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D-29
이상과 현실에서 균형을 잡고 살자 내가 왜 이렇게 이상과 현실에 대해 말이 많은지 모르겠다. 아마도 현실을 사는 게 버겁고 이상으로만 가면 인간으로 태어난 원죄로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재미가 없어 그럴 것이다. 인간 사회에선 인간을 믿을 수 없다. 싫어도 변하며 변화무쌍하게 살면 된다.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고 그들이 절대 알아주는 게 아니다. 아니 알아줄 능력도 못 된다. 그러니 그 믿을 수 없는 것에 좌절하거나 하지 말고 자기만의 이상을 만들어 거기서 안정을 찾으면 된다. 이곳은 싫은 인간 사회와는 다르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곳이고 기댈 수 있는 곳이고, 그래서 자기의 페이스를 찾는 힐링의 장소이고 다시 활력을 찾는 곳이다. 내 이상적인 공간과 현실에서 서로 힘을 주며 살면 된다.
AI와 나의 대결 인간을, 거듭 이기는 AI가 무섭다. 모든 것에서 하나하나, 인간은 AI에게 자신의 고유 자리를 내주고 있다. AI가 인간들 간에 축적된 자료를 모아 인간을 학습하고 인간처럼 그것으로 뭔가를 해석해 결론을 내고 통찰을 끌어낸다. 인간의 고유 영역이 한없이 침식당하고 있다. 이제 인간들은, 인간 전문가나 권위자에게 묻지 않고 AI에게 달려가 묻는 시대에 와 있다. 그건 점점 더할 것이다. 인간이 그런 AI를 이길 수 있을까? 고등의 인간임을 자랑하는 예술 창작도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보다 더 정교하게 짜서 AI가 내놓고 있다. 인간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를 사용해 스토리를 구성한다. AI가 짠 소설이 영구 베스트셀러가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인간과 AI의 대결에서 최종 승자는? 인간의 특성을 계속 끝없이 AI는 학습하고 있다. 눈여겨볼게, AI를 더 인간답게 하는 자료들은 거의 다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것들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건 많지 않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왜냐면 나는 늘 나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와 항상 시간을 보내는 존재는 나 외엔 없다. 나는 내가 한 모든 것을 안다. 내가 한 것 중 남에게 감추거나 거짓말한 것도 안다. 가능하지도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늘 붙어있다 해도 내가 받아들이고 느끼는 감정과 같을 수는 없다. 즐거울 때, 슬플 때, 다른 사람과 있을 때, 혼자만 있을 때, 항상 나는 나와 함께한다. 그동안에 AI는 나를 관찰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계속 학습하고 뭔가를 접하고 잠을 자고 책을 읽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걸 느낀다. 남에게 밝히기 뭐한 아주 은밀한 것도 나만 갖고 있다. 풍파를 일으킬 것 같아 겉으로 표출을 안 할 뿐이다. 내 이런 극히 프라이빗한 걸 AI는 모른다. 내 마음에만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면, 또 AI는 나의 데이터를 보고 학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 살아가면서 개인적이고 은밀한 경험을 계속한다. AI에게 지지 않으려면 겉으로의 표출을,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의 십 분의 일도 정도만으로 제한하는 게 필요하다. 나만의 것을, 90%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AI가 나까지 학습하기 전인, 이 개인적인 것을 표출할 당시는 내가 더 독창적이기 때문에 AI는 독자성 면에서 나를 앞설 수 없다. 이게 거듭되면 결국 사는 동안 AI는 항상 나에게 뒤처져 있다. 내가 유명인이 되지 않으면 더 유리하다. 그러면 AI는 나를 더 학습하기 쉽지 않다. 나에 대한 데이터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유명해지지 않고 그냥 지금처럼 계속 개인적이고 신비하고 아주 독자적인 것만 표출하면 AI는 나를 앞서기 힘들다. 승부의 차원이라면 그렇다. 이러면 AI는 나를 평생 이기지 못한다. 내가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는 AI를 누를 수 있다. 이건, AI와의 대결에서 거듭 인간이 깨지니까 고육책으로 인간이 AI를 누를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고 고민 끝에 꺼내든, 전적으로 나만의 고안이다. 인간은 자기를 다 알 수 없고, 그걸 언어로 모두 표현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극히 개인적인 것과 자신조차 자신을 다 모르고 그걸 언어로 다 표현 못 하는 것에 희망을 걸어본다. 동시에, 인간의 습성을 못 버리고 억지로라도 AI를 이겨보려는 이런 현실과 그 치열함에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세 가지 큰 이유로 AI는 나를 이길 수 없다. ① 나는 극히 개인적이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 나는 나를 1/10만 표현하려고 하고, AI는 내 표현보다 항상 늦다. 