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씩 끝내기

D-29
207쪽. 찰스 드루 박사는 혈액응고를 막는 법을 발견해 혈액을 저장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가 교통사고로 다 쳤을 때, 가장 가까운 병원에서 유색인 환자를 받지 않는 바람에 출혈 과다로 사망했죠.
210쪽. 아직 역사가 되지 못한 역사, 지금도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역사, 내가 써내려가는 동안에도 일 분씩 착착 쌓여가는, 우리 스스로가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후대 사람들이 이해해낼 역사.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라는 올가미.
5장 정화의식 다 읽음. 휴… 당연하지만 사이다 전개는 없었다. 두 사람의 장례식. 포니아의 일기장. 콜먼의 자녀들이 준비한 장례식. 두 사람에 대한 오해와 소문은 그대로 남는다. 죽음에 대한 의혹도. 이 소설 자체가 네이선 주커먼이 내막을 상상해서 쓴 것이라는 설정. 필립 로스는 이런 설정을 자주 썼나보다. 그 설정 때문에 끝까지 ’과연 이게 다 진실일까?‘라는 의심을 하게 한다. 정말로 그런 대화, 그런 일들이 있었을까? 정말로 레스가 한 짓일까? 정말로 델핀은 그런 사람인가? 옮긴이의 말에서 일부 옮겨둔다. 클린턴 스캔들 이야기가 왜 계속 나오나 했는데 콜먼과 오버랩되는 게 있다. “두 가지 사건 모두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은 알 수 없는 것, 판단하기 어려운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어느 쪽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것까지도 일단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흑과 백으로 나누고 그 어느 편에건 서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직성 이 풀리는 인간의 본성 말이다.”
두 번째 책은 앤서니 도어의 ‘클라우드 쿠쿠랜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정말, 정~말 재밌게 읽었다. 매우 아름답고 가슴 아픈 소설. 언젠가 다시 읽고 싶다. 그 책을 다 읽고 앤서니 도어의 작품을 더 읽고 싶어 무지 찾았는데, 작품 자체가 많지 않은 작가이고 그나마도 번역된 게 없었다. 그러다가 이 책이 출간된 것! 바로 사긴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두껍다, 초반 몇 페이지가 확 끌어당기지 못했다 등)로 묵혀 두었었다. 이번에 읽어보자. 전작과는 여러모로 달라 보인다. 과연 어떨지… 시작!
느리지만 어쨌든 읽고 있다. 지금 책갈피는 189쪽에 있다. 시모어가 너무 안타깝다. 하지만 시모어만이 아니지. 지노도, 섀리프도, 어쩌면 매리앤도, 아니 레이크포트공공도서관이, 아니 큰회색올빼미가… 아, 안나도. 콘스탄스와 아버지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떠올리게 했다. 아직 슬픈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슬픔의 기운이 계속 떠돈다.
329쪽. 어찌나 추운지 그곳에 사는 털이 부숭부숭한 인간들이 말을 하는 대로 단어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으니,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들으려면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334쪽.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을 푹푹 고아서 뼈를 우려 봐." 렉스가 말한다. "그러면 솔단지 바닥에 앉아서 위를 쳐다보는 고대인들을 발견하게 될 거야."
341쪽 이번 것은 날개다. 큰회색올빼미의 잘린 날개는 보송보송한 우 비깃과 밤색과 흰색이 섞인 날개깃으로 덮여 있다. 악!!
343쪽. 트러스티프렌드. 귀 기울여 들어 준 존재. 순정하고 선명한 아름 다운 목소리를 가졌던 존재. 늘 다시 와 주었던 존재.
오늘은 370쪽까지. 지노의 트러스티프렌드는 렉스구나. 아 너무 슬프다….
