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외계인] 버지니아 울프,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읽기

D-29
"말들에 너무나 많은 의미와 기억이 쟁여 있다는 것", 오래된 말로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어서 인상깊었습니다. 작가란 이렇게도 언어에 민감하군요. 한국 작가 중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언급한 분이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구요. 요몇년간 갑자기 범용되는 '무해하다'라는 단어도 떠올랐어요. 이 단어도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쓰임을 찾은 것일까?
오래 전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은 적 있던 나츠메 소세키의 “산시로”를, 1950년대에 재출간된 현대 일본어판문고본으로 최근 얼마 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산시로”는 1908년에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신문소설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소설 속의 일본어 문장들 중에는 오늘날 한국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과 닮아있는 어휘나 관용구, 문장구조 같은 것들이 적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입니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요.“ ”さすが専門家は違いますね。“ (夏目漱石、『三四郎』、新潮文庫、p. 334) 일본에서 소세키의 문학작품에 담긴 언어들은 그야말로 고대의 일본어와 전혀 다른 ‘근대 일본어’를 확립한 일종의 분기점으로 중시되고 있습니다. 특히 일상에서 오가는 구어를 문장으로 기록하는 ’언문일치체’의 정착에 소세키의 역할이 크다고 보고 있는 듯합니다. (한글이나 고대 한국어의 역사와 별개로) 비교적 짧은 현대 한국어의 역사 중에는, 수십년 간의 일제강점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특히 신경쓰이는 부분입니다. 한국 근대소설의 초창기가 바로 소세키가 활발히 집필 활동을 하던 1910년 경임을 감안하면, 문학의 언어로서 한국어는 어떻든 일본어와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요. 단순히 ‘일본어의 잔재’라고 정리해 버리기 어려운 근본적인 유사성들을 아직도 많이 찾아볼 수 있기도하고요. 울프는 라틴어나 그리스어에 비하면 현대 영어의 역사도 짧은 것이라 보고 있지만, 지난 수백년 간 문학의 언어로서 영어가 겪어온 세월과 변화, 또 그에 따른 권위에 비하면, 너무도 다른 환경에 처해 있는 오늘날의 한국어와 한국 근현대 문학에는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요! :) 흥미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문장에 관한 연구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열째 날] 〈후원자와 크로커스〉 (1925) 이 글은 매우 짧습니다. 작가는 어떤 후원자를 선택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이면서, 후원자로서의 독자는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는냐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작가에게 후원자가 중요한 이유는 "누구를 위해 쓰느냐를 아는 것은 어떻게 쓰느냐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로 주어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의 이상적인 후원자의 자질은 무엇일까? *크로커스: 영국에서 봄에 제일 먼저 피는 꽃.
누구를 위해 쓰느냐를 아는 것은 어떻게 쓰느냐를 아는 것이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후원자의 으뜸가는 자질은 뭔가 다른 것,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감싸버리는 편리한 단어, 즉 〈분위기〉라는 말로나 표현될 수 있을 무엇이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p.200-201,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야 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밀린 며칠치를 밀리로 훑었어요. 작가의 진심은 혹 의도는 무엇일까 고민하며 읽던 때가 있긴 있었는데 .. 이젠 모든 책을 너무 나 읽고픈 대로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네요.
‘기우는 탑(The Leaning Tower, 1940)’의 마지막 구절에 "문학은 공유지입니다“에 해당하는 문장이 나오네요. “Literature is no one’s private ground; literature is common ground. It is not cut up into nations; there are no wars there. Let us trespass freely and fearlessly and find our own way for ourselves.” 아래 링크는 하버드 신학대 Stephanie Paulsell 교수의 2021년 출간 저서 관련 인터뷰인데, “문학은 공유지입니다”와 같은 제목으로 작성된 기사여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https://bulletin.hds.harvard.edu/literature-is-common-ground-on-reading-virginia-woolf/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영문판의 “Character in Fiction")에도 ‘common ground'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던 문장이 있었는데, 해당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But if I had done that I should have escape the appaling effort of saying what I meant. And to have got at what I meant, I should have had to go back and back and back; to experiment with one thing and another; to try this sentence and that, referring each word to my vision, matching it as exactly as possible, and knowing that somehow I had to find a common ground between us, a convention which would not seem to you too odd, unreal, and far-fetched to believe in. (Character in Fiction, <Selected Essays, p.49>)
우리는 문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가르쳐야 합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24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이 강연을 들은 노동자( 연합 회원(?))들 중 많은 이가 고무된 상태로 강연장을 나갔을 것 같아요.
