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GX] 1. 미셸 트랑블레처럼 일상 포착하기

D-29
망했어. 교수의 시체를 발견한 이후부터 D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단어였다. 깜짝 놀란 후배를 다독이며 119에 신고를 하고, 나중에 도착한 경찰에게 목격했던 상황을 진술하는 동안에도 계속 머리 속에서는 그 생각 뿐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엉엉 우는 동기들, 선후배들과 함께 있을 때는 같이 울기도 했지만 그건 교수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캄캄해진 미래가 걱정돼서가 더 컸다. D의 속마음을 알 수 없던 사람들은 교수의 애제자였던데다가 시체를 처음 발견했으니 충격이 얼마나 크냐고 위로했지만, 정작 D는 글쎄. 미래를 걱정하는 자신이 조금 속물같기는 했지만 교수가 장담해준 일들이 다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된 상황에서 충분히 걱정할 수 있지않나 싶기도 하고, 일을 도우며 망연자실한 교수의 가족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을 먹은 게 미안해지기도 하고 냉혈한 같은 자기가 싫어지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D는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교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주변 다른 연구실을 둘러봐도 이런 교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원생들을 잘 챙겨주고 특히 D를 학부생때부터 눈여겨 봤던터라 다들 D는 교수가 밀어주는 한 걱정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버려? 나는 어떡하라고? 죽은 사람을 향해 말도 안되는 원망의 마음이 생겼다가, 그래도 그 동안 정말 잘해주셨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다가. 장례식 내내 D의 감정은 놀이기구처럼 상승했다 추락했다 흔들렸다 멈췄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강춘남씨는 가방끈이 길어졌다.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나 대학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하면서 의도치 않게 실험을 하고 연구를 하면서 석사를 거처 박사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세계를 벗어날 용기가 없어 유야무야 하다가 그 생활에 묻힌거겠지만 말이다. 강춘남씨는 외국 박사고 아니고 그나마 서카포 같은 졸업생도 못됐다. 그렇게 덜렁 그냥저냥 그런 국내 박사졸업장 하나 들고 취업하려니 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가 취업한 직장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그런 곳은 못 되지만 이 업계에서는 어느정도는 아는 그런 곳의 기업 연구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업연구소가 그리 크지 않은 지라 선임이나 주임같은 직위 부여는 없고 과장이라 직급을 얻었다. 늙은 신입이면서 과장이라는 어정쩡한 위치에서 애매모호한 느낌으로 일하는게 영 미적지근해서 과장들 모임인 과장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졸로 15년이 넘어 과장이 된 사람 40중반이 넘었는데 만년 과장인 사람.. 과장에 걸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과연 내가 이 곳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낼 수 있을까.. 여전히 미적지근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이다.
5st. GX/24.7.15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엄마는 왜 엄마밖에 모를까. 본인이 가장 큰 피해자고 세상에 자신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는 듯 슬픔과 우울을 쏟아낸다. 나는 소나기처럼 퍼붓는 하소연을 맞고 있다. 나는 어떤 말도 하면 안 된다. 말을 덧붙이면 자식도 이해해 주지 못한다며 나를 힐난한다. 듣기 싫어해도 안 되고 반박해도 안 된다. 이런 내 고통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야기할 수 없다. 엄마가 말하고 있는 엄마 세상 속 가해자는 아빠다. 하지만 그런 아빠 곁을 아직도 떠나지 못하게 만든 나도 가해자다. 내가 가해자라서 엄마 이야기가 듣기 싫은 건가? 내 고통은 언제나 엄마를 이길 수 없고 그럼에도 고통스럽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통은 아닌 것 같다. 가족이 부끄럽고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없음에 무기력하고 지겹다. 아빠를 미워하는 게 더 타당하지만, 엄마를 더 견딜 수 없다. 그냥 그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빠랑 다를 게 뭐지? 