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여자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 호기심이 점점 더 동한다. 여자에 대해 더 파기 위해 이 책도 손에 넣었다. 여자에게 대해 관심이 많으면 절대로 외모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건 남들이 먼저 안다.
여자 없는 남자들
D-29
Bookmania모임지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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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태어나기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회에서 엘리트로
무난하고 평판이 좋게 자란 인간들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작가라면 이런 사회 최적 적응자들에 대한
열등감이랄지 이런 게 있다.
나머지 인생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나도 그렇다.
작가는 그들과 같은 경우가 별로 없고 대개는
핍박을 받으며 자란 사람들이 많다.
그래 글을 쓰게 된 것이고, 그런 기질로
태어나고 말았다.
글을 쓰기 위해 팔자로서 태어난 것이다.
세상 살기가 절대 쉽지 않고 너무나 고달프다.
그냥 되는 게 거의 없다.
너무 힘들다.
그러나 그들은 안 그렇게 보인다.
남들도 다 같이 그들을 칭찬하고 인정해 준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소릴 들은 적이 없다.
있더라도 감수성이 너무 예민해 비난하는 소리만
그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 인간들을 그냥 좌시하지 않겠다.
꼭 억울하고 피해를 그들에게 받은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비뚤어진 사고는 글을 위해 엄청난 자산이고 에 너지다.
맘껏 기르고 글로 활활 승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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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남녀관계의 실질적으로 도움만 되는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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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신도 그렇고 절대적인 건 절대적으로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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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통으로 봐야 지금 하는 것의 경중을 알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대수럽지 않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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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도입 글은 작가의 노림수
글에서 처음에 느닷없이
자기 생각의 깊은 것-자기만 정리된 생각-을 적어놓는다.
독자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글을 다 읽고 나면,
“아, 이래서 이런 말을 썼구나.” 하고 깨닫는다.
아마 작가도 이런 걸 노리고 도입부에 뭔가 깊이 있게
총정리한 글을 먼저 적은 것이리라.
그래 자기 글을 다 읽고 다시 앞으로 와서
그 앞부분을 독자에게 다시 읽히기 위한
의도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처음 글을 접했을 때 독자의 자존심을 건드려
헤비 독자에게 무슨 말인지 모르게 만들어
그의 오기를 끓여 올려 자기 글을 더
깊게 반복해 읽기를 노리고 초반에 그런 어렵고
어떻게 보면 철학적인 글을 먼저 느닷없이
집어넣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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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그렇고 미국도 다른 나라로 여행을 잘 떠나지 않는다. 한국은 왜 해외여행 열풍이 지금 지나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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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이 내게 특수하다
연애에 있어,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는 말은 특수한 경우다.
나는 연애에서 특별하지 않다.
일반적인 걸 따르면 그녀가 잊힌다.
그녀의 단점을 나열하는 것이다.
특히 내가 안 좋아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찾아내고
그것을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질리고 싫증이 나게 되어 있다.
내게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책과 글밖에 이제 없다.
이것들은 내게 너무나 특수해 일반적인 이론이 안 먹힌다.
내가 시골로 책을 읽으러 간다고 하면
시골의 텃세를 사람들은 들먹인다.
그러나 내 특수한 책에 대한 성향은 그것을
다 감수하고도 남는 열정이 있다.
타고난 팔자라서 일반적인 게 책에 대해선
전혀 먹히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에 대해선 일반적인 게 곧잘 먹힌다.
그만큼 열정에서 여자는 책에 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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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하며 살자
인간은 너무 한쪽만 기대하고 그게 막상 잘못되면
그것에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해 상처를 받고
대상을 만들어 어떤 식으로든 보복(Revenge)을 하려고 덤빈다.
이게 너무 긍정적이고 낙관론만 신봉한 결과다.
세상은 안 좋은 일이 얼마든지 지금이나 아니면
내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
당장 내일 전쟁이 터져 내가 사는 집이 폭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은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내겐 남들에게 일어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하며 너무 기대(Expectation)하거나 낙관론만 펴다가,
막상 그 일이 터지면
이제 보복 대상을 물색하느라 눈을 번득거린다.
뭔가 내 기대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잠재워줄
희생양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그게 일어나더라도 항상 감수(甘受)하며 사는 게 좋다.
일어나면,
“우려스러웠던 게 일어났네.” 하고
감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어날 수 있는 것을 항상 감안하고 살아야 한다.
계속 잘되는 건 순전히 운이 좋아 그런 것뿐이다.
안 좋은 건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사고(Thought)는 너무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한 결과다.
