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읽기 위해서

D-29
26쪽. 송이버섯을 따라가다 보면 환경 교란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 환경을 더 훼손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여하간 송이버섯은 협력적 생존의 한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26-27쪽. 송이버섯은 글로벌 정치경제의 균열도 보여준다. 송이버섯은 가격이 높기 때문에 어디에서 채집되든 생계에 큰 도움이 되며, 문화 회생을 촉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어떤 종류의 경제인가? 송이버섯 채집은 자영업이며, 채집인을 고용하는 회사는 없다. 상업적 야생 버섯 채집은 사회보장이 제공되지 않는 불안정한 생계의 한 예다.
27쪽. 우리는 현재의 불안정성을 지구 전체의 상태로 이해해야만 우리 세계가 처한 이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다. 성장을 가정한 분석만이 권위를 갖는 한, 전문가들은 시공간의 이질성을 보지 않는다. 일반인 참여자와 관찰자에게는 그 이질성이 명확히 보일 때조차 말이다.
29쪽. 사람과 사물은 소외되는 과정을 거치며 이동하는 자산이 되었다. 운송을 통해 거리라는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사람과 사물은 자신의 삶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삶의 세계에서 교환되는 자산이 될 수 있다. (...) 소외시키려는 [자본주의의] 꿈은 단 하나의 독립형 자산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풍경을 변화시킨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잡초나 쓰레기가 된다. 단일 자산을 더 생산하지 못하면 그 장소는 버려진다.
30-35쪽. 송이버섯(트리콜로마 마쓰타케)의 출현-나라와 교토 근방 사람들이 산림을 남벌함에 따라 송이버섯의 가장 흔한 숙주 나무인 소나무가 싹을 튀우면서 송이버섯이 흔해짐. 송이버섯은 가을철을 상징하는 향기로 칭송받고 귀족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선물이 됨. 에도시대가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로 끝이 나면서 산림 남벌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소나무와 송이버섯에 유리한 생태 조건을 남김. 그러나 1950년대 중반부터 소농민 산림지가 목재 생산지로 바뀌어 벌목되거나, 교외 개발을 위해 포장되거나,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버려져 활엽수로 뒤덮여 소나무가 자라기에 너무 그늘진 곳이 되어버림. (소외, 이동, 버려짐?) 1970년대 중반 일본 전역에서 송이버섯은 보기 드문 것이 됨. 한편으로 이 시기 일본의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송이버섯 수요가 많아져 가격이 급등함. 이때부터 송이버섯 국제무역이 등장함. 일본에는 세계 곳곳에서 채집된 송이버섯의 등급을 매기는 기준이 있고, 이 등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됨.
42쪽. 미엔인들, 일본의 미식 버섯, 그리고 나는 오리건주의 폐허가 된 산업비림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우리 모두가 마치 동화에서 튀어나올 법한 상황에 놓여 신비롭게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45-49쪽. 1930년대 오리건주는 미국에서 목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 되었다. 1989년에 이르러 캐스케이드산맥 동부는 이제 벌목된 숲이 되었고, 벌목회사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 - 개척자와 진보 이야기, 그리고 '텅 빈' 공간이 산업 자원을 지닌 장소로 탈바꿈한 이야기.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 - 산업적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은 생계 터전을 잃고 풍경을 훼손하게 될 물거품 같은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런 기록에 미처 담기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1989년 무렵 오리건주의 벌목된 숲에서는 야생 버섯 무역이 시작됐다.
51쪽. 실로 남은 것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국가의 유효성과 자연 풍경에 대한 자본주의의 대대적인 파괴를 고려할 때, 우리는 국가와 자본주의의 기획 바깥에 있던 것들이 오늘날 왜 살아남았는지 질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다루기 힘든 가장자리의 것들edges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미엔인과 송이버섯이 오리건주에서 함께 모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런 질문이 모든 것의 방향을 뒤집어,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encounters을 핵심적인 것으로 보도록 이끌지도 모른다.
51쪽. 대체로 우리는 이런 불안정성(실업, 멸종 위기, 해수면 상승 등)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예외적 상황이라 여긴다. 불안정성은 체계에서 '예외'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불안정성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조건이라면 어떨까? 아니, 달리 말해서 우리 시대가 불안정성을 인지할 단계에 이른 것이라면 어떨까? 불안정성과 불확정성, 또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무언가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체계성의 중심을 이루는 것들이라면?