따라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동안 나는 단독자적인 걸 계속 내놓는다. 나는 원하지도 않거니와 능력도 안 되어 유명해질 수 없다. 따라서 AI는 내 정보를 구하기 힘들다. 유명하지 않으면 더 개인적일 수 있다. 자기 검열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② 인간은 자기를 다 알 수 없다. 경험에 따라 자기가 드러나는데, 인간은 모든 상황을 다 겪지 못한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해서, 자기를 다 알기도 전에 죽는다. 따라서 나에 대한 게 다 표현이 안 된 채 생이 끝난다. 나에 대한 남은 부분은 나만 가지고 가고, AI는 영영 그걸 얻지 못한다. ③ 인간은 언어로 모두 표현이 안 된다. 언어의 한계와 나의 표현 미숙으로 나를 다 표현하지 못한다. 표현의 해석에서도, AI가 내 표현의 진짜 뜻을 모두 이해한다는 보장은 없다. 나를 왜곡해 해석할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과거와 현재의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그 차이는 나만 안다. 이걸, 다시 표로 정리하면
난 인간을 혐오한다. 자기들끼리 서로 혐오하고 지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 때문에라도 나는 인간 전체를 혐오한다.
여자들은 왜 명품백에 사족을 못 쓰는지 이해가 안 간다. 남자들의 차에 사족 못 쓰는 것하고 같은 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름은 잘 암기가 안 된다. 뭔가 연관성이 없어 그런 것이다. 그게 입에 붙을 때까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밀물, 썰물, 이랑, 고랑, 고물, 이물 같은 순 우리말의 정확한 뜻을 알고 거듭 사용해야 하는데.
책을 안 읽으면 사람들이 생각을 안 하고 살아 그 사회가 민주주의에서 점점 멀어진다.
한국 여자들의 싸움 이제 그런 건 잘 없지만, 여자들끼리 머리끄덩이 잡고 (머리끄덩이만 잡지 몸은 서로 닿지 않고 떨어져 있다. 바로 소싸움이 연상된다.) 씨름을 하는 게 드라마에 곧잘 나오곤 했다. 사람들은 사방에 원을 그리고 그걸 구경한다. 이상한 건, 남자들 싸움은 주변에서 말리지만 여자들의 싸움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자 싸움은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더 발동해 그런 것 같다. 이젠 이런 싸움은 드라마에도 별로 안 나오고 (늙은 여자들끼리는 지금도 가끔 나온다) 이제는 서로의 얼굴에 테이블의 물을 확 뿌리거나 뺨을 찰싹 때린다. 한 여자가 갈기면 맞고 있던 여자가 더 세게 갈기는 장면은 흔히 나온다. 나중에 더 세게 갈기는 쪽이 자존심이 세거나 뭔가 더 유리한 입장인 경우가 많다. 이런 건 사실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선 보기 힘들다. 한류도 있고 해서 한국 드라마에 그런 게 나오는 게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어서 창피한 짓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한국 여자들끼리 찰지게 뺨을 서로 후려갈기면 드라마가 점점 흥미진진해지고 거기에 흐르는 냉기 때문에 시원하기는 하다. 어떤 놈은 자기가 짝사랑만 하고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여자한테 뺨을 맞는 게 소원이고, 그녀가 자기 얼굴에 침을 뱉어주면 원이 없겠다고 한다. 어떤 변태 인간은, 사랑하는 여자가 자고 있는 자기 얼굴 위로 다리를 벌리고 서서 오줌을 누기를 바라는 새끼도 있다. 여자의 음모를 따라 흐르는 물이 마치 수풀이 우거진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흐르는 약수처럼 생각하고 그걸 쩝쩝거리며 먹고 싶다고 한다. 그녀에 대해 아직도 목마른 그는 그 물줄기를 타고 올라가 그 음습한 옹달샘을 접수한다. 그녀에 대한 끝없는 갈증으로 샘은 메말라가고 상황은 이제 역전되어 여자가 남자의 물을 갈구하기에 이른다. “아, 내게 자기 물 좀 채워줘. 오늘 자기가 너무 고파.” 변태는 이런 음흉한 상상을 하며 미소를 머금은 채 깊은 잠속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현실의 변태는, 이렇게 뺨 때리기는 여자가 자기에게 관심 없는 게 아니라 적어도 그렇게라도 엮여 있는 거니까 괜찮다는 거다. 한국은 왜 이렇게 여자들끼리 육탄전을 벌일까? 전통적인 가부장제 때문에 남자들에게 대접을 못 받아 아마 좀 응어리나 화병의 발로로 그런 것도 같다. 그런데도 남자에게 대들지 못하는 건 힘이 약해 그런 면도 있지만, 남자보단 상대 여자의 속을 더 잘 꿰뚫어봐서 그럴 수도 있다는 거다. 여자끼리는 한 여자가 자기가 점찍어놓은 남자를 좋아하는 걸 금방 알아채는데 남자는 그런 눈치를 못 챈다. 여자들끼리는 여자가 남자에게 여우짓 하는 게 훤히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당하는 남자는 그런 공기를 못 읽는다. 원래 가깝고 더 잘 알수록 더 많이 싸우는 것 같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까운 일본과 원수이지 잘 알지도 못하는 저 북아프리카 리비아와 원수이겠나?
