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D-29
하루키는 에세이도 어렵게 안 쓰고 쉽게 잘 쓰는 것 같다. 진짜 일본의 글쟁이다. 나에게 딱 맞는다. 나는 앞으로도 하루키 작품을 두 권은 더 읽을 예정이다. 나에게 딱 맞는 글쟁이다.
나에 대해 그냥 A형 인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고, 나에 대해 2박3일동안 표현해도 모자라기도 한다.
다양해져 남을 포용하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솔로’에 나오는 인간들을 보면 정 코스를 밟아 자기 스펙을 자랑하러 나온 인간들 같다. 이런 인간들이 그 자식들을 나으면 그 비슷한 것들만 연속적으로 양산할 것이다. 그럼, 세상은 그런 것 투성이가 된다. 마치 상품처럼 비슷비슷한 인간들만 즐비하고 그들은 뭉쳐서 다른 종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할 것이다. 원래 인간들은 그렇게 고상하지 않다. 다른 것을 척결하려고 든다. 이런 살벌한 세상에 누가 애를 나으려고 하겠나. 그래, 세상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발 좀 이상한 사람들도 기를 좀 펴게 사람으로 쳐줘라. 사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성과 포용이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이게 점점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정 코스의 인종들을 사회에서 너도나도 권장한다. 그러니 인간 세상은 점점 삭막해져 가고 좀 이상한 인간들은 상처를 입고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큰일이다. 좀 사람들이 깨쳐서 이런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조직은 신뢰가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래 거짓말도 통일해서 해야 한다. 그만큼 조직의 신뢰는 중요한 것이다. 지금 나라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게 되었다. 큰일이다.
나는 혼자 하는 걸 좋아해 이 순간들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학교 들어가기 전 나는 썰매를 많이도 만들었다. 송판에 철사를 박고, 송곳도 거기에 맞게 오리나무를 구해 못대가리를 없애고 거꾸로 끼웠다. 초가집 굴뚝 처마 밑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거기서 느긋하게 작업을 했다. 대장장이처럼 철사와 못을, 나무에 잘 들어가게 불에 달궜다. 동네 형들이 내게 썰매를 얻으려고 줄을 섰다. 나중엔 돈을 받고 팔았다. 돈은 선불로, 예약까지 받았다. 나중엔 남동생들까지 조수로 고용해야 했다. 큰 애는 회계 담당, 작은 애는 작업장 세팅과 잔심부름. “태식아, 내 썰매 멀었냐?” “형, 좀 기다려요.” 썰매에 쓰는 동네 철사란 철사는 나한테 요절이 났다. 한번은 곡식을 까부는 이웃집의 손풍구에 붙은 철사를 자르다가 주인에게 들켜 주인이 얼마나 꼭지가 돌았는지(이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동네에서 철사가 사라지기만 하면 무조건 나한테 와서 내놓으라고 했다) 낫을 들고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나를 쫓아온 적도 있었다. 나는 그 주인이 미친 줄 알았다. 나는 도둑질만 했지 도둑당하는 심정과 손풍구가 망가져 농사지을 일이 막막한 농부의 심정까지 헤아리진 못했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도망치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내가 싫으면서도 서글펐다. 그러면서도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동네서도 철사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나는 걸어서(그때는 버스도, 하다못해 자전거도 없었다) 30리가 넘는 장터로 가서 철사를 구하거나 동네에 가끔 들어오는 엿장수에게 철사를 주고 엿 바꿔먹은 게 아니라 거꾸로 깨진 솥, 고무신 등이나 고가의 돈을 주고 철사를 엿장수에게 오히려 샀다. 그때, 나는 좋은 썰매를 만들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썰매를 목숨 바쳐 만든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국어가 제일 좋았다. 한번은, 서울대 법대 간 애가 전 과목에서 국어만 나 때문에, 일등을 놓친 게 분한지 내게 다가와 국어 잘하는 비결을 빵을 사주며 물었다. “비결은 없고, 그냥 좋아서 하는 거야.”라고 나는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말한 것 같다. 그 애 앞에선 왠지 뻐기고 싶었다. 나는 국어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그래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역시 위대한 왕으로 받들어 모신다. 