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보르헤스 읽기] 『셰익스피어의 기억』 2부 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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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읽는 보르헤스의 다섯 번째 책입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셰익스피어의 기억』 2부는 4개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4일에 걸쳐 한 편씩 읽는 모임입니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필요하다면 원문과 영역본도 함께 참고하겠습니다. 목차는 이렇습니다. ⏤1983년 8월 25일 ⏤파란 호랑이들 ⏤빠라셀소의 장미 ⏤셰익스피어의 기억 ※ 한 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대화하실 때는 단편별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서 대화 타래를 엮어가요. ※ 지나간 단편에 대한 언급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단편별로 나눠놓은 기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언제든 대화 타래에 동참해주세요.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참여 인원이 없어도 24/8/15에 시작하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일정] ⏤1983년 8월 25일 (8/15-8/18) ⏤파란 호랑이들 (8/19-8/22) ※8/23은 쉽니다. ⏤빠라셀소의 장미 (8/24-8/27) ⏤셰익스피어의 기억 (8/28-8/31) ※ [화제로 지정된 대화]에 [이 대화에 답하기], 말풍선을 눌러서 대화하시면 됩니다. ※ 이 모임은 [게시판] 모드로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1983년 8월 25일~] 일전에 다룬 ⟨타자⟩라는 단편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이로써 보르헤스는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젊음)와 미래(죽음)의 자신을 소설 안에서 모두 만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타자⟩에서 노년의 보르헤스는 스무살을 코앞에 둔 청년인 자기 자신을 만났고, ⟨1983년 8월 25일⟩에서 노년의 보르헤스는 임종을 앞둔 자신을 조우하고 죽음을 그 목도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쩜 우리는 현재라는 날렵한 점 위에서 차츰 미래가 되어가는 중이고, 꼭 그만큼의 속도로 과거는 아득한 꿈이 되어가는 중인 거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보르헤스는 뭇사람들만큼이나 자신을 벗어나고 싶어 했고, '보르헤스'라는 명성을 벗어나서도 온전히 자신의 소설이 읽힐 수 있는지를 고심했던 사람 같습니다. 아이러니합니다. 누구보다 특징적인 작품 세계를 지녔으면서도 흔히 말하는 '작가주의'를 배격하는 방향으로 실험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소설 속 대화를 보면 알겠지만 보르헤스가 마드리드에서 가명으로 소설을 출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실제로 보르헤스는 동료 소설가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와 함께 '오노리노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가명으로 소설을 여러 차례 발표한 적 있습니다. 최근에 ⟪죽음의 모범⟫이라는 책으로도 번역 출간되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모범 - 보르헤스 가명 소설 모음집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가명의 소설가인 ‘오노리노 부스토스 도메크’를 내세워 만들어 낸 공동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문학 실험으로,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나는 무자비한 불빛 아래서 나를 발견했다. 좁다란 철제 침대 위에 더 늙고 마르고 아주 창백한 내가 멍하니 석고상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내게 음성이 다가왔다. 그것은 딱 들어맞는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녹음기에서 듣곤 했던 나의 따분하고 특징없는 목소리 같았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4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는 무자비한 불빛 아래서 나를 발견했다. 좁다란 철제 침대 위에 더 늙고 마르고 아주 창백한 내가 멍하니 석고상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1983년에 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아직 내가 더 살아야 할 나머지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수 있겠군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1983년 8월 25일] 본문에서 보르헤스는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섭섭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는 현실에서 소설이 어떻게 읽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간혹 독자 중에서 자신은 저자와 무관하게 잘 쓰인 (재밌는) 작품을 좋아하고 기억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문면만 읽는 게 아니라 그 문면을 둘러싼, 구체적인 물성을 지닌 책을 펼치고 있으니까요. 이 말인즉, 우린 책뿐만 아니라 책날개에 씌인 저자의 약력을 포함한 '작가'라는 또 하나의 맥락을 결코 간과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보르헤스가 왜 그토록 성서를 자주 레퍼런스로 삼고, 또 성서를 지향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줬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 날개에 저자의 약력이 없어도 이상해하지 않는 책은 성서 하나입니다. 성서가 아닌 한 작가와 작품을 떼놓고 읽지 못하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점이 보르헤스로서 발표한 소설과 '오노리노 보스토스 도메크'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을 달리 읽히게 만들었을 겁니다. 