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보르헤스 읽기] 『셰익스피어의 기억』 1부 같이 읽어요

D-29
맞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사랑을 알았고, 그리고 죽음을 보았던 거지요.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보고, 아니 적어도 모든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볼 수 있게끔 운명지어져 있지요. 그러나 내게는 한 밤으로부터 아침 사이에 그 두 가지 본질적인 것들이 드러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거지요. 세월이 지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들려주었는 지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실제로 일어났던 그 사건들인지, 아니면 그것들은 내가 들려주었던 언어들인지 확실치가 않아요. 아마 라 까우띠바에게도 인디언의 습격과 관련하여 같은 일이 벌어졌었겠지요. 이제는 더 이상 모레이라가 죽는 것을 본 사람이 나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요.
셰익스피어의 기억 80-8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거울과 가면] 카프카의 단편에서 볼 법한 짧고 의뭉스러운 소설입니다. 카프카의 ⟨선고⟩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이 단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후일 바이킹의 시대를 종식시켰다고 일컬어지는 클론타프 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아일랜드의 대왕은 전쟁이 끝난 뒤 한 시인을 불러서, 자신이 아이네아스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밝힙니다. 따라서 시인이 아이네아스를 기록한 버질이 되어 "승리와 영광에 관한 시"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줍니다. 1년 뒤, 반란이 일고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시인인 오얀은 시를 약속대로 시를 지어옵니다. 아일랜드의 왕은 감탄하며 그 신뢰의 증거로 거울을 하사합니다. 그리고 한 번 더 1년이라는 시간을 주면서 시를 지어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오얀이 지어온 시를 보며 왕은 감탄하고, 황금 가면을 하사하면서 3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한 번 더 시인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합니다. 1년이 더 지난 어느 날 오얀은 이전과 많이 달라진 행색으로 찾아와서 단 한 줄로 된 시를 읊습니다. 왕은 마찬가지로 시가 위대하다는 증거로 시인에게 단검을 하사합니다. 시인은 단검을 하사 받은 뒤 궁을 나서자마자 단검을 자결합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거울과 가면은 정말 많이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저는 이 우화가 정확히 무얼 가리키는지는 모르지만, 거울과 가면이 모두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특유의 관념성을 만들어내는 소재라는 것은 압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추가된 마지막 '단검'은 무얼 뜻하는 걸까요? 저는 그 상징과 은유에 대해서 알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다만 거울과 가면이 무언가를 되비추고 가리는 용도로 활용되는 반면, 단검은 무언가를 찢고 가르고 베는 구체적인 용도로 활용된다는 사실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죄⏤왕이 속삭이듯 말했다⏤, 인간은 알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미⟩를 알게 된 죄. 이제 우리는 그 죄값을 치러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나는 이전에 그대에게 거울과 금으로 된 가면을 주었지. 이제 마지막이 될 세번째 선물을 주도록 하겠네." 왕이 시인의 오른손에 단검을 놓았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8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운드르] 늘 그렇듯이, 이 단편도 해적판으로 추정되는 ⟪독일연감(Analecta Germanica)⟫이라는 책에서 발견한 한 원고로부터 시작합니다. 보르헤스는 해당 책에서 브레멘의 아담('아단 드 브레멘' 혹은 '아담 폰 브레멘')이 운드르를 찾아나선 이야기를 읽고서 그것을 자신이 스페인어로 직역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게 보르헤스는 출처가 불분명한 이 원고를 입수하게 된 얘기를 하면서도 사실관계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실수인지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그 내용인즉, 라펜베르크라는 인물이 보들레르 연구소에서 소장 중이던 원고를 입수했고, 훗날 그것을 자신의 1894년 판 ⟪독일연감⟫에 수록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독일연감⟫이라는 책은 실존하는 책이긴 합니다만, 이 책은 독일어 문헌과 관련한 원고를 모아서 편집한 책이라서 특정 저자가 아니라 다양한 저자의 글이 포함돼 있습니다. 한 개인의 저서로 볼 순 없습니다. 나아가, 라펜베르크는 독일의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추정되는 실존 인물인데, 그는 1865년에 죽었으므로 ⟪독일연감⟫에 운드르에 관한 글을 수록하기로 결정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초반부 원고의 출처를 밝히는 내용의 사실관계는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나 왜곡돼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내용 얘기를 하겠습니다. 원고에서 브레멘의 아담은 룬 문자처럼 문자를 돌에 새기는 '우른'이란 종족을 만난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담은 아이슬란드 출신의 시인 울프 시거다슨을 만나서, 우른이라는 땅에서는 단 하나의 단어로 된 시를 쓴다는 얘기를 전해듣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 한 단어를 찾는 여정을 떠납니다. 아담은 우여곡절 끝에 우른에 당도하고 군나르 왕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율하는 듯 현을 퉁기는 소리와 함께 그토록 바라던 '한 단어'를 듣게 됩니다. 