실은, 여기엔 밝혀지지 않은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학교에선 골고루 공부해야 하는데, 국어만 하는 게 딴엔 창피해 다른 과목을 국어책 옆에 펴놓고 그걸 하는 척하면서 오로지 국어만 팠다. <선데이 서울> 같은 불온서적이나 이현세의 까치나 이상무의 독고탁 만화를 밑에 깔고 교과서나 참고서를 보는 척하는 게 정상인데, 나는 국어책을 밑에 까는 이상 행동을 보인 것이다. 90년대, 회사에 들어와선 컴퓨터에 침잠했다. 주변 지인이나 회사의 거의 모든 컴퓨터를 고쳤다. 컴퓨터 경진 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 당시엔 컴퓨터만 보였다. 어쩌다 옛 동료를 만나면 지금도 컴퓨터를 하느냐고 묻는다. “지금은 눈도 침침하고, 초창기의 PC처럼 순수함이 사라진 것 같아 안 해. 지금은 AI가 뭐든 더 잘하잖아, 내가 굳이.” 나는 워드를 비롯해, 정보처리기사, 리눅스 마스터, PC 정비사, 인터넷 보안전문가 등 컴퓨터 자격증을 15개나 땄고, 뭐든 오래 하면 나름대로 철학이 생기듯 컴퓨터도 사람 같아서 자기를 아껴주면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만나는 컴퓨터는 내 말을 아주 잘 들었다. 묵묵히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나중엔 컴퓨터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주인님, 오셨습니까?” “오냐, 너는 여기가 아프구나. 음, 어디 좀 보자.” 용한 의원이 환자 겉모습만 보고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듯이 나도 그런 경지에 기분만은 올라섰다. 지금은 책만 들이판다. 책이 나이고, 내가 곧 책 같다. 이제 내게 책은 거의 신에 가깝다. 그래 내가 지금 읽는 책에 매일 감사의 절을 올린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책님!” 하며. 앞으로 죽을 때까지 책은 내 나머지 삶의 동반자라 생각하며 같이 갈 생각이다. 컴퓨터에 빠져 하나하나 자격증을 따는 것에 흐뭇했는데, 이젠 매년 한 권의 책을 내는 것에 격한 자부심을 느낀다. 나는 새로운 차원의 영감이 떠오를까 싶어 술을 띄엄띄엄 코가 삐뚤어지게 퍼마시고, 땅바닥을 기어보는, 남과 자신조차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어 생의 밑바닥을 허우적거려 보는 것이다.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과도 대화에서 사이가 틀어질까 굳이 피하지 않는다. 사실 이들이 내게, 쓸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덕담만 주고받는 대화는 기분만 좋지, 사실 글 소재로 건질 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은 모든 게 글로 수렴되어 있다. 이런 걸 종합하면, 내 성향이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같이 하는 것보다 남 간섭없이 혼자 하는 것에 깊이 빠지고 그걸 하며 아니, 즐기며 깊은 행복감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지금, 현실에서 오는 혼란과 울분도 책으로 들어가면 사르르 녹는 것만 같다.
작가는 그래도 이거 하나 때문에 믿을만하다 작가는 여러 시각이 좀 있고, 사물을 그대로 복합적으로, 다층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건 그래도 인간이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본질에 좀 더 다가선 것이다.) 이것저것 두루 살피게 되어 자기가 확신을 갖는 걸 남에게 침을 튀기며 강요하지 않는다. 한 가지만 알고 책을 한 권밖에 안 읽은 인간이 주로 남에게 자기 생각을 진리라며 (인간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것 중에 변하지 않는 진리가 어디 있는가) 위험하게 강요한다. 그는 그게 진리인 줄 알기 때문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강요한다고 그가 설득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그렇듯이 상대의 처지란 게 특수해서 내가 강요하고 있는 게 실은 그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그러지 않는다. 이렇게 한 가지만 아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라 남에게 강요할 게 없는 사람이 덜 위험하다. 한 가지만 아는 자가 힘이라도 얻으면 그 조직의 밑에 있는 사람들, 국민은 그 위험한 신념으로 희생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남은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란 걸 잘 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처지라는 게 있다는 것과 그에겐 따로 그에 맞는 게 있고 자기는 그걸 모른다는 걸 그나마 솔직히 고백하려고 한다. 사실 이런 진실된 것이 없으면 작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계속 써나갈 수 없다는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 그들은 남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려고 노력한다.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계속 써나가기 위해서는.
