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보르헤스 읽기] 『셰익스피어의 기억』 1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원반] 짧지만 짧은 만큼 여러 상징으로 가득한 단편입니다. 자세히 보면 어떤 극명한 대립 구도가 설정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색슨 왕국과 오늘날의 영국, 방랑자와 그를 맞이하는 고행자, 왕과 목수, 북구의 오딘과 기독교의 예수, 마술적 원반(disk)과 도끼의 이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딘은 방랑자였고, 예수는 목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의 면만 존재하는 오딘의 마술적 원반은 기독교적 세계를 살아가는 나무꾼에게는 존재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물건일 것입니다. 오딘의 자손에게는 가능한 물건이 그리스도를 믿는 나무꾼에게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단편은 유럽 대륙에서 거대한 두 세계관이 만나서 파열한 역사를 그리고 있다고 볼 여지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딘의 후손인 이세른 왕은 단 한 면만 존재하는 원반을 쥐고 있지만 어쩐지 손을 펴도 그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 그가 원반의 '존재하는 면'을 자신의 손바닥, 그러니까 아래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따라서 그가 손바닥을 펴서 보여주려고 해도 '존재하지 않는 면'이 위로 가 있기 때문에 나무꾼이 보지 못한 것이지요. 심지어 이세른 왕 자신에게조차 원반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철저히 2차원에 종속된, 부피 없는 원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보르헤스는 예전부터 자신의 소설 속에서 두 개의 면으로 이뤄진 동전(⟨자히르⟩)이나 모든 것으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지점(⟨알레프⟩)을 언급해왔습니다. 이 디스크, 그러니까 원반은 앞선 작품들에 등장하는 '불가능한 사물'의 연장선상에 놓입니다. 자히르처럼 이 원반은 그 자체로 두 개의 면을 암시하지만 한쪽 면만 존재하는 마술적인 물건입니다. 그 이면은 존재하지 않고 대신 암시될 뿐이며, 애초에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원반과 자히르의 뒷면, 그 이면은 굳이 표현하자면 '없음의 있음', '보이지 않지만 있음'으로 있습니다. 동전과 원반은 모두 두 개의 면으로 이뤄진 조형을 띠지만, 전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후면을 암시하고 숨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특이한) 조형을 볼 때 한 번에 하나의 면만 볼 수 있는 겁니다. 누구도 지금 눈앞에 놓인 종이의 문면을 보면서, 그 뒤편의 문면을 함께 읽을 수 없는 것처럼요.
그가 돌아섰다. 그로 하여금 비칠거리다 쓰러지게 만드는 것은 목 뒤를 내려친 단 한 차례의 도끼질로 충분했다. 그러나 쓰러지면서 그가 손바닥을 벌렸고, 나는 허공에서 반짝거리는 무엇을 보았다. 나는 도끼질로 그 자리를 잘 표시해 놓은 다음 시체를 물이 잔뜩 불어 있는 개울로 끌고 갔다. 그곳에 나는 시체를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원반을 찾아보았다. 나는 그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계속 그것을 찾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모래의 책] 매력적인 제사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조지 허버트의 시 ⟨The Collar⟩의 한 행입니다. 조지 허버트는 훗날 하느님에게 귀의해서 사제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위 시의 마지막 행에서 화자는 하느님이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서 "예 주님"이라고 응답하며 시를 끝냅니다. 이 작품은 단편집 ⟪픽션들⟫의 ⟨바벨의 도서관⟩이 여러 모로 연상됩니다. 하지만 '바벨의 도서관'에서는 거울을 배치함으로써 무한히 증식하는 그 빼어나고 체계적인 구조가 돋보인다면, '모래의 책'은 그러한 체계적인 구조가 부각되지는 않습니다. ⟨바벨의 도서관⟩이 모든 책의 스펙트럼을 무한히 연장해놓은 하나의 컬렉션이며 철저한 규칙의 지배 하에 있는 하나의 구조물이라면, ⟨모래의 책⟩은 스펙트럼이 없는, 무한히 불연속적인 페이지들의 대중없는 모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러한 이행 과정을 굳이 제가 이해한 대로 표현하자면, 거대한 구조물에서 한 권의 책으로 이행한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붙잡으려고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모래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모래의 책은 포착 불가능한 어떤 것들의 불완전하고 불연속적인 모음입니다. 젊은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이었던 모습이 만년에 이르러서 모래의 책으로 변화한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모래의 비유는 적절합니다. 모래 한 알과 또 다른 모래 한 알은 일견 닮아보입니다. 하지만 더 세밀한 시선으로 보면 세상에 완벽히 똑같은 두 개의 모래란 불가능합니다. 범박하게 바라보고 쉽사리 유추하고 은유하는 인간의 인식에서 볼 때 각각의 모래알들은 비슷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래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처럼, 모래의 책 역시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재밌었습니다. 보르헤스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 책을 차마 태워버리지 못하고(무한한 페이지에서 피어오르는 무한한 연기 때문에 지구가 질식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90만 권의 장서량을 자랑하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의 어느 서가에 버리고 옵니다. 이는 무한에 대한 보르헤스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르헤스에게 무한은 개개의 유한한 어떤 것들이 죽 늘어선 스펙트럼의 소실점에 놓이지 않습니다. 보르헤스의 무한은 유한 속으로 숨어들어갑니다. 그렇게 바벨의 도서관이 건립되고, 알레프가 보이고, 모래의 책이 완성됩니다. 이는 유한 속에 무한을 숨기는 것이며, 전체보다 큰 부분을 가능하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 무한을 인식하는 방식이 꼭 이러합니다. '전체보다 큰 부분'이라는 역설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인간은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보는 식으로 세계를 은유하며 살아왔던 게 아닐까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나뭇잎을 숨기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는 숲이라는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은퇴하기 전 90만 권의 책의 소장되어 있는 국립도서관에서 일했다. 따라서 나는 입구 오른쪽에 신문과 지도를 보관해 놓는 지하실로 뚫려 있는 굽은 층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축축한 서가 속에서 ⟨모래의 책⟩을 잃어버리기 위해 사서들아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했다. 나는 출입구로부터 어느 높이, 어느 정도의 거리에 그 책을 두었는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국립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는 멕시코 가에 결코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3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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