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D-29
하루키는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다. 의미가 깊겠지만 겉으로는 그래도 어려운 것 같지 않다. 단편들도 그렇게 읽는데 어려움을 못 느낀다. 그래, 단편 하나를 또 선택하게 되었다. 어디, 읽어보자. 날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일본 AV를 보면 남자가 위에서 하는 정상 체위에서 마무리 짓는다. 주로 남자들이 보니까 여자를 마지막엔 정복한다는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내가 더 사랑하는 게 낫다 사랑에서 자기가 갑이 되길 바란다. 내가 갑의 위치에서 상대를 맘대로 휘두르길 원한다. 자기가 더 좋아해 상처를 받고 심리적 고통을 견디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 상대가 사랑에서 을이 되어 나를, 나보다 더 좋아하길 바란다. 돌아서는 내 옷소매를 붙잡고 매달리길 바란다. 그런데 더 안달하는 건, 을 쪽이라 갑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싫증을 내면 을은 사랑의 보복, 요즘 말로 하면 데이트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다. 예전에 이런 걸 치정(癡情)이라 했다. 치정에 얽힌 범죄도 많았다. 이런 걸 생각해, 차라리 자기가 더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가 덜 좋아해 내가 더 괴롭고 사랑의 열병(Fever)을 앓는 게 차라리 낫다. 나는 그 고통을 통과해 사람에 대해 더 배우고, 나중엔 더 성숙해져 삶을 올곧게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진정한 사람의 묘약을 맛본 것이다. 나는 투명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어떤 조건도 없이 내 마음을 준 것이다. 어떠한 아쉬움도 남지 않게, 아름다운 사랑을 한 것이다. 이런 경험을 우리가, 소중한 일생에서 한 번이라도 맛볼 수 있을까. 나는 다시없는 사랑을 한 것이다. “그 사랑은 언젠가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熱源)이 됩니다.” * 상대를, 사랑의 을이 되어 더 사랑해 1966년 유행가,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에서도 그랬듯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감내(堪耐)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남은 내 맘대로 안 되는 것도 깨닫고, 쉽진 않겠지만 그런 고통의 다리를 건너면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배신했다며 내가 한때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면 그 사랑도 하찮아지는 것이다. 나도 덩달아 전과자가 되어 하찮은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게 자신에게로 향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정상이 아니란 게 핵심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정상의 궤도를 걷는다. 사랑의 묘약도 있지만, 시간이라는 묘약도 있다. 모든 게, 일상이 아닌 것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안정을 찾으려 하고, 그리로 변하게 되어 있는데 변화만이 인간사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다. 사랑의 순간은 정상이 아니기에 늘 정상으로 복귀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 사랑의 열병과 고통도 예외 없이 반드시 지나간다. 모든 것엔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가려는 원리가 작동한다. 봐라, 여행이라는 일탈도 일상으로의 복귀를 전제로 하지 않는가. 반드시 일상으로의 회귀가 있기에 여행이 즐거운 것이다. 정처 없이 영원히 떠도는 신세라면 즐거움도 사라지리라. 안 돌아오는 건 여행이 아니라 또 다른 곳의 일상에 합류하려는 이주다. 하여간 일상으로 가려고 하는 건 마찬가지다. 비정상적인(irregular) 상태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사랑을, 일탈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곧 그 사랑도 변하고 사랑에서 을이었던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소중한 일상을 굳건히 영위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잠시의 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사랑을 내 가슴과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한 채, 한때는 내게 이런 사랑도 있었노라며, 소환하고 추억하면서(Reminisce) 나는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일인칭 단수> 중에서