51쪽. 불안정성은 타자들에게 취약한 상태를 말한다.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은 우리를 변모시킨다. 52쪽. 불안정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른 방식의 사회 분석이 가능하다. 불안정한 세계는 목적론이 없는 세계다. 시간 본연의 무계획성을 뜻하는 불확정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불안정성을 놓고 생각해보면 불확정성도 삶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53쪽. 진보는 서로 다른 종류의 시간을 하나의 리듬에 맞추면서 전진해나가는 행진이다. 그런 식으로 추동하는 박자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시간의 패턴을 알아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저마다 계절에 따른 성장 맥박을 통해서, 일생 동안 행하는 생식 패턴을 통해서, 그리고 지리적 팽창을 통해서 세계를 재구축한다.
54-55쪽. 우리를 둘러싼 많은 세계-만들기 프로젝트 중에는 인간에 의한 것도 있고 비인간에 의한 것도 있다. 세계-만들기 프로젝트는 살아가는 실질적인 행위를 통해 창발하며, 그 과정에서 지구를 변화시킨다. 55쪽. 인간만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유기체는 흙, 공기, 물을 변형해 생태적 주거지를 만든다. 운용할 수 있는 주거 환경을 만들 능력이 없는 생물종은 멸종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유기체는 모든 생명체의 세계를 바꾼다. 인간 역시 다종의 세계를 만드는 데 늘 참여해왔다. 56쪽. (20세기) 학자들은 다른 삶의 방식을 억압하면서 특정한 삶의 방식을 확산시키는 행위에 도취되었기에, 그 밖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은 무시했다. 그러나 진보에 관한 이야기가 견인력을 잃자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56쪽. 배치assemblage 하나의 배치 안에 존재하는 여러 생물종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는지는 결코 정해져 있지 않다. 배치는 열린 모임gathering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편견 없이 공동의 영향에 대해 물을 수 있고, 형성 중인 잠재적 역사를 볼 수 있다.
57-60쪽. 배치에서는 의도치 않은 조율coordination 패턴이 발달한다. 그런 패턴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다양한 삶의 방식이 모여 빚어내는 시간적 리듬 및 규모의 상호작용을 지켜본다는 뜻이다. 다운율poly-phonic이라는 수식어를 생각해보면 내가 배치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성음악, 보르네오섬의 이동경작 농법과 같은 '다른 종류'의 농경, 소규모 의류 봉제 공장의 산업적 조율. 61쪽. 진보가 더는 타당하지 않다는 '알아차림의 기술'(이 장의 제목)
2장. 협력으로서의 오염.
63쪽. 어떻게 모임은 그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사건'이 되는가? (1장에서 나온 질문) 한 가지 답은 오염이다. 우리는 마주침을 통해 오염된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게 길을 열어줌에 따라 마주침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64쪽. 어떤 생물종이든 살아 있기 위해서는 살기에 적합한 협력이 필요하다. 협력이란 차이를 수용하며 일한다는 의미로, 이것은 곧 오염으로 이어진다. 협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
64-65쪽. 생존이 개별적 이익의 증진이라는 판타지 - 신고전파 경제학과 집단유전학. 이 두 학문의 중심에는 개별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자립적 개별 행위자가 존재한다. (이기적 유전자, 호모 에코노미쿠스) 자립을 상정하자 새로운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자립적 개별자는 마주침을 통해 변형되지 않는다. 개별자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마주침을 이용하지만, 그럼에도 마주침으로 변형되지는 않는다. '표준적인' 개별자는 집단 전체를 대신하는 분석 단위가 될 수 있다. 오로지 논리만으로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학자로서는 상당히 유혹적일듯...!)
66쪽. 불안정성이란 우리가 다른 존재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상태다. 생존하려면 도움이 필요한데, 도움은 의도했든 안했든 간에 모름지기 다른 존재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다. (여성과 막대기의 마주침) 우리가 각자 홀로 생존한다는 식의, 사실과 정반대되는 환상을 품을 수 있는 건, 다른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짐을 끄는 짐승들'이 떠올랐다. '서툴고 불완전하게,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 비장애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는 자립적 개별자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마주침으로 인한 변형'을 외면하는 사고방식인 셈이다. 물론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66-67쪽. 만약 생존하기 위해 항상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생존이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가 함께 변형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확정성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생물종 내에서, 그리고 생물종 간에 이뤄지는 협력을 통해 변화한다. 협력은 차이를 가로지르는 작업이지만, 이것을 자립적 진화의 경로에 존재하는 순수한 다양성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들의 진화는 이미 마주침의 역사를 통해 오염되었다. 오염이 다양성을 만든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종족성이나 생물종 같은 명칭이 수행한다고 상상하는 일을 바꾼다. 범주들이 불안정하다면, 우리는 그 범주들이 마주침을 통해 등장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범주의 명칭을 사용하려면, 그러한 범주가 일시적으로 유지하는 배치를 추적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나는 알아차림을 위한 실체를 제공하기 위해 명칭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있는 명칭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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