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하곤 하는데요. '만약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외모, 나이, 학벌, 직업, 능력, 가정환경, 경제적 여건 등 온갖 조건을 다 빼놓고 순수하게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에요. 그때마다 상대의 대답은 여러 가지로 돌아오곤 합니다. 저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 '아 이 사람이 이런 쪽에도 관심이 많았구나'를 새삼스레 알아가기도 하고, 지금 본인의 삶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꼬집거나 결핍을 말하는 등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도 해요.
근데 제 경우 대답이 늘 한결 같았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배우'였어요. 매번 그랬어요. 하지만 쑥스러워하지는 않기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조건을 다 내려놓는다는 전제하에 하는 선택'이라고 했으니까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어요. 아마 제가 이 직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에 얄팍하게 접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유명해지고자 한다거나 많은 인기를 누리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다).
저라는 인간은 저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분석(?)하고 탐구하는 걸 좋아해요. 글을 쓰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제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 같다 여겨지고요(그래서 좋아하지요). 근데 배우는 뭔가 그 감정선을 더 폭발적으로 표출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배역에 숨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일종의 광기랄까)하면서 하나의 창작물로 완성시킨다는 건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누군가가 그걸 제지(?)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미쳤다거나, 왜 저러냐는?). 말 그대로 연기니까요.
그럼에도 그 직업은 저와 맞지 않다는 걸 압니다. 제가 원하는 연기보다는 소속사나 대중이 원하는 연기를 할 가능성이 높고(이것도 인기나 있어야 가능한 거겠지만), 거기다 인기와 돈, 그외 부수적인 관계를 다방면으로 모두 신경 써야 하니까요(아이돌처럼 팬들의 눈치까지 하나하나 봐야할 테죠). 거기다 저는 사회적 에너지도 낮고,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말수도 적은 편이라 어떻게든 눈에 띄고자 혈안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에너지가 쫙쫙 빨릴 것이 자명하기에 더더욱 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죠. 근데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품고 있는 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건 여전히 좋아해요. 배우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이 눈앞에서 팡팡 터지는 느낌이거든요. 근데 어쩌면 이 꿈은 꿈으로 남겨둘 수 있어 아름다운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올해 초에 다녀왔던 전시 중에 <논펀저블(NONFUNGIBLE): 대체 불가한 당신의 이야기>라는 전시가 있었는데요. 배우 류덕환님이 이끄는 예술 프로젝트로 '작품의 탄생에 적극 참여하는 배우에게는 저작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배우는 작품의 저작권을 가질 수 없는 걸까', '배우는 자신의 이야기로 연기를 할 수 없을까', '배우의 연기는 타인의 글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배우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들이 던져졌었죠. 감정 표현이 자유로운 직업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라는 존재를 철저하게 지워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제대로 이해했던 것 같아요.
[📕수북탐독] 4. 콜센터⭐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
D-29

연해
GoHo
배우.. @연해 님한테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심하게 보고 세심하게 이야기해 주는 분 같거든요..^^
배우들은 그런 섬세함이 있는 것 같아요..
전시 관련해서도 찾아봤는데 꽤 남다른 의식의 프로젝트 같습니다.
기사 말미 질문들도 생각해 보게 되네요..
https://naver.me/xZV9tcVu

김혜나
배우를 꿈꾸셨다니, 꿈꾸는 것만으로도 정말 빛나는 일이네요. 최근에 읽은 소설 <왓 어 원더풀 월드>에서 배우를 꿈꾸지만 평생 회사생활을 해온 인물이 말미에 나오는데, 그 캐릭터가 떠오릅니다. 배우의 꿈이라면 꿈으로만 남겨놓든, 뒤늦게라도 좇아가든 무척 멋진 일인 것만 같습니다^^

연해
엇! 그 책 저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작가님 찌찌뽕... )
해본 적도 없는 국토종주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줄거리 자체도 흥미로운데, 각 인물들의 모습이 한 명 한 명 생동감 있게 통통 튀는 느낌이었어요. 정진영 작가님의 다른 소설을 읽었을 때도, 인물에 대한 묘사와 감정선이 인간미 있게 다가올 때가 많았는데, 이 소설도 그랬답니다. 말씀해 주신 캐릭터는 이재유일까요? 저도 읽은 지가 좀 된 소설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속도감 있는 전개에 눈을 뗄 수 없었던 맛깔스러운(?) 소설이었어요.

