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은 마이클잭슨 음악을 가지고 사회가 썩어간다고 이야기했다. 새로운 것은 기존 것에 의해 이렇게 뭉개진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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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글에는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라는 게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면 약간 음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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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소설가다. 그래 에세이엔 별로 신경 안 쓴다. 더 좋은 것은 자기 소설에서 쓴다. 작가도 자기가 유독 아끼는 분야가 있다. 물론 조설가는 소설을 가장 아낀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선 그런 좋은 것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그래 작가에게서 이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는 뭔가 하고 생각하고 그걸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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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가장 중요시 하는 건 이것 같다. 자유로움과 하고 싶은 것.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기가 하고픈 것을 맘껏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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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움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맘껏 하기
인간이 사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자유로운 환경과 그런 환경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강조하는 창조성이
여기저기서 마구 튀어나올 것 같다.
하고 싶은 걸 하는데 그것을 막는 환경이면 안 된다.
그가 맘껏 하게 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진짜 그의 것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올 것 같다.
개인과 사회가 모두 여기저기서.
자기만의 특유한 것, 유일무이한 것이 나올 것 같다.
그는 점점 잠재력이 발휘되어 점점 더 진짜 자기로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이런 거라면, 모두가 행복하고 사회의 생산성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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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가장 아끼는 장르를 봐라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Novelist)다.
그래 에세이엔 소설만큼 별로 신경 안 쓴다.
더 좋은 게 있으면 자기 소설에 넣는다.
작가는 자기가 유독 아끼는 장르가 있다.
자기의 출신성분과 같은 것이다.
“소설 쓰는 누구입니다.” 한다.
그래 자기를 소설가로 불러주는 걸 가장 좋아한다.
말할 것도 없이 소설가는 소설을 가장 아낀다.
그들은 여기서 맘껏 뛰놀면서 거의 모든 것을 풀어놓는다.
못다한 건 다음 소설에서 계속한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선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박 겉핥기로 조금만 흘린다.
아껴두었다가 자기 소설에서 상세하고 친절하게 푼다.
그리고 자기 소설을 읽어주는 독자를 가장 사랑한다.
자기 유튜브를 봐주는 시청자가 아니다.
그들이 거기 나가는 것도-아마 나가기 싫었는데
홍보에 좋다며 누가 시켜 나갔을 것이다-어찌 보면
그들을 자기 독자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는 대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를 꺼리지만
애독자와의 대화 시간은 기꺼이 응한다.
자기가 가장 애착(Affection) 갖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안 좋아할 사람은 없다.
거꾸로 그걸 욕하는 사람은 가장 미워한다.
다른 사람도 그렇지 않나?
그리고 장편소설 작가가 있고, 단편소설 작가가 있다.
장편소설이 본업인 소설가는 단편보다는
여기에 자기의 거의 전부를 쏟아붓는다.
장편이 주특기이고 주 경기장이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맘껏 재주(Magic)를 부린다.
그래서 독자는 그의 다른 분야보단 이 장편에서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기(氣)를 뿌리고,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주로 그가 장편으로 시작한 작가인지,
주로 많이 쓰는 게 장편인지로 판단하면 된다.
그가 어디에 더 애착을 갖는지 안다.
단편이나 산문 같은 건 심심풀이로 가끔 내놓고.
작가에게서 이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Sector)는 뭔가, 생각하고
그걸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작가가 말하는 소중한 걸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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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복을 어디에 더 구축할 것인가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뭔가 보여주고 출세를 하려면
그들의 규칙을 익히고 그대로 실천만 하면 된다.
인간과 세계의 운영 원리를 익히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이 내세우는 출세를 하고 이름을
어느 정도 날릴 수 있다.
그것만이 전부라면 그는 후회(Regret)할 수도 있다.
공허(Emptiness)를 느낄 수도 있다.
그는 그것을 하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고 뭔가 거기에
모두 투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내 맘대로 안 되고 운이라는 게 있고
가장 안 좋은 모습은 현실에서 자기가 극복하려고
주장했던 것에 굴복하고 그 속에 그냥
파묻혀-처음 정신은 어디로 가고-이룬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을 다시 접하고 허무함을
새삼 대면할 때이다.
세상은 내 노력과는 상관없이
그 모순을 그대로 지닌 채-오히려 더 악화되어-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볼 때.
내 노력(Effort)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또 그거라도 진정으로 자기가 원했던 것이면 좋은데
그게 아니라 그냥 그걸 하느라 한세월만
낭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냥 자기도 모르게 현실의 흐름에 휩쓸리고 마는 것이다.
휩쓸리기만 하고 그 속에 있는 자기를,
거기를 헤쳐나와 볼 줄 모르는 것이다.
나중엔 자기가 좋아한 것은 안 하고
엉뚱한 짓만 한 것에 허무와 회한이 몰려올 수도 있다.
인생 무상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다.
그래 인간 세상에서 “아, 맘껏 하고 이제야 속 시원하게
살다 영면에 든다.”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그러니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채 가상의 공간을
따로 만들어 거기서 자기의 뜻을 펴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을 나누는 것이다.