물론 세상을 주체적으로,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건
중요하지만 너무 거기에만 빠지면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
남도 실은 자기만을 중심으로 나같이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 충분히 나를 제쳐놓을 수 있다.
주체적으로 살되 자기를 어찌 보면
한낱 한 인간에 지나지 않고,
남이 볼 때는 여럿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자기를 객관화해 보는 습성이다.
자기만큼이나 중요한 남도 있는데, 자기만 앞세우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말이 자꾸 튀어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말처럼 쓸데없는 말도 없으며,
듣는 사람조차 헛웃음만 나오게 하는 말이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지금까진 운이 좋아
안 일어났던 게 일어난 것뿐이라고 큰 충격과 상처 없이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일어날 일에 대해 충분히 감안하고 일어났을 때는
그걸 받아들여 감수하는 것이다.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거나
희생양으로 삼을 게 아니라.
너무 세상과 동떨어진 생각이라고?
아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나만 봐주면서 나만 비껴가지 않는다.
형제들 속에서 양보와 타협을 하고 안 되는 것도
배우면서 자란 게 아니라 오직 혼자,
큰 부침이나 굴곡 없이 그저 잘한다. 오냐오냐하며
순탄하게만 살아온 인생에서도 이런 게 종종 보인다.
자기만 생각한다.
조금도 손해 보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그런 삶을 지금 살고 있는 건 순전히 운칠기삼이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남에 대한 사려(思慮)가 없다.
삶에서 겸손함을 모른다.
항상 자기가 먼저다.
세상이 자기를 위해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한다.
그래 자기의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지 못한다.
남의 생명보다 자기 이익이 우선이다.
이런 인간들은 사회에서, 없어도 그만인 게 아니라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자기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고,
최우선이라는데 그럼, 이들이 왜 필요한가?
우리가 무슨 그들 특권층의 들러리인가.
이런 것에선 내 주체성을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지금에 매몰(埋沒)되지 않고 세상 속의 나, 삶을
횡이 아닌 종으로 보는 사람이 자기 객관화를 잘한다.
현재에만 중점을 두는 가로가 아닌, 역사적으로 세로로
보는 버릇을 들이자.
이미 죽은 사람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
지금 내가 포함된 사람들이 가고, 앞으로 새로운 생명이
등장할 미래를 같이 보는 버릇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중요해도 나는 결국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게 내 흔적을 지우며 계속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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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사랑하는 게 낫다
사랑에서 자기가 갑이 되길 바란다.
내가 갑의 위치에서 상대를 맘대로 휘두르길 원한다.
자기가 더 좋아해 상처를 받고 심리적 고통을
견디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
상대가 사랑에서 을이 되어 나를, 나보다 더 좋아하길 바란다.
돌아서는 내 옷소매를 잡고 매달리길 바란다.
그런데 더 안달하는 것은 을 쪽이라
갑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싫증을 내면 을은
사랑의 보복, 요즘 말로 하면 데이트 폭력을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 이런 것을 치정(癡情)이라 했다.
치정에 의한 범죄도 많았다.
그러니 이런 걸 생각해, 차라리 자기가 더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가 덜 좋아해
내가 더 괴롭고 사랑의 열병(Fever)을 앓는 게 차라리 낫다.
나는 그 고통을 통과해 사람에 대해 더 배우고,
나중엔 더 성숙해져 삶을 올곧게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진정한 사람의 묘약을 맛본 것이다.
이런 경험을 우리가, 소중한 일생에서
한 번이라도 맛볼 수 있을까.
상대를, 사랑의 을이 되어 더 사랑해
1966년 유행가,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에서도 그랬듯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감내(堪耐)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남은 내 맘대로 안 되는 것도 깨닫고,
쉽진 않겠지만 그런 고통의 다리를 너끈히 건너면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배신했다며 내가 한때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면 그 사랑도 하찮아지는 것이다.
나도 덩달아 전과자가 되어 하찮은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게 자기에게 향하면,
식음을 전폐하며 자신을 망가뜨리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정상이 아니란 게 핵심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정상의 궤도를 걷는다.
사랑의 묘약도 있지만, 시간이라는 묘약도 있다.
모든 게,
인간사에서 일상이 아닌 것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안정을 찾으려 하고, 그리로 변하게 되어 있는데
변화만이 인간사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다.
사랑의 순간은 정상이 아니기에 늘
정상으로 복귀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 사랑의 열병과 고통도 예외 없이 반드시 지나간다.
모든 것엔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가려는 원리가 작용한다.