아빠는 엄마의 고통에 무심했고,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더 분노했으며 물건을 던지고 깨부쉈다. 엄마를 때렸나? 내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맞았겠지. 이런 미친 사람이랑 같이 산다고 엄마가 이렇게 된 거겠지. 엄마가 가만히 순응하고 있어도 나는 엄마를 싫어했을 거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싸움을 만드는 요인이 엄마 같다고 느끼지? 제발 그 입 좀 다물라고.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엄마가 제일 불쌍한 게 맞다. 그런데 나는? 나는 여기서 어떤 걸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 속에 나를 함께 가둔다. 이 불행 속에 갇힌 나는 영영 행복할 수 없다. 나를 불행하게 만든 건 엄마다. 아니 아빠다. 그래 아빠가 맞지. 그게 정확하다.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엄마 목소리. 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벽을 타고 그 목소리가 흘러온다. 이제 비난의 화살은 나고 스스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하던 엄마는 나 때문에 더욱 비참해졌다. 나는 내가 가해자라는 게 견디기 어렵다. 엄마의 목소리가 끔찍하다. 나는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른다. 옆에 놓인 책상 스탠드를 잡고 바닥에 내던진다. 스탠드가 산산조각이 나고 바깥이 조용해졌다. 드디어. 힘겹게 얻어낸 고요함에 기쁨과 혼란이 섞인다. 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김대리는 스스로를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 안정된 직장에 취직했지만 운이 좋아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이게 특별한 특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비정규직, 마이너스 성장, 평화유지군이라는 말 조합을 조롱했고 더 나은 세상이 되기 위해 ‘연대’가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월급에 비해 많은 금액을 기부금으로 지불했고, 굵직한 시국문제가 터질 때마다 성실하게 집회에 참여했으며, 여러 인권 현안에서도 흔들림없이 왼쪽 자리를 지켰다. 김대리는 전산팀에서 일하는 K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컴퓨터 관련 업종은 아니지만 전산담당자가 필요했던 회사는 비정규직으로 K를 채용했다. 나이도 비슷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비슷한 김대리와 K는 인터넷 불통부터 회사 뒷담까지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김대리가 속한 인사부가 워크샵을 가는 날 아침, K는 대절버스 앞을 서성이다 김대리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톡으로 음악 보냈어요. 심심할 때 들어요.” 회사에서 해도 될 일을 무슨 잠까지 자가면서 워크샵을 가냐며 몇번이나 볼멘소리를 했던 김대리라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온 김대리는 K가 보낸 음악을 틀었다. 설레는 마음, 고백, 사랑... K가 보낸 14곡은 모두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였다. 집에 오면서 들어도, 주말 동안 들어도 사랑노래...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과 언짢음에 김대리는 당황했다. K는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해결하지 못한 전산 문제가 없는 인정받는 일꾼. 김대리는 친구들처럼 미래 남편에 대해 정해놓은 하안선 같은건 없었다. 그냥 뭐... 성실하고 평균 외모에 적당한 대학 나와서 월급 착실하게 받고 회사 다니는 평범한 사람. 김대리는 K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없다. 하지만 14곡의 노래 앞에서 K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K가 유능한 일꾼이 아니라 사원이었다면, 김대리와 같은 대학을 나왔다면, 내년 계약 걱정 없이 월급받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김대리는 혼란스러웠다. 김대리는 스스로를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랑노래 14곡 앞에서 진보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생을 온순하게 살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아기 시절, 바로 눕혀놓으면 몇시간이고 좌우로 몸을 틀지도 않아서 생긴 그의 뒷짱구가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가만히 따르는 아이가 그였다. 