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jaann @ssaanngg @소유 @흰벽 여러 분들의 글을 읽고 제 생각도 보태 봅니다.
<세월의 책> 이야기는 자유의지의 역설을 표현하는 예화인 것 같아요.
세상의 모든 일이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결정론을 받아들이면, 모든 일은 필연적인 것이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이미 정해진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도 주관적인 의식 속에서 자명하게 느껴지죠.
제가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게 될지는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이미 정해진 일이겠지만, 지금 이순간 저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도 자명하게 느껴집니다.
자유의지란 존재하는 것일까요? 삶은 필연적인 운명을 따라가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일까요?
우리는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만,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면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옷가게에서 옷을 사려고 하는데 어떤 옷이 마음에 드는지 결정하기 힘들 때면 무척 부자유스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하려고 고민하다가 하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나서 다른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면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느낌입니다.
저는 ssaanngg님이 인용해 주신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었지만, 그렇기에 자유롭다.'라는 말에 정말 공감이 갑니다. ^^
아마 이 말이 마음에 드는 분이라면 스피노자도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르는 것입니다. 운명론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필연성이란 자기 자신의 본성과 외부를 함께 아우르는 것이죠.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선택의 자유라는 것을 느끼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느끼는 것은 무엇이 좋거나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이죠.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의식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눈 앞에 있는 대상에만 집중하는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라는 개념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필연에 따라 사는 삶이 가장 자유로운 삶이겠죠.
동시적 의식이란 그러한 필연을 자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그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의 삶이란 선택과 필연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와 죽음까지 과거를 기억하듯 인식하면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현실적으로 그런 삶은 불가능하죠. 우리는 미래를 미리 알 수 없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 옳고 그른지 확신하지 못하고 항상 의심을 품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내게 주어진 숙명을 찾아 필연적인 삶을 살고 싶은 욕구와 나는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정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이성이나 노자가 예찬하는 물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방편이 될 수 있겠지만 적용하려다 보면 걸리는 부분들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동시적 의식'에 가까워지기 위한 지침들을 정하거나 자기 나름의 수련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기본 모드에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SF 함께 읽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읽고 이야기해요!
D-29
오도니안
ssaanngg
루돌프는 나를 바라보면서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형은 강한 사람입니다. 형은 긍정적으로 도달한 그곳에 나는 부정적으로 체념하고 온갖 생명력을 소모한 뒤에야 도달하는 것입니다. 형이 의지를 갖고 노력하여 수행하는 일을, 나는 이 세상 피곤한 것들에 남겨져 있는 크나큰 무에의 귀환이라는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의 경우에서도 지고의 자유로운 감정은 자기 자신이 의지한 속박 속에 있기 마련이지요. 진정한 자유는 모든 가능한 것들 중에서 참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에 따르는 자기 긍정 속에 있으니까요."
"물론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는 아니다. 자유는 우리 인생의 최고 순간에 우리에게 구원으로 열려지는 것으로서, 그때의 우리 속마음은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기에 내가 있다는것,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것-그런 상태인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참다운 자유란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고 있는것을 따른다는 것이지. 인간이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그런 의미로서의 운명에의 귀환이라는 뜻이 강해지는 것이다."
루 살로메의 <선택된 자들의 소망> 에서 발췌 했어요.
이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해서요~
선택된 자들의 소망"한 남자가 루와 정열적으로 교제할 수 있다면 9개월 후쯤 그 남자는 한 권의 책을 저술할 수 있다"는 말의 주인공인 루 살로메. 그러나 스스로 훌륭한 작가이자 정신상담가이기도 했던 그녀의 중편소설과 산문들을 모은 책으로 광범위하고 신선한 살로메의 지적세계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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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군요. 가는 길은 달라도 정상에서 만난다더니.. 좋은 책 구절 소개 감사합니다.
흰벽
그러게요. 정말 비슷하네요- 운명과 자유의 딜레마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걸까요.
소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르는 자유’와 ‘동시적 의식’은 관련이 깊겠네요. 스피노자의 이성과 노자의 도가 비슷한 것임을 오도니안 님 덕에 알게 됐습니다. 마지막 문장에도 동의합니다.
