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함께 읽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읽고 이야기해요!

D-29
이 모임에 올라오는 글들과 다양한 해석을 읽으며 좀 더 생각을 해보게 되니 작품의 의미가 풍성해지는 것 같아 좋습니다. 146쪽. "그 느낌을 당신에게 전할 수는 없었어. 내가 마음속 깊이 무조건적으로 믿고 있었던 무엇인가는 결국 진실이 아니었고, 그걸 증명한 사람은 다름아닌 나였으니까." 르네 말의 의미: 르네 자신이 믿고 있던 기존의 수학체계는 진실이 아니었고 그걸 증명한 사람은 르네 자신이다. 르네 말에 공감하는 칼의 입장: 르네가 변해서 기존의 르네에 대한 칼의 기존 믿음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두 사람의 기존 믿음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것에 공감하는 거죠. 하지만 공감의 내용은 다릅니다. 르네는 칼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지만, 칼은 "르네와 헤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145쪽) 생각하고 있어 "떼어놓는 종류의 감정이입"인 거죠. "떼어내는"의 의미는 헤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이해와 공감에 있어 타인에게서 분리된다는, 심리적인 분리의 의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칼은 아직 르네로부터 분리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같지만. 이해와 공감이란 건 완벽히 도달해 머물 수 있는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완벽한 이해와 몰이해라는 양 극단이 있는 게 아니라 , 이해와 공감의 스펙트럼 또는 네트워크 위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사안이나 맥락에 따라, 나와 타인의 감정 변화에 따라, 또는 나의 해석에 따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느끼거나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칼은 예전에는 르네를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착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르네가 뱐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칼은 르네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도, 르네에게 공감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는, '불완전한 공감'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르네가 수학 체계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였듯이, 칼도 불완전한 이해와 공감을 하고 있어요. 칼은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감정은 세계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당신은 감각 입력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당신 감정의 능동적 구성자이다. 당신의 뇌는 감각 입력과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를 구성하고 행동을 지시한다. 만약 당신에게 과거 경험을 표상하는 개념이 없다면, 당신의 모든 감각 입력은 잡음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거나 '탐지'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의 설계자다." (리사 펠드먼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장)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심리학과 인지과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저자는 의학, 법률 제도, 자녀 양육, 명상, 심지어 공항 보안 분야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감정과 마음과 뇌에 관한 새로운 과학이 밝혀낸 연구 성과와 함께 감정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같다고 느낄 때, 실제 두 사람의 감정이 같은 게 아니라 나의 "뇌는 감각 입력과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를 구성해" 나와 타인의 감정이 비슷할 거라고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윗글에서 '이해와 공감의 스펙트럼 또는 네트워크' 라고 쓴 것도 '이해와 공감이 가능하다면? 그러한 스펙트럼이나 네트워크가 있다면?'이라고 가정하고 상상해본 것일 뿐입니다. 리사 펠드먼 배럿은 제 생각이 틀렸다고 할 겁니다.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일치하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리사 펠드먼 배럿의 '구성된 감정 이론'에 따라 얘기해보면, 우리가 이 작품에 대해 또는 작품의 해석에 대해 '이해한다, 공감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들 각자의 "뇌는 감각 입력과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를 구성하고 행동을 지시"하므로 각자의 해석이 모두 다르게 구성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을 작가의 의도대로, 또는 타인이 이해한 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고 독자들 각자의 해석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나 자신이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시점마다 나의 "감각 입력과 과거 경험"이 달라지므로 나의 해석은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고요. 이것도 저의 해석일 뿐이라 리사 펠드먼 배럿이 제 해석에 동조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네요.ㅎㅎ
‘0으로 나누면’에 대한 @숨쉬는초록 님과 @오도니안 님의 이야기 너무 재밌어요! 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덕분에 얻습니다. 완전한 공감은 불가능하다는 걸 새롭게 깨닫는 칼. 서로를 떼어놓는 이해라는 것은 서로를 갈라놓는 감정이입이면서, 심리적 분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네요. 인용해 주신 책도 넘 좋고요. 지금 칼이 마음의 고통을 느끼고 있지만 엄연하게 우리는 이러한 심리적 분리를 토대로 하여(기본값으로 하여) 관계를 맺어가야겠지요. 환상을 사실로 믿는 것인 감정이입이 아닌. 르네나 칼이 둘 다 모종의 관념적 환상에서 깨어나 실제 세계로 진입한다는 면에서 같은 단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신 책의 내용, 우리는 이전 경험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들어오는 감각 정보를 계속 해석하며 감정을 만들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걸 느낀다고 생각해도 다를 수밖에 없고, 또 같은 걸 읽더라도 이미 내가 또 달라져 있어서 나의 해석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세상을 사는 일은 순간 순간 계속 바뀌는 춤과 같군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묵직함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아, 이 책은 저도 관심 있는 책인데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구성된 감정 이론' 상당히 설득력이 있네요. 앞서 숨쉬는초록님이 말씀하신 '이해와 공감의 스펙트럼 또는 네트워크 위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이라는 내용도요.
