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씩 끝내기

D-29
134쪽. "거드름을 피우는 백합처럼 새하얀 낯바닥을 보는 일이 없었으면 싶네." "'백합처럼 새하얗다'고? 왜 '백합처럼 새하얗다'고 했을까?" 오... 내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기억하는 반전이 슬슬 씨를 뿌리고 있는 건가!
콜먼은 비밀을 좋아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비밀 말이다.
휴먼 스테인 1 (무선) 162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이스트오렌지, 뉴어크, 하워드대학, 피츠버그대학, 웨스트포인트… 장소의 상징이나 인상을 모르니 소설을 좀 피상적으로 읽게 되네.
174쪽.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존재는 하룻밤 사이에 우리라는 것에 내포된 모든 고압적인 견고함과 함께 우리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그는 우리가 됐든 그에 따라온 그다음의 압제적인 우리가 됐든 전혀 얽히길 원치 않았다.
175쪽. 작은 그들이 우리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의 규범을 강요하게 둘 수 없듯 거대한 그들이 자신들의 편견을 강요하게 둘 수는 없다. 우리와 우리라는 담화가 자행하는 폭압을, 그 우리가 내 머리 위로 쌓아올리고자 하는 모든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를 삼켜버리지 못해 안달이 난 우리의 폭압, '여럿이 모여 하나'"라는 음흉한 의식과 더불어 강압적 이고 모든 것을 아우르고 역사적이고 피할 수 없는 도덕률인 우리를 그는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울워스의 그들이든 하워드의 우리든 마찬가지다. 그 대신 아주 명민한 있는 그대로의 나가 있다. 자아의 발견. 그것이야말로 라본즈에 정통으로 꽂히는 펀치였다. 독자성. 독자성을 지키기 위한 열정적 투쟁. 유일무이한 동물. 그 무엇과 관계를 맺든 계속 변화하는 것.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것. 자신에 대해 인식은 하지만 숨기는 것. 그만큼 강력한 게 또 있을까?
201쪽. 인생이 얼마나 쉽게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릴 수 있는지, 운명이 얼마나 우연에 좌우되는지••••• 한편으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음에도 운명이란 때로 얼마나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지 이해하며 걸음을 옮겼다. 말하자면,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그 자리를 떠났던 것이다.
217쪽. 비밀 없 이 산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천진난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게 부족한 기분이었다. 분명 그는 천진난만함을 되찾았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 없이 엘리가 준 것이었다. 하지만 천진난만함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아이리스는 그 이상의 것을 준다. 그녀는 모든 걸 또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아이리스는 콜먼이 살고 싶어하는 스케일의 삶을 되돌려주었다. 대단한 야망의 소유자 콜먼….
231쪽. 자유란 위태로운 것이다. 자유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도 내가 바라는 조건으로 오래 지속되는 법은 없다. "어머니를 만나겠다는 생각조차 품지 마. 연락도 하지 마. 전화도 하지 마.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절대. 무슨 소린지 알겠지?" 월터가 말했다. “절대, 감히 어머니 집 근처에 네 백합처럼 새하얀 낯바닥을 들이밀 생각은 두 번 다시 품지도 말란 말이다!" 아, ‘백합처럼 새하얀’이 여기서…!
2장 ‘펀치 피하기’ 읽음. 콜먼의 과거가 나온다. 2장의 시작에서 변호사와의 대화를 통해 콜먼의 비밀이 암시되나? 싶은 순간, 그 비밀은 바로 드러난다. 콜먼, 비밀을 동력으로 나아가는 인물, 흑인도 백인도 아닌 오직 자신으로 살 자유를, 천진난만한 즐거움이 아닌 야망을 추구하는 사람. 그의 신체조건, 그의 비범함, 그의 성품은 결코 그가 하워드대학에 머물 수 없게 한 것이다… 스티나와의 결별이 그에게 남긴 교훈(왜 그래야 하는가?) 역시도. 이어지는 내용이 기대된다.
260쪽. 도덕적 견지에서 말하자면, 콜먼이 아는 사람 중 가장 혐오스럽지 않은 인간은 아니지만 그나마 가장 덜 혐오스러운 인간이며, 그토록 오랫동안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정반대의 삶을 사는 동안 그가 놓친 모든 것 때문에 -끌린 아이. 이게 콜먼이 포니아에게 끌린 이유였구나. 그가 버리고 떠났던 삶이 그를 다시 잡으러 온 건가.
3장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하죠?’ 읽음. 오해, 곡해, 왜곡, 비밀, 충동, 오만. 콜먼도, 그 자식들도, 델핀도, 아테나대학의 이름모를 교수들도. 다들 식자의 오만과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것 같다. 콜먼은 포니아와의 관계가 그가 일생동안 쌓아온 원칙을 무너뜨린 것이라 여기고 그 이유로 그 관계에 빠져들었지만 이번에는 그 이유로 빠져나오려고 한다. 잡역부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거겠지. 그는 포니아에 대해 마음대로 생각한다. 글자를 못 읽는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지쳐버린 리사는 말로는 이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멸시한다. 이해할 수도 없고 그러려 들지도 않는다. 제프를 비롯한 콜먼의 자식들이 포니아와 콜먼에 대한 소문을 의심조차 하지 않은 것은 콜먼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포니아를 그렇고 그런 여자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델핀은 최강이다. 그녀는 너무도 자기애가 넘쳐서 콜먼이 포니아를 만나는 것이 자기에 대한 복수이며, 포니아는 자신의 안티테제라고 생각한다. 뉴욕공공도서관에서의 에피소드는 델핀의 감상성과 오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포니아는 자신이 까마귀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몸에 깃든 까마귀. 어디에나 있고, 문제를 일으키고, 공격적이고, 엄청난 노력을 들여 날아오르는, 대단히 인상적이고 대단히 아름다운 새. 그냥 떠나면 되는,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실용적인 동물. 이젠 포니아 역에 니콜 키드먼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지극히 미국적인 소설이다. 한국독자인 나에게는 좀 과하게.