아담은 그것이 자신이 찾던 한 단어임을 알았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왕의 사람들로부터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만 듣습니다. 나아가, 그 누구도 그 단어를 가르칠 수 없으며, 다만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만 말합니다. 그때부터 어떤 자기 희생적인 여정이 다시 시작됩니다. 한편, 작품 초반에 오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딘은 룬 문자를 얻기 위해 자신을 자신에게 제물로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오딘은 투창인 궁니르에 겨드랑이가 꿰뚫린 채로 이드그라실이라는 나무에 자신을 9일 동안 매달린 끝에 지하계에서 룬 문자를 알아내기에 이릅니다. 어떤 지(知)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보여주는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이런 일화는 단편에서 브레멘의 아담이 단 한 단어로 된 시를 찾아나서는 자기 반복적인 여정과 일견 닮아 있습니다. 아담은 세상을 돌며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여러 사람인 모든 사람이 되며, 단 한 번의 사랑을 하고, 몇 번의 살인을 한 끝에 다시 우른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언젠가 한번 들었던 하프 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운드르'라는 단어를 듣습니다. 그 순간 자신이 거쳐온 인생의 모든 행로가 되살아가면서 브레멘의 아담은 하프를 쥐고 다른 어떤 단어를 노래합니다. 이윽고 "당신은 이제 깨달은 거예요"라는 말을 들으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굉장히 이상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모든 말을 대신하는 단 하나의 말, 단 하나의 단어, 단 한 음절로 된 시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보르헤스는 글쓰기에서도 점점 단순한 스타일로 나아갔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좀더 짧고 교훈적인, 그런 오래된 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보르헤스의 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선천적으로 약한 시력을 가지고 태어난 조부 세대를 보면서 보르헤스는 핏속을 흐르는 자기 운명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표현했던 대로, "여름철의 황혼처럼" 시력은 천천히 잦아들었고, 꼭 그처럼 그가 천착했던 주제들도 그에게 서서히, 작고 소박한 형태로 찾아오고 있었던 겁니다. 브레멘의 아담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군나르 왕 앞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그 단어는 이미 주어져 있던 것입니다. 이후 아담의 삶은 그 주어져 있는 단어, 언젠가 한번 들은 말의 의미를 스스로 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습니다. 인간은 찾는 존재가 아니라 회복하는 존재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 삶의 그 많은 신산함과 아름다움, 단 한 번의 사랑과 몇 번의 살인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나는 그 죽어가는 사람의 시에 금세 빠져들어갔지요. 그런데 나는 그의 시와 그의 음조 속에서 나의 시들과, 내게 첫사랑을 주었던 여자 노예, 내가 죽였던 사람들, 차가운 기운의 새벽, 물위에 비치는 여명, 노(櫓)들을 보게 된 거예요. 나는 하프를 집어들고 다른 한마디 말을 했지요.
셰익스피어의 기억 9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지친 자의 유토피아] 제목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먼 미래 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남자'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어떤 갈등과 여정이 있는 이야기라기보다는 간밤의 꿈에서 만난 사람과 나눈 대화록 같습니다. '나'는 수천년 후의 미래인인 어떤 남자를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그 주제는 언어, 독서, 시간, 국가, 정치, 사유재산, 노년, 문화, 이름, 시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남자'가 말하기를 미래의 세계는 라틴어로 되돌아갔으며, 인쇄는 폐지되었고, 정치인은 모두 사라지고 코미디언이나 심령치료사가 되었으며, 더 이상 시간은 분절되고 지엽적이지 않으며 다만 연속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언젠가의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히틀러는 박애주의자가 되어 있습니다. 재밌게 본 지점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나'가 '어떤 남자'와 환상 소설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여기는 두 권의 책으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토머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드는 대목입니다. 또한 "언어란 일종의 인용체계"이며 미래인들에게는 인용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는 대목도 흥미롭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다음 책을 읽는 속도가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이전의 독서가 지금의 독서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훼방을 놓는다고 느낍니다. 모르긴 몰라도 제 머릿속에서도 어떤 서재가 있어서, 새로운 책이 들어올 때마다 전체의 큐레이션을 바꾸어야 한다고 느껴서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새 책이 들어오면 새로 배열해야 하기 때문에 점점 다음 책을 읽을 때 버겁고 더뎌지는 이상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소설 속 대화에 더 공감이 갔습니다. 미래인들에게는 더 이상 인쇄물이 없다는 얘기가 저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다.