글의 사위일체 이런 게 갖춰지면, 남의 글이 더 잘 읽혀지게 된다. 문장 하나하나에 의미가 다 있는 것 같다. 그 단어들에서 내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 그 한 단어조차 작가는 그냥 쓴 게 아니다. 용언의 어미와 체언의 조사를 다 생각하면서 쓴 것이다. 의미가 있고, 그걸 잘못 쓰면 자기 생각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그렇게 쓰는데도 자기 글을 읽는 독자는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독자는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글을 해석하게 두고 작가는 자기 생각을 가능하면 정확하게 글로 표현하려 든다. 작가는 이런 뜻으로 쓴 것인데, 독자는 각각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읽는다. 글에도 삼위일체가 있는 것 같다. 이 세 가지가 서로를 돕는 것 같다. 먼저 많이 읽을수록 글은 점점 작가 마음에 들게 써진다. 글을 꾸준히 쓰면 그럴수록 더 정확하게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아니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쓰기만 하고 남의 글을 안 읽으면 자기 생각에만 빠질 수 있다. 글을 많이 읽을수록 글은 깊이가 더해진다. 그리고 물론 생각도 중요한데, 그것보다는 작가의 나이가 글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그 나이대의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에 많이 흡수한 내용을 자기도 모르게 자꾸 표현한다. 또한 나이 들수록 남의 글도 더 의미심장해지는 것 같고 더 잘 그 작가를 이해하게 되고 자기 생각도 더 풍성해진다. 나이 들수록 남의 사정에 더 잘 공감해서 그런 것 같다. 꾸준히 쓰면서 나이에서 오는 경험이 보태지고, 그러면서 남의 글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도 가능해진다. “이 작가는 이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네.” 하면서 남의 글을 읽으면서 자기 글과 비교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글은 더 발전한다. 나이에서 오는 경험이 글에 힘을 보탠다. 영감과 생각도 더 깊어지고. 아, 독서와 글쓰기와 나이에서 오는 경험, 그리고 사색(思索) 이 네 개가 서로 돕는 것 같다. 글의 사위일체(四位一體)다.
나도 이제 늙었다 나이 먹은 걸 실감할 때가 있다. 외모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는 아직도 40대 후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들과, 아니 남에게 찍힌 독사진을 볼 때, 내 나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내 모습을, 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보는 순간이다. 또 내가 빠진 동창회 술자리에서 무방비하게 노출된 동창들 사진을, SNS에서 볼 때다. 웬 배불뚝이 아저씨들이, 백발에 머리가 벗어진 중늙은이들이, 턱살마저 늘어져 보기 싫은 인간들이 왜 여기에 있지? 이 아저씨들, 동창들이 맞나, 저 아저씨들이 나와 같은 나이란 말인가, 하고 놀란다. “아, 그럼 나도 저렇게 늙었다는 말인데!” 그걸 보며, 나도 나이가 든 걸, 눈물겹게 대면하고 만다. “하긴, 나도 이제 환갑인데.” 반면, 이게 고마울 수도 있다. 나중에 쓰나미로 한꺼번에 몰려오는 충격을, 미리 보여줘 다소 완화해 주고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외면만 할 게 아니라 언젠가는 대면할 수밖에 없는 팩트이기에. 그러니 가끔 사진(Portrait)에서 자길 봐야 한다. 그러나 늙을수록 사진 찍는 걸 자꾸 피하게 된다. 겁이 나서 병원 안 가는 것하고 비슷하다. 자신이 늙었음을 극사실주의로 대면하는 것에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진이, 아무리 배경이 좋고 남들은 다 잘 나왔어도 나만 마음에 안 들게 나오면 그 사진을 과감히 지워버리기도 한다. 결국 살아남은 건, (마음에 들게) 자신만 잘 나왔거나 좀 더 젊게 나온 것들이다. 심지어 아무리 싫어하는 인간이 찍어준 거라도 자신에게 자신이, 마음에 들게 나오면 그걸 망설임 없이 프사로 올린다. 지금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진은, “난, 아직도 팔팔해.”에서 이만 졸업하고 좀 현실과 타협하고 자연스럽게 늙은이로 살아가라는 충고와 귀띔이다. 자신의 늙음을 제발 인정하고, 그걸 피하거나 몸에 돈 들이는 어리석은 짓 그만두고, 미련 때문에, 머리를 거세게 가로젓고 있는 나에게 현실의 팩트 폭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오고야 마는 걸 막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냥 받아들이는 게 현명하고 지혜롭다. 쓸데없는 곳에 힘만 쓰는 꼴이 될 것이고, 결국 자기 힘에 겨워 나가떨어질 게 뻔하다. 괜히 붙들고 있어 봐야 자신만 더 초라해지고 불행해진다. 자연의 변화와 시간의 힘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직도 한국을 우습게 여긴다. 그러나 미국은 안 그렇다. 동경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독일도 그들이 좋아하는 편이다.