흰벽
어쩌면 두서없이 오갔던 대화들을 말끔하게 정리해주신 느낌이에요. 차분하게 읽으니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스피노자의 자유의지가 이렇게 연결되는군요.
ssaanngg
일흔두 글자
신학에서 과학적인 사고 방식으로 이행 하는 듯한 전개..(글의 세계와 다르지만, 우리의 세계도 충분히 신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단 생각도..들었어요. 우리가 익숙할 따름.)
원소의 정령, 유니콘뿔, 인어, 양피지, 일흔두글자, 물질적 우주, 어휘적인 우주, 정자인간, 호문클루스, 전성의 원칙, 이름과 통명, 움직이는 이름과 호부로서의 이름, 적명, 열과 일의 변환....
이런 매력적인 세계관에 논리적 내용의 완결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함의들이 내포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며 읽으면서 결론은 어떻게 이르게 될까 추측하면서 읽었어요.
읽으면서 이렇게 전개 되나 하다가.. 아니네 이렇게 전개 되려나 보네.. 하다가 아니네 또 이렇게 전개 되나 보네.. 하다가.. 추격전에.. 자명에 의한 스트래튼의 해답에 이르게 되는데.. 숨쉴 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자명은 바로 쉽게 이해를 하기 어려워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었네요.
자신의 이름을 지닌 태아, 자명에 의해 계속된 자신의 이름을 복제하고, 미세한 분신 대신, 어휘적 표현을 내포..그러면 전성된 태아를 내포하는 대신, 남성도 생식능력을 가진다.
'어휘적 복제를 가능케 하는 이름'
'이제 인간은 그 이름의 산물인 동시에 그 매개체가 될 것이다.'
물질적 우주는 태아, 어휘적인 우주는 이름..
태아에 자신의 이름을 지니고 자명이라는 통명도 함께 낙인되어...
(일단 남성만..생각해서)태아는 남성이 되고
그 남성의 정자는 자신의 이름(남성이 되는)이 자명 되어
다시 그 정자는 남성이 된다. (복잡복잡.)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나요?;;
흰벽
정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얽혀 있고, 과학과 신학이 교묘하게 통합된 듯한 설정이 정말 놀라운 소설이에요.
읽으면서 몇 번의 추측을 거듭하게 되었다는 @ssaanngg 님의 소감, 너무너무 공감되구요.
명명학 설정에서는 태초에 말이 세상을 창조하는 창세기가 떠올랐고,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어요. 이 소설에서도 언어의 역할? 영향? 에 대한 작가의 깊은 관심이 드러나는구나 싶었죠.
생명 창조의 시도라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도 떠오르고 생명복제기술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생각났구요.
스트래튼이 개발하는 자동인형과 그것으로 노동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주조공들의 일자리가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그것에 반대하는 윌러비를 보면서는 새로운 기술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기술 발전의 양면성도 생각하게 했고 당연히 인공지능에 대한 지금의 여러 반응과 예측들도 떠오르고 말이지요. (기술발전은 인간에게 자유를 줄 것인가, 인간의 위치를 위협할 것인가의 문제) 게다가 나중에는 우생학적인 논리를 펼치는 인물까지 나와서 그야말로 섬뜩…!
마지막에 ‘인류라는 종이 자기 자신의 행동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는 날’이라는 스트래튼의 미래상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고 오히려 디스토피아로 느껴졌어요. 인류가 다른 어떤 종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왕성하게 번성하면서 종 다양성과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현대사회에 대한 암시인가 싶어서요.
여하튼 설정도 기발하면서 복잡하고 현대사회의 여러 면을 은유하는 듯한 설정이 놀랍고도 어려웠습니다 ㅎㅎ
다른 분들의 소감도 기다려 봅니다~~
ssaanngg
저도 나중에 갑자기 번뜩 생각 났던건데, 정자가 엄청난데, 소설에서 말한 그거 영양학적(?) 기법만 적용하면 다 사람이 된다는 건데.. 라는 생각. @흰벽 님 처럼 거기까지 생각 못했는데, 대박이네요~
김새섬
다른 작품들은 주제가 단일하고 명확하게 느껴지는데 반해 <일흔 두 글자>는 정말 여러가지 이야기가 섞여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처음엔 말씀하신 것처럼 "빛이 있으라" 해서 생긴 것처럼 성경 느낌이 물씬 나다가 자동 인형의 등장으로 로봇이 생각났고요, 그 다음엔 러다이트 운동. 그러다 우생학까지...