아무도 2천 권의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았던 4세기 동안 나는 채 여섯 권의 책조차도 읽지 못했을 겁니다. 인쇄란, 이미 폐지된 것이지만 인간의 가장 나쁜 해악들 중의 하나였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불필요한 텍스트들을 현기증이 일 정도로 증식시키곤 했으니까요. (···) 그것들은 읽고 나서 곧 잊혀져야 할 것들이었지요. 왜냐하면 또 다른 자질구레한 것들이 그것들을 지워버리게 될 것이었으니까요. 모든 직무 중 정치적 직무야말로 가장 공적인 거지요. 한 사람의 대사, 또는 장관은 모터사이클과 현병들에게 둘러싸이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길고 떠들썩한 자동차 행렬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일종의 불구자지요. 그들은 마치 다리가 잘린 사람들 같아, 하고 내 어머니가 말씀하시곤 했지요.
셰익스피어의 기억 102-10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매수] '미국성'이라고 할 만한 특성이 잘 드러난 단편이 아닌가 합니다. 앞서 살펴본 몇 개의 단편과 마찬가지로 '이민자'로서 아이너슨과 '자국민'으로서 윈드롭이 서로 맞서다가 그 이후에 일견 화해하는 구도로 흘러갑니다. 중간에 문학적인 논쟁 내용은 잠시 접어두고 보더라도, 아이너슨이 이민자로서 주류 학계에 편입되려는 욕망과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 계략을 실행하는 과정은 감탄할 만합니다. 아이너슨은 자신과 허버트 중 한 사람이 콘퍼런스에 참여할 자격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서, 결정권자인 윈드롭을 포섭하려 합니다. 아이너슨은 참석자로 지명되기 위해서 계략을 짜는데, 그것은 자기 실명을 밝힌 채 윈드롭이 난처해 할 만한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아이너슨은 윕드롭이 공개적으로 복수를 가할 성품도 아니거니와, 사소한 복수심에 불타 불이익을 주는 사람으로 비춰지기 싫어한다는 걸 간파하고서 그런 전략을 짠 것입니다. 결국 아이너슨은 윈드롭이 지닌 지식인 특유의 공명정대함을 십분 활용하고자, 자신의 포지션을 프로타고니스트에 둡니다. 아이너슨은 이민자로서 어떻게든 주류 학계에서 편입되기 위해 허영심을 발휘했고, 윈드롭은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아이너슨에게도 끝까지 공명정대해야 한다는 지식인 특유의 허영으로 응답합니다. 이는 아이너슨이 작중 제기한 문제, 그러니까 문학에서 텍스트를 읽을 때 반드시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맞물립니다. 아이너슨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서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기존의 관점을 부정하고, “일상적 언어가 침윤되어 있는 11세기의 시 ⟨무덤⟩으로부터 시작해 최초의 작품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안은 주류 학계로 편입되려는 아이너슨의 '어그로'인 동시에, 이미 윈드롭이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었던 교육 방침의 과장된 거울상이었습니다. 아이너슨은 다만 그것을 일깨워주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대화에서도 보듯, 두 사람을 악수시키고 있는 것은 그들이 지닌 각기 다른 허영심, 그리고 문화적 용광로로 대변되는 미국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어떤 사람이 먼 곳으로 이민을 가려고 결정하면 그는 자신에게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철저하게 주입시킵니다. 근본적으로 문헌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나의 첫번째 두 소품들은 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 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것으로는 충분치가 않았지요. 나는 한 두 줄 정도 빠뜨릴까 모두 암송할 수 있는 말돈의 발라드 시에 관해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나는 예일대학 출판부로 하여금 그것에 대한 비평서를 출판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지요. 당신이 알고 있는 바대로 그 시는 노르웨이의 승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후기 아이슬랜드 사가에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억측에다 얼토당토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그러한 반론을 포함시킨 것은 단지 영어 사용권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1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벨리노 아레돈도] 1897년 8월 25일,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있었던 대통령 총격 테러 사건을 보르헤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당시 교회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보르다 대통령은 아벨리노 아레돈도라는 이름의 한 청년에게 암살당합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인 이 사건과 관련한 자료를 보면서, 이 '외로운 늑대'의 내면을 픽션으로 추적해봅니다. 외로운 늑대, 외톨이 늑대란 기관이나 집단에 속해 있지 않고, 일체의 명령도 하달받지 않은 채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테러리즘을 준비하거나 수행한 사람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마지막 대통령 총격 이후 아레돈도가 투항하면서 뱉는 대사입니다. 물론 이 대사들은 보르헤스적 상상력이 가미된 것일테죠. 그럼에도 이러한 대사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레돈도는 총격 후에 이 모든 일을 스스로 행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합니다.