화를 낼만한 일에도 가만히 있고 해서 학교에서 괴롭힘을 받은 시절도 있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공장에 취직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치 군인이 지시를 받는듯 그는 지령을 해치웠다. 어느날은 거래처에서 시행하는 공장평가를 앞두고 청소를 하는데 약품을 받아와야 했다. 약품을 받으러 간 공장의 모든 직원은 공업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상사는 받아온 약품을 써 청소를 진행할 때 그가 마스크에 대해 묻자 상사는 시간이 없다고 화를 내며 윽박질렀다. 마스크는 공장평가하는 내일써야 한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공장평가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시정해야할 부분이 있었으나 거래가 끊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에게 생겼다. 그날 이후 그는 일하는 도중에 정신을 놓는 일이 생겼다. 일주일에 한번 그럴 때도 있었고, 3일에 한번 그러기도 했다. 한번도 없었던 늦잠을 자버려서 혼나는 날이 늘어나버렸다. 그는 울컥하며 화가 치밀어오르는 경험도 그때가 시작이었다. 아무리 험한 말을 들어도 그냥 흘려버렸던 사람의 가슴 속이 무언가가 막히고 두드리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날도 그랬다. 상사는 여느때처럼 자신의 화를 입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의 실수는 작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김씨 자꾸만 이럴거야? 요즘 나한테 시비걸려고 일부러 그래? 미친거야? 응?' 사실 상사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온순했던 그는 바늘방석에 일주일 내내 앉아있던 사람이 마침내 바늘주인을 찾은 것처럼 받아치고야 말았다. 시비걸려고 하냐니, 시비거는 사람 본적이 없나, 걸어달라는 소린가 하는 생각이 화로 인해 충혈된 머리 끝에서 울리다가 입으로 터져나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 자신의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흔들렸다. 그리곤 동시에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서 뒤로 세걸음 물러났다. 소리를 지르느라 감았던 눈을 뜨자 상사의 표정이 들어왔다. 상사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채 크게 뜬 눈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저건 화를 내는 표정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르던 개가 물면 저런 표정일까 싶었다. 소리를 지를 때 잠시 가벼워졌던 가슴이 다시 쿡쿡 찌르는듯한 불편함 속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지했다. 평생 눈에 띄지 않으며 살았다. 불편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선택을 해왔다. 정말 내가 미친걸까?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잖아 그냥 평소의 저놈인데... 그는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무엇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수가 없었다.
5th. 평소 소극적이고 존재감 없던 A대리는 회의를 할 때면 의견을 내기보다는 늘 듣던 편이었다. 보통 A대리는 발언자의 말에 동조를 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아래위로 공손하게 끄덕이거나 업무노트에 발언자의 내용을 열심히 열심히 적기만 할 뿐 회의에 영향을 줄만한 그 언행을 삼가는 편이었다. 한 마디로 존재감이 없었고 남들 말에 그저 동조만 하는 맹탕 같은 분위글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다르다. 먼저 A대리는 수첩에 아무것도 적지 않고 발언자만 정면으로 쳐다볼 뿐이다. 그렇다면 발언자의 에고를 북돋아주는 동조의 고개 끄덕임을 해야할 텐데 오늘은 그냥 듣기만 하고 있다. 웃음기도 없이 그냥 무표정하게 발언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흥’하고 콧소리를 냈다. 그것도 다혈질인 K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이다. 기분파에 감정기복도 심했고 가장 문제는 일관성이 없는 업무 지시로 사원들은 미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확률을 뚫고 치열한 입사시험과 압박면접을 통과하여 열정과 의욕으로 충만한 신입사원도 단 몇 일 만에 퇴사를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바로 K부장이었다. 그러나 인사고과를 비롯하여 모든 권력을 움켜진 슈퍼갑 K부장 앞에 말단 사원은 영원한 을일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K부장앞에 A대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본사근무 대신 한적한 지방으로 발령을 받고 싶은 것이었을까.
