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작품을 다시 손에 넣었다. 이제 흐루키에게서 벗어나야 하는데 약간 관성이 붙고 중독된 것도 같다. 그래도 일단은 나는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가장 많이 얻어 진정한 내 글을 쓸 수 있었다. 나와 잘 맞는 작가이다. 그건 무시할 수 없다. 얻을 수 있는 것도 다 얻을 것이다.
어둠이 저편
D-29
Bookmania모임지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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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인데 어둠이 저편으로 잘못 썼다. 그래도 계속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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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는 짓거리는 그 기준이 모호하고 자기 멋대로 기준을 변경한다. 내부 고발자는 내부에서 서로 이간질하다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있고 아니라고 해도, 비슷한 것으로 한국이 국제법을 어겼다고 미국에 꼬질르면 그는 오히려 용기 있는 내부고발자가 아니라 반역자로 비난을 받거나 처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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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잘 표현하지 못하는 성향
유튜브에서 일본에서 10년 차로 생활하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일본인과 한국인이 근본적으로
차이 나는 것을 말했는데 그게 내게 다소 충격이었고
새롭게 다가온 거라 그것을 글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어 여기에 적는다.
물론 이런 것도 다 일본에 대한 내 관심과 사랑이
심해 그럴 것이다.
나와 약간 비슷한 게 많은 사람들이라 뭔가 공감이나
연민 같은 게 작용했으리라.
사람은, 상대가 자기와 같아 어쩔 수 없이 맘대로
못하는 걸 보고, 이유 없이 괜히 눈물이 나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 같다.
이게 실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데 약간 자기 마음을
들들 볶으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는 사람을 일본에서는
좀 병이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고 한다.
꼭 칭얼대고 응석 부리는 애 같다는 거다.
한국 사람들은 뭔가 끓어오르는 흥과 주체못하는 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데 실은 인간은 한국 사람에 더 가깝다고 본다.
한국인은 잘 끓어오르는데 식기도 잘한다.
냄비근성이다.
그러나, 불닭볶음면을 개발해 세계적으로 히트 치고,
매운 고추를 매운 고추장에 찍어 먹는
못 말리는 민족이라 그런지,
한번 끓어오르면 그게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도 한다.
그래 그것으로 당한 경험도 있어 한국의 위정자들이
이런 한국인의 근성에 겁을 덜컥 먹는 것도 사실이다.
그전에도 각종 민란이나 민주화 시위도 있었지만,
근자의 것으로,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와
2016년 촛불 집회로 정권이 바뀐 것을
가장 비근한 예로 들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마음의 작용으로 시도 때도 없이 변한다.
그것을, 실은 다 겉으로 드러내는 게 더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다.
(여자를 옭아매는 코르셋으로 대변되는)
히스테리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도 중세에
여자들을 종교적으로 옥죄는 문화 때문에
여자들이 욕구 불만, 집단 히스테리라는
정신적인 병을 앓은 것이다.
이런 감정은 억누르는 게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겉으로 드러내는 게 좋다고 본다.
안 그러면 한꺼번에 폭발해 큰 사달이 날 수 있다.
이걸 분출 잘하는 게 한국인이고, 일본인은 참고 억누르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본다.
일본인 스스로도 자기들을
세상에서 가장 소심한 국민이라고 말한다.
이건 이글과 직접 관련 없는 여담으로,
한국도 이런 성향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걸 또 자기
스타일로 여겨, 그런 유의 노래를 곧잘 듣는 사람도 있다.
나도 물론 자주 들으면서 내 마음을 달랜다.
MSG워너비의 <바라만 본다> 라는 노래인데,
한 여자를 향해 그저 바라만 보는, 짝사랑하는
소심한 한 남자의 눈으로 노랫말을 쓴 것인데,
그의 심정이 이 노랫말을 통해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얼마나 그리고 그리워 해야
내 맘 너의 곁에 닿게 될까
매일 하루 종일 너의 생각에 사무쳐
너무 보고 싶다.”