이는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도 한 차례 확인한 바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작품만 본다'는 말처럼 나이브하고 허황한 말도 없을 겁니다. 그건 '온전한 나'로서 '나 자신의 음성'이 뭔지 알고, 들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타인으로서 나'를 보기(듣기)는 소설적인 상상으로만 가능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녹음된 자기 목소리가 생경하게 들리는 경험을 해봤을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내가 듣는 내 목소리와 타인이 듣는 내 목소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듣는 내 목소리는 엄밀히 말하면 성대를 진동해서 입밖의 공기를 통해 전달되는 목소리와 내 인체 기관을 내부로부터 진동하는 소리가 뒤섞인 복합적인 것입니다. 또한, 내가 듣는 내 목소리는 타인이 듣는 내 목소리와 다르게 '시차'가 비교적 짧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이 '나만이 듣는 내 목소리'를 구성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차'를 극단적으로 늘린, 일종의 사고 실험이 보르헤스의 두 단편인 셈이고요. 그런데 과연 진짜배기라고 할 수 있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듣는 내 목소리'인가요, '타인이 듣는 내 목소리'인가요? 아마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임종을 앞둔 보르헤스는 '나'에게 말합니다. "모든 단어는 공유된 경험을 선(先)전제로 요구”한다고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단어는 과거의 것입니다. 어느 하나 내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 조합만이 독창적이고 무한할 뿐입니다. 백년 전에 '기억'이라는 단어는 오늘날에도 '기억'이라는 단어이고, 그 동안 '기억'이라는 단어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입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르내렸을 겁니다. 따라서 개인이 인지하지 못할 뿐, 대다수 글자들은 과거의 기억을 품고 있고, 한 언어를 배운다함은 그 언어에 얽힌 기억의 역사를 읽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보게 될 글이라는 것은 오래된 글자들의 새로운 조합입니다. 언젠가 발레리가 말한 오래된 나사의 새로운 회전인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명성을 얻은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몇 가지 주제만 반복적으로 탐닉한다는 비판을 들었고, 그런 비판을 또한 지겹도록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에, 자신에 염증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염증을 잠시나마 달랠 방법은 이런 환상 소설을 쓰는 것이었을 테고요. 소설의 말미를 보면 이런 '쓰기'의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임종을 앞둔 보르헤스는 현재의 보르헤스에게 "자네는 내가 될 것이고, 자네는 나의 꿈이 될 걸세"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보르헤스가 지금의 조우를 글로 남길 것이라고 다짐하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던 탓입니다(이 단편이 그 증거입니다). 그 순간 임종을 앞둔 자신과의 만남은 현실이 아닌 환상소설 속 한 만남으로 반전되었고, 현재의 보르헤스는 자신이 '임종을 앞둔 보르헤스'와 전혀 다른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임을, 그리하여 되레 그를 꿈으로 만들 것임을 직감합니다. 실제로도 보르헤스는 소설 속 1983년이 아닌 1986년에 죽었습니다. 재밌지 않나요?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나의 캐리커처인 당신의 얼굴이 지겹고, 내 것의 모방인 당신의 목소리가 지겹고, 내 것이기도 한 당신의 감상적인 논지가 지겹기만 하오.” “나도 마찬가지라네.”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 거지.”
셰익스피어의 기억 15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파란 호랑이들~] 말의 미끄러짐에서 출발하는 상상력이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1904년 말, 한 해외지역의 소식지에서 갠지스 강의 델타 지역에서 푸른 호랑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슬랜드에서는 에티오피아를 블라란드(Bláland), 그러니까 ‘푸른 땅’, ‘검둥이들의 땅’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어에서 ‘blár’는 파랑(blue)과 검정(black)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나'는 꿈 속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고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는 푸른 색깔을 가진 호랑이"를 보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나'는 갠지스 강 인근의 마을로 휴가를 떠나고, 그 지역 사람들이 파란 호랑이를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듣습니다. 그리고 해당 지역의 신성한 언덕 꼭대기에서 마침내 파란 호랑이가 아닌 '파란 돌멩이', 무한히 증식하는 이상한 돌멩이를 손에 넣게 됩니다. '나'는 해당 지역에서 "파란 호랑이" 역시 세사의 불가능한 일에 대한 일종의 관용어처럼 쓰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검은 백조'가 "모든 백조는 희다"는 명제의 잠정적인 반례로 기능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추측컨대, 보르헤스는 간단한 말놀이(pun)에서 시작하여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파란 호랑이를 무한히 증식하는(실제로는 무한히 나눠지는 듯한) 파란 돌멩이로 바꾸어 자기 상상력을 전개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땅은 갈라져 있었고, 모래투성이였다. 나는 깊지 않은 게 틀림없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땅의 틈바구니들 중 하나에서 어떤 색깔을 발견했다. 그것은 믿을 수 없게도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 호랑이의 파란색이었다. 