5th. GX "누구요?" 영자 할머니의 묻는 소리에 저녁을 준비하던 은정은 주방에서 뛰어 나왔다. 하지만 인터폰은 꺼져 있고, 영자 할머니는 휴대폰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소파에 앉아서 거실 한 구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은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영자 할머니는 은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쩌그는 누구다냐?" "누구요? 어머니, 혹시 거기 누가 보이세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영자 할머니의 눈빛이 이내 돌아왔다. "아니여. 내가 잠깐 딴 생각 혀서..." 은정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돌아서 주방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 영자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최근 들어 영자 할머니는 집안 곳곳에서 낯선 사람을 보고는 했다. 하지만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모르는 사람이 집 안에 들어와 있을 리가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막상 그 상황에 닥치면 꼭 진짜 같아서 자꾸 묻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이러까. 노망이 났능가...' 영자 할머니는 그런 날이면 가슴이 선뜩했지만, 누구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말했다가 괜히 걱정 끼치는 게 싫기도 했지만, 혹시 생각조차 하기 싫은 병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컸다. 처음엔 '이러다 말겠지', '요즘 기가 허한가 보다'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보약을 달여 먹고 병원엘 다녀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처럼 아들네 집에 있을 때는 그나마 덜 했지만, 혼자 사는 집에서는 훨씬 더 자주 누가 보였다. 그동안 그건 영자 할머니 만의 작은 비밀이었는데, 오늘 그만 며느리인 은정에게 들키고 만 것이었다. 일단 잘 둘러대기는 했지만, 은정의 미심쩍은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아들인 현호 귀에 이야기가 들어갈 것 같았다.
자신의 딸 수진이 아파트 주거 환경을 해치고 무엇보다 아파트 값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라 여기던 최부녀의 잠재적 빌런이자 안타고니스트로 스스로 상정해두었던 캣맘이었다는 사실에, 최부녀의 분노는 더욱 끓어올랐다. 더이상 눈에 보이는 도둑 고양이들의 새로운 아지트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자부심이자 온 인생을 투여해서 키워온 그녀의 딸이 그 증오의 대상이자 척결해야할 적이었다는 사실이 최부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수진과 최부녀의 대치는 누그러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진은 엄마의 그간의 행태에 쌓일대로 쌓은 감정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냉정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최부녀는 달랐다.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오랜 자부심이 바로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최부녀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고, 아파트 앞마당까지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어수선한 분위기와 사람들의 시선에 최부녀는 무언가 종지부를 찍어야겠다 싶었다. "엄마, 얘네들도 같이 살아야죠?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면 안되잖아요!" "수진아, 너 왜이러니! 안돼! 이런 건 다 없애야 해.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여기 우리 아파트엔 절대 안돼!" 최부녀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행동해야 한다 마음 먹었다. 새로운 아지트의 나무 벽체를 발로 사정없이 힘껏 걷어 찼고, 양손으로 있는 힘껏 지붕모양의 합판을 뜯어발겨 버렸다. "어떻게 만든 우리 아파튼데. 이런 도둑년놈들은 싹다 밀어버려야한다고!" 수진은 저항할 새도 없이 벌어진 눈 앞의 일에 그저 아무런 댓구도 못한 채 그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 : 경비원들 서넛이 합판과 나무 괘짝이 널부러진 음식물쓰레기장 뒷편을 정리하는 동안, 최부녀는 그 곁에 서서 지켜보는 듯 서있었다. 눈은 그 경비원들을 바라봤지만 하얗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생각만 무성하고 복잡해졌다. 수진이에 대한 분노와 수진이 그렇게 되도록 자신이 무엇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그리고 나의 빌런이 나의 자부심이었다는 양가 감정이 최부녀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게 만들었다. 이제 아파트 사람들은, 부녀회원들은 어떻게 볼까? 또 수진이는, 가족들은 어떻게 대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이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처럼 최부녀를 괴롭혔다. 아지트 지붕을 부수면서 깨진 합판 조각에 손바닥의 살점이 떨어져나간지도 모르고 손에 흐르는지도 모르고 아랫입술을 자꾸만 깨물고 또 깨물었다.