2권 9쪽. 지금 저들은 누구인가? 지금의 저들은 두 사람에게 가능한 가장 단순한 존재 방식이다. 독자성의 진수. 모든 고통이 열정으로 응결된 것이다. 저들은 인생이 지금과 다르게 풀리지 않은 것에 더이상 회한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세상에 대한 염오가 너무 견고하다. 저들은 자신들을 겹겹이 짓누르던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 삶의 어떤 것도 두 사람 사이의 친밀감만큼 저들을 유혹하지 못하고, 삶의 어떤 것도 그만큼 저들을 흥분시키지 못하며, 삶의 어떤 것도 그만큼 삶에 대한 저들의 반감을 억누르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 일흔하나와 서른넷의 나이에 저토록 어울리지 않는 동맹을 맺은 저들은 누구인 가? 저들은 저들에게 떨어진 재앙이다. 토미 도시 밴드의 리듬과, 젊은 시절의 시내트라가 나직이 부르는 노래에 맞춰 저들은 알몸으로 춤을 추며 폭력적인 죽음을 향해 직행하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마지막을 보낸다. 이것은 두 사람이 생각해낸 마지막을 보내는 방식이다. 이제 늦지 않게 두 사람을 멈출 방법은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17쪽.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모두가 알고 있다니… 어떤 일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안다고? 인간사를 규정하는 사건들, 불확실성들, 사고들, 불화, 충격적인 부조리의 연속 인 난맥상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도?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요. 루 교수. " 모두가 알고 있다"라는 말은 상투어를 이용한 호소인데, 경험을 진부하게 만들어버리는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못 견디게 싫은 것은, 상투어를 내뱉는 자들의 위선적인 진중함과 권위의식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상투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는 것도 실은 알지 못한다. 의도? 동기? 결과? 의미? 모르는 건 전부 놀랍게 느껴진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이다.
4장 대체 어떤 편집광의 머리에서 이런 생각이 나온 걸까? 읽음. 헐… 이런 내용이었다고? 영화에서도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전개됐었을까? 기억이 안 난다… 아무래도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책을 다 읽고 나면. 3장까지 읽었을 때 콜먼 실크에 대한 나의 생각은 틀렸던 것 같다. 콜먼은 아들과의 통화 후 아마도 그 전의 삶, 그가 거짓 기반 위에 공들여 쌓아올렸던 삶의 허위를 떠나버리기로 했나 보다. 공연장에 같이 있던 그와 그녀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평화롭고 자족적이다. 23쪽. 그가 지닌 비밀이 바로 그의 매력이다. 결여된 무언가가 사람을 현혹하고, 그동안 내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만의 비밀로 지니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무언가가. 그는 절반의 모습만 보여주는 달처럼 자신을 연출한다. 내게는 그의 모습을 완전히 보이게 할 재간이 없다. 공백이 존재한다.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두 사람이 결합하면 공백 한 쌍이 된다. 그녀에게도 공백이 있다. 이 장의 제목은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레스터? 델핀? 네이선? 다른 모든 사람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콜먼 실크에 대한 평가가 이대로 남는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다. 정작 그는 신경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얼른 마저 읽어야겠다.
5장 제목은 ‘정화의식’ 아 정말로 정화가 절실하다.
144쪽. 그저 고발만으로도 혐의가 증명된다는 식이다. 혐의에 대해 듣자마자 사실로 믿어버린다.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동기도 필요 없고, 논리도 이성적인 근거도 필요 없다는 식이다. 그저 꼬리표 하나면 족하다. 꼬리표가 곧 동기다. 꼬리표가 곧 증거다. 꼬리표가 곧 논리다. 콜먼 실크가 왜 그랬느냐고? 그가 x이기 때문이고, 그가 y이기 때문이고, 그가 그 둘 다이기 때문이다.
154쪽. 배움이 숨막힐 듯 답답한 적절성이란 것의 한 형태라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좀더 강력하고 선행하는 앎으로 배움을 눌러 이겨버리려 했던 것이다.
180쪽. 진실 뒤에는 또다른 진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세상엔 자신이나 자기 이웃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한없이 많다. 우리에 대한 진실에는 끝이 없다. 거짓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 꼼짝없이 끼어 있는 거지, 나는 생각했다. 고매한 놈들한테 비난받고, 정의로운 놈들한테 욕먹은 다음, 흉악한 미치광이에게 몰살당하는 것. 구원받은 자들, 선택된 자들, 한 시대가 지나면 사라질 도덕관을 맹신하는 자들로부터 파문당한 다음 무자비한 악귀에게 목숨을 잃는 것. 인간의 절박함 두 가지가 그에게서 접합점을 찾아냈다. 결백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모두가 전력을 다해 움직인다. 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둘이 닮았다. 이중으로 당하는 거지, 나는 생각했다. 이 세상의 적대적인 이빨에 이중으로 당하는 것이다. 바로 세상 자체인 적대감 에 의해.
199쪽. 하지만 증오가 위험한 건 일단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예상보다 백배는 더 괴롭기 때문이에요.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도 없어요. 미워하는 마음보다 통제하기 힘든 건 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미움을 다스리는 것보다 차라리 술을 끊는 게 훨씬 쉬워요. 그만큼 어려운 일이죠.
206쪽. 어떻게 콜먼 같은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가 자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타인이 그가 어떤 사람일 거라고 생 각한 것보다 더 타당했을까, 아니면 덜 타당했을까? 그런 걸 알아낼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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