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떼의 창궐과 같은 또 다른 음성이 있으니, 그것은 산만한 말들 사이에서 졸음에 겨워 뒤뚱거리며 모호한 생각들을 되는대로 움켜쥐는 사람의 목소리이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4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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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한국에 "창궐하는" 다양한 에세이 책들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입니다.
울프가 독설을 내뱉을 때는 참 날카롭네요.
서울외계인
알맹이는 그토록 작은데 매만지는 손길은 끊임이 없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5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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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결코 자기 자신이 되지 않되 항상 자기 자신이라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55,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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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여덟째 날] 〈전기라는 예술〉 (1939)
이 글의 제목은 논쟁적입니다. '전기'를 예술이라고 하는 것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음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결론을 선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전기 작가]가 기술자이지 예술가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 중간에 끼인 무엇이다.
하지만 그 낮은 수준에서도, 전기 작가의 작품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p.178)
poiein
“ 전기를 읽고 나면 얼마나 자주 어떤 장면이나 인물이 마음속 깊이 살아남아, 우리로 하여금 시나 소설을 읽을 때 마치 전에 알았던 무엇을 기억하기나 하는 듯 소스라치며 알아보게 하는가 ”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전기라는 예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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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ein
츠바이크의 전기 작품을 읽다 보면 딱 이 문장들 같은 경험을 갖습니다:)
서울외계인
전기 작가는 우리보다 앞서가며 거짓과 비현실성과 유명무실한 관습의 잔재를 탐지해야 한다. 그는 진실에 대한 감각을 생생하게 지니고 깨어 있어야 한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7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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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전기 작가는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보다 더 상상력을 자극한다. 물론 최고의 시인이나 소설가는 제외하고 말이지만.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7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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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shun
20세기에 태어나 너무도 ‘당연하게’ 전기를 접하고 읽어온 세대로서, 상대적으로 전기라는 장르가 존재해 온 지 얼마 안되었고, 서구의 문학이나 역사 연구에서 오늘날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로 전기에 (자서전도 포함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울프 자신도 전기작가였고, 울프의 전기를 썼던 Hermione Lee가 오늘날 전기 연구 분야의 권위자 중 한 명인 것도 주목해볼 부분인 듯 합니다.
[아홉째 날] 〈솜씨〉 (1937)
이 글은 "작가의 솜씨, 즉 말을 다루는 솜씨"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소 사변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울프가 작가로서 말과 글을 어떻게 생각하며 다루고 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말은 결코 유용한 물건을 만들지 않으며, 말이야말로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말들]은 유용해지는 것을 싫어하고, 돈벌이를 싫어하며, 대중 앞에서 강연되는 것도 싫어합니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들을 한 가지 의미로 낙인찍거나 한 가지 태도 안에 가두는 것을 싫어합니다. 변하는 것이 그들의 본질이니까요."
이런 주제를 다루는 라디오 방송이 당시에 있었다는 것도 재밌네요. 시리즈 이름이 〈Words Fail Me〉라니. 요즘 팟캐스트 제목 같군요. 방송 내용을 후에 글로 다시 정리해 다른 매체에 게재했다는 점도 요즘과 비슷해(《지대넓얕》 등) 흥미롭습니다.
yoonshun
뉴욕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작품들을 보다가,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If you could say it in words, there would be no reason to paint)'이라고 말했다는 인용문이 눈에 띄었습니다.
활동 지역은 달랐지만, 호퍼는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해에 태어난 동시대 예술가였습니다. 제가 상대적으로 그림에는 재능도 없고 흥미도 덜한 편이어서 그런지, 미술관에 가면 작품 자체보다 ‘말이 더 많은’ 현상을 접할 때마다 신경이 쓰이곤 했었는데, 호퍼의 ‘말’에 대한 단호한 의견이 왠지 반갑게 다가왔습니다.
문득 표현의 도구로서 말과 글, 그림 사이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네요.
poiein
오래된 말들이 살아남아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진실을 말하게 하려면, 어떻게 그것들을 새로운 질서에 결합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솜씨,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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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ein
특히 시 장르에서 위의 문제 제기를 느끼곤 합니다. 제 경우, 딜런 토머스의 시들은 오래된 말들의 아름다움이 현재성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요.
서울외계인
억지로 유용하게 만들려고 하다 보면, 말은 우리를 오도하고 속이고 뒤통수를 칩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8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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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한 줌의 별과 단도로, 예술 비평 전체, 문학 비평 전체가 6페니 은전 크기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p.185,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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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계인
말이 마음 편히 살기 위해서는 —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 프라이버시가 필요합니다. ... 우리의 무의식이 그들의 프라이버시이고, 우리의 어둠이 그들의 빛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