[5차 과제] “팀장이 나더러 대구 내려 가래! 야, 이게 말이 되냐고! ” 빈 회의실에서 마주 앉은 A는 주먹을 쥐고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눈물에 범벅이 된 목소리가 알아듣기 어려웠다. 뭐라고! 팀장이 그랬단 말이야? 아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듣고만 있었어, 그런 쓰레기 같은 말을? 뭐 그런 새끼가 있어! 당연히 이렇게 말하며 A보다 더 분노해야 하는데, 정작 나는 감정이 빠진 “어쩌니, 어쩌니.” 만 입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A는 나와 입사 동기다.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려면 온 몸의 기운을 쥐어짜야 하는 나와는 달리 A는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거의 모든 상사들이 예뻐하는 생기발랄 에너자이저다. 그런 A가 왜 나와 단짝이 되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회사에서 늘 붙어 다니는 편이다. A가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들을 때 나는 박수를 쳤다. A가 야근하면 간식을 챙겨 주고, 휴가 일정 맞춰서 해외 여행도 같이 같다. A가 동료들 뒷담화 할 때 같이 스트레스를 풀었고, 좋은 정보가 있으면 공유했다. 나는 승승장구하는 A가 좋았고, 할 수 있는 한 도왔다. 진심이었다. 그런 A가 새로운 팀장과 함께 일한 지 반년 만에 지방 사무소로 내려가라는 일방적 통보를 받은 것이다. A말이 맞다. 팀장이 무슨 이유를 붙였던 간에 쫓겨나는 거다. 그럴 때 단짝이 아니면 누구를 찾겠는가. 그러나 나는 A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위로하고 싶은 생각이 아니라 불편한 마음이 차오르는 내 상태에 당황하고 있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드러난 듯 얼굴이 달아 올랐다. 이게 뭐지? A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채지 않았을까? 이중인격자라고, 배신자라고 생각하겠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다닐 거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A의 하소연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내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했다. “니네 팀장 정말 웃긴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이유가 뭐래, 도대체?” 나는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A의 손등을 토닥토닥 하다 종이컵에 물 한잔을 가져다 주었다. “이럴수록 정신 차려야 대응을 하지.” 숨기고 있는 나의 불안은 불쾌함으로 덩치를 키웠다. 휴지로 코를 푸는 A의 어깨를 다독이고 있었지만 빨리 회의실에서 나가고 싶었다. A가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 못하는 거 없잖아. 이번 일도 알아서 해결하면 되지, 왜 이렇게 울고불고 해서 나를 힘들게 만드는 거야.’ 내 얼굴에 숨겨진 짜증과 피곤이 차 올랐다. 어떻게 나가지? 그 순간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은 회의가 떠올랐다. “내가 지금 회의를 들어가야 해. 좀 진정하고 팀장 하고 다시 얘기 해 봐. 방법이 있을 거야. 밥 맛 없어도 점심 꼭 먹어.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는 A를 회의실에 남겨 놓고 급하게 복도로 나왔다. A의 일이 저절로 해결되어 맥주 안주로 바뀌기를 바랐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6th. GX (7/14~7/17)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드디어 WritersGX 마지막 과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의 생각을 10문장 이상으로 적어보았지요. 이번에는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을 10문장 이상으로 묘사해보겠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277쪽부터 282쪽에서는 티 루가 죽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티 루는 육신의 고통을 감지하고, 죽음을 예감하며, 지난날을 반추하고, 죽음의 방식을 정하고 그대로 죽습니다. 이 과정은 무척 그럴 법하면서도 상당히 장엄하게 그려집니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과제입니다. 임종을 맞는 사람의 내면을 10문장 이상으로 적어주세요.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277~282쪽을 참고하세요.