여자는 남자만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여자가 주는 영향보다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영향이 적어 그럴 것이다. 남자들은 그러려니 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지금 쓰고 있는 글 중에서도 쓰고 싶어 퇴고를 거듭하는 게 있고 그냥 방치하는 글이 있다. 쓰고 싶은 글만 죽어라 써라.
남녀가 같이 좋아하기 쉽지 않다 예능 프로 <나는 솔로>에서도 그렇고, 여자들이 한 남자에게 뭔가 메시지, 추파를 던지면 대개의 남자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그 대신 남자는 그녀의 다른 것 (그녀가 남자에게 보낸 신호가 아닌 것)이나 다른 여자에게 끌리는 경우가 많다. 서로의 호감이나 선호하는 스타일이 일치하지 않고 대개는 한쪽이 더 좋아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여기서 사랑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을 왔다 갔다 하자 사회는 내 맘대로 안 된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원죄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거기에 몸담고 있어 인간 사회를 무시하며 사는 것은 진짜 어리석은 짓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태어났다면 그럴 수 있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이 어디서 하나? 이게 가장 하고 싶은 것이고 자기를 충전하는 것이고 치유하는 것인데. 그것은 가상 공간이나 지상(紙上)에서 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다. 사회에선 그냥 적당히 맘에 안 들어도 맞춰 가며 사는 것이고, 그래야 자기의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래 방전된 힘을 가상 공간에서 보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 현실과 이상을 왔다 갔다 하며 사는 것이다. 그래야 또 양쪽 다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삶의 희열과 즐거움을, 양쪽 다에서.
남녀의 섹스 남자가 그렇게 원하던 여자와 섹스를 드디어 하게 되면 여자들은 섹스가 끝나면 좀 허탈하지 않냐고 하는데 남자는 그렇지 않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와 그녀가 그동안 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뺐던 섹스를 드디어 하게 되면 그런 생각보단 뭔가 해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여자는 분명 안 그런 것 같은데, 남자는 여자와 하는 것 자체가 솔직히 목적인 경우가 많다. 남자는 바라는 것에 대한 정복 욕구가 있다. 아마도 이제 정복했고, 이 여자는 이제 내 여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 여자가 되는 것이고 이제 점을 찍어 놓은 거고 자기 침을 발라 놓은 것이다. 개가 여기저기 오줌을 누는 것처럼 자기 영역을 확보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자에겐 분명 섹스가 무슨 분기점 같기도 하다. 그게 사랑의 종착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 자기와 섹스를 나눈 상대를 결국 자기 머리에서 평생 지우긴 쉽지 않다. 이런 중요한 의미가 있기에, 아무에게나 자기 몸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몸을 허락하면 그때부터 남자의 태도가 달려지고, 자기를 떠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작용한다. 남자는 섹스로 시작해 사랑을 이루어나가는 거고, 여자는 사랑이 무르익어야 섹스를 허용하는 것 같다. 섹스를 사랑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확실히 남자보다는 성욕이 왕성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임신을 하게 되어 조심스러워 그런 본능이 작용해 남자보단 성욕이 덜 왕성한 것이리라. 