남자는 자기 세계가 더 중요 내가 전에 남녀 차이로도 쓴 것 같은데 지금 막 생각나서 다시 쓰고 싶다. 여자와 남자에게 차이가 나는 게 있는데 여자는 일단은 유행에 민감해, 아마 이게 관계 지향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이것저것 하려고 한다. 남 뒤꽁무니 쫓아가다 세월 다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자기주장이 강하다. 여자는 대개 현실적인 것, 삶의 태도에서 자기주장이 강한 것 같고 남자는 자기 세계 구축에서 더 그런 것 같다. 유행에서 비켜나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 남자들이 더 여자들보다 선생님 말을 더 안 듣는 것 하고 비슷하다. 그래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자가 남자가 더 많은 것 같다.
지금 쓰는 글이 제일 잘 쓴 것 같아 쓸 때는 뭔가 영감이 있는 것 같아 신나게 쓴다. 그러다 차분히 나중에 읽어보면 부끄러운 글이 된다. 그리고 항상 지난 글보다는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제일 마음에 들고 제일 잘 쓰는 것 같아 남들에게 빨리 발표하고픈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도 나중에 읽으면 형편없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글이 되고 만다. 이건 자기가 썼지만 이미 발표해서 시중에 나도는 자기 책도 거들떠보기 싫은 것하고 비슷한 것 같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또다시 생각해보면, 생각건대, 그런 관심이 이젠 다른 곳에 가 있어 그런 것 같다. 주 관심사가 이젠 지금 쓰는 글에 와 있어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동시에 작가는 이것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쓴 것도 이젠 흥미가 떨어지는데, 글에 별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자꾸 자기 글을 보여주는 것도 삼가야 한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글에 대해 진지하지도 않고 처절하지도 않다는 것. 지금 내가 절실히 관심 두고 있는 것에 상대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
유시민도 하루키도 읽고 쓰는 게 즐겁다고 했다. 나도 물론 그렇다. 안 그러면 지금도 이러고 있겠나?
이제 잘나가는 사람을, 나는 배신하겠다 내가 좋아하던 작가나 배우가 유명해지면 나는 그를 기꺼이 배신하고 전보다는 더 안 좋아하게 된다. 갑자기 그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뚝 떨어진다.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곳에서 발 빼려는 그런 이상야릇한 내 성향도 물론 여기에 한몫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이런 것도 여기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그는 나 없이도 잘 살아갈 거야, 그는 전보다는 확실히 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거야, 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혼자라면 더 좋은 것인데 유명해지거나 상을 타게 되면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 (물론 그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처음부터 몰랐었지만, 그래도) 나만 독점하지 못하는 것이 작용해 그럴 수도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혼자만 독차지하고 싶은 심리. 그리고 나는,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전보다는 지금 유명해진 그는 그 순수성을 잃고, 초심을 잊고-처음의 생각이 바뀌어-다른 곳에 눈이 돌아갈 것 같아 그가, 전보다는 좋아지는 게 저절로 덜해진다. 이제 술에 물 탄 것처럼 핵심(Kernel)과 그 순수(Genuineness)가 흐려져 그런 것 같다. 우리가 같이 추구하던 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그대로인데 그는 눈이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러니까 사회적인 배경이나 주변의 지지 없이 오직 혼자 힘으로 뭔가 자기의 꿈을 향해 노력하고 있는 그 자체를, 나는 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명해지고 상을 타서 사회적으로 이제는 더 힘을 안 들여도 더 잘 나갈 것을 예상해 전의 그 어려움 속에서도 분투했던 그 모습을 이젠 보기 힘들겠구나, 하는 그런 게 작용해 그를 기꺼이 배신(Treachery)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없이도 잘해나갈 것 같기에, 나의 도움 따윈 이젠 필요 없을 것 같기에. 연예인을 걱정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다.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 지금 잘나가는 인간들은-특히 예술 분야에서-기존 체제에 고분고분하고 순응하는 인간들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견지한다. 반발이 심하고 욕을 먹어야 뭔가 자기만의 고유한 것을 -시스템에 아랑곳없이-펼치는 자이다, 이거다. 아무런 배경 없이 자기의, 혹은 내가 동시에 꾸는 꿈을 향해 척박한 토양 속에서 같이 공생(共生)하던 그를 나는 더 좋아하는 것이다. 그 순수성과 처음에 우리가 먹은 마음과 어려움 속에서도 나와 함께 헤쳐나가던 그 박력을. 나와 친했던 친구가 알고 보니 엄청난 부자인 것이 밝혀지면 뭔가 배신감이 들어 자동으로 멀어지는 것하고 비슷한 것인데, 그게 전부는 아니고 우리만의 그 순수한 우정에 금을 가게 한 상대가, 그리고 이젠 그 재지 않고 조건 없이 상대를 대하던 그 무구(無垢)한 상황이 사라지게 한, 책임으로 그를 멀리하게 된 것이다. 