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감사합니다, 주문했어요. 다행히 알라딘에 리커버 중고가 있었습니다. 기대됩니다!
Beyond Beer Bookclub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X다자이 오사무X청춘> 2편
D-29
내로
장맥주
첫 문장이 유명한 소설을 꼽으라고 하면 늘 수위를 다투는 책입니다. ^^;;; ("설국"을 이렇게 설명하는 게 좀 웃기긴 한데요...)
siouxsie
어! 저도 지금 막 끝문장 읽었는데 <어릿광대의 꽃> 마지막 문장 명문입니다!!!
장맥주
「어릿광대의 꽃」을 읽고서 (자녀 살해 후 자살이 아닌) 동반자살을 하는 심리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다른 사람과 함께 죽으려는 이유는 뭘까요? 죽음이 덜 두렵게 느껴져서일까요? (그렇다면 가만히 뒀다면 죽음을 선택하지 못했을 겁쟁이 두 사람이 함께 한 덕분에 죽을 용기를 얻은 걸까요?) 죽기 직전 상대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어서일까요? 죽으려는 사람(대체로 남자)이 다른 사람을 가스라이팅한 걸까요?
연해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는 유독 '동반자살'이라는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아요. 제가 어제 읽었던 「우바스테」에도 또!
다행히 다른 단편들과는 달리 조금 더 가볍게(?) 풀어쓴 것 같기는 했지만, 어쨌든 동반자살을 하러 떠나는 부부의 이야기였어요. 결과는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입, 아니 손을 멈추겠습니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동반자살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는데('동반'이라는 단어보다는 '자살'에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니 정말 그러네요. 이건 어떤 심리일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으면 덜 두렵게 혹은 덜 외롭게 느껴져서일까요? 아니면 둘 중에 자살의지가 더 강한 사람의 가스라이팅일까요?
만약 저라면 차라리 혼자 죽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섭고 아니고를 떠나서 저는 그냥 뭐랄까. 제가 없는 세상에서도 제가 아꼈던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거든요. 이건 뭔가 선량한 척? 을 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래요.
일례로 저 혼자만 어떤 모임을 탈퇴하거나 집단을 떠날 때도, 저는 그곳에 남은 분들이 다 행복하게 잘 지내신다는 소식을 듣고 싶거든요. 만약에 그분들의 소식이 닿는다면 말이죠(그런 의미로 전 남자친구들도 부디 행복하게 잘 지내고들 있기를, 연락 좀 하지 말고). 단지 저는 그분들과 마음과 뜻이 맞지 않아 그곳을 떠났을 뿐이지 남은 분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단단히 만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그래서 저라면 굳이 누군가를 데려가고(?) 싶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농담처럼(과연 농담일까) 연인에게 하는 말이지만 저는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저보다는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거든요. 저보다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상실감이 두려운 이유도 있지만, 그냥 제가 다 버리고 가는 게 마음이 가장 편안... 아, 근데 한참을 쓰고 보니 글이 너무 어두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저 아직 죽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요.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몸도 마음도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조금 뜬금없지만 자살을 막는 마음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뜻이 없어 떠나겠다는 이를 붙잡을 명분이 없다 여겨져요. 지난번에 작가님 블로그에도 댓글로 달았던 것처럼, 삶이 힘들어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을 때, 언젠가 좋은 때가 올 거라는 책임 없는 공수표나 생명은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근거 없는 말 외에 어떤 이유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까 싶거든요. 친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와의 추억을 계속 쌓고 싶다거나, 너의 곁에 있고 싶다거나, 너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 말하는 정도겠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상대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글쎄요. 여전히 그 자격에 대해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결국 동반자살을 하는 걸까요(흠).
장맥주
저는 제가 죽으려는 길에 누구를 끌어들인다는 생각 자체가 비겁하게 느껴집니다. 지난해 비행기 조종사가 주인공인 단편 소설을 쓰면서 항공기 추락 사고에 대해 웹서핑을 많이 했거든요(자료조사를 빙자한 시간 낭비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자살 추락’ 혹은 ‘자살 비행’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항공기 조종사가 일부러 비행기를 추락시켜서 승객들과 함께 자살하는 사건들이 있더라고요. 환청을 듣고 그런 일을 벌인 조종사도 있지만 우울증이나 신병 비관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걸로 추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경멸합니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라는 말을 전혀 미안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장맥주
그런데 연인 사이에서는 ‘함께 죽는다’는 행위가 사랑에 대한 증명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은 들기는 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로맨틱한 면이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읽은 소설 중에서도 인상적인 연인들의 동반 자살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하나는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에서 페트로니우스와 해방 노예인 에우니케의 동반 자살입니다. 소설 전체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데, 실제로 이런 인물을 만나면 저는 그다지 존경할 거 같지는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에우니케도 살아 있는 인간 같지는 않고요. 그래도 무척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들의 죽음이 묘사됩니다.