남자처럼 시도 때도 없이 왕성하면 가임 기간 내내 임신만 하다가 말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의 생활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 임신할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여기저기 씨를 뿌려야 해서, 자기 자손을 번성하게 남기는 게 본능이라서 계속 나이가 들어도 체력은 감퇴해도 성욕은 줄지 않고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나.) 80이 넘어서도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여자들이 자기는 전혀 성욕이 없다고 하는데, 불감(不感)인 여자를 빼고는, 여자가 전혀 성욕이 없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 여자도 동물인데 전혀 성욕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섹스에서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는다. 여자는 천천히 안정감이 들고 사방의 분위기가 자기에게 맞게 갖춰졌을 때 서서히 성욕이 생기는 것 같다. 성욕이 먼저가 아니고 자기 맘에 드는 주변 환경이 먼저다. 뭔가 불안하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지 않으면 섹스 생각도 일지 않는 것 같다. 뭔가 여유롭고 평화로울 때 성욕도 생기는 것 같다. (그래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남자가 자기에게 충분히 믿을만하고 자기를 안심시켜 사랑하게 되면 자기 몸을 저절로 그 남자에게 여는 것 같고, 남자가 빨리 달아올라 빨리 끝내는 것보단 서서히 지구력을 갖고 장시간 정성 들여 여자를 달아오르게 하면 여자는 그때서야 비로소 달아올라 같이 남자와 뜨겁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급한 남자는 안 그렇지만, 여자에겐 전희(前戱)와 후희(後戱)가 다 필요한 것이다. 성교도 중요하지만 도입부와 끝마무리도 여자는 무시 못 하는 것이다. 그래 지구력과 힘을 강조하는 정력제와 기력 회복을 위한 강장제들이 성인 남자들에게 잘 팔려나가는 것이다. 남자 위주의 속전속결로 빨리 끝내면 여자가 싫어하니까. 남자가 자기를 조절하고 인내심을 발휘해 여자의 페이스에 맞출 수 있는 제품이 인기 있는 것이다. 이것도 자연의 이치와 섭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는 빨리 끝내고 다른 여자에게 가서 또 자기 씨를 뿌려야 자손이 번창하는 것이고, 그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 여자에게만 그렇게 오래 매달리거니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임신의 위험도 있고 또 새끼를 낳으면 남자의 지원과 돌봄이 필수니까 믿을 수 있는 남자와 건강해 보이고(중간에 병들어 죽으면 안 되니까), 잘생긴 남자에게 끌리고 아주 천천히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다른 여자에게 못 가게) 붙잡아 놓아야 하는 임무가 있다. 여자인 자기를 남자가 보호하고, 새끼의 공동 양육을 위해. 그래 섹스할 때도 남자와는 달리 천천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남자가 본능만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어 붙잡아 놓고 그냥 섹스 자체가 아니라 충분히 사랑하며 자기 남자의 새끼를 낳아 같이 기르기 위해. 가만 생각하면, 남녀의 섹스에서도 모든 게 다 자연의 섭리(攝理)대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든다.
진보와 보수 진보는 거시적으로 본다. 지금만이 아니라 미래도 보아, 기후 위기를 더 많이 생각한다. 생각이 건전하고 건강하다. 그러나 보수는 당장 지금이 좋은 것이다. 지금이 편하면 미래가 어떻더라도 상관없다. 그냥 표피적이고 단세포적이다. 다분히 동물적이다. 지금의 쾌락이 좋은 것이다. 보수는 지금 잘나가는 자 편이다. 지금과 지금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다. 소외계층이나 이방인, 정상에서 떨어진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꺼린다. 진보를 대개 이런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입장에서 서서 정책을 입안한다. 우리는 무엇을 따를 것인가.
유시민이 진보지만 전라도를 포용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게 경상도 출신의 한계다. 자기 지역을 벗어나기 이렇게 힘든다.
정희진 작가는 소설은 못 쓰지만 글의 방향이 독특하다.
백화점의 하이라이트 4층 여성복 코너.