지칠 줄 모르는 걸 잘 활용하는 게 현명 성욕 같이 지칠 줄 모르는 걸 잘 활용하는 것은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그걸 할 수 있다잖은가. 이렇게 끝없이 향하는 걸 그냥 놔두는 것도 낭비다. 그걸 무언가에 이용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걸 십분 이용하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걸 자기 글에다 아주 잘 써먹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걸 잘 활용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어느 것이나 그걸 갖고 있지는 않으니까. 사람들이 하라고 하는 걸 하느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냥 의무적으로 하는 걸 하다 인생 다 낭비할 수도 있다. 누가 꺼리고 혐오하기도 하고, 못하게 방해하고 잘못하면 죄를 짓고, 그러니까 더 거기에 매달리는 건지도 모른다. 그걸 걸 다 떠나, 그것과 상관없이 끝없이 나아가는 힘을 이용하는 지혜는 아무나 잘 활용하지 못한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고 난 후에 그게 가능하다. 바로 위대한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인물. 그런 어쩔 수 없는 본능으로 우리는 사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향해 결국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어느 게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인간 사회에서 움직이지 않고 늘 해온 것을 모르던 것을, 누가 발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걸 알고 그걸 잘 제어하며 더 잘 체계적으로, 학문적으로 체계를 짜놓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그는 선구자이고 삶의 핵심을 찌른 통찰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법칙에 따라 우리는 더 현명하게 더 자기를 절제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여자들은 그 성욕이 남자처럼 그렇게까지는 아닌 것 같아 예외지만 남자는 자손 번창(번식 본능, 종족보존)이 무슨 본능이니까 그런 게 이렇게 변하지 않고 끝없이 좇아가는 것 같다. 성욕이나 탐욕, 질투, 허영심, 공감, 연민, 공포 같은 인간에게 있고야 마는 것을 좋은 쪽으로 활용하는 것은 훌륭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살아생전에 활용하는 것하고 거의 견줄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글의 방향은 결국 이 세 가지로 모여 지금까지 줄기차게 내가 말해 온 거지만 내 글은 결국 이리로 향해 가고 있다. 아마 가장 바람직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나라, 아니 세계적인 교육 방향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엉뚱한 걸 하기 때문에 계속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기가 가진 것을 살아 있는 동안, 맘껏 살리라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고,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하고 그러면서 어떤 성취도 낼 수 있는 것, 자기만의 타고난 재능, 기질 같은 걸 썩히지 말라는 거다, 한마디로 자아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자기 개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잘 활용해야지 남이 가진 것에, 동경하는 것에, 헛물켜지-그걸 추구하면 힘만 들어가고 효과도 없고 진정한 자기 게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결국 행복하지도 않다-절대 말라는 것이다. 매슬로우의 인간 본능 중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이다. 누구는 그 위에 초월이 있다고, 성숙한 이기심은 이타적인 초월의식이라고 하는데, 이건 더 실현하기 어렵고 자아실현이 더 현실적으로 나은 것 같다. 그리고 글이나 말, 생각이, 살펴보면 자기가 하는 것의 전부를 거의 다 합리화한다. 내 글의 방향을 잘 보면, 이 어려운 세상에 좀 더 잘 버티고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 같다. 결국 기승전 ‘더 잘 살아내기’이다. 그래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나 생각을 가지고 그걸 합리화한다. 그러면서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왕 살아가기로 한 거, 잘 살아내는 것이다. 살아낼 힘을, 거기서 얻는 것이다. 쓰는 글은 모두가 현실을 버텨내기 위한 것이다. 모든 글은 결국 나 자신이 이 험난한 세상을 더 잘 살아내는 것이고, 그걸 버텨내기 위해 자기를 끊임없이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즉 인간의 본능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본능이라는 게 갈증이나 성욕, 안전, 생존처럼 물리적인 것도 있지만 인간을 가장 잘 특징 짓는 게 정신, 마음이 지배하는 것이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고 그 같은 본능을 살려 잘 활용하자는 것이다. 역시 좋은 방향으로, 이왕 어떻게 해도 안 없어지는 거 없애기는 글렀고-종교적으로 금욕 같은 걸 주장해 그러라고 하는데, 결국은 다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거-어차피 없애지 못할 거 좋게 좋게 활용하자는 것이다. 안 좋은 감정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분노와 공포, 탐욕, 질투, 정복욕, 열등감, 허영심, 피해의식 등 이런 감정들도 좋은 곳에 활용하자는 것이다. 내 글은 여기로 향하고 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사라지지 않는, 잘 활용만 하면 인간만이 가진 귀중한 에너지랄 수 있다. 그러니 안 좋은 곳 말고 좋은 데에 활용하자는 것이다. 인류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현명하기만 했어도 전쟁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꺼지지 않는 인간의 본능을 좋은 곳에 잘 활용하자는 게, 내 글의 또 지향하는 바다.
