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태어나 너무도 ‘당연하게’ 전기를 접하고 읽어온 세대로서, 상대적으로 전기라는 장르가 존재해 온 지 얼마 안되었고, 서구의 문학이나 역사 연구에서 오늘날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로 전기에 (자서전도 포함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울프 자신도 전기작가였고, 울프의 전기를 썼던 Hermione Lee가 오늘날 전기 연구 분야의 권위자 중 한 명인 것도 주목해볼 부분인 듯 합니다.
[서울외계인] 버지니아 울프,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읽기
D-29
yoonshun
서울외계인
아, 울프도 전기 작가였군요. 몰랐던 사실이네요.
yoonshun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긴밀히 교류하던 화가 로저 프라이(Roger Fry, 1866-1934)의 전기를 썼다고 하네요. 저도 이번 책을 읽는동안 처음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구성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후에 읽어볼 기회를 마련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s://www.amazon.com/Roger-Fry-Biography-Virgina-Woolf/dp/015678520X
서울외계인
[아홉째 날] 〈솜씨〉 (1937)
이 글은 "작가의 솜씨, 즉 말을 다루는 솜씨"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소 사변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울프가 작가로서 말과 글을 어떻게 생각하며 다루고 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말은 결코 유용한 물건을 만들지 않으며, 말이야말로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말들]은 유용해지는 것을 싫어하고, 돈벌이를 싫어하며, 대중 앞에서 강연되는 것도 싫어합니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들을 한 가지 의미로 낙인찍거나 한 가지 태도 안에 가두는 것을 싫어합니다. 변하는 것이 그들의 본질이니까요."
이런 주제를 다루는 라디오 방송이 당시에 있었다는 것도 재밌네요. 시리즈 이름이 〈Words Fail Me〉라니. 요즘 팟캐스트 제목 같군요. 방송 내용을 후에 글로 다시 정리해 다른 매체에 게재했다는 점도 요즘과 비슷해(《지대넓얕》 등) 흥미롭습니다.
yoonshun
뉴욕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작품들을 보다가,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If you could say it in words, there would be no reason to paint)'이라고 말했다는 인용문이 눈에 띄었습니다.
활동 지역은 달랐지만, 호퍼는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해에 태어난 동시대 예술가였습니다. 제가 상대적으로 그림에는 재능도 없고 흥미도 덜한 편이어서 그런지, 미술관에 가면 작품 자체보다 ‘말이 더 많은’ 현상을 접할 때마다 신경이 쓰이곤 했었는데, 호퍼의 ‘말’에 대한 단호한 의견이 왠지 반갑게 다가왔습니다.
문득 표현의 도구로서 말과 글, 그림 사이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네요.
poiein
오래된 말들이 살아남아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진실을 말하게 하려면, 어떻게 그것들을 새로운 질서에 결합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솜씨,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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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ein
특히 시 장르에서 위의 문제 제기를 느끼곤 합니다. 제 경우, 딜런 토머스의 시들은 오래된 말들의 아름다움이 현재성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요.
서울외계인
억지로 유용하게 만들려고 하다 보면, 말은 우리를 오도하고 속이고 뒤통수를 칩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8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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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한 줌의 별과 단도로, 예술 비평 전체, 문학 비평 전체가 6페니 은전 크기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85,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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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말이 마음 편히 살기 위해서는 —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 프라이버시가 필요합니다. ... 우리의 무의식이 그들의 프라이버시이고, 우리의 어둠이 그들의 빛이지요.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9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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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말의 본질은 어느 한 가지 진술이 아니라 천 가지 가능성을 표현하는 데 있습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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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말들에 너무나 많은 의미와 기억이 쟁여 있다는 것", 오래된 말로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어서 인상깊었습니다. 작가란 이렇게도 언어에 민감하군요. 한국 작가 중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언급한 분이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구요. 요몇년간 갑자기 범용되는 '무해하다'라는 단어도 떠올랐어요. 이 단어도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쓰임을 찾은 것일까?