@ssaanngg 님이 자세히 풀어주시니 한 번 더 소설을 짚어보게 되네요. 저도 마지막에 가슴이 아팠어요. 수학을 이렇게 관계와 연결지은 게 새삼 대단하기도 하구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모임 혼자 이 책을 읽을 때는 ‘영으로 나누면’이 제일 어렵다고 느꼈는데, 같이 읽고 여러분들이 올려주는 설명과 해석을 보다 보니 심지어 이 소설이 책 전체에서 두 번째로 좋은 작품이 되었어요. 스스로도 놀랍네요. 오늘부터는 이 책의 표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네 인생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 이고 단편 제목은 Story of your life이므로 제목이 같은 듯 다르죠. 이걸 ‘네’와 ‘당신’으로 구분해서 번역한 게 저는 신의 한수라고 생각해요- 다른 분들은 의견이 어떠실지?)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영화랑 소설은 또 같은 듯 다릅니다. 매체가 다르다 보니 당연한 일이지만요. 오늘부터 8일까지 이 소설에 대해 같에 이야기해 보아요. 즐거운 독서가 되길~
다른 작품과 달리 기억이 아주 생생한 작품입니다.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당신'이 누구인지가 너무 궁금했어요. '당신'이 화자의 죽은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정말 감탄했습니다. 중간 중간 삽입되는 알쏭달쏭한 일화들은 읽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현재 일어나는 일과 병렬 배치되지요. 그러면서도 혼란스럽지 않게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끌어가는 테드 창의 솜씨가 정말 멋집니다. 끝 부분에 둘이 춤추다 아이를 갖기로 하는 것도 정말 로맨틱한 감성을 자아내고요. 결과를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여러 SF 들이 다뤘겠습니다만 이 작품은 저에게 큰 감동을 줬어요.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저녁 노을을 볼 때의 슬픔이나 우주의 신비로운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봤을 때 느꼈던 어떤 그런 먹먹함이 책을 덮고 난 뒤 오래 남았습니다. 일시적인 기분이었을까 싶었는데 이번에 재독할 때도 다시 벅찬 감동이 ^^
'0으로 나오면'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떼어놓는 종류의 감정이입"의 의미에 조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르네의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르네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몰입되어 있어서 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칼이 르네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된 이유는, 르네의 세계 안에 자신이 차지하는 영역이 없음을 체감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140페이지에 보면 칼에게 두 가지 직관이 찾아왔다고 나와 있어요. "첫번째 직관은... 자신은 그녀가 왜 그런 행동에 이르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인식" 두번째 직관은 르네의 행동에서 과거의 자기를 연상하게 되었을 때 찾아옵니다. "칼은 수치심으로 얼어붙은 채 르네가 바닥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그였던 당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145페이지엔 이런 대목이 나와요. "위선자.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칼 자신이 바로 그런 입장에 서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고통에 완전히 몰입한 채로 다른 사람들의 인내심을 시험했지만, 그중 한 사람은 줄곧 그를 돌봐주었다. 르네와 헤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터였다." 고통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하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 옆에서 사랑하면서 그를 지키고 돌봐줄 수 있는지는 그와 다른 문제일 거에요. 칼은 르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고통 속에 있는 르네를 사랑할 수도 없고 함께 있는 것을 견딜 자신도 없어서 헤어지기로 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을 때는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었지만 자기는 힘들어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결정한 거니까요. 