짝사랑이라는 가슴 찢어지는 사랑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절대 쓸 수 없는 노랫말이다.
내 사랑이 그녀도 알아 자기만 바라봐, 그녀가 행복에
겨워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그녀는 알지도 못하는
나만의 일방적인, 다가가지 못하는 그저 바라만 보는
사랑이라 고구마를 물 없이 먹은 듯 너무나
답답하고 애절한 사랑이다.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노래 가사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의 입을 빌려 대신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깊이 공감 가는 노래다.
이 노래는 커버로 씨야의 이보람도 잘 부르는데
(아니, 어쩌면 더 잘 부르는 것 같다.
맑고 또렷하고 청아한 목소리로,
이보람은 슬픈 노래에 가장 특화된 가수라고 생각한다.)
이보람은 나와 같은 A형인데,
-난 MBTI도 INTP로 글쓰기에 안성맞춤 기질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약간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부리는
<바라만 본다>를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바로 그 노래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언제 들어도 절대 질리거나 싫증 나는 법이 없다.
다시 본래의 글로 돌아가서,
일본은 또 상대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래 연인끼리도 연락을 잘 안 한다.
내가 연락할 때, 마침 그가 운전하고 있어 위험한 상태거나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거나 강의를 듣고 있을 수도 있고
조용히 영화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연락을
못하는 것이다.
대신 한국은 시시콜콜하게 “지금 뭐 해?” “밥은 먹었어?”
“뭐 먹었어?” “맛은 어땠어?” 하면서 별것도 아닌 것으로
연락을 수시로 취한다.
그러나 일본은 이렇게 하면 상대에게 미움을 살까,
안 한다는 것이다.
그래 상대가-그들의 표현대로-내 병적인 마음을
(사랑하니까 궁금해 수시로 연락하는 거) 접하고
나를 미워하면 어쩌나, 해서 참고 있다가 갑자기 상대로부터
이별을 통보받고 혼자 울고불고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중간중간 표현해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야 하는데,
그걸 회피해 연인끼리도 소통이 잘 안 되어 나중에
한꺼번에 폭발해 이별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녀는 또 일본에 왜 이렇게 바람피우는 걸 쉽게 생각하고
너도나도 많이도 하는지 그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바람을 많이 피우고 불륜이 많은 것도
자기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고 상대도 나에게
살갑게 대해주는 제3자가 나타나 그에게 마음을 쉽게
빼앗겨 바람으로 이어지고, 한류 드라마가 인기가 있는 것도
한국 남자 배우가 상대 여배우에게 자기 마음을,
“여기서 자기는 공주고 나머진 다 자기를 돕는 시녀 같아.”
“내 눈에 다른 사람들은 다 지워지고 자기만 보여.” 같이
오글거리는 것도 잘 표현하고, 상대 여배우도 남자에게
거침없이 세게 표현하는 것에 매료되어 그렇다는 거다.
진심으로 믿고 마음을 깊이 나누는 상대가 아니라서
뭔가 채워지지 않아 그 공허를 메꾸기 위해 여러 상대를
전전하며 헤매는 거 아닌가.
어장 관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란다.
어디 마음 둘 곳 없어 정처 없어 떠도는 것이다.
결국 나도 상대에게 좀 무뚝뚝하고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편이고, 겨우 표현한다 해도 글로 이렇게나마
끼적이는 게 전부인데, 이런 것이 일본인과
많이 닮아 그들 마음이 너무 잘 이해가 되고
동정심도 생기고 나를 보는 것 같아 연민까지 들어
일본인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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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자기 목적이 정당하면 그 방법이나 절차를 무시하는 것 같고, 일본인은 그 방법도 정당하지 않으면 괴로워하는, 약간 결벽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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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이 가진 것
인간에게만 기질과 마음과 기억이 있다.
동물도 기질(성깔, 그러나 결국 본능)은 있을 수 있는데,
인간만이 의지와 방향을 갖고 그것으로
자기를 구현하려고 한다.
