터 17일까지는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읽습니다. 이 소설집 전체에서 가장 긴 소설이에요. 예전에 읽었을 때 저는 이 작품이 가장 재밌었어요. (그냥 그 느낌만 기억나고 내용은 전혀 기억나질 않아서 이번에 읽으면 어떨지 궁금하네요.) 모임지기가 책읽기에 도움될 정보 하나 드리는 법이 없어 민망하오나, 모임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의 수준에 높아 앞다투어 여러 정보를 올려주고 계시므로… 저는 숟가락 얹겠습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즐거운 독서 해요!
아마도 테드 창의 소설들 중 가장 길지 않나 생각됩니다. 읽으면서 제법 길다고 여겼던 <네 인생의 이야기>도 80여쪽 밖에 안 되네요.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2013년에 우리나라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을 정도로 분량이 제법 있습니다. 화이팅들 하시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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