르네가 그런 자기만의 몰입 속에 머물렀다면 오히려 자신을 정당화하기가 쉬웠겠지만, 르네가 뒤늦게 마음을 열어보이자 칼은 아픔을 느낍니다. "그만둬. 그는 빌었다. 말하지 마. 제발." "칼은 르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자기도 정확하게 알며, 그 자신도 그녀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떼어놓는 종류의 감정이입이었고, 그녀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헤어짐은 고통스러워 하는 르네에 대한 사랑을 칼이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르네가 마음을 열고 관계 회복의 의지를 보이지만 이미 칼은 르네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결론내린 것이겠지요. 저도 약간은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분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문장들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니 새로운 해석들을 하게 되네요.
오도니안님의 해설을 읽으니 칼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더 이해가 잘 갑니다. 칼의 입장에서의 칼과 르네의 관계를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르네가 자신의 절망에 빠져 칼에게 내어줄 자리가 없었고 이로부터 촉발되는 둘의 문제(칼 입장에서의 문제)인데, 마지막에 르네가 관계 회복을 시도하고 있군요. 칼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둘의 관계를 정리하는(결별 쪽으로) 시점인데 말이죠.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저는 칼의 그러한 깨달음이 너무나 비극적으로 느껴졌는데, 오도니안 님이 비슷한 경험을 하셨다고 하니 왠지 맘이 아프네요. 물론...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나로 하여금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를 아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행위를 포함해서,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아는 사람들은 미래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세월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네 인생의 이야기, 218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햅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햅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네 인생의 이야기, 219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루이스 뱅크스는 페르마의 원리와 햅타포드B를 통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고 미래를 알게됩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들에 대해 돌아보기도 하고 또 다음엔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이쪽이야, 이걸 선택해, 바로 저기, 이런식으로 힌트를 주면 참 좋겠다,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또 다시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느끼게 되네요. 미래를 알고도-아이가 죽는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다 등- 동일한 선택을 하는 주인공의 사유방식에 감탄하고 존경하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양가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는 의미가 없고 강제 또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정확히 어떤 말일까요? 또 수행문으로서만 발화되는 햅타포드의 언어를 우리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어떤 수련의 과정이 필요한 걸까요? 저는 테드 창의 소설 속 수학, 과학적 지식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삶에 대한 작가의 어떤 일관된 태도나 세계관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제 삶에도 끌고와서 대입해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더 정확히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이번 모임을 통해 하고 있습니다.