1903년에 설립되었다는 노동자교육연대(WEA)에서는 지금도 활발한 활동이 진행 중이네요.
[열한째 날] 〈기우는 탑〉 (1940) 이번 글은 위에 @yoonshun 님이 말씀하셨듯이, 책의 제목 "문학은 공유지입니다"라는 문장이 등장하는 글입니다. 울프는 명백히 이전 세대 영국 작가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class", '계급'을 이용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미래에는 이 '계급'이나 소수가 올라가 있는 탑이 없어지리라 희망하며,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걸어 들어가, 자기 길을 스스로 발견"하는 새로운 문학 세계를 제안합니다. 제 억측일지도 모르나, 남자 형제들처럼 공식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독서를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비전을 제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거기에는 국경도 전쟁도 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걸어 들어가, 자기 길을 스스로 발견합시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242,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매일 글을 쓰십시오. 자유롭게 쓰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쓴 것을 항상 위대한 작가들이 쓴 것과 비교해 봅시다. 굴욕적이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뭔가를 남기고자 한다면, 창조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241,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평민이라고 해서 왕들 앞에서 지레 물러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스킬로스, 셰익스피어, 베르길리우스, 단테 등이 보기에는 그거야말로 치명적인 죄입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241,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열두째 날] 〈너무 많은 책이 쓰이고 또 나오는 게 아닐까?〉 (1927) 이 글은 버지니아 울프와 배우자 레너드 울프가 방송에서 한 대담을 옮긴 글입니다. 각주를 보니 "당시의 방송은 대부분 생방송이라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는 식이었다"고 하는군요. 당시 영국의 독서, 출판 관련 상황이 현재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레너드 울프의 주장들은 식상할 정도로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평범한 중류층 지식인의 주장들이네요. 반면 버지니아 울프는 상황들의 다른 측면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나는 반대로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책을 쓴다고 말하겠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책 한 권을 쓸 만한 사연은 갖고 있어요." 당시도 독서와 다른 오락거리들과의 경쟁을 걱정했군요. 지금도 그렇지만 독서는 항상 뭔가와 경쟁해야 하는 운명인가 봅니다. 좋지만 즐겁지 않은. 그리고 독서가 즐겁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그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을 걱정하거나 무시하는. "2천5백 년 후에도"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이렇게 이 책을 다 읽었네요. 내일은 이 책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해봤으면 좋겠네요.
내 생각에는, 책이 늘어난 것은 무조건 환영할 일이에요.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244,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게다가 모든 책을 백 년은 갈 것처럼 만드는 것도 이상해요. 보통 책의 수명은 기껏해야 아마 석 달일 거예요.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25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저는 지난 4월에 런던에 잠시 갔었는데요, 놀라울 정도로 시내에서 와이파이 잡히는 곳이 적었고, 통신 자체가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휴대폰 사용이 어려워서 조금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인지, 런던의 지하철이나 기차에서는 책이나 신문을 읽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휴대폰 연결이 당연히 잘 되지 않는다는 전제로, 가방에 읽을 거리를 갖고 다니는 일이 당연한 듯한 분위기였달까요. ㅎ 울프 시대의 런던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겠지만, (다른 주요 도시들과 달리) 요즘 시대에 이동하며 책 읽는 사람들을 볼 수 있던 경험이 인상적이었어서 간략히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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