인간을 가장 잘 특징 짓는 건
이 기질과 마음과
그 궤적의 흔적인 기억(추억)이다.
인간은 기질이 있어 자신을 가장 특징지으며 산다.
이 기질로 인해 인간의 큰 궤도가 주로 결정된다고 보는데,
인간엔 또 마음(감정)이라는 게 있어 일탈인 탈선을 통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이게 인간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만드는 요인이다.
인간은 사실 불안하고 불완전해서 절대자를 만들어 섬기고
불행과 행복의 시소를 타면서 모순과 아이러니 속에 있지만,
인생의 큰 줄기인 기질 대로 살다가 갑자기
마음(감정)의 작용으로 중간에서 생을 중단할 수도 있다.
자기 생을 이만 마감하는 것이다.
기질은 한 인간에게 다소 운명적이지만,
감정으로 그것을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다.
고정과 변화를 오르락내리락한다.
기질은 꾸준하고 마음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마음이 인간으로부터 영영 떠나는 일은 없고
다시 돌아와 붙어산다.
인간의 가장 큰 미덕인 이성에 의지해
살아야지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감정이 그 몸에서 분리될 때는
그의 생명이 다할 때뿐이다.
인간은 이성보다는 마음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빙산에서 겉으로 드러난 일부만이 이성이고,
그 밑에 묻혀 안 보이는 거대한 부분이 감정이다.
듣기 좋게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려는 것도 결국, 알고 보면
자기 마음 좋아지려는, 행복해지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기질과 마음은 서로 견제하기도 하고 돕기도 한다.
지지고 볶으며 싸우기도 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타협하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맞춰 살아간다.
“산목숨은 어떻게든 살아야지.”
붙어 있으면 진저리를 치는데, 떨어지면 또 서로 그리워한다.
기질은 자기 생긴 대로 살려고 하지만 그 경로를
마음이 있어 이탈할 수도 있다.
기질과 마음의 길항작용(拮抗作用)으로 수놓아진 자기만의
인생길을 되새기고 기억(추억)하는 게 인생 아닐까?
이 타고난 본성과 성정인 기질이 한 인간을 가장
특징짓게 하고, 마음으로 인생을 변화무쌍하게
창조적으로 꾸미며
나중에 나이 들어, 아니 중간중간
그 기질과 마음의 행로를 기억하며
정리하기도 하고 인생철학으로 결론지으며
후회하고 미소 짓는 게 인간의 삶, 인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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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소설엔 헉교에 안 가고 어린 나이에 대신 책을 읽는 소녀가 많이 나온다. 그들은 하루키가 어릴 적에 하고 싶은 캐릭 터였지만 용기가 없어 자신은 못하고 대신 자기의 분신으로 그렇게 만든 것 같다. 하루키는 학교를 별로 안 좋아한다. 상상력이 없어 그렇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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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뜨거운 화두에 대한 정의
뭔가 작가가 내가 궁금하던 것을 정의 내리려고 하는데,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대개는 별거 없는 경우가 많다.
그냥 평범한 얘기거나 다분히
자기만의 한 생각을 말할 뿐이다.
그래도 유명한 작가라서 기대를 했는데 자기만의 한 가지,
너무나 개인적이어서 그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혼잣소리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내가 그 말에 오해가 있거나 하는 것도 있겠지만,
내 느낌엔, 이러는 건 뭔가 명료하게 규정하는 것에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수도 있어-
조심성이 너무 있어 모호하게 말하는 것도 있겠지만
자기의 정의가 실제 아직은 명확하지 않거나 그게
자기만의 발견인지라 자기 딴엔 뭔가 대단하고
흥분되는 것이어서 그 정의를 숨기면서 그것과
약간 관련 있는 것만, 혼자만 아는 소리로 작게
말하는 것, 같을 때가 많다는 거다.