죄수나 장님에게 가벼운 경사를 따라 흐르는 듯한 시간은 마치 지하수처럼 흐른다. 자신의 은둔 생활을 반쯤 마친 아레돈도는 한 차례 이상 거의 시간 없는 시간을 경험하곤 했다. 집에 있는 세 개의 마당 중 첫번째 것에는 바닥에 두꺼비가 살고 있는 연못이 하나 있었다. 그는 단 한번도 영원의 경계선에 있는 그 두꺼비의 시간이 자신이 찾고 있는 시간이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적이 없었다. 이제 목표의 날짜가 얼마 남지 않게 되자 그는 초조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진 그는 거리로 나갔다. 모든 게 다르게 보이고 더 커보였다. 한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는 불빛을 보았고, 그 주막으로 들어갔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2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원반] 짧지만 짧은 만큼 여러 상징으로 가득한 단편입니다. 자세히 보면 어떤 극명한 대립 구도가 설정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색슨 왕국과 오늘날의 영국, 방랑자와 그를 맞이하는 고행자, 왕과 목수, 북구의 오딘과 기독교의 예수, 마술적 원반(disk)과 도끼의 이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딘은 방랑자였고, 예수는 목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의 면만 존재하는 오딘의 마술적 원반은 기독교적 세계를 살아가는 나무꾼에게는 존재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물건일 것입니다. 오딘의 자손에게는 가능한 물건이 그리스도를 믿는 나무꾼에게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단편은 유럽 대륙에서 거대한 두 세계관이 만나서 파열한 역사를 그리고 있다고 볼 여지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딘의 후손인 이세른 왕은 단 한 면만 존재하는 원반을 쥐고 있지만 어쩐지 손을 펴도 그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 그가 원반의 '존재하는 면'을 자신의 손바닥, 그러니까 아래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따라서 그가 손바닥을 펴서 보여주려고 해도 '존재하지 않는 면'이 위로 가 있기 때문에 나무꾼이 보지 못한 것이지요. 심지어 이세른 왕 자신에게조차 원반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철저히 2차원에 종속된, 부피 없는 원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보르헤스는 예전부터 자신의 소설 속에서 두 개의 면으로 이뤄진 동전(⟨자히르⟩)이나 모든 것으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지점(⟨알레프⟩)을 언급해왔습니다. 이 디스크, 그러니까 원반은 앞선 작품들에 등장하는 '불가능한 사물'의 연장선상에 놓입니다. 자히르처럼 이 원반은 그 자체로 두 개의 면을 암시하지만 한쪽 면만 존재하는 마술적인 물건입니다. 그 이면은 존재하지 않고 대신 암시될 뿐이며, 애초에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원반과 자히르의 뒷면, 그 이면은 굳이 표현하자면 '없음의 있음', '보이지 않지만 있음'으로 있습니다. 동전과 원반은 모두 두 개의 면으로 이뤄진 조형을 띠지만, 전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후면을 암시하고 숨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특이한) 조형을 볼 때 한 번에 하나의 면만 볼 수 있는 겁니다. 누구도 지금 눈앞에 놓인 종이의 문면을 보면서, 그 뒤편의 문면을 함께 읽을 수 없는 것처럼요.