아, 차라리 그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곳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틈바구니는 모두 크기가 같고, 둥글고, 아주 매끄럽고, 직경이 몇 센티미터가 안 되는 작은 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은 너무나 똑같아 마치 도박장의 칩처럼 인공적인 어떤 느낌을 주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6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당연히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과 같은 네 가지 숫자 계산은 불가능했다. 그 돌들은 산수와 확률을 거부했다. 40개로 나눠놓은 돌은 9개가 될 수 있었다. 역으로 9개로 나눠놓은 돌들은 300개가 될 수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무개가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것들을 저울에 달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의 무게가 지속적이고 가벼웠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것들의 색깔은 항상 그 파란색이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7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는 여러가지 실험을 시도해보았다.나는 그 둥근 돌들 중의 하나에 칼로 십자가를 새겨 보았다.나는 그것을 나머지 돌 속에 집어넣었다.나는 한두 차례 변환되는 사이 비록 돌들의 숫자는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찾을수 없었다.나는 줄을 가지고 반원 모양으로 깎아낸 비슷한 실험을 해보았다.그것 또한 사라져버렸다. 나는 송곳을 가지고 한 돌의 중앙에 구멍을 낸 뒤 실험을 되풀이해 보았다. 나는그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다음날,십자가를 새겨놓은 돌이 무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불가해한 법칙 또는 비인간적인 섭리에 순종하면서 돌들을 삼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하나 다시 토해내는 그 공간이야말로 얼마나 신비스러운 것인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파란 호랑이들] 위 인용구를 보면서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이 단편은 무한(소) 개념과 미분 개념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 많습니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과거인들에게 '무한'은 신의 속성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된 지식으로 신을 논변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2,000년 가까이 무한 개념을 사람의 정신에 해롭다고 여겼고, 일례로 19세기 수학자 게오르그 칸토어 역시 '칸토어의 정리'("사물들의 집합의 무한은 사물들의 무한보다 더 크다")라는 아름다운 원리를 발견해냈지만 말년에 광기에 휩싸였다고 전해지니까요. 다만, 이 소설에 나오는 무한히 증식하는 돌멩이는 엄밀히 말해서 무한대가 아니라 무한소 개념을 연상시킵니다. 보르헤스가 ⟪픽션들⟫과 ⟪알렙⟫에서 지속적으로 건드려 온 주제이기도 합니다. 무한소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제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유명한 '아킬레우스의 거북이'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논은 경주 과정을 무한히 분할하여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과정을 무한히 지연시키며, 그로써 운동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제논의 역설'로도 불리는 이 문제를 통해서 제논은 묻습니다. 무한한 일들이 어떻게 유한한 시간 내에 끝날 수 있겠느냐고요. 무한에 관한 모든 내용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간단히만 언급하면, 제논은 해당 문제에서 오늘날의 '실무한' 개념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실무한에서는 무한한 분할이 유한한 전체를 이룹니다. 오늘날 수학자들은 이런 실무한 개념을 수학적으로 승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 보르헤스의 소설 속 '나'가 손에 쥔, 무한히 증식하는 푸른 돌멩이 역시 비슷한 개념을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 속 '나'는 돌멩이의 개수가 끝없이 줄어들고 늘어나는 와중에도, 비록 저울에 달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무게가 "지속적이고 가벼웠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파란 돌멩이가 손에 쥐어지는 무한을 상징하며, 무한히 나뉘어지면서도 전체의 무게는 변화가 없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무한소, 더 나아가서는 미분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70쪽에 나오는 "수많은 언어들에게 ⟨계산⟩이라는 단어를 유산으로 물려준 그리스의 돌들"에 대해서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계산'으로 번역된 스페인어 단어는 ‘cálculo’입니다. 이는 영어의 'calculus'에 대응될 겁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이 'calculus'가 '미적분학'이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며, 정확히 같은 단어가 라틴어로는 '조약돌'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겁니다(하나 더, 'calculus'는 의학적인 맥락에서는 '결석(結石)'을 지칭합니다). 이 단어의 어원에 얽힌 이야기도 의미심장하고 재미있습니다. 먼 과거에는 조약돌을 이용해서 수를 셌는데, 숫자를 모르던 양치기들은 한 마리의 양에 작은 돌을 하나씩 대응시켜서 양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먼 옛날 'calculus'는 셈을 하기 위한 도구의 의미였고, 오늘날에도 미적분학은 강력한 수학적 도구입니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사이의 유사성을 포착하고, 그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결국에는 그 두 가지를 '같다'라고 상정함으로서 세계를 확장해온 독특한 종입니다. 어쩜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굉장히 강력한 도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당연히 돌멩이 하나는 양 한 마리와 같지 않습니다. 