자기가 힘들게 찾아낸 걸 쉽게
발설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강력한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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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릴 땐 평균적으로 살기 위해 자기가 못 하는 걸 어느 정도 올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이가 이미 많을 땐 자가 못하는 것보단 잘하고 즐거운 것에 올인해 거기에 빠지는 게 백번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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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호락을 뛰어넘으려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말은 이미 부자보다
더 돈을 벌려고 그들을 이기려고 감히 덤비는 경우에
쓰는 말이기도 하다.
흙수저가 금수저 대열에 끼려는 객기 같은 것.
그리고 이미 닦아놓은 곳에 자기가 뭔가 변혁 바람을
일으키려고 덤빌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기존의 것이 엄청난 힘으로 버티고 있다는 말을 할 때
그것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체 게바라가 혁명을 꿈꾸었지만, 그는 너무나 견고한
기존 벽에 부딪혀 자기 꿈을 실현하지 못했을 때도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 예로 잘 쓰인다.
이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걸 알고 거기에 덤비는 것하고
그냥 무데뽀로 덤비는 것하고는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
알고 덤비는 것하고 모른 채 그냥 무데뽀로 덤비는 것은
그 결과에서 당연히 확연한 차이가 날 것이다.
남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그게 이미 견고한 성이라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깊고 넓게 연구하고 그래 잘 알게 되고 자기가 거기에
뛰어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그걸 공략하기 위해
반드시 그리고 맘껏 즐기면서 한다면 승산은 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목표도 자기가 엄청나게 바라면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미 각오를 단단히 하고 그 험난한 곳에 뛰어들어야 한다.
자기희생이 너무 크면 그냥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긴 안목을 갖고 자기를 챙기고 자기를 잘 관리하면서
힘을 비축하고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뛰어든 다음엔 절대 초심을 잃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그저 또 하나의
세상은 역시 만만치 않고 호락호락하지 않음의
한 사례로 기록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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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관심이 부모에게서 남편으로 다시 자식으로 옮겨간다. 뭔가 의지하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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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에게 의지받고 기대고 싶은 심정이 있는 동시에 모성애라고 그를 챙기고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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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자
세상의 비리(非理)는, 빌런이 마음이 꼬여 바꾸려고 한다.
자기식대로 바꾸려고 한다.
자기 맘에 안 들고 자기와 맞지 않으니까 바꾸려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다.
사람들 다수가 그런 식이나 모습으로
바꾸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절박하기 때문에, 현실과
거기 사는 인간들을 혐오해 그걸 뜯어고치려는
의지가 강하지만, 그는 다수가 바라는 쪽으로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자기의 어긋난 뜻,
절대 권력대로 바꾸려고 해서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그런 그들에게,
“세상의 비리를 뜯어고친다고 해도, 그 후엔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으면 말을 잇지 못한다.
그들에겐 아니겠지만, 그 방법도 그 후의 모습도
결국 떳떳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선 명분(名分)과 지속 가능성이 중요하다.
“할 거면 똑바로 해라.”
그런데 (사회에서 말하는) 선한 사람은 바꾸려는
결기(決起)가 약하다.
그는 대체로 지금의 시스템에 순응해 말을 잘 들어
승승장구한 인간이다.
지금 이대로도 좋은데 굳이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호의적이라 절박함도 떨어진다.
주변을 둘러봐도 자기가 상위 몇 프로 안에 들어
서로 오르겠다고 아우성치는 자가 허다한 것이
매일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저변에 깔린 용광로가 없다.
없으니 현실에서 분출할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부와 책을 많이 읽고 세상에 대해
“이건 아니지.” 하는 소수가 그들 중에서 나올 수 있다.
그들은 역사를 알고 인간과 세상에 대해
다른 인간들보다 잘 안다.
그 결과, 지금의 이 자리에 만족할 수 없고,
뭔가 늘 공허하고 자기 게 아닌 옷을 입은 것 같은 것이다.
드디어 자기는 이런 식으로 채우면 안 되겠다고 결심한다.
이들이 충분히 의지와 힘이 갖춰지면 세상을
다수가 바라는 대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다.