사람보단 변한 상황에 나는 더 어리둥절한 것이다. 우리가 안 그런 것처럼 변함없이 계속 똑같이 간다는 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그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한다.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 아마 처음부터 그랬는데, 내가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나는 또 나와 맞는, 전과 같은 그런 상황을 나눌 새로운 상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내가 진짜로 바라는 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상황과 처지를 공유하며, 전처럼 곤란함에서도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솔직히 말해, 이제 사회적으로 더 올라선 그를 배신하는 게 내가 배신당하는 것보다 덜 상처받고 충격이 덜할 것이다. 그는 이제 나와 같은 사람이 여럿 있다. 나는 그에게서 사라져도 표시가 나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자진해 내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 속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내가 주는 것에 전처럼 고맙다거나 작은 감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성가셔하거나 귀찮아할지도 모른다. 내가 준 것이 이젠 처치 곤란해 애물단지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배고플 때 먹는 밥과 배부를 때 먹는 밥은 그 맛이 다르다. 나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곳으로 옮겨갈 때가 되었다. 나는 눈치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 상황은 변해 이제 전과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차라리 나와 비슷한 처지의 비슷한 성향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게 나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서로 주고받는 게 비슷해야 둘 모두에게 실제 많은 도움이 되는 거 아니겠나.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거나, 줬는데도 그쪽에서 별 반응이 없다면 서로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고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될 것이다. 이런 관계의 유지가 과연 모두에게 무슨 소용이겠나. 이제 그는 자기 위상에 맞는 사람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상대적으로 정체된 나는 이제-그가 없으므로-내게 걸맞는 새로운 사람과 소통하고 모자람을 메우고 서로 도우며 살면 되는 것이다. 이게 위대한 연대(連帶)다. 삶은 이렇게 돌고 돌아 자기를 진정 필요로 하는, 내게 적합한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 아닐까.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극히 개인적은 걸 맘껏 누리기 위함이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글을 쓰면 재미도 없고 우선 내 맘에 안 들어 즐기면서 써나가지 못할 것이다. 사회 속에 살면 사회인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 사회에선 싫은 놈 앞에서도 웃어야 한다. 가식을 떠는 것이다. 하나하나 다 걸고 넘어가면 피곤해 못 산다. 그것만 해결하다 세월 다 간다. 직장에서 상사가-가만 듣고 있으면-헛소리만 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지 않고 바른말을 따박따박하며 대들면 그 당신엔 시원할지 몰라도 직장 생활을 하고 그걸로 먹고살 것이라면 그대로 엉뚱한 소릴 해도 그 앞에서 고개를 끄덕여 줘야 하는 게 바로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안 그럴 거라면 크게 한바탕하고 나와버리면 된다. 나는 이것만으로 살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물론 그것만 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 같지 않게 잘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라는 인종은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삶을 둘로 나눠 살기로 했다. 사회생활에서 하는 것하고, 내가 이상적인 곳에서 하는 것. 사회생활에선 꾹 참은 그걸, 내 글 공간을 통해 다 털어놓고 거기서 실컷 욕을 퍼붓는 것이다. 사회에서 의무적으로 하는 걸 거기선 안 해도 된다. 싫으면 싫다 하고, 좋으면 좋다 하는 것이다. 여기선 싫은데도 웃을 필요가 없다. 거기서 애들에게 모범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여러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카사노바, 난봉꾼이 되어 보는 것이다. 바로 이걸 위해 나는 글을 쓴다. 사회에서 말 못 한 것을 맘껏 하고, 역할에 충실해 해보지 못한 걸 맘대로 해보는 것이다. 사회에서 의무적으로 하거나 하지 못한 걸 다 버리고 그 공간에선 내 맘대로 해보는 것이다.
서태지나 비틀즈 음악은 지금 들으면 시시하다. 그러나 이들을 왜 사람들이 기억하는가? 바로 새로운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들의 독창성을 알아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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