눈을 뜬 노인 욱은 침대 매트리스 바닥으로 몸이 깊에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호흡이 짧아지는 것을 보니 이제 곧 자신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게 되리라 짐작했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보니 2년간 수족이 되어 주었던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다. 아내를 깨워야할지, 그냥 놔둬야할지 욱은 잠시 고민했다. 살갑지 않은 부모 슬하에서 성장한 욱은 순하고 다정한 아내가 좋았다. 사남매, 그것도 장손에게 시집온 아내를 맞으면서 적어도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살게 해주겠노라 본인 자신과 약속했는데, 그마저도 온전히 지키지 못해 미안했다. 지독하게 캄캄한 것을 보니 새벽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려나보다. 지금 이 시각, 보고 싶은 건 딸의 얼굴이다. 남자같은 무뚝뚝한 성정이지만, 그들 부부가 필요한 것을 묻지도 않고 제 때에 슬쩍 가져다 놓는 딸은 어릴 때부터 그의 자랑이었다.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면 아내를 깨워야할텐데, 팔도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목소리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온전히 혼자 견뎌할 몫이라는 것을, 욱은 사무치는 고독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문득 건강을 위해서 담배를 끊으라는 아내와 딸의 잔소리에 10년 전에 끊었던 담배가 그립다. 오토바이에 딸 아이를 태우고 다녔던, 에너지 넘쳤던 젊은 시절의 욱을 남아있는 이들은 기억해 줄까. 욱은 이제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해 아내를 깨워보려한다.
자신의 죽음에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특히 아주 조금이라도 우울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남들보다 더 자주, 그리고 좀 더 가볍게 자신의 죽음에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E도 약간은 우울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주 죽음에대해 생각했다. 가족의 죽음, 모르는 사람의 죽음, 자신의 죽음에대해 생각했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에대해서도 생각했다. E가 상상한 족히 백 번은 넘는 죽음들 중에 지금같은 상황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지진으로 인한 진동으로 잠에서 깼을 때였나. 책장 꼭대기에 상자를 올려두다가 떨어트릴 뻔했을 때였나. 하지만 그 때는 이렇게 아플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이렇게 오래 깨어있을 거라고도 생각을 못했다. 묵직한 책장과 수 백권의 책에 깔려서 꼼짝도 못하고 그저 죽기만 기다리는 시간이 올 줄은 생각도 못했고. 책장에 커다란 유리 장식이나 액자라도 올려뒀더라면 그게 머리나 목에 치명상을 입혔더라면 단숨에 죽음을 맞지 않았을까. 굶거나 목이 말라서 죽고 싶지는 않은데, 조금 피로한 기분은 들지만 잠이 오는 것 같진 않다. 눈을 감은 것 같지도 않고 뜨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이건 종이 냄새일까, 피 냄새일까. 몸이 몸 같지가 않은 기분... 그래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책에 둘러쌓여 죽는다는 건 뭐,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E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짝 웃었다.
딸 수진과의 언쟁과 길고양이들의 새로운 아지트를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동안, 손의 살점이 날아가면서 생긴 생채기가 제법 깊었다. 출혈이 제법 있어서 오른손의 다섯손가락 모두를 타고 흐르는 피가 피처럼 안보일 지경이었다. 내리는 빗물이 이미 젖어버린 비취색 블라우스를 타고 팔을 타고 다섯손가락을 타고 핏물이 빗물인지 모르게 흘러내리길 10여분. 쿵. 최부녀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고선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수진과의 거리를 두려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는데, 어, 이상하다. 수진이 주저앉아 울고 있고 그 옆의 비취색 블라우스 자락이 보이고... 최부녀, 자신이 누워있는게 아닌가! "수진아! 수진아, 엄마 여기있어! 너 누굴 보고 그렇게 우는 거니? 응?? 왜 그래? 수진아.. 수진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몸은 좀전까지의 답답하고 화나고 슬픈데 비까지 와서 복합적인 감정에 힘들었는데, 이젠 홀가분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수진이는 최부녀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계속 주저앉아 울면서 비취색 블라우스를 흔들고 또 흔들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모여들었던 아파트 주민들 중 누군가는 급하게 달려나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어디론가 엄청 다급한 표정으로 전화를 하고 있고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런 와중에 무언가 발치를 간지럽히는 느낌이 들어 내려다보니 아까 아파트 화단사이로 사라졌던 고양이 무리 중 두마리가 최부녀의 벌린 다리 사이를 무한대의 누인 숫자 8을 그리며 캣워킹을 하고 있는 거였다. "아줌마. 