또 하나는 여러 의미로 악명 높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인데, 저는 이 커플의 죽음을 솔직히 우습게봅니다. 그런데 미시마가 정말 유려한 문장으로 그 죽음을 매혹적으로 보이게 잘 묘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동반자살 장면이 나오지는 않지만 동반자살에 대한 상상이 언급되는 소설, 그리고 그렇게 동반자살을 꿈꾸는 심리를 제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입니다. 거기서 주인공 하지메는 짝사랑도 아니고 첫사랑도 아닌 미묘한 관계의 여인 시마모토가 자신과 함께 죽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눈치 챕니다. 그리고 하루키는 그런 마음이 왠지 유혹적으로 느껴지게끔 썼습니다. 이 소설은 어딘지 미완성인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고, 이걸 하루키의 대표작으로 부르는 사람도 없는데 기묘한 매력이 있어서 가끔 생각납니다.
쿠오 바디스 1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쿠오 바디스>가 수상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되었다. 고대 로마의 가치관과 새로운 기도교 사상의 갈등, 그 해소를 그려낸 역사소설이다. 폴란드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최초의 한국어 판으로, 화가 얀 스티카사 <쿠오 바디스>를 주제로 그린 연작 화보가 수록되어 있다.
쿠오 바디스 2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상실의 시대》의 완결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발표 당시 전 세계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에서 일관되게 고집해온 1970년대를 떠나 ‘현재’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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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맥주
그런데 「우국」은 현재 한국어 번역본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출판사가 배타적 발행권을 갖고 있어서 다른 출판사의 선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출판사가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무라카미 하루키...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동반 자살의 ‘미학’을 은근히 추종하는 분위기가 일본 문학에 있는 걸까요.
연해
으악, '자살 추락'과 '자살 비행'이라니 너무 끔찍하네요. 이런 용어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작가님 말씀대로 '죽으려면 혼자 죽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네요. 무서운 일입니다.
올려주신 책들은 다 처음 보는 책들이에요. '동반 자살'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 꽤 있군요(이 또한 몰랐던 사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도 동반 자살하는 아이들이 나오는데 말이죠. 장강명 작가님의 『표백』이라고...(쿨럭) 더 정확히는 연쇄 자살이지만요.
『우국』은 한국어 번역본이 없다니 아쉽습니다.『쿠오 바디스』는 방대한 분량에 각오가 필요할 것 같고, 작가님 소개 덕분에『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라는 책에 흥미가 생겼어요.
읽어보겠습니다:)
내로
<어릿광대의 꽃>
일본 작가가 다 그런가요? 다자이도 자신의 삶(동반 자살 기도)을 작품에 깊이 투영하였고, 이 작품도 그러한 삶을 예술로 승화하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자이의 인간실격이라는 작품도 읽어본 적이 없고, 이번 독서 모임이 그를 알아가는 최초의 시도이기에, 그에 대해 무어라 판단할 자격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어릿광대의 꽃>이라는 단편은, 독서하는 내내 저를 아주 지속적으로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스토리의 배경 사건이 된 그것(동반 자살 기도)을 포함하여 화자의 중간중간의 넋두리는 최초로 소설을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죠. 아이들을 죽이고 자살하는 부모와 학폭 가해자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이게 화자의 의도라면 성공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왜 이 소설에 극도의 불쾌함을 느끼는지, 그 핵심 출처는 위의 이유들이 아닙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왜 저는 불쾌한 마음을 느꼈을까요? 이 출처를 찾는 것이 이 단편을 읽는 유일한 이유였고, 그것을 찾기까지 저는 완전히 지리멸렬한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나름의 결론은 (화자가 자신에 대해 직접 한 말이지만) “화자의 응석받이”에 있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 스스로도 찌질한 사람이 되어간다고 느꼈습니다. 도저히 이 단편을 두 번은 읽을 수 없게끔 말이죠. (물론 응석받이를 계속 들으면 찌질한 사람이 되어가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또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응석받이를 느꼈는지는 정확히 특정할 수 없습니다. 그걸 특정하려면 다시 이 단편을 읽어야 하는데, 하, 도저히 읽을 자신이 없습니다. 카프카가 얘기했던 것처럼 저는 “생각건대, 우리는 우리를 물어뜯거나 찌르는 책만 읽어야 한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리는 도끼여야만 한다.”와 같은 책들이 주변에 넘쳐나기 때문에, 그것에 더 시간을 쏟고 싶기 때문이에요(물론 나중에 이 단편에 크게 공감할 순간이 올 지도).