675쪽. 시모어 내면의 회전 고리가 움직이지 않게 된다. 그의 눈에 이 행성은 죽어 가고 있으며, 주변 사람 모두가 이 살해에 가담한 공모자로만 보인다. 에덴스 게이트라 지은 별장에 사는 사람들은 쓰레기통이 넘치도록 쓰레기를 버리고, SUV를 몰고 두 집 사이를 오가고, 뒤뜰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며, 제 딴에는 자기들이 좋은 사람들이고 올바르고 품위 있는 삶을 살며 이른바 꿈같은 삶- 미국이야말로 하느님이 모든 영혼에 평등하게 온화한 자비심을 베푼 에덴 동산이라도 되는 양-을 영위한다고 믿는다. 기실은 맨 밑바닥에 있는 그의 어머니 같은 사람들을 갈아 넣는 다단계 사업 같은 시스템에 가담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을 위해 축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다.
680-682쪽. 다섯 명의 아이들이 제각각 ‘내가 사는 클라우드 쿠쿠 랜드에서는…’ 하고 소망을 뇌까리는 부분. 인간은 늘 이토록 꿈꾸는 존재인 것인가. 아르고스 호의 반전!
685쪽. 시모어의 내면에선 진작에 끔찍한 반응이 일어나는 중이다. 그 의 머릿속 지하층에서 백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말을 걸고 있다. 이거 먹어, 이거 입어, 넌 미숙해, 넌 자격이 없어, 지금 이걸 사면 통증 이 사라질 거야. 멀리 내다보셔, 앉은뱅이 아저씨, 하하. 시모어의 공포, 혹은 현대사회.
708쪽. 지금까지 만난 멋진 친구들은, 모두 나와 같은 언어로 말 하지 않았어. 타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751쪽. 열일곱 살에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이 소비의 명령에 사로잡힌 기생충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러나 지노의 번역을 재구성하면서, 진실은 갈수록 한없이 복잡해지는 속 성이 있으며, 우리는 모두가 문제의 일부지만 동시에 모두가 아름 다운 존재라는 것,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 결국 인간됨임을 깨닫 는다.
767쪽. 아이톤은 책장 앞면과 뒷면에 있던 어두운 도시와 밝은 도시가 기실 한 개뿐인 같은 도시이며, 전쟁 없는 평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 없 는 삶 또한 없음을 확인하였고, 그래서 두려움에 휩싸였다.
793쪽. 그들이 각자의 트레드밀 위에 자리 잡자, 그는 창문으로 걸어가 서 바깥의 호수를 내다본다. 여기에서 북쪽으로는 네 올빼미가 날아 다닐 만한 곳이 못해도 스무 곳은 있을걸, 그녀는 말했었다. 여기보다 더 큰 숲, 여기보다 더 좋은 숲이라고. 그때 그녀는 그를 구하려는 중이었던 거다. 퍼램뷸레이터가 휙휙 소리를 내며 빙빙 돈다. 그 시절 아이였던 어른들이 걷는다. 내털리가 말한다. "말도 안돼." 앨릭스가 말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야." 시모어는 이동 주택 뒤 숲이 눈에 뒤덮이는 날이면 적막에 잠기던 나무들을 떠올린다. 3미터 높이의 죽은 나무 위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트러스티프렌드. 400미터 떨어진 자갈 밭에서 나는 타이어 소리에 움찔하던. 2미터 아래 눈에 묻힌 들쥐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그. 공기 모터가 퍼램뷸레이터의 앞쪽을 들어 올리는 걸 보니 지금 그들은 현관의 화강암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봐.” 크리스토퍼가 말한다. "저건 내가 만든 표지판이야." 레이철의 빈 의자 옆 의자에서, 레이철의 손자가 손을 아래로 뻗어 파란색 책을 집어 들더니 무릎 위에 펼치고 책장을 넘긴다. 올리비아 오트는 오른손을 허공에 뻗어 문을 연다. 아이들은 차례대로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완독. 폐허에서 새로 돋아난 야생버섯 같은 이야기이다. 먼 길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인물들. 그들이 찾아낸 것. 아름답고 슬프고 힘이 있다. 이 모든 불안정성, 이 모든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워섬기기. 이야기의 힘.
글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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