테드 창은 과학도 과학이지만 언어에도 엄청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거의 모든 작품이 언어, 소통, 이해의 키워드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흰벽
이렇게 정리해 놓으니 뭔가 인류 문명의 흐름을 보는 것도 같네요!
소유
일흔 두 글자는 못 읽을 거 같습니다. 다음 소설부터 참여할게요!
jjaann
“ 명명학은 이 시기에 일종의 혁명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름에는 예부터 두 부류가 존재했다. 물체를 움직이는 이름과 호부로서 기능하는 이름. 건강 호부는 부상이나 병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소지하는 것이었고, 다른 종류의 호부는 화재로부터 집을 지키거나 배가 바다에서 침몰할 가능성을 줄이는 데 효력이 있었다. ”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241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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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ann
물체를 움직이는 이름의 어휘적 질서는 해당 물체의 질서를 증가시키고, 그럼으로써 자동인형을 움직이기 위한 동력을 제공하는 거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264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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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ann
그는 어둠 속에서 완전히 암기하고 있는 일흔두 글자의 조합을 그위에 썼고, 종이를 네모난 사각형으로 잘 접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301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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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ann
“ 이 연구에 엄청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자네들도 동의하겠지. 누가 아이를 가지고, 누가 가지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식견을 발휘한다면, 우리 정부는 국가의 인종적인 구성을 유지할 수 있을거야. ”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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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ann
“ 어떤 이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고의 의식 상태는 해당 인물이 필수적인 명상 테크닉을 모두 습득한 후에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런 테크닉들은 엄중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습니다. 적절한 훈련을 거치지 않고 사용한다면 발광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름 자체는, 그것이 아무리 강력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경험할 능력이 없는 초심자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런 이름은 점토인형을 움직이는 것 이외에는 쓸모가 없습니다. ”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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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ann
건강호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테드창의 어떤 언어, 어휘적 질서 등에 대한 열망이 여러 단편 곳곳에서 느껴지는데, 저도 좋아하는 부분이어서 같이 마음이 동합니다.
그런데 왜 제목이 일흔두 글자 일까요.
주인공이 암살자에게 쫓길때 자동인형을 움직이게 하려고 외워둔 일흔두 글자를 적었다고 했는데
명명법을 통해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는 최소의 글자의 개수가 일흔두 개 인걸까요.
그리고 그게 왜 제목으로 지어질 만큼 중요한걸까요.
sf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판타지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정의를 봤는데, 그런면에서 인종구성 유지를 위해 명명법을 활용하려는 모습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혹은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불현듯 들어서 소름돋기도 했습니다.
ssaanngg
건강 호부, 부적 같네요.^^ 언어에는 엄청난 힘이 있는 듯. 부적도 만들고 저주도 하고 축복도 하는거 보니까요. 말 함부로 뱉지 말라고.. 자기예언실현을 해버리니까 조심하라 하더라구요. 선언과 맹세의 효과라던지.. 정말 일흔두글자는 임의로 정한 숫자 일까요?
문자 6개가 12열이라는데...어떤 맥락이 있을지..
흰벽
건강호부, 저도 필요해요 ㅎㅎ
일흔 두 글자, 초반에 그냥 히브리어 일흔 두 글자 언급이 있어서 별 생각이 없이 읽었는데, 그러고보니 정말 궁금하네요. 왜 하필 제목이 일흔 두 글자일까요... 주인공이 명명법에 대해 인식하는 중요한 문자열이어서일지? (아닌듯)
모든 명명이 일흔 두 글자인 것은 아니겠...져?
히브리문자에 대해서도 잘 모르다보니 더욱 짐작이 어렵습니다.
sf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왠지 섬찟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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