그걸 모르는 바보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름을 '같다'라고 보고, 두 대상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잠시' 잊어버렸던 바보들만이 양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겁니다.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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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라셀소의 장미] 본문에 나오는 빠라셀소(Paracelso)는 16세기 의학자이자 연금술사로 유명했던 인물로서 영어권에서는 파라켈수스(Paracelsus)라고도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 외에도 점성술과 같은 비의적인 학문을 연구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오늘날에는 그런 분야가 사이비 과학처럼 여겨지지만 종교와 (분과학문으로서) 과학이 면밀히 분리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중요한 학문적 기틀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단편에서 빠라셀소는 일종의 현인처럼 그려지고 있는데요, 문답 형식으로 빠라셀소는 이름 없는 제자와 얘기를 이어나갑니다. 이야기 자체는 간단합니다. 어느 날 밤, 이름없는 제자가 빠라셀소를 스승이라고 부르며 찾아옵니다. 그 장미를 불태우고 나서 그것을 다시 소생하는 기적을 눈앞에서 보여달라고 합니다. 제자는 스승의 능력을 검증하고 싶어하고, 스승은 그러한 제자의 검증 체계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제자는 자신이 쉽게 속아넘어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두 눈으로 장미의 절멸과 부활을 보겠다고 말하고, 빠라셀소는 '보이는 것'은 "속임수로부터 야기된 외양의 변화"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름없는 제자가 찾으려는 신앙은 그와 무관하다고 맞섭니다. 신앙은 '바라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20장의 '의심 많은 도마'의 일화를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믿지 못하고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그 못 자국에 손을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8일 후, 예수님이 나타나서 직접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했고, 만져보고 나서야 도마가 믿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편은 요한복음의 '의심 많은 도마' 일화와 닮은 듯 다릅니다. 왜냐면 빠라셀소는 끝끝내 이름 모를 제자의 눈으로 기적을 확인시켜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기적을 목격한 사람은 빠라셀소 자신밖에 없습니다. 빠라셀소가 행한 기적은 자신 외에 아무도 보지 못한 기적이며, 엄밀하게 말해서 아무에게도 증명되지 못한 기적입니다(물론 이러한 일화 속의 기적을 독자들은 보고 있긴 합니다). 빠라셀소의 기적은 불신자의 등 뒤에서 벌어지는 기적이고,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누구도 깨닿게 하지 않습니다. 끝끝내 이 이름없는 제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스승 빠라셀소에 연민을 느낀 채 등을 돌려서 어디론가 가버립니다. 그는 빠라셀소가 행한 기적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 더,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단편의 초반부에서 빠라셀소가 신에게 제자 하나를 보내달라고 간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픽션들⟫에 나오는 ⟨원형의 폐허⟩와 매우 흡사합니다. 생각해보면, 성서를 비롯한 동서고금의 경전이나 종교서는 형식상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현인 같은 스승이 등장해서 제자에게 가르침을 건네는 대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단 겁니다. 제자를 가지려는 것이란, 어떤 면에서는 독행자가 스스로 말을 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자신에게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빠라셀소, 즉 영어권의 파라켈수스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습니다. 그는 의학자로서 연금술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오늘날 흔히 연금술이라고 하면, 납이나 구리 같은 흔한 금속으로 금은과 같은 귀금속을 만드는 기술,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드는 마술로 받아들이고는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연금술을 과거 마술적 세계를 신봉했던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연금술을 마술로 국한하는 것은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과학이 광의의 개념인 분과학문을 의미할 시절, 그러니까 종교와 과학이 지금처럼 세분화되지 않던 시절에 연금술은 단순히 사이비 과학이나 허무맹랑한 마술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이었습니다. 오늘날 과학의 기틀을 세운 많은 인물이 크든작든 연금술을 연구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고전물리학의 기틀을 세웠다고 일컬어지는 뉴턴 경 역시 연금술에 조예가 깊었고, 오늘날 연구자들은 역작인 ⟪프린키피아⟫에서도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다시 파라켈수스의 얘기로 돌아가면, 그는 연금술로써 비단 '금'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약'을 만들어내어 연금술의 새 장을 열었다고 일컬어집니다. 파라켈수스는 오늘날 의약 화학, 독극물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러 질병의 특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독성 물질로 받아들여지던 유황과 수은을 적정하게 쓰면 약이 될 수 있음을 임상적으로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만물에 독이 있으며 독이 없는 물질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오늘날 독극물학의 유명한 격언인 "복용량이 독을 만든다"는 말 역시 파라켈수스에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이름없는 제자의 진짜 이름은 마지막에 밝혀지는데요, 바로 18세기 독일의 성서 비평가인 요한 야코프 그리스바흐(Johann Jakob Griesbach)로 추정됩니다. 제가 신학에 조예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정확히 그가 성서에서 어떤 견해를 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보르헤스의 단편에서 두 사람은 약 두 세기라는 시차를 뛰어넘어서 조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프린키피아 - 해설서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아이작 뉴턴은 1687년 출간한 기념비적인 저서인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즉 『프린키피아』에서 현대 물리학의 발전을 이끈 ‘시간’, ‘힘’, ‘운동의 원리’를 수학적인 용어로 설명했다.