봐라,
여행이라는 일탈도 일상으로의 복귀를
전제로 하지 않는가.
반드시 일상으로의 회귀가 있기에 여행이 즐거운 것이다.
정착 없이 영원히 떠도는 신세라면 즐거움은 사라진다.
안 돌아오는 건 여행이 아니라 또 다른 곳의 일상에
소속하려는 이주다.
하여간 일상으로 가려고 하는 건 마찬가지다.
비정상적인(irregular) 상태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사랑을 비정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곧 그 사랑도 변하고
사랑에서 을이었던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소중한 일상을 굳건히 영위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잠시의 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사랑을
내 가슴과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한 채,
한때는 내게 이런 사랑도 있었노라며,
소환하고 추억하면서(Reminisce)
나는 아름답게 늙어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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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나와 다르다
사람에겐 자신이 지금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게 있다.
그게 안 변할 수도 있는데,
그의 기질과 살아온 환경에 따라 좌우된다.
사랑에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만일 사랑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돈에 미친 사람에게 빠지면
돈 때문에 그의 순수한 사랑이 희생될 수도 있다.
그는 나중에 알고 충격을 받아 자살을 감행할지도 모른다.
세상엔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은 자도 있고,
없는 자도 있다는 걸 몰라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른 인간은 나와 같지 않다.
내가 사랑에 목숨을 걸지만, 그는 돈에 목숨을
걸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는 사는데
돈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 나는 사랑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지만,
그는 자기가 돈을 벌기 위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돈을 위해 남의 순수한 사랑을 이용할 수도 있다.
단지 그는 사랑보단 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러니 내가 남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내가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은 얼마든지 하찮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은 절대 나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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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나 남자나 상대방의 신음소릴 듣고 더 흥분하는 건 맞다. 그게 직업적인 거라도 마치 로봇처럼 하면 오히려 시간을 더 잡아 먹는다. 그걸 보면 일본 AV는 안 그런다. 그래서 세계적인 성진국인 것이다. 그것으로 돈도 많이 벌고 시장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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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하루키도 많이 순수를 엄청 추구한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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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기 위주로 한다
작가가 글을 약간 어렵게 쓰는 것 같고
그냥 독자는 가볍게 읽는다.
작가는 그 주인공이 하는 것의 구체적인
이유나 배경, 같은 것을 친절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자기는 뻔히 아는 내용이라 그냥 넘어가는 것도
있겠지만 독자는 안 그렇다.
마치 전문가 집단에선 매일 하는 일이라 그들
사이에선 설명 안 해도 아는 것을
외부 사람은 설명 안 하면 모르는 것하고 같다.
그런데 문학평론가가 그 소설에 대한 해설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는 자기 평론에서 그 소설의 배경과 인물들의 관계,
주인공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한다.
그 설명을 듣고 독자는 그 소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주인공이 이러는 이유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또 그 평론가는 자기의 지식을 총동원해
그 소설을 다름대로 분석하긴 하는데
그 부분을 읽고 독자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누구나 다 자기 위주로 말을 한다.
소방서에 교육을 받으러 가면 그들은 반복해서 하는
교육이니까 기본적인 것은 그냥 넘어간다.
그런데 교육생들은 그 기본을 배우러 오는 것인데
그런 얘기는 안 하고 뭔가 자기가 의문 나는 것만 말한다.
이런 사람이 개인적인 학원을 차려 그 교육을 한다면
그는 수강생이 없어 곧 망할 것이다.
소방서에 있어 다행이다.
그러니까 독자나 수강생이 원하는 걸 가르쳐 주지 않고
자기에게 지금 필요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인간은 이렇다.
이런 걸 염두에 두고 남에게 배워야 한다.
가르치는 인간도 자기에게 좋은 것, 필요한 것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르치거나 논평하는 자는 역사에 남지 않는다.
말을 안 하고 행동으로 바로 옮기는 자가
역사에 위인으로 남는다.
예수, 석가, 공자 같은 인물이다.
그들은 그냥 행동한 것을 그 제자들이
알아서 기록한다.
설명하는 자는 자기를 위해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에 위인으로 남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위주로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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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하는 걸 좋아해
전부 내 자랑 같은데, 그래도 나는 이 순간들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썰매를 그렇게나 많아 만들었다.
송판에 철사를 박고, 송곳도 거기에 맞게
나무를 구해 못대가리를 없애고 거꾸로 끼웠다.
나는 초가집 굴뚝 주변 처마 밑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거기서 주로 작업을 했다.
대장장이처럼 철사와 못을, 나무에 잘 들어가게 불에 달궜다.