다 쓰고 보니, 저는 이 단편에 대해 도망치듯이 결론을 내렸다는 생각이 됩니다. 어린아이가 상황을 모면하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혹은 소설에서 회피하고 싶어서 (긴 설명을 하기 싫어) 자는 척을 했던 요조처럼요. 저의 소감을 다자이가 응석받이라고 느낀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siouxsie
와~내로님 글 정말 최고예요. 저랑 같은 감정은 아니지만 왜 이런 글들을 쓰는 거지? 란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부끄럽다 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어요.
근데 그런 점에 매력을 느끼시는 분들도 많기 때문에 아직도 읽히는 건지 아님 천재 소리 듣던 작가들에게 극찬을 받아서 많이 읽는 건지 닭이 먼전지 달걀이 먼전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래도 책 디자인도 예쁘고 다른 사람들한테 '나 이 사람들 단편집 읽어 봤어~'라고 자랑하고 싶으니까 꼭 다 읽을래요. ^^
그리고 이상하게 내용은 이해가 안되는데 좋은 문장은 많고요.
전 지식인병에 걸린 사람이니 이 정도는 해야죠. ㅎㅎ
도리
나는 아무래도 예술가라는 존재에게 마음을 뺏기는 결점을 갖고 있는 것 같아. 특히 그 남자가 세상으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때 더욱 가슴이 설레는 거지.
『다자이 오사무×청춘』 p.49,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다자이 오사무 지음, 최고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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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재밌었습니다. 무르고 소심하고 무맥해 강단 없는 화자가 답답하면서도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도리
“ 청년들은 언제든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면서 제 심기를 소중히 감싼다. 쓸데없이 경멸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한번 상처를 입으면 분명 상대를 죽이든, 제가 죽든 끝을 보자는 생각까지 하고 만다. 그래서 다툼을 꺼리는 것이다. 그들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수도 없이 안다. 아니오, 이 한 마디조차 열 가지쯤으로 나눠 쓸 수 있다. 논의를 시작하자마자 이미 타협의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끝내 웃으며 악수하면서도, 속으로는 서로 함께 이렇게 중얼거린다. 덜떨어진 녀석! ”
『다자이 오사무×청춘』 p.87, <어릿광대의 꽃>, 다자이 오사무 지음, 최 고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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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이 부분 재밌었습니다. 평소에 저도 대화할 때 긍정적으로 맺은 말 남기는 습관 같은 게 있는데요. 긍정적인 기분이 아닐 때도 긍정적인 양 이러는 게 스스로 어이없으면서도 자주 이러네요.
1지은
저도 이 문장과 여기 아래, 그리고 그 아래 남겨주신 문장에서 예나 지금이나 청춘들의 심리는 같구나 했어요. 아마도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만나게 되는 책임감과 진지한 상황들이 어쩐지 어색해서 그렇게 얼버무리고 과장하고 웃음으로 무마해야만 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실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생각하면서도요.
도리
그들의 대화에서는 '대'라는 형용사가 종종 등장했다. 지루한 세상에서 뭔가 기대를 걸 만한 대상을 바라기 때문이겠지.
『다자이 오사무×청춘』 p.89, <어릿광대의 꽃>, 다자이 오사무 지음, 최고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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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 그들은 잘 웃는다. 별것 아닌 일에도 큰 소리로 웃어 댄다. 청년들에게 웃는 표정을 짓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몸에 배기 시작했을까. 웃지 않으면 손해다. 웃어야 할 어떤 사소한 대상도 놓치지 마라. ”
『다자이 오사무×청춘』 p.92, <어릿광대의 꽃>, 다자이 오사무 지음, 최고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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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너무 너무 찔리는 말입니다. 호감을 사는 수법으로 매번 웃어 버릇해서 인위적으로 안 웃으려고 연습하기도 했어요.. 근데도 그냥 웃어요. 그나마 웃을 때 모습이 좀 낫긴 한 것 같아서 말이죠.. 흑흑.
도리
그런데 이 다음 문장 '아아, 이것이야말로 탐욕스러운 미식주의의 허망한 편린이 아닐까.' 이건 잘 모르겠어요. 웃는 거와 미식주의... 어떤 연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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