한국과 일본과 중국 이 세 나라는 서로 지리적으로 가깝고 한국이 솔직히 힘이 약해 쳐들어간 적은 없지만 전쟁 등으로 엮여 서로 많이 관계해 왔고 그건 지금도 똑같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집단적이지만 개인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긴다. 집단 속에서도 자기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냥 집단 위주로 생활하면서도 주체성이 강해 창의적이다. 뭘 하라고 하면 그대로 따르지 않고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 뭔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려고 한다. 그냥 따르기만 하면 자기가 훼손될 것 같아 그런 것 같다. 이런 게 주체성이 강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집단이 정한 매뉴얼 대로 그대로 시행하려고 한다. 그래서 뭔가 매뉴얼은 매뉴얼이고 좀 응용하면 서로 편하고 쉽게 할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융통성이 없지만 이미 정한 규율은 잘 지켜 기초질서를 잘 지키고 뭔가 집단에서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일본인이 자유분방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그 집단이 정한 범위 안에서 즉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도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 결국 많이 알게 된다. 중국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다. 좋아하는 건 가까이하려 하고 싫은 건 피하려고 한다. 원래 인간은 인구가 많고 지역이 넓어 개인이 어떻게 해도 그 거대한 조직이 안 바뀌면 그 조직을 바꾸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개인이 편한 대로 살려고 한다. 개인과 자기 위주로 살려고 한다. 그래 개인주의와 남에 대한 배려가 약하다. 중국은 남에 대한 배려가 약해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몰려다닌다. 일본은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면 끝장이다. 한국보다 지역도 넓고 인구도 많지만 그 따돌림은 다른 지역으로 가도 영향을 주니까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는 게 일상이다. 한 번 찍히면 그 낙인(烙印)에서 벗어나기가 그렇게 어렵다. 그러나 중국은 개인주의와 남에 대한 배려가 희박해 어디 가서 사기당하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친다. 일본은 큰 가치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거기서 나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역(役)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 대를 이어 장사를 하고 장인이 나오는 것이다. 자기 자리 고수가 불문율이기 때문에 천황은 천황의 일을, 나는 다만 나의 일을 하면 될 뿐이다. 그래 서로 간섭하지 않아 왕에게 대드는 혁명이 일어나기 힘들었고, 실제 잘 일어나지도 않았다. 정치에도 자기 자리 고수로 정권이 잘 바뀌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게 되었다. 정치는 그들이 자기 역에 충실해 알아서 하겠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신하가 왕에게 간언(諫言)해 그 과오(過誤)를 조목조목 따진다. 왕이라고 해서 맘대로 하지 못한다. 대통령도 잘못하면 한국에서는 탄핵(彈劾)당한다.
인간이 사는 방식 인간만이 마음이란 게 있어서 지금 자신이 사는 사회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하면서도 뭔가 자기만의 이상을 좇아 일탈을 꿈꾸는 존재 같다. 현실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먹고사는 곳이고 이상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는 거의 완전히 자아를 실현하는 곳이다. 삶은, 긴장된 현실과 평온한 이상이 서로 힘을 주고받으면서 격려하고 돕는 것 아닐까? 이게 인간이 사는 방식이 아닐까?
기존 개념을 절대 무시하지 마라 “시장이 반찬이다”, “개 눈엔 똥만 보인다”, “양날의 칼” 같은 속담이 있는데 이것들은 관용어로 촌철살인(寸鐵殺人)적인 통찰이 숨어 있다. 그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법칙을 만들겠다며 덤비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자기 생이 짧고, 자기 생각엔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인간 사회에서 이미 쓰인 통찰을 십분 참고하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자기의 독특한 생각을 창출하는 식으로 자기 생각을 전개하고 확장하는 게 인간 사회에선 아주 현명한 자세다. 자기가 뭐나 된 것처럼 기존 생각들을 무시하고 아주 따끈따끈하다며 자기 생각만 고수했다가는 제풀에 겨워 곧 쓰러지고 말 것이다. 한 인간의 힘은 절대 강하지 않다. 그러니 기존 인간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는 통찰을 십분 자기의 창조력에 가능한 한 많이 활용하고 인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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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골목을 광장으로 만드는 법" 성북구 비문학 최종후보도서 4권을 소개합니다.
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①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② 『공감의 반경』 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③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 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④ 『탄소로운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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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 28. 달밤에 낭독,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서울외계인] 버지니아 울프,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읽기<평론가의 인생책 > 전승민 평론가와 [댈러웨이 부인]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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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한국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
[김영사/책증정] 다니엘 튜더 소설 《마지막 왕국》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어크로스/책증정] <뉴요커> 칼럼니스트 콜린 마샬과 함께 진짜 한국 탐사하기!
논픽션의 유혹!
중독되는 논픽션–현직 기자가 쓴 <뽕의계보>읽으며 '체험이 스토리가 되는 법' 생각해요[그믐북클럽] 7. <더 파이브> 읽고 기억해요 [벽돌책 챌린지] 2. 재난, 그 이후글쓰기 책 함께 읽기 네 번째, 《네 번째 원고-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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