그가 돌아섰다. 그로 하여금 비칠거리다 쓰러지게 만드는 것은 목 뒤를 내려친 단 한 차례의 도끼질로 충분했다. 그러나 쓰러지면서 그가 손바닥을 벌렸고, 나는 허공에서 반짝거리는 무엇을 보았다. 나는 도끼질로 그 자리를 잘 표시해 놓은 다음 시체를 물이 잔뜩 불어 있는 개울로 끌고 갔다. 그곳에 나는 시체를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원반을 찾아보았다. 나는 그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계속 그것을 찾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모래의 책] 매력적인 제사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조지 허버트의 시 ⟨The Collar⟩의 한 행입니다. 조지 허버트는 훗날 하느님에게 귀의해서 사제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위 시의 마지막 행에서 화자는 하느님이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서 "예 주님"이라고 응답하며 시를 끝냅니다. 이 작품은 단편집 ⟪픽션들⟫의 ⟨바벨의 도서관⟩이 여러 모로 연상됩니다. 하지만 '바벨의 도서관'에서는 거울을 배치함으로써 무한히 증식하는 그 빼어나고 체계적인 구조가 돋보인다면, '모래의 책'은 그러한 체계적인 구조가 부각되지는 않습니다. ⟨바벨의 도서관⟩이 모든 책의 스펙트럼을 무한히 연장해놓은 하나의 컬렉션이며 철저한 규칙의 지배 하에 있는 하나의 구조물이라면, ⟨모래의 책⟩은 스펙트럼이 없는, 무한히 불연속적인 페이지들의 대중없는 모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러한 이행 과정을 굳이 제가 이해한 대로 표현하자면, 거대한 구조물에서 한 권의 책으로 이행한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붙잡으려고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모래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모래의 책은 포착 불가능한 어떤 것들의 불완전하고 불연속적인 모음입니다. 젊은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이었던 모습이 만년에 이르러서 모래의 책으로 변화한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모래의 비유는 적절합니다. 모래 한 알과 또 다른 모래 한 알은 일견 닮아보입니다. 하지만 더 세밀한 시선으로 보면 세상에 완벽히 똑같은 두 개의 모래란 불가능합니다. 범박하게 바라보고 쉽사리 유추하고 은유하는 인간의 인식에서 볼 때 각각의 모래알들은 비슷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래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처럼, 모래의 책 역시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재밌었습니다. 보르헤스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 책을 차마 태워버리지 못하고(무한한 페이지에서 피어오르는 무한한 연기 때문에 지구가 질식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90만 권의 장서량을 자랑하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의 어느 서가에 버리고 옵니다. 이는 무한에 대한 보르헤스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르헤스에게 무한은 개개의 유한한 어떤 것들이 죽 늘어선 스펙트럼의 소실점에 놓이지 않습니다. 보르헤스의 무한은 유한 속으로 숨어들어갑니다. 그렇게 바벨의 도서관이 건립되고, 알레프가 보이고, 모래의 책이 완성됩니다. 이는 유한 속에 무한을 숨기는 것이며, 전체보다 큰 부분을 가능하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 무한을 인식하는 방식이 꼭 이러합니다. '전체보다 큰 부분'이라는 역설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인간은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보는 식으로 세계를 은유하며 살아왔던 게 아닐까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나뭇잎을 숨기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는 숲이라는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은퇴하기 전 90만 권의 책의 소장되어 있는 국립도서관에서 일했다. 따라서 나는 입구 오른쪽에 신문과 지도를 보관해 놓는 지하실로 뚫려 있는 굽은 층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축축한 서가 속에서 ⟨모래의 책⟩을 잃어버리기 위해 사서들아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했다. 나는 출입구로부터 어느 높이, 어느 정도의 거리에 그 책을 두었는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국립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는 멕시코 가에 결코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3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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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며 작품 함께 읽어요.
[Re:Fresh] 3. 『채식주의자』 다시 읽어요.[라비북클럽](한강작가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1탄) 작별하지 않는다 같이 읽어요
"우리 골목을 광장으로 만드는 법" 성북구 비문학 최종후보도서 4권을 소개합니다.
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①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② 『공감의 반경』 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③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 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④ 『탄소로운 식탁』
버지니아 울프를 읽어요.
[그믐밤] 28. 달밤에 낭독,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서울외계인] 버지니아 울프,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읽기<평론가의 인생책 > 전승민 평론가와 [댈러웨이 부인] 함께 읽기
믿고 읽는 그믐북클럽 🌘
[그믐북클럽X교보문고sam] 23. <좋은 불평등> 읽고 답해요[그믐북클럽X교보문고sam] 22. <더 나은 세상> 읽고 답해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었습니다
강릉교육문화관 <생존독서>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다정한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나서<도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서평 쓰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조선과 한국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
[김영사/책증정] 다니엘 튜더 소설 《마지막 왕국》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어크로스/책증정] <뉴요커> 칼럼니스트 콜린 마샬과 함께 진짜 한국 탐사하기!
논픽션의 유혹!
중독되는 논픽션–현직 기자가 쓴 <뽕의계보>읽으며 '체험이 스토리가 되는 법' 생각해요[그믐북클럽] 7. <더 파이브> 읽고 기억해요 [벽돌책 챌린지] 2. 재난, 그 이후글쓰기 책 함께 읽기 네 번째, 《네 번째 원고-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책방연희>의 다정한 책방지기와 함께~
[책방연희X그믐] <책 읽다 절교할 뻔> 번외편 <내가 늙어버린 여름> 읽기[책방연희X그믐] 책 읽다 절교할 뻔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끝나지 않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읽기 행렬!
[라비북클럽]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같이 읽어요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진주문고 서점친구들]비문학 독서모임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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