yoonshun
오래 전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은 적 있던 나츠메 소세키의 “산시로”를, 1950년대에 재출간된 현대 일본어판문고본으로 최근 얼마 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산시로”는 1908년에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신문소설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소설 속의 일본어 문장들 중에는 오늘날 한국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과 닮아있는 어휘나 관용구, 문장구조 같은 것들이 적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입니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요.“
”さすが専門家は違いますね。“ (夏目漱石、『三四郎』、新潮文庫、p. 334)
일본에서 소세키의 문학작품에 담긴 언어들은 그야말로 고대의 일본어와 전혀 다른 ‘근대 일본어’를 확립한 일종의 분기점으로 중시되고 있습니다. 특히 일상에서 오가는 구어를 문장으로 기록하는 ’언문일치체’의 정착에 소세키의 역할이 크다고 보고 있는 듯합니다.
(한글이나 고대 한국어의 역사와 별개로) 비교적 짧은 현대 한국어의 역사 중에는, 수십년 간의 일제강점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특히 신경쓰이는 부분입니다. 한국 근대소설의 초창기가 바로 소세키가 활발히 집필 활동을 하던 1910년 경임을 감안하면, 문학의 언어로서 한국어는 어떻든 일본어와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요.
단순히 ‘일본어의 잔재’라고 정리해 버리기 어려운 근본적인 유사성들을 아직도 많이 찾아볼 수 있기도하고요.
울프는 라틴어나 그리스어에 비하면 현대 영어의 역사도 짧은 것이라 보고 있지만, 지난 수백년 간 문학의 언어로서 영어가 겪어온 세월과 변화, 또 그에 따른 권위에 비하면, 너무도 다른 환경에 처해 있는 오늘날의 한국어와 한국 근현대 문학에는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소금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요! :) 흥미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문장에 관한 연구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서울외계인
[열째 날] 〈후원자와 크로커스〉 (1925)
이 글은 매우 짧습니다. 작가는 어떤 후원자를 선택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이면서, 후원자로서의 독자는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는냐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작가에게 후원자가 중요한 이유는 "누구를 위해 쓰느냐를 아는 것은 어떻게 쓰느냐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로 주어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의 이상적인 후원자의 자질은 무엇일까?
*크로커스: 영국에서 봄에 제일 먼저 피는 꽃.
서울외계인
누구를 위해 쓰느냐를 아는 것은 어떻게 쓰느냐를 아는 것이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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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후원자의 으뜸가는 자질은 뭔가 다른 것,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감싸버리는 편리한 단어, 즉 〈분위기〉라는 말로나 표현될 수 있을 무엇이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p.200-201,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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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이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야 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밀린 며칠치를 밀리로 훑었어요.
작가의 진심은 혹 의도는 무엇일까 고민하며 읽던 때가 있긴 있었는데 .. 이젠 모든 책을 너무 나 읽고픈 대로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네요.
yoonshun
‘기우는 탑(The Leaning Tower, 1940)’의 마지막 구절에 "문학은 공유지입니다“에 해당하는 문장이 나오네요.
“Literature is no one’s private ground; literature is common ground. It is not cut up into nations; there are no wars there. Let us trespass freely and fearlessly and find our own way for ourselves.”
아래 링크는 하버드 신학대 Stephanie Paulsell 교수의 2021년 출간 저서 관련 인터뷰인데, “문학은 공유지입니다”와 같은 제목으로 작성된 기사여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https://bulletin.hds.harvard.edu/literature-is-common-ground-on-reading-virginia-woolf/
yoonshun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영문판의 “Character in Fiction")에도 ‘common ground'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던 문장이 있었는데, 해당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But if I had done that I should have escape the appaling effort of saying what I meant. And to have got at what I meant, I should have had to go back and back and back; to experiment with one thing and another; to try this sentence and that, referring each word to my vision, matching it as exactly as possible, and knowing that somehow I had to find a common ground between us, a convention which would not seem to you too odd, unreal, and far-fetched to believe in. (Character in Fiction, <Selected Essays,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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