@jjaann 님께서 인용 두 부분을 해 주셔서, 그 문장들을 새롭게 읽어 봐서 좋았습니다. 햅타포드들이 수행문으로만 언어를 발화하는 이유는 그들이 동시적 인식으로 삶을 통째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미 다 아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언어여서일테고, 사고와 언어의 관계에 관심 많는 테드 창님이 이 부분을 그들의 언어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고 있지요. jjaann님께서 ‘수련’이 필요한 걸까요? 라 얘기해 주셨는데, 선형적 언어에 익숙한 우리가 이걸 어느 정도라도 실천해 보려면 모종의 훈련이 필요할 것도 같아요. 직관적 세계 인식? 통째로 보려는 노력?(명상처럼 말이죠.) 그리고 자유가 의미가 없는데 강제도 아닌 이유는, 이렇게 통째로 아는 세상을 완전히 수용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전후를 동시에 통째로 안다는 것은 곧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걸 아는 걸 테니까요. 이 부분은 정말 생각해 볼 거리인 듯요! 저도 이 아름다운 이야기 속 삶의 방식을 제 삶으로 끌어오고 싶네요. 이 책에서 이 소설이 저에겐 아름답고 감동적인,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어요.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움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저절로 바뀐 거라고 생각해요. 언어는 사고의 수단인 동시에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헵타포드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헵타포드의 사고방식을 익히는 것인데 헵타포드의 언어는 말을 시작할 때 이미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발화하는 형식이기에 결국 헵타포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거죠. 그게 아마 '동시적 의식'인 것 같아요. 그러므로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는 의미가 없겠죠... 왜냐하면 이미 일어날 일을 알고 있고 그대로 수행하게 되어 있으므로. (인용해 주신 '세월의 책'처럼요.) 그리고 세월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미 일어날 일을 아는 동시에 아는 대로 수행하게 되지만 그것이 강제가 아니라는 것, 그냥 선험적으로 아는 것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강제도 의미가 없다고 한 게 아닐까 합니다. 결국 헵타포드는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기에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은 수행문인 거죠.... 우리도 루이스처럼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히면 동시적 의식을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네요... ㅎㅎㅎ
저의 해석(감상문)을 올려 봅니다. 좀 길어서 민폐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안 읽으셔도 됩니다.ㅎ ————— 엄청 좋다. 감동. 외계인들이 선물하고 간 것은 '헵타포드B'였고, 그것은 예를 들어 루이즈에게 전달되었다. (아마 다른 몇몇 언어학자도..) 루이즈는 외계인의 언어, 사고를 체득한다. 그래서 그것으로 산다.(살아낸다.-수행performance) 이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독자도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루이즈가 '헵타포드B'를 체득하여, 사고도 변환되어 그렇다면,(사고에는 기억, 세계관, 운명 수용, 체험 등이 포함된다.) 독자는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읽으며 그러하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이 유행시킨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이 말을 이 소설에 적용하자면, '사랑'은 애정을 뿜뿜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이다. 이 '완전한 수용'이 전체로서의 세계를 동시에 알고, 결과를 알면서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며, 이때 보이는 것은 자유의지를 체험하는 선형의 사건 진행이 아니라, 전체의 세계이다. 있는 그대로 통째의 세계.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문자 언어를 완전히 체득하지는 못하여(우리 인간의 선형적 언어에 여전히 물들어 있기에) 가끔씩 미래 순간을 문득 문득 아는 듯이 그려져 있다. 물론 미래에서 과거를 감전되듯 알기도 하고.(논 제로섬 게임) 그리고 후반부에 헵타포드들이 떠나갈 때, 연극을 수행하듯 정해진 것들을 정확하게 알면서 수행하고 있는 모습이 거의 순간 순간 그렇게 그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독자도 이 이야기를 몸으로 흡수하듯 읽었다면, 같은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너'를 사랑하는 루이즈의 마음이 이 소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이 고통과 슬픔이 모두 사랑이라는 한 단어의 일부인 것처럼(거대한 한 원을 그리고 있는 헵타포드의 문자처럼), 그래서 이 문장(문단)의 모든 요소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서로를 굴절시키고 있듯. -- 또한 이 소설에 나오는 '너'에게 말하는 루이즈의 모든 말들이 그렇게 독자에게 경험된다. 