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2.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D-29
저도 서문의 이 문장 보면서 아! 하고 감탄했었어요. 더불어 이 책의 핵심이 이렇게 친절히 설명되었다면 크게 긴장하거나 힘들어하면서 읽어야하는 건 아니겠구나 싶어서 안도하면서 시작랄 수 있기도 했구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오늘 금요일(7월 5일)과 주말(7월 6일, 7월 7일)은 3장 ' 벽이 없는 학교', 4장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5장 '논쟁의 세계'를 읽습니다. 이 3개 장에서는 센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소(산티니케탄 학교)와 두 인물(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외할아버지(크시티 모한 센)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물론, 외할머니도 함께! 저는 특히 5장을 읽고서 지적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평소 알았던 타고르가 사실 서구가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을. 타고르와 간디의 충돌도 이 책을 접하고서야 처음 알았답니다. 여러분도 센이 어떤 지적 토양 속에서 성장했는지를 확인해 보세요.
산티니케탄은 학교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본 방식으로 재미있었다.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데 굉장히 많은 자유가 주어졌고,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친구들과 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며, 교과목과 관련 없는 것도 부담 없이 질문할 수 있는 친절한 선생님도 많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규율이 많이 부과되지 않았고 체벌이나 가혹한 처벌이 전혀 없었다. 체벌 금지는 타고르가 강하게 견지하고 있는 규칙이었다. 외할아버지 크시티 모한 센은 이것이 ‘우리 학교와 이 나라의 다른 모든 학교’ 사이에서 얼마나 중요한 차이점이며 왜 이것이 교육에, 특히 아이들을 배움에 동기부여되게 하는 데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설명해주셨다. 외할아버지는 저항할 길이 없는 아이를 때리는 것이 마땅히 혐오해야 할 야만적인 행위이기도 하거니와, 학생들이 그저 아픈 것과 모멸감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합리적으로 이해해서 옳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체벌 금지 원칙에 백번 동의하고 늘 충실히 지키셨던 외할아버지가 이 원칙과 관련해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셨던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대학 강의를 주로 하셨고]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은 잘 안 하셨지만 드물게 그런 수업을 맡으셔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여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시는 도중에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한 아이가 막무가내로 자꾸 앞으로 나와서 샌들을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알아듣게 합리적인 설명으로 이해시키는 것을 포함해 온갖 방법을 써보았지만 아이가 샌들 장난에 흥미를 잃게 하는 데 실패하고서, 외할아버지는 한 번만 더 하면 맞을 줄 알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이렇게 대꾸했다. “오, 크시티다, 구루데브(현자를 뜻하는 말로, 여기에서는 라빈드라나트를 의미한다)께서 산티니케탄의 땅에서는 어떤 학생도 체벌받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해두셨는데요, 모르셨어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외할아버지는 아이의 옷을 잡고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고서 이제 아이가 산티니케탄의 ‘땅에’ 있지 않다는 데 쌍방 동의를 한 뒤 상징적으로 살짝 때리는 시늉을 하고서 샌들 말썽꾼을 산티니케탄의 땅에 다시 내려주었다고 한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아마르티아 센 지음, 김승진 옮김
교권 침해, 교권 추락 관련해서 교사가 체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 듣는데요. 그럼에도 체벌에 동의하지 않는 저에게 타고르의 체벌 금지에 대한 이유도 공감했고, 외할아버지의 모순적인 상황도 재밌었어요.