틀렸네. 자네는 어떤 것이 무로 돌아갈 수있다고 믿나?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단 한 포기의 꽃이나 억세풀이나 잡초를 없애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저희들은 에덴 동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젊은이가고집스럽게 말했다 여기 달 아래서 모든것은 죽는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빠라셀소가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다른 어떤곳에 있는데? 신이 에덴동산이 아닌다른 어떤 곳을 창조할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이 우리가 에덴 동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 못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라 생각하나? 세익스피어의 기억 176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셰익스피어의 기억~] 마지막에 어울리는 재미있는 단편입니다. "역사 속의 걸출한 인물의 기억을 가지면 그 인물처럼 걸출해질 수 있을까?" 하는 누구나 해봤을 법한 상상, 그 욕망에서 출발하는 단편입니다. 먼저 말씀드리면, 한 권의 책은 그 책을 쓴 사람의 기억과 같지 않습니다. 다만 한 권의 책은 분명 저자의 기억이 작용한 결과이고, 기억의 일부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책은 현실의 기억을 초과하는 어떤 상상의 소실점에서 펼쳐지는 무언가이고,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기억은 책을 둘러싼 광막한 배경입니다. 이 소설은 기억과 책의 공통점과 그 근원적인 차이점에 대해서 사유할 길을 열어주는 한편, 한 시대와 시대에 속한 개인이 맺는 관계도 생각해보게 해줍니다. 소설의 화자인 헤르만 세르겔은 셰익스피어의 연구자로서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손에 넣게 됩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얻게 되면, 셰익스피어가 남긴 불후의 걸작을 창조해낸 순간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헤르만 세르겔이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속한 현대와는 어딘가 모르게 맞지 않고 생경한 일상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권의 책과 독자가 어떻게 만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독자는 책이라는 물성을 소유할 뿐, 그 책의 내용을 소유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약간의 돈만 있으면 '성서'를 살 수는 있어도 성서의 '사유'를 소유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요. 따라서 헤르만 세르겔도 말하듯, 책은 서술자의 기억과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억을 들여다 볼 가능성의 암시할 뿐입니다. 완전히 똑같은 글을 읽더라도 그 글을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책은 완전히 다른 풍경과 기억을 독자에게 펼쳐 보여주니까요. 굳이 한 권의 책과 한 개인의 기억이 닮은 구석이 있다면, 그건 그 전체를 한번에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한 권의 책의 모든 페이지를 한눈에 보는 게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모든 기억을 단번에 떠올리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기억은 망각작용까지 포함해서 기억이라고 칭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둘은 근원적으로 다름만 부각됩니다. 한 걸출한 인물이 쓴 책을 읽고자 하는 욕망은 그의 기억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까지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헤르멘 세르겔처럼요. 하지만 당사자의 기억을 소유한다는 것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첫째로 아무리 걸출해도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감추고 싶은 어두운 기억, 떠올리기를 거부하는 어둡고 누추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은 그가 속한 시대적 한계를 품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지닌 채 살아가는 헤르만 세르겔의 고통과 한계와 좌절감이 읽힙니다. 그는 헤르만 세르겔 자신임과 동시에 셰익스피어일 수 없다는 두번째 문제에 봉착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셰익스피어는 헤르만 세르겔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셰익스피어가 작품으로 도달하고 이뤄냈던 것들은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나는 토프가 말했던것처럼 지금도 또렷하게기억하고 있다 기억은 이미 당신의 의식속에 들어갔지만 당신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오. 그것은꿈속에서 ,깨어 있을 때 어떤책의 책장을 들출때,모퉁이를 돌때 나타날것이요.너무 조바심을 내서도 기억들을 억지로 만들어내서도 안됩니다. 우연히 자신의 신비스런 방식에 따라 그것을 드러내보일 수도,지연시킬수도 있습니다.내가 잊어버리는 만큼 당신은 기억하게 될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85쪽