아름답게. 그래서 삶이 선물인 것이다. 헵타포드들이 자신들의 문자와 문자에 담긴 통째로 보고 그대로 살아가는 수행을 선물로 주었듯이. 루이즈의 문장들은 그렇게 독자에게 체험된다.(선물로) 이 소설에는 두 가지 서술 방식이 있다. 우선, 루이즈가 외계의 언어를 공부하도록 부름받고, 게리를 만나고, 게리와 '너'를 얻는 밤으로 죽 흘러가는 일직선의 서사.(이 부분은 언어도 순차적이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과거, 현재, 미래가 섞이고, 또 그것들끼리 서로 간섭하며, 언어적으로도 대화체와 과거에서의 미래형(짐작형)등의 부드럽게 섞이는 형태로 흘러가는 원형적 서사. 이 둘은 자연스레 섞이며 흘러가고 있다. 예전 어느 순간 읽을 때에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며, 언어면에서도 '~다'로 직선적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딱딱하고 경직되게 느껴진 때도 있었는데, 오늘 보니 둘 다 좋다. 각 부분은 다른 종류인 그 부분들을 서로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리하여 이 세상은 완벽한 걸까. 어쨌든 "세월의 책"에는 '당신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쓰여 있는데, 그 이야기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게 되는(즉 자유의지에 의해 변형된) 모순이 있다, 그렇다면 특별한 사람만 그 이야기책의 독자일까? 라고 루이즈는 말했다가, 후반부에 다시 "세월의 책" 이야기가 나오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해도, 미래를 아는 사람들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이것도 너무 아름답다.(좋다.) 어쨌든 이 소설은 다소 체험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소설이면서. (이건 마치 소설 속 루이즈가 어느 정도는 선형적 사고를 하면서, 또 일부 비선형적, 전체적, 체험적 사고를 하는 것과 같다.)
저도 이 소설집 전체에서 이 소설이 가장 좋아요. 자세히 풀어주신 소유 님의 글, 감사합니다. 저는 예전에 이 소설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서 그믐 블로그에 올렸었어요. 그것도 공유해 볼게요~ 아래 링크입니다. https://www.gmeum.com/blog/12891/4404
오 긴 의견은 이렇게 블로그에 쓰면 되는 것이었군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았네요. ‘자유의지는 운명에 반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미래를 아는 것이 그렇게 살아야 할 의지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들은 보기 위해 왔다.~그러니 그들이 ‘지독히도 호기심이 없을’ 수밖에’, ‘인간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사는 게 아니라 살아야만 비로소 죽을 수 있는 존재.’ 자유의지와 운명,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감상이네요. 우리도 ‘보기 위해’, ‘실제로 살아내기 위해’(수행, 경험, 실제화) 태어난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한 가지 덧붙이는 제 생각은, 최소 혹은 최대에 대한 것인데, 빛의 경로에 대한 그 방정식(이름 까먹음)이 특이하게도 최소 혹은 최대를 지향한다 했고(우리에겐 그게 정반대인데 빛에게는 그게 같다는 것) 루이즈가 마지막에 내 삶이 최소를 향할까? 최대를 향할까? 라고 자문했는데, ‘경험하기 위한’(보다, 수행하다와 같음.) 삶이라면 그 둘은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루이즈는 질문은 했지만 어느 쪽이 더 좋다고는 판단하고 있진 않을 것 같아요. 저도 최소 혹은 최대를 모두 반기는 ‘경험하는 자’의 삶을 살고 싶네요.
아, 소유 님의 덧붙인 의견이 매우 와닿네요. '최소이든 최대이든, 경험이라는 면에서 그 둘은 같은 것'! 마치 손등과 손바닥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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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되는 논픽션–현직 기자가 쓴 <뽕의계보>읽으며 '체험이 스토리가 되는 법' 생각해요[그믐북클럽] 7. <더 파이브> 읽고 기억해요 [벽돌책 챌린지] 2. 재난, 그 이후글쓰기 책 함께 읽기 네 번째, 《네 번째 원고-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책방연희>의 다정한 책방지기와 함께~
[책방연희X그믐] <책 읽다 절교할 뻔> 번외편 <내가 늙어버린 여름> 읽기[책방연희X그믐] 책 읽다 절교할 뻔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끝나지 않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읽기 행렬!
[라비북클럽]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같이 읽어요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진주문고 서점친구들]비문학 독서모임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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