왓 어 원더풀 월드일주일 전 회식 자리 말미, 호기롭게 뿌린 여덟 장의 로또 복권, 그중에 1등이 있었다. 당첨된 로또 복권을 가지고 잠적한 직원을 찾아오라는 사장의 지령이 떨어지고, 그를 데려오는 직원에게 연봉 1천만 원을 인상해주겠다는 공약이 내걸린다.
책장 바로가기

김혜나
이 책 벌써 읽으셨다니 반갑네요~ 제 기억에 나중에 배우로 전향하는 캐릭터는 이재유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저도 너무나 가물가물합니다 ㅋㅋ

김의경
배우로 살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타고 나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뒤에 숨겨진 고통도 있겠지만 그저 부럽네요^^

장맥주
남들은 다 아니라고 해도 나는 꼭 한번 이루고 싶다는 꿈을 지금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미 반쯤 체념했고요. 공교롭게 아내도 저랑 비슷한 인간이라서, 그런 꿈을 꾸고 있고 그게 그믐입니다. 아내가 한때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했는데 간절함도 알겠지만 집착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정작 저는 제 꿈을 위해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한 적은 없고요.
이 노래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링크 올려요.
https://www.youtube.com/watch?v=UHPJZF3pBhk
노래 가사대로 정말 ‘A bit of madness is key’이려나요.

김혜나
아 저는 20대에는 소설 쓴다고 꼬박 22시간 30분동안 안 자고 안 먹고 작업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 생각하는 모든 걸 다 글로 쓰고 싶었고, 그럴 수 있을 만한 체력과 정신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 같아요. 지금은 하루 5시간도 힘듭니다 ㅠㅠ 그믐 대표님께서는 지금도 그렇게 일하신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장맥주
김새섬 대표도 요즘 그 정도로 일하지는 않고요... ^^;;; (제가 그거 뜯어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어서 16시간 정도 일을 한 적은 살면서 한 번도 없네요. 마감 때문에 울면서 그런 적은 몇 번 있어도요. ㅎㅎㅎ

김혜나
저는 원래 성향이 좀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편인가 봐요. 하지만 건강상으로는 뭐든 일정하고 꾸준히 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ㅎㅎ

장맥주
“ 방 안에서도 시현은 수없이 많이 스튜디오에 섰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방송은 늘 ‘현재’였다. 콜센터와 방송의 공통점 역시 ‘현재’라는 것에 있을 것이다. 콜센터에서의 시간은 ‘끔찍한 현재’였다. ”
『콜센터 - 2018 제6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83쪽, 김의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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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맥주
이 문장들 참 좋아합니다. ^^

김혜나
현재를 살고 있기는 한데 그것이 '끔찍한 현재'라는 사실이 너무나 아리게 와닿습니다...

바다연꽃3
평생 콜센터에서 일해라
『콜센터 - 2018 제6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p.85, 김의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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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리
이 문장 너무 무섭지 않나요? 육두문자 하나 없지만 정말 소름끼치는 표현이에요. ㅜㅜㅜ

바다연꽃3
전 두 가지가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욕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직업을 욕으로 들어야하는 현실이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바닐라
아…저도 그래서 사실상 콜센터나 고객센터는 욕받이 센터라는 생각이 들더 라고요.
바닐라
혹시나 해서 욕받이 센터를 검색해봤더니 이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2024년 6월 기사입니다..
#. 공공기관 콜센터 노동자 A씨는 해결할 수 없는 제도적인 문제를 건의하는 고객과 1시간 30분가량 통화를 이어갔다. 그 고객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못 듣지 못하자, A씨에게 “뭐하러 거기(콜센터) 있냐”,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은데 다른 일 찾아봐라” 등의 비아냥과 조소를 쏟아냈다. 그 이후로 A씨는 자존감 하락과 스트레스로 한동안 전화 벨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울렁거림을 겪었다.
“김 지부장은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유명무실해진 이유는 원청-용역 구조 때문”이라며 “노동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콜이지만 그 콜에 대한 권한은 원청사가 가지고 있다. 즉, 용역회사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셈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욕받이가 아니다”…‘악성민원’ 대책서 제외된 콜센터 노동자들의 울분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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