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D-29
하루키와 맞는 것 같다. 일단은 그의 작품을 계속 읽으려고 한다. 다음 내게 맞는 일본 작가나 다른 세계적인 작가를 만날 때까지
나는 다른 사람이 내 책을 읽고 뭔가 외부활동을 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냥 내 안에 있는 콘텐츠를 지금은 그냥 책이라는 형태에만 발표하고 싶은 것이다. 다른 활동은 그걸 방해하기 때문에 싫다. 나는 글에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고 있는 중이다.
소설가들 중에 성격이 특이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비록 자기가 그냥 현실에서 평범하게 살아도 그렇다. 그런 성격 때문에 실은 소설가가 된 것 같지만.
잘 쓴 글은 내용이 예상되면 안 된다. 무슨 교훈적인 것도 안 된다. 그리고 대개는 처음 들었거나 뭔가 느낌이 달라야 한다.
역시 유시민하고 김영하는 TV에 나와서도 역시 작가라 일반인이 사용하는 상식은 잘 말하지 않고 독특한 말을 한다. 역시 작가라 많이 안다.
나는 혼자 하는 걸 좋아해 고난도 있었지만, 이 순간들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교 들어가기 전 나는 썰매를 많이도 만들었다. 송판에 철사를 박고, 송곳도 거기에 맞게 오리나무를 구해 못대가리를 없애고 거꾸로 박았다. 초가집 굴뚝 처마 밑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느긋하게 작업했다. 철사와 못을, 나무에 잘 들어가게 불에 달궜다. 동네 형들이 내게 썰매를 얻으려고 줄을 섰다. 나중엔 돈을 받고 팔았다. 돈은 선불로, 예약까지 받았다. 동생들까지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큰 애는 회계 담당, 작은 애는 작업장 세팅 및 심부름꾼. “태식아, 내 썰매 멀었냐?” “형, 좀 기다려요.” 썰매에 쓰는 동네 철사란 철사는 내게 모두 작살났다. 한번은 곡식을 까부는 이웃집의 손풍구에 달린 철사를 자르다가 주인에게 걸려 주인이 얼마나 꼭지가 돌았는지(이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부락에서 철사가 없어지기만 하면 무조건 나한테 왔다) 낫을 들고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나를 쫓아온 적도 있었다. 그 주인이 미친 줄 알았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도망치면서 이럴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싫으면서도 슬펐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동네서도 철사 구하기가 여의치 않자 걸어서(그때는 버스도, 하다못해 자전거도 없었다) 30리가 넘는 장터로 가서 철사를 구하거나 동네에 가끔 들어오는 엿장수에게 철사를 주고 엿 바꿔먹은 게 아니라 거꾸로 깨진 솥, 고무신 등이나 거금을 주고 철사를 엿장수에게 오히려 샀다. 나는 그때 좋은 썰매를 만들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썰매를 목숨 바쳐 만든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국어에 홀딱 빠졌다. 한번은, 서울대 법대 간 애가 전 과목에서 국어만 나 때문에, 일등을 놓친 게 분한지 내게 다가와 국어 잘하는 비결을 빵을 사주며 물었다. “비결 같은 거 없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야.” 내 목소리엔 거드름이 묻어났다. 그 애 앞에서 뻐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국어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역대 위대한 왕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나중에 십만 원 지폐가 나오면 만 원 지폐에서 빠져나와 거기에 실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실은, 여기엔 밝혀지지 않은 사연이 있다. 학교에선 골고루 공부해야 하는데, 국어만 하는 게 딴엔 낯 뜨거워 다른 과목을 국어책 옆에 펴놓고 그걸 하는 척하면서 오로지 국어만 팠다. <선데이 서울> 같은 불온서적이나 이현세의 까치나 이상무의 독고탁 만화를 밑에 깔고 교과서나 참고서를 보는 척하는 게 정상인데, 나는 국어책을 밑에 까는 이상 행동을 보인 것이다. 국어만 편식하고 편애했다. 90년대, 회사에 들어와선 컴퓨터에 탐닉했다. 주변 지인이나 회사, 거의 모든 컴퓨터를 고쳤다. 컴퓨터 경진 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 당시엔 컴퓨터만 보였다. 어쩌다 옛 동료를 만나면 지금도 컴퓨터를 하느냐고 묻는다. “지금은 눈도 침침하고, 초창기의 PC처럼 순수함이 사라진 것 같아. 지금은 AI가 뭐든 더 잘하잖아, 내가 굳이.” 나는 워드를 비롯해, 정보처리기사, 리눅스 마스터, PC 정비사, 인터넷 보안전문가 등 컴퓨터 자격증을 15개나 땄고, 뭐든 오래 하면 나름 철학이 생긴다고, 컴퓨터도 사람 같아서 자기를 아껴주고 격하게 사랑하면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 당시 컴퓨터를 함부로 다루는 인간을 제일 혐오했다. 컴퓨터가 돌고 있는데 발로 툭툭 치거나 옮기는 인간을,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플래터를, 스핀들의 헤드가 긁어 데이터가 망가질 수도 있다는 걸 정녕 모른단 말인가? “무식한 새끼, 네가 컴퓨터를 알아!” 나중엔 이건 나만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 당신엔 울화통이 터졌다. 나를 만나는 컴퓨터는 내 말을 아주 잘 들었다. 묵묵히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나중엔 컴퓨터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주인님, 오셨습니까?” “오냐, 너는 여기가 아프구나. 음, 어디 좀 보자.” 용한 의원이 환자 겉모습만 보고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듯 나도 그런 경지에 기분만은 올라섰다. 지금은 책만 끼고 산다. 책이 나이고, 내가 곧 책이라 여긴다. 이제 내게 책은 거의 신의 경지까지 등극했다. 