인류 역사에서 이들의 등장은 쉽지 않다.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되풀이하지만, 그들은 기존 체제에 순응해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들 중에 나오긴 힘들지만 그나마 그들 중에
뭔가 배움이 있는 이가 나오기가 상대적으로 쉬워
그들 중 인간 세상에서 크게 깨달은 사람이
그 역을 맡을 수 있다.
내세우며 이들이 바꾸려는 건 다수가 바라는
세상 모습(정치적 올바름)이라, 보다 성공하기 쉽다.
그러나 기존 체제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쩌면 난공불락일 수 있다.
그러니 다수와 연대해 정교한 계획하에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런 후(성공 후), 자기를 다시 돌아보고(올챙이 적 모습)
성찰하고 자기 자신을 견제하며
초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안 하면 자기가 사는 동안 편히 득세(得勢)하며
살 순 있겠지만, 절대 역사적인 인물이 되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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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사람을 강제한다. 이 체제에 반기를 드는 국민을 용서하지 않는다. 원래는 다 인간이 만든 국가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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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는 아직도 정이 있어 집안 식구끼리 같이 서울에 사는데 그게 이젠 힘들다. 결국 살다가 힘드니까 들어가 산 사람이 나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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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할 때 원하는 경우가 여자가 더 많고 그래서 대개 남자들이 더 많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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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여자의 몸매는 실내보단 밖에서 사진을 찍으면 더 말라 보인다. 쇄골이나 발목 같이 마른 것을 강조하는 부분이 더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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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방송에 나와서 까불면 전에 그의 작품으로 좋아했던 것도 물리고 싶고 그가 내놓는 작품에서도 이제 진정성이 안 느껴진다. 나도 형편없는 글 5권을 낸 인간으로서 글쓰기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걸 잘 아는데 그들도 사람인지라 작품에 쓸 에너지를 방송에 나가 입 놀리는 것에 써서 왠지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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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우물을 판 작가를 존경하겠다
작가가 방송에 나와서 까불면 전에
그의 작품으로 좋아했던 것도 물리고 싶고
그가 내놓는 작품에서도 이제 진정성이 안 느껴진다.
나도 형편없는 책 5권을 낸 인간으로서 글쓰기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는 걸 잘 아는데 그들도
사람인지라 작품에 쓸 에너지를 방송에 나가 입 놀리는
것에 쓰는 것 같아 왠지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된다.
배신감도 든다.
“속았다. 이용당했다.”
작가는 뭐니 뭐니해도 글로만 자기 생각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작가의 진정한 본분(本分)이라고.
그래야 작가 아닌가.
만화도 마찬가지다.
방송에 나오면 전의 그의 작품들이 모두 그의 방송 출연에
대한 수단과 방법으로밖에 안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허영만 만화를 읽은 기억은 없다.
까치의 이현세나 독고탁의 이상무를 보며
고교 시절을 아름답게 보냈다.
내게 진정으로 그 시절 남은 거라곤 그뿐인 것 같다.
그리고 지조(志操)를 지킨 이들을 존경한다.
그들의 길을 기리고, 내 감수성 예민한 시절을 그들의 작품으로
다채롭게 수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가 에너지가 분산될 것이고, 이젠 방송의 달콤한
맛을 봐서 작품 따위는 거들떠도 알 볼 것 아닌가.
단언컨대 그들은 작품으로 왔다가는 다시
방송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게 그들을 이미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송을 위해 자기 작품을 희생한 꼴이 된 것이다.
독자까지 배신하고 자기들 인기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그들은-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예술 작품을 그만 접고
아예 방송 쪽으로 가서 거기에 뼈를 묻어라.
양다리 걸친 채, 저울질하지 마라.
그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어느 것으로 듣고 싶은지, 방송인지, 작가인지
그러나 작품에 소홀할 거면 작가 소리 듣는 걸 이젠 포기하라고
충고해 주고 싶다.