아줌마 지금 이상하지 뭔가가?" 그중 한 고양이가 사람의 말로 최부녀에게 이야기했다. "아줌만 지금 이승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그러니 이상하겠지만 좀만 있어봐봐. 금새 저 빗속을 뚫고 나타나는 노오란 깃발이 보일테니." 최부녀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수진이도 안쓰럽고, 아직도 해야할 일들과 지난번 특수학교 설치를 무산시킬 때 자신 앞에 무릎 꿇었던 학부모들의 얼굴들도 스쳐지나가고... "고양아. 이게 뭔일이냐? 내가 어떻게 니 말을 듣고, 난 또 왜 내가 보이고 이러는 거냐고..?"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어보고 다시 누워있는 자신을 슬쩍 돌아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픽 돌려버리고는 망연해서 고양이에게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는데 이제 그것도 잘 안되는 듯 했다. 그러던 사이 저쪽 경비실 앞쪽, 그러니까 지난 여름에 경비 하나가 쓰러졌던 그 즈음에서 노오란 풀이 돋아나나 싶더니 깃발 같이 생긴 것이 표록 하고 쏫아올랐다. 그런 다음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노오란 깃발같은 그것이 점점 최부녀에게로 뚜벅뚜벅. 여전히 떠오르는 얼굴들이 눈 앞을 스쳐지나고, 노오란 깃발 같은 것은 그렇게 뚜벅뚜벅 다가오고 그렇게 무한대의 누인 숫자 8 모양으로 고양이 두마리는 더 빠른 속도로 발치를 맴돌고만 있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에도 젖지않는 그 깃발같은 것과 최부녀와 고양이 두마리. 그렇게 묘한 루프를 그리며 시간이 흐르는 듯 멈춰버린 그 순간, 최부녀는 자신이 방금 저승을 향해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내가 먼저 가게 되어 미안해요. 짐만 남겨두고 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앞으로 꽃같은 인생을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먼저 가면서 염치없지만 우리 춘남이 잘 키워줘요. 그리고 우리 춘남이 이제 다 컸으니 엄마 말 잘 듣고 멋진 어른이 되면 좋겠구나. 아빠가 대학교 입학식도 가고 남자친구도 보고 직장에 들어가는 것도 보고 결혼할때도 손 꼭잡아주려 했는데.. 그거 못해줘서 미안하다.. 그렇게 춘남이 아빠는 2000년 밀레니엄을 몇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밀레니엄 시대에 지구가 망하느니 컴퓨터가 먹통이 되느니 말이 많았지만, 춘남이에게는 밀레니엄은 아빠가 있기 전과 후로 나누는 시간의 잣대일 뿐이다. 새 학기 첫 시간이 되면 자기소개를 하고 가족소개를 하는 시간이 오면, 춘남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항상 불편했다. 가족은 엄마와 저입니다. 라고 말해는 짧은 문장을 말할 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해야 할지 당당하게 말해야 할지 부끄러워하며 말해야 할지 도데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날들 뿐이었다. 아빠가 없는 대학교 입학식이었지만 춘남은 더 이상 새학기에 가족소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야 비로소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을 느낀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수십 년간을 한결같이 기다려왔던 그 순간이 지금이란 말인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지만, 한 번도 닿을 수 없었던 ‘죽음’ 세상의 온갖 나쁜 것은, 예쁘지 않은 말들은 혜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러한 단어들이 없다면 그녀의 인생을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그러한 단어들이라도 있어, 그 마음을 나타낼 수라도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그만큼 혜진의 인생은 고단했다. 죽는 것이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죽기로 했다. 그것도 여러 번. 하지만 죽음조차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 데려갔다. 마치 그녀를 벌주듯이. 그녀가 불쌍해서 잘 대해 주던 마음 착한 사람들도, 혜진을 자신 아래로 두며 ‘동정’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에 알록달록 예쁘게 색칠해 가던 평범한 사람들도, 속절없는 죽음 앞에선 한낱 연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이, 혜진이 서로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따뜻한 온기에조차 그녀는 화상 입을 듯 뜨거웠다. 그렇게 