동네 형들이 내게 썰매를 얻으려고 줄을 섰다.
나중엔 돈을 받고 팔았다.
나는 그때, 썰매 만들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나는 국어 과목이 좋았다.
서울대 법대 간 애가 전 과목에서
국어만 나 때문에, 일등을 놓쳐 분한지 내게 다가와
국어 잘하는 비결을 빵을 사주며 물었을 때
“그냥, 국어가 좋아서 하는 거야.”라고만 말했다.
나는 국어와 깊은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국어를 사랑한다.
그래서 세종대왕까지 존경하고 사랑한다.
90년대 말, 회사에 들어와선 컴퓨터에 심취했다.
주변 지인이나 회사에서 내가 거의 모든 컴퓨터를
다 고쳐주었다.
컴퓨터 경진 대회에 나가서도 1등을 차지했다.
그 당시 내 눈엔 컴퓨터만 들어왔다.
어쩌다 옛 동료를 만나면 지금도 컴퓨터를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컴퓨터 자격증을 15개나 갖고 있고,
뭐든 오래 빠지면 나름대로 철학이 생기듯이,
컴퓨터도 사람 같아서 자기를 아껴주면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만나는 컴퓨터는 내 말을 아주 잘 들었다.
묵묵히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지금은 책을 끼고 산다.
책이 나이고 내가 곧 책이다.
내게 있어 책은 거의 신의 경지에 올라 있다.
그래 내가 지금 읽는 책에 매일 감사의 절을 한다.
“책이여, 고맙습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책은 내 나머지 생의 동반자라
생각하며 같이 갈 생각이다.
컴퓨터와 감정이입 할 때 하나하나 자격증을 따는 것에
흐뭇했는데, 이젠 매년 한 권의 책을 내는 것에
격한 흐뭇함을 느낀다.
이런 걸 보면, 내 기질이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같이 하는 것보다 남 간섭없이 혼자 하는 것에 잘 빠지고
그걸 하며 아니, 즐기며 깊은 행복감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현실에서 오는 혼란과 울분도
책으로 들어가면 스르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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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보면 여성형은 남성 언어에 뭐가 더 붙는다. 한자도 계집녀가 들어간 자는 별로 좋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여자는 역 사에서 괄시받으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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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빚 아깝지 않은가?
일본인은 나와 비슷한 게 너무 많다.
그중 한 가지는 나도 현금을 좋아해
현금으로 거의 계산한다.
그리고는 80% 이상 현금영수증을 해달라고 한다.
사실 카드로 계산해 월급을 받았을 때
카드값으로 다 빠져나가면 기분 더럽지 않나.
한 달 일한 게 다 카드빚으로 나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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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형은 성격이 비슷해 신비한 매력 같은 게 없어 서로 사랑에 빠지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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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을 찾자
옛날에 나에게 상처를 줘서 지금도 만나면
죽이고 싶은 인간들이 있다.
그를 만나 “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하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걸 잊지 못하겠다.
<더 글로리>에서 동은이 연진을 잊지 못하듯이.
그런데 복수하면 속이 시원할까?
내 마음이 풀릴까?
처음엔 좀 풀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후회할 것 같다.
뭔가 찜찜하고 답답함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그건 진정 내가 원하던 것도 아니고,
결국 복수는 복수를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삶의 목적이 과거에 내게 상처 준 인간을
찾아가 복수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내 목적(Aim)은 그렇게 시시하지 않다.
진정한 복수란, 보란 듯이 잘 사는 것을 넘어 아예
그 인간을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걸 잊게 만드는 더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
내 활력을 찾는 것에 몰입해, 그 인간을 아예
내 관심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복수한답시고 범죄를 저지르면 나는 또
억울하게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다.
내 소중한 인생, 그런 데서 소모할 만큼 하찮지 않다.
그럼 뭘 해야 하나?
부정적인 것은 절대 개운할 수가 없다.
역시 삶의 목적이 긍정적이라야 그것의
성취에서 의미가 생긴다.
그건 지금의 활력(Vigor)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가 진정 좋아하는 걸 하는 것이다.
활력 찾을 곳은 두 곳 정도면 될 것 같다.
그러다가 한 곳에서 활력이 사라지면
다른 곳에서 활력을 찾는 것이다.
내가 진정 행복해지는 거.
두 군데서 동시에 활력을 찾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잘 없다.
이게 또 시들해지면 저번에 활력을 잃은 것에 다가가
거기서 다른 활력을 찾는 것이다.