산티니케탄의 수업은 독특했다. 실험실 수업이거나 비가 오는 경우가 아니면 수업은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정해진 나무 아래의 땅바닥에 앉았고(작은 방석을 가지고 다녔다) 선생님은 옆에 칠판이나 교탁을 두고 우리를 마주 보게 되어 있는 곳에 시멘트로 만들어진 자리에 앉으셨다. 벵골어, 벵골 문학, 산스크리트어 선생님이던 니트야난다 비노드 고스와미Nityananda Binod Goswami(우리는 고사인지Gosainji라고 불렀다)는 타고르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장벽을 싫어하며 벽으로 제한되지 않는 야외 공간에서 수업을 하는 것은 이러한 태도를 상징한다고 설명해주셨다. 더 폭넓은 수준에서, 타고르는 우리의 사고가 자신의 속한 공동체(종교적인 것이든 다른 것이든) 안에 갇히거나 국적의 주형틀에 끼워맞추어지는 것을 경계했다(그는 민족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또한 그는 벵골어와 벵골 문학에 애정이 있었지만 하나의 문학 전통에 갇히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전통에 갇히면 책벌레적 애국주의로 빠지기 쉬워질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전통들에서 배울 기회를 방기하게 된다고 보았다. 또한 고사인지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타고르는 학생들이 바깥 세계가 보이고 들리는 와중에서도 집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을 환영했고(그는 이것이 습득 가능한 능력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교육을 인간 삶과 유리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매우 심오한 이론이었고, 나와 친구들은 때때로 이를 두고 토론했다. 이 이론에 매우 회의적인 친구들도 있었지만, 우리 모두 야외 수업이 매우 즐겁기는 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설령 그것이 주는 교육적 이득이 없다 해도 야외 수업을 주장할 근거가 있다고 결론내렸다. 또한 우리는 간혹 집중해서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울 때가 있긴 해도, 벽에 둘러싸여 있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라는 데도 의견이 일치했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아마르티아 센 지음, 김승진 옮김
너무 재밌었을 거 같고 또 부럽습니다...
그의 교육 방법이 취하고 있는 원칙은, 모든 것이 평화롭고 자연의 모든 요인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환경 속에서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술, 음악, 시, 또 그 밖의 모든 학문을 교사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수업은 규칙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의무적이지는 않으며 야외의 나무 아래에서 교사의 발 앞에 앉아 이루어진다. 학생 각자는 저마다의 재능과 기질이 있어 자연스럽게 자신이 적성과 소질이 있는 주제와 과목들에 끌리게 된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아마르티아 센 지음, 김승진 옮김
산티니케탄에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유의 행사는 이성의 역량과 함께 발달해야 한다는 타고르의 개념이 내게 점점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자유가 있으면 그것을 행사해야 할 이유를 갖게 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자유의 행사가 될 수 있다. 단순 암기 교육을 주입식으로 받는 학생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성의 자유를 두려워하게 되는 게 아니라, 이성의 자유를 잘 사용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이 타고르가 그의 독특한 학교에서 가장 크게 노력한 부분인 것 같았다. ‘자유와 이성의 조합’의 막대한 중요성은 그 이후로도 내내 내 삶에서 큰 교훈으로 남아 있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아마르티아 센 지음, 김승진 옮김
나는 풀이가 잘 알려진 수학 문제를 특이한 방법으로 접근하곤 했는데, 그러면 선생님은 기존의 방식도 아니고 내 방식도 아닌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하셨다. 그러면 나는 선생님의 새로운 논증을 다시 나의 새로운 논증으로 능가해보려 노력했다. 꽤 여러 달 동안 날마다 학교가 끝나면 선생님 댁에 가서 몇 시간씩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내게 내어줄 시간이 무한한 것처럼 대해주셨고 아내분도 가정생활을 이렇게나 침해하는 학생을 너그럽게 참아주셨다(그리고 종종 “두 사람 대화 계속하라”며 차를 내어주시기도 했다). 나는 자가반두다 선생님이 내가 몰랐던 논증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책과 논문을 찾아보시는 것에 매우 고무되었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아마르티아 센 지음, 김승진 옮김
저도 5장을 읽으며 제가 대충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내용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아직 안 읽은 분들에게 스포일러일 것 같아 조심스럽긴 하지만, 주말엔 글 남기기 힘들 것 같아 미리 구절 남겨 봅니다. 신비주의적인 시인인 줄 알았던 타고르가 이성에 우위를 두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건 간디님이 지진을 바라보는 시각이었습니다.
3장에서 몇 번 크고 유쾌하게 웃었는데, 하나는 외할아버지가 체벌 금지 원칙에 예외를 두고 여섯 살짜리 장난꾸러기 녀석을 번쩍 들어올린 뒤 때리는 시늉을 했다는 대목에서였습니다. 또 하나는 센이 한 달 동안 노래 연습을 한 뒤 “음악 수업에는 안 와도 되겠다”는 말을 듣는 대목, 마지막으로는 군 생활에서 뉴턴 역학으로 원사에게 개기는 대목이었습니다. 노래 못 부르고 운동 못하고 약간 똘끼 있는 좋은 집안 도련님의 모습이 그려지더라고요.
3장 잡상 (1) 제 세대는 남학생도 여학생도 예외 없이 고등학교 때 교련이라는 이름으로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참 기괴한 일이었습니다. 3장 잡상 (2) 그런데 총알이 총구에서 나온 다음에 가속이 붙어서 속도가 더 빨라진다는 이야기는 저도 어디서 들은 거 같은데, 혹시 다른 분들도 들어보셨나요? 이게 근거가 뭔가요?