나는 한 우물을 판 작가만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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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과 할 수 없이 말해야 할 때
말을 잘하든 못하든 그들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할 때에도 직장에서는 말을 섞기가 실은 싫고
말이 안 통한다고 해도 그들과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해야만 할 때는 기본과 효율, 상식선에서 하면 된다.
왜냐면 그들은 책을 안 읽어서 기본적으로
나와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말은 인간이 추구하는 거의 궁극에 가까운
정치적 올바름(PC)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나는 그 말만 하면 된다.
말이 막힐 때는 그 말 중에서 과연 어느 게
PC에 가까운지 나중에 정리하고 그들과 다시 대화에
도전하면 된다.
그러면 나도 떳떳하고 내 PC를 다시 정리하면서
시간 낭비도 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그나마 PC는 내가 추구하는
이상에 또한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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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꼬여 있다
나는 작가를 열망하고 있어
성격이 약간 꼬여 있고 괴팍하다.
성격이 먼저냐 작가 열망이 먼저냐에서
나는 성격이 먼저라고 본다.
세상과 사이가 안 좋아 성격도 고약하고 못됐다.
나는 사람의 운명은 기질이 많이 좌우한다고 보는데,
이 성정(性情) 때문에 작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로 혼잣말이지만, 입도 거칠다.
굳이 고치려고도 않는다.
어느 때는-안 그래도 되는데-일부러 욕을 할 때도 있다.
그의 글에서도 말에서도 <객지>의 황석영처럼 작가는
모름지기 입이 거친 법이고,
“그건 솔직함의 방증이다.”라며 좀
한쪽으로 너무 경도된 논리를 편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솔직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욕을 해야 하는데 안 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것으로 공연히 엮이기를 피하면서 바람을 이루려면,
사람이 없는 데서 혼자서라도 욕을 실컷 해라.
술도 굳이 끊이려고도 않는다.
술을 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유는 딱히 없는데 다만 단지 작가란 자고로
술을 좋아해야 하고 거기에 곁들여 예쁜 여자가 있어야
한다는 활력을 위한 풍류적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언제 적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의 삼합(三合)이나
삭힌 홍어와 막걸리라는 홍탁(洪濁)처럼
작가와 술과 여자는 같이 있어야 제맛이라는 거다.
더 그럴듯한 이유를 억지로 붙이면 뭔가 일상을 멈춰 세우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렇단다.
중국 당나라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처럼.
맨정신이 일상과 현실이고, 취중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이로다.
“그렇다고 치고, 예쁜 여자는 왜?”라는 질의엔,
예쁜 여자(자기 생각에 예뻐야 신이 나서
막 떠들 거 아니냐는 거다.
여기서 또 예쁜 것도 보통 말하는, 일반적 기준이 아니라
자기 취향에 한껏 부합해야 하는, 그래서
남들 눈엔 그다지 예쁘지 않은 여자와도)와
술을 마시며 일상에서의 흔한 얘기가 아닌 인간과
그들이 수놓는 인생에 대해 치열하면서도 차원 높게
논해야 한다는 나름의 침 튀기는 역설(力說) 때문이다.
일각에서,
뭔가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확실히 밝혀두면,
작가는 술을 매개로(술의 힘을 빌려 자기가 선호하는
사람과 자연스럽고 진솔한 대화를 위해) 호감 가는
여자 사람과 인간과 그들이 꾸리는 세계에 대해
진지하고 폭넓은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것 외에
다른 건 감히 끼어들 수 없다는 거다.
다른 해석은 콘텍스트와 순수성을 이해 못 한 데서
오는 오해로 치부해 버리고 말겠다는 거다.
작가
술
여자 사람
⇔
삼합(三合) ⇒ 인간과 삶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대화
그리고 나는 사람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인데,
그나마 작가 말은 어느 정도 믿는다.
이유는, 다음 세 가지 때문이다.
세상엔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걸 체화해 대상을
다 각도로 볼 줄 알고, 그들은 인물을 많이 다뤄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각별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를
지향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순수와 본질을 빼면 아무것도
남을 게 없는 작가같이 보이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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