늙은 다음에 유행하는 것엔 영향을 잘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도 어릴 적이 있어 그 당시에 받은 영향을 잘 잊지 못한다. 가수나 그 당신에 인기 있던 배우 등. 지금 인기 있는 것들은 지금 젊은 것들이 잘 기억할 것이다.
작가는 다중인격자인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그는 현실과 가상 공간에서 너무 다른 인간인가.
경찰이나 소방서, 학교 같이 이론적으로만 좋은 것을 그대로 믿어 나도 그들이 이론에서 말하는 대로 대우해주겠지, 하면 큰 오산이다. 지하철이나 구청 같은 관공서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 개인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 나는 불특정다수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늘 명심하라.
회색 언론은 이래서 경계해야 한다. 이들은 욕을 잘 안 먹는다. 지지자나 반대자에게 모두 다. 그러나 뚜렷한 진영 언론은 다른 쪽에 서면 배신자라고 욕을 먹는다. 그래 늘 약자를 위해 말을 아낄 수 없는 거다. 그러나 회색 언론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요리조리 빠져나갈 수 있다. 그냥 힘 있고 흐름이 큰 곳에 붙으면 그만이다. 그래 지금 하는 말에 믿음이 안 간다.
이래서 회색 언론을 무시하는 거다 회색 언론은 이래서 경계해야 한다. 이들은 욕을 잘 안 먹는다. 지지자나 반대자에게 모두 다. 그러나 뚜렷한 진영 언론은 자기 노선을 버리고 다른 쪽에 서면 배신자라고 욕을 먹는다. 그래 늘 약자를 위해 말을 아낄 수 없는 거다. 그러나 회색 언론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요리조리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 그냥 힘 있고 흐름이 큰 곳에 붙으면 그만이다. 그래 지금 그들이 하는 말에 믿음이 안 가는 것이다. 언제 또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리는 그들에게 오직 유리한 쪽이니까.
일본은 팝 가수의 공연장에서도 떼창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 역을 중요시 여겨 그런다는 말이 있다. 관중으로서 잘 경청하고 가수는 열심히 부르는 각자 자기 역의 충실함이다. 물론 일본 국민의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도 있고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풍습도 있고.
나는 혼자 하는 걸 좋아해 이 순간들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학교 들어가기 전 나는 썰매를 많이도 만들었다. 송판에 철사를 박고, 송곳도 거기에 맞게 오리나무를 구해 못대가리를 없애고 거꾸로 끼웠다. 초가집 굴뚝 처마 밑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거기서 느긋하게 작업을 했다. 대장장이처럼 철사와 못을, 나무에 잘 들어가게 불에 달궜다. 동네 형들이 내게 썰매를 얻으려고 줄을 섰다. 나중엔 돈을 받고 팔았다. 돈은 선불로, 예약까지 받았다. “태식아, 내 썰매 멀었냐?” “기다려 봐요.” 썰매에 쓰는 동네 철사란 철사는 나한테 요절이 났다. 한번은 곡식을 까부는 이웃집의 손풍구에 붙은 철사를 자르다가 주인에게 들켜 주인이 얼마나 꼭지가 돌았는지(이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동네에서 철사가 없어지기만 하면 우리 집으로 찾아 왔다.) 낫을 들고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나를 쫓아온 적도 있었다. 그 사람이 미친 줄 알았다. 나는 도둑질만 했지 도둑당하는 심정과 손풍구가 망가져 농사지을 일이 막막한 농부의 심정까지 헤아리지 못했다.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도망치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내가 싫으면서도 서글펐다. 나는 그때, 좋은 썰매를 만들겠다는 일념만 있었다. 나는 썰매를 목숨 바쳐 만든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국어가 제일 좋았다. 한번은, 서울대 법대 간 애가 전 과목에서 국어만 나 때문에, 일등을 놓친 게 분한지 내게 다가와 국어 잘하는 비결을 빵을 사주며 물었다. “비결은 없고, 그냥 좋아서 하는 거야.”라고 나는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말한 것 같다. 그 애 앞에선 왠지 뻐기고 싶었다. 나는 국어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그래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역시 위대한 왕으로 받들어 모신다. 실은, 말 못 할 치열한 노력이 있었기에 이게 가능했던 것이다. 학교에선 골고루 공부해야 하는데, 국어만 하는 게 딴엔 창피해 다른 과목을 국어책 옆에 펴놓고 그걸 하는 척하면서 오로지 국어만 팠다. <선데이 서울>이나 만화책을 밑에 깔고 교과서나 참고서를 보는 척하는 게 정상인데, 나는 국어책을 밑에 까는 이상 행동을 보인 것이다. 90년대, 회사에 들어와선 컴퓨터에 침잠했다. 주변 지인이나 회사의 거의 모든 컴퓨터를 고쳤다. 