다시 보면 활력을 잃었던 것에서, 성숙미(Maturity)가 느껴져
새로운 차원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활력을 찾기 위해, 내 행복을 위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만약을 위해 굴을, 두 군데 파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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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순수성과 문체
작가는 순수(Purity)를 추구한다.
그걸 추구하지 않으면 글을 계속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글과 생각은 그리로 향해 있다.
그게 사라지면 그는 목적을 잃고 등대 없이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난파될 것이다.
사막에서 나침반이 없어서 거기서 말라 죽거나
다른 굶주린 동물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그 순수는 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을 좀 넘어서서
함부로 훼손되지 않고 변덕스러운
인간들의 마음으로 인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추구하던 게 쉽게 이뤄져 더이상 할 게 없으면
거기서 그만 멈추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는 이런 게 아니다.
진정한 작가라면 이걸 향해 글을 쓸 것이다.
인간들이 추구는 하지만 거의 이룰 것
같으면서도 결국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진정한 순수를 추구하는 작가라면,
그는 그 순수를 추구하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그걸 지키려 할 것이다.
현실에서 그 순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작가도 있다.
순수한 사랑 같은 건 현실에서 잘 존재하지도 않고,
사랑이란 게 일시적인 감정이라 잘 이뤄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순수한 사랑을 위해
진정한 작가는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진정한 사랑, 자기의 순수를 지키는 것이다.
인간이 행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고 현실 세계에서
아무나 하지 못하는 순수한 열정(Enthusiasm))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 현실에서 좋다고 떠드는, 결국 훼손되고 마는
인간의 간사스러운 마음 때문에 배신당하는 것을 이상이라며
추구하는 작가처럼 구는, 사이비 작가는
순수하지 않고 순수함을 추구하지도 않아
그들이 끼적인 글을 보면 그 얕음이 금방 탄로 난다.
그들은 자기가 이상(변덕스러워 결국 배신당할 거지만)이라고
여기는 것 때문에 글을 이용할 뿐이다.
순수한 작가는 글 자체가 목적이고,
작가처럼 구는 인간은 글을 이용해 다른 걸 이루려는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
정치인들이 내놓는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진정한 글일까?
과연 이걸, 시간을 들여가며 읽을만할까?
그리고 그는 그 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걸 이용해
더 힘 있는 권력(Power)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들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어
독자는 이용만 당할 뿐이다.
진정한 작가는 순수를 추구해 현실적인 모든 행동이
그리로 향해 있어 그의 글은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는 또한 현실에서 자기 이상, 즉 순수를 달성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 자기 글에서나마 지키려는
순수를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따라서 그는 현실에서든 가상에서든 순수를 추구함으로
인간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사람 중 하나이리라.
작가에게는 문체(Style)가 있다.
그가 쓰는, 글의 형태와 곧잘 쓰는 용어,
사물을 묘사하는 그만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다.
물론 그 문체가 유행을 타기도 한다.
“~이지 싶다.”, “이를테면”, “하여”
이런 말들은 유명 작가들 속에서 유행을 타던 것이었는데,
작가들도 물론 글을 많이 읽어 다른 작가들이 쓰는 문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 유행하는 용어를 쓰게 된다.
그래서 “뭔가 글을 좀 쓰는 것 같은데,
작가처럼 글을 쓰는 것 같은데.”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문체는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그 글을 읽으면
“아, 이거 그 작가가 쓴 것 같다”, 하고 알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작가가 글을 처절하게 쓰고
계속 써나가는 힘을 얻으려면 자기에게서 솟아 나와,
만들어진 생각(Thinking)이 있어야 한다.
이런저런 글에 대한 활동을 멈추지 않으면
계속 영감이 떠오르고 생각은 발달해 자기 고유의 사상이
생겨 글을 계속 쓰게 되는 것이다.
나중엔 글쓰기를 멈추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글의 콘텐츠들을 계속 나열하다 보면
자기 고유의 문체, 자기만의 글 스타일이 생긴다.
그러니까 글의 내용, 생각의 나열, 이게 먼저이지
문체가 먼저인 건 아니다.
진정한 작가는 그 콘텐츠, 즉 내용, 내면이 먼저이고
그 문체, 즉 외양은 부차적으로 나중에 저절로
생기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문체가 생긴다.
이 문체는 남이 먼저 알아보고 자기는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자기만의 버릇을 나는 모르는데 남은 아는 것하고 비슷하다.
Bookmania
일본에서 열네 살은 우리나라 열여섯 살 같다. 즉 중학교 3학년인 것이다. 일본이 실제 나이보다 더 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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