@장맥주 그건 오류죠. :) 당연히 총알은 총에서 나갈 때의 발사 속도가 가장 빠릅니다. 일단 발사가 되면 가속도가 붙는 게 아니라 공기의 저항 때문에 속도가 느려지기 마련이죠.
아, 총을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쏘면 정점에서 다시 떨어지면서 중력으로 가속될 수는 있겠네요.
공기 저항 때문에 느려지기도 하지만 일단 총구 안에서는 한쪽 방향으로만 총알을 밀어내던 압력이 muzzle 이후에선 여러 방향으로 압력이 분산되서 느려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물론 총알의 momentum이 공기저항과 중력에 의해 감소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포구에서 벗어나는 순간의 muzzle velocity를 잰다고 들었어요.
저 그럼 혹시 몸에 문신 많은 잘생긴 남녀가 총 쏠 때 스타일리쉬하게 몸 비틀면서 쏘면 총알이 막 휘어져 나가서 악당 정수리에 콕 박히고... 그것도 오류인가요! ㅠ.ㅠ
4장을 읽으면서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저는 현대 인도에 대해 딱히 엄청난 호감을 품고 있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이 나라의 사상적, 문화적 유산과 전통은 엄청나구나 하고 실감했습니다. 아니면 아마르티아 센이 굉장히 특이한 가정에서 자라난 걸까요? 위험하고 무모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는데 한국의 사상적, 문화적 유산은 어떠한가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한국 지식인이라면 어느 정도 내재화한 한국만의 독특한 철학 사상, 혹은 미학적 감각이라는 게 있을까요? 홍익인간 정신? 기복신앙? 이기론? 곡선미? 칼군무? 화끈한 냄비정신(아니면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표현인데 ‘은근과 끈기’)? 저는 2000년대 이후 공학계에서, 또 2020년대 대중문화계에서 ‘K-’가 거둔 세계적인 성공에 대해 조금 고깝게 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리지널리티나 깊이, 체계 따위를 무시하고 눈앞의 성과를 극한으로 추구하는 ‘태도’의 성공이라고요. 그 태도라면 많은 한국 지식인에게 내재되어 있고 저도 아주 어려서부터 익혔습니다. 주변 어른들이 다 그런 태도였으니까요. 혹은 그런 풍토에도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서 하나의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최근에 한국을 묘사하는 표현 중에 가장 그럴듯했던 것은 ‘혼종의 나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책도 나중에 한번 읽어보려고요. 문소영 작가님 칼럼 좋아합니다.
혼종의 나라 - 왜 우리는 분열하고 뒤섞이며 확장하는가《명화독서》, 《그림 속 경제학》 등 예술이 우리의 일상과 교차하는 지점을 읽어내온 문화 전문 저널리스트 문소영이 한국 문화를 ‘혼종’이라는 콘셉트 아래 7개의 키워드로 구분해 바라본 책이다.
@장맥주 @borumis 아, 저는 6장 읽으면서 똑같은 고민했었어요. 그때 제가 올린 메모입니다. "저는 6장을 읽으면서 심사가 여러 가지로 복잡했어요. 성장기 때부터 고민했던 대목인데 저는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해서 정말 관심이 전혀 없었거든요. 한국에 도대체 우리가 다시 살펴보고 습득하고 또 계속해서 곱씹어볼 전통 문화라는 게 있는가?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불교에서?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유교에서? 혹은 민간 무속 신앙에서? 아무튼, 이것저것 뒤적여봐도 저는 문학, 철학, 종교 모두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6장을 읽으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의 과문함과 편협함 탓에 나도 한국 역사 속의 소중한 전통을 알지 못하고 있나, 이런 생각도 들고. 아무튼 그랬습니다. :)"
저도 어쩌면 외교부의 문화행사 등이 아니라 진정한 깊이 있는 한국 문화를 어릴 때부터 많이 접했더라면 그런 씨니컬하고 차가운 태도를 갖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춘기때 종교에 의지하던 엄마나 약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빠졌던 아빠의 일 등을 많이 비판하기도 했고 지금도 그렇게 바뀌진 않았지만.. 당시 엄마아빠의 마음을 그렇게 따듯하게 포용하지 못하고 참 씨니컬하고 냉정한 딸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좀 반성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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