이미 독자들은 이 초기에 출현한 기억들이 가진 일반적 특징이 몇몇 뛰어난 은유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시각적이기보다는 아주 청각적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드 퀸시는 인간의 뇌란 하나의 팔림프세스트 같다고 말했다. 새로운 글이 전의 기억을 뒤덮고, 그것은 이어지는 다른 글에 의해 덮여진다. 그러나 전능한 기억은 만일 충분한 자극만 주어진다면 비록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느낌도 떠올릴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8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누군가 백과사전을 구입한다고 해서 그가 모든 행, 모든 단락, 모든 페이지, 모든 삽화를 다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러한 것들 중 어떤 것을 알게 될 가능성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항목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정리해 놓은 구체적이면서 상대적으로 간단한 어떤 실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면 마치 죽은 자의 마술적 기억과 같은 추상적이고 변하기 쉽고, ⟨물결치고 다변적인⟩ 어떤 실체에서 또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아무도 한 순간에 자신의 과거 전체를 회상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셰익스피어도 그의 부분적 상속인인 나에게도 그러한 선물은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은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무규정적인 가능성들의 혼돈이다. 내가 잘못 알고 있지 않는 한 성 아구스틴은 기억의 궁전들과 동굴들에 대해 언급한다. 두번째 비유가 보다 정확하다. 그 동굴들 속으로 나는 들어갔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8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셰익스피어의 기억] 이어서 얘기해보면, 한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시에 타인으로서 기억을 감당할 순 없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타인이 전혀 다른 시대를 풍미한 셰익스피어 같은 인물이라면 더 할말은 없을 겁니다. 헤르만 세르겔이 인용한 스피노자의 말처럼, "모든 것은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나아 있고 싶어" 하며,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으려는 실존적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걸출한 작가의 기억 전체를 온전히 얻게 된다 하더라도, 그가 그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나아가 걸출한 대가가 살았던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 그 걸출한 삶을 되풀이하지는 못할 겁니다. 헤르만 세르겔은 이렇게 토로합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내게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정황들 이상의 것을 드러내 보여줄 수가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세상을 바라보는 한 단면을 보여주긴 했지만, 셰익스피어가 구체적으로 창작했던 방식, 그 순간을 재현해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비범한 삶이라는 것도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하고 "덧없는 물질" 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려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일 겁니다. 결정적으로 헤르만 세르겔은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가졌지만 연구자였지, 창작자가 아니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작가의 삶, 그 구체적인 면면, 세세한 기억을 소유한다고 해도 그 작가처럼 허구를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허구를 쓰려면 일단 상상하려는 욕망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상상을 자신만의 절차를 밟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니까요. 이런 걸 생각해보면, 학문과 창작이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기는 하지만 종내에는 완전히 다른 노정을 밟고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이 단편은 어떠한 작가를 읽는 사람에게 하나의 물음처럼 다가옵니다. 왜 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읽을까요? 이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런 면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보다는 한 사람의 책에 녹아 있는 기억을 끝까지 따라가봄으로써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도 도서관에 가면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파편적인 기억을 훔쳐볼 수 있습니다.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파편적인 기억의 보고, 그 가능성의 집입니다. 다만 도서관에 가는 사람, 또 책을 열어 보는 사람은 생각해봐야 합니다. 흠모하는 '누군가'가 되려는 노력은 무용하다고요. 왜냐면 첫째로 모든 사람이 근원적으로 그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우리가 흠모하는 그 누군가는 다른 '누구 같은' 인물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속 구절을 읽고 감탄한 사람이 노자처럼 살려고 한다면 그는 얼치기 노자가 될 뿐입니다. 예수를 읽고 환희하고 그의 행적을 답습하려는 사람은 예수의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니라, 다만 사이비 교주가 될 뿐입니다. 이로써 모든 황병하 선생님이 번역한 전집을 다섯 권을 모두 읽었습니다.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잠시 쉬는 기간을 보내면서, 민음사 논픽션 전집을 읽어보려 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세트]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1~3 세트 - 전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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