그래 내가 지금 읽는 책에, 감사의 절을 매일 올린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책은 내 나머지 생의 동반자라 생각하며 같이 갈 생각이다. 컴퓨터에 빠져 하나하나 자격증을 따는 것에 흐뭇했는데, 이젠 매년 한 권의 책을 내는 것에 심각한 자긍심을 느낀다. 나는 새로운 차원의 영감이 떠오를까 싶어 술을 띄엄띄엄 코가 삐뚤어지게 퍼마시고, 땅바닥을 기어보는, 남과 자신조차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어 생의 밑바닥을 허우적거려 본다.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과도 대화에서 사이가 틀어질까 굳이 걱정하지 않는다. 사실 이들이 내게, 쓸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덕담만 주고받는 대화는 기분만 좋지, 사실 글 소재로 건질 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은 모든 게 글로 수렴되어 있다. 종합하면, 내 성향이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같이 하는 것보다 남 간섭없이 혼자 하는 것에 빠지고 그걸 하며 아니, 즐기며 깊은 행복감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지금, 현실에서 오는 혼란과 울분도 책으로 들어가면 눈처럼 사르르 녹고 만다.
유시민의 말 정리(2) 성공하지 못할 걸 알고 아무도 칭찬해 주지도 않고 지지도 남들의 관심도 없는 일을 꾸역꾸역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게 성공할 것 같은 생각으로 그 성공을 위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사람은 그 성공이 목적이라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지만 그런 게 아니고 자신의 비참함을 참지 못하고 내가 이걸 하지 않으면 평생 비참함 속에서 살아갈 것 같기에, 자기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러는 것이기에, 그가 비록 그게 성공할 거라고 믿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하는 사람은 그게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은 본래 자신의 비참함을 견딜 수 없어 그런 것이기에 성공을 못 한다 해도 좀 서운하기는 하겠지만 자신은 비참하진 않았기에 성공만을 목적으로 한 사람보단 좌절을 덜 겪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사람은 이런 목적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고, 저런 목적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다 존중받아 마땅하면서도 자신은 자신이 믿는 것을 계속 지켜나갔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비참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거다. 민주주의는 독재와 반대인데 민주주의가 만능은 아니고 민주 제도에서 다수결에 의해 잘못된 지도자를 뽑을 수도 있는데 그가 정치를 잘못하면 그를 갈아치울 수 있는 게 민주주의의 핵심 장점이라는 것이다. 반대인 독재는 그게 국민 마음대로 안 되는 사회이고. 그 사회가 민주적인 사회냐 아니냐 하는 기준은 국민이 정권을 중간에 중단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란다. 그 반대가 독재거나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글쓰기는 남을 설득하기 위한 것보다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것이며 남은 사실 자기 글로 인해 설득당해 변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글쓰기의 본래 목적은 자기표현이 우선이고 내 글로 인해 독자가 공감하고 소통이라도 하게 되면, 본래 자신의 표현이 목적이기 때문에 내 논리에 그가 변하지 않아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글은 어떤 사람을 설득해서 바꾸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을 바꾸는데, 하나의 기회 제공 정도의 힘만 준다는 것이다. 상대가 변한다면 내 글의 논리로 변한 게 아니라 내 글에서 제시한 자료에 의해 더 그럴 수 있다는 거다. 내 논리적인 글 내용대로 그가 변하는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변하는데 내 글이 하나의 계기만 제공할 뿐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내 글 때문에 그가 변하는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자기를 변화시키는데 내 글을 이용한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내 글이 그를 변화시키는 데에 약간 필요했을 뿐 충분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거다. 유시민의 서울대 글쓰기 특강에서 어떤 질문자가 어떤 역사소설, 대하소설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박경리의 <토지>를 제일로 치고, 황석영의 <장길산>은 과장이 심하고 이문열의 <영웅시대>는 역사를 왜곡했다고 하는데 박경리의 <토지>를 제일로 친 이유는 정직하게 표현해서라고 했다. 거기엔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주 중에도 좋은 지주가 있고, 소작농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악인도 분명 있다고 정직하게 표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글은 현실을, 과장이나 왜곡 없이 정직하게 그대로 드러내야 하고, 자신을 속이면 계속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내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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