거기에 각각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할 일과 이상에서 할 일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가 협력하고 서로 돕는 것이다.
현실의 일은 가상의 일을, 허구의 사업은 실재의 사업을.
왜냐면 현실에서만 통하는 게 있고, 현실에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그걸 이상에서 이루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상에선 맘대로 이룰 수 있는 것도
그 구체적 감각까지는 현실에서처럼 느낄 수 없는 게 문제다.
글 같은 허구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그러면서 거기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그건 물론 현실의 행복까지 연결되어 이어진다.
실은 행복 때문에 사는 것이기에, 그걸 하며
즐기고 맘껏 해서 더이상 미련이 없고 힘이 다한 다음
아주 홀가분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가상에서 자기만의 행복을 구축하고 그래도 힘이 남으면
뜻이 맞는 사람끼리 힘을 합해 사회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잘 안 되지만 그야말로 ‘정치적 올바름’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가상에서 찾고 여기서 충전(Charge)한 다음
현실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향해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며 현실적 행복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어디에 더 중점이 두느냐가 문제인데, 나는
현실에 40, 가상에 60을 두고 있다.
누군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나에겐 이게 최적인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주특기가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이건
변화무쌍해서 장담 못 하지만-그 이상을 실현하려는
사람이 있고, 가상 공간에서 자기에게 맞게
나름의 행복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에게 맞는 행복 공간(Space)을 확보하라!
누가 더 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자기에게 맞게 자기 행복을
각자 찾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Procedure)엔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 자기 길을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게 중요할 뿐이다.
진정한 자기 길인지,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그 문제만이 중요할 뿐이다.
후회는 적게, 맘껏,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미련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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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인구가 계속 줄고 있지만 그나마 20~30대 여성이 주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왜 읽는가. 그래 그나마 20~30대 여성 작가의 전성시대가 그나마 이어지는 것인가. 이것도 문제다. 너무 한쪽으로 독자와 작가가 치우쳐 있다. 이게 문제인데 겁이 나서 누가 감히 거론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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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댓글을 안 보고 지금 글을 올리면 전의 글을 바로 항상 삭제할 것이다. 그냥 내가 좋은 대로 쓰고 올리면 그뿐이다. 나는 내 글의 향상을 위해서면 그 짓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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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내 단상
글은 결국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자기를 변명하기 위한 것이다.
또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쓰는 것 같다.
그러면서 행복을, 거기서 찾고 즐기기 위해 쓰는 것 같다.
그 누군가를 위해 쓰기도 하는 것 같다.
그 사람이 단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아예 없다가
우연히 다른 누군가가 내 책을 접해 읽고 뭔가
얻으면 좋을 뿐이다.
나는 내 기쁨을 위해 글을 쓴 것이니
그런 사람이-하나도 없어도 괜찮지는 솔직히 않지만-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오늘도 끼적인다.
나도 우연히 나에게 맞는 작가를 만나
그의 글을 읽게 됐고 그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만은
말하면서 나도 뭔가 희미한 희망을 하고 싶다.
속에 있는 울분과 응어리를 겉으로 드러내
자기 치유를 위해 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글을 통해 자기도 모르던 자기 무의식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언어로 표상화하고
그 과정에 자연 치유가 되는 것 같다.
글은 그걸 통해 주체적으로 살게 하는 동시에
자기를 상대화해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게 해주는
역할도 하는 것 같다.
이건 자기를 아집에 빠지게 하는 걸 방지하고
늘 겸손한 자세로 세상을 보는 눈을 길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뭐든 그렇지만 너무 글에만 치우치면
누가 그걸 비판이라도 하면 죽여버릴 듯이 덤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도 단단히 마음을 잡고 있어야 한다.
내 글에 대해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고
내가 준 글을 아예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던지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이것도 감안해서 나를 위해 쓰는 것이므로 감수하고
견뎌야 하고 그것으로 또 글을 쓰며 나를 정화하고
글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나는 충분히 단련되어야 한다.
이걸 보면 역시 글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세상을 더 잘 견디고 살아가기 위해 쓰는 것 같다.
나는 이대로 글 쓰는 게 좋다.
유명하지 않은 선에서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선 자기가 쓰고 싶은 것만 쓸 수 있다.
의무적으로 뭔가 자기 검열 같은 게 끼어들면
의무로 억지로 쓰게 되는 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단계까진 역시 안 가겠지만 그래도
운이 좋아서도 안 갔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전에 안 좋은 말을 했던 것을
어느 계층에선 상처로 끄집어내서 나를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글 외에 다른 거로 괴롭힘을 당하기 싫다.
나는 그저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냥 책만 읽고 글을 내 맘대로 쓰고 싶은 걸
쓰고 싶을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도 괴로워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지 않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글 쓰는 그 자체가 목적이랄 수 있다.
글을 쓰며 그 속에서 즐겁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애초 내가 원하던 게 그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거고
내가 증명되는 것 같고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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