컴퓨터 경진 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 당시엔 컴퓨터만 보였다. 어쩌다 옛 동료를 만나면 지금도 컴퓨터를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컴퓨터 자격증을 15개나 땄고, 뭐든 오래 하면 나름대로 철학이 생기듯 컴퓨터도 사람 같아서 자기를 아껴주면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만나는 컴퓨터는 내 말을 아주 잘 들었다. 묵묵히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나중엔 컴퓨터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주인님, 오셨습니까?” “오냐, 너는 여기가 아프구나. 고쳐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용한 의원이 환자 겉모습만 보고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듯이 나도 그런 경지에 기분만은 올라섰다. 지금은 책을 들이판다. 책이 나이고, 내가 곧 책이다. 이제 내게 책은 거의 신에 가깝다. 그래 내가 지금 읽는 책에 매일 감사의 절을 올린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책님!” 앞으로 죽을 때까지 책은 내 나머지 삶의 동반자라 생각하며 같이 갈 생각이다. 컴퓨터에 빠져 하나하나 자격증을 따는 것에 흐뭇했는데, 이젠 매년 한 권의 책을 내는 것에 격한 흐뭇함을 느낀다. 나는 새로운 차원의 영감이 떠오를까 싶어 술을 띄엄띄엄 코가 삐뚤어지게 퍼마시고, 땅바닥을 기어보는, 남과 자신조차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어 생의 밑바닥을 허우적거려 보는 것이다.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과도 대화에서 사이가 틀어질까 굳이 피하지 않는다. 사실 이들이 내게, 쓸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덕담만 주고받는 대화는 기분만 좋지, 사실 글 소재로 건질 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은 모든 게 글로 수렴되어 있다. 이런 걸 종합하면, 내 기질이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같이 하는 것보다 남 간섭없이 혼자 하는 것에 깊이 빠지고 그걸 하며 아니, 즐기며 깊은 행복감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지금, 현실에서 오는 혼란과 울분도 책으로 들어가면 사르르 녹는 것만 같다.
이래서 작가는 책을 읽는다 자기가 이미 출간해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은 잘 안 읽으려고 한다. 내가 왜 이렇게 썼지, 하고 후회하는 것도 있고, 그것보다도 뭔가 창피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잠재울 방법은 남의 책을 읽는 거라, 생각하고 남이 쓴 책에 빠진다. 그러면 그 창피함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책을 내서 아는 척하고 있는 게 남들에게 창피한 것이다. 그래 그 부끄러움을 달래려고 남의 책에 깊이 빠지는 것이다. 그 부끄러움 때문에라도 작가는 남의 책을 안 읽을 수 없게 된다.
나는 외롭다. 이 다섯 글자를 갖고 글 5장을 쓸 수 있다. 인간은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아다.
일본은 어린이 학대했다고 언론에 그대로 얼굴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와는 엄청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점쟁이들은 그냥 현실을 잘 사라갈 것을 가르친다. 가장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것을 권한다. 순전한 예술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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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그믐, 지금
딱히 이번이라고 뭔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근거는 없었다.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어느 여성도 셰익스피어의 비범한 재능을 갖지 못했을 거예요.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겨울에는 러시아 문학이 제 맛
[문예세계문학선] #01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함께 읽기[그믐밤] 8. 도박사 1탄, 죄와 벌@수북강녕[브릭스 북클럽]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1, 2권 함께 읽기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내셔널 갤러리 VS 메트로폴리탄
[도서 증정] 저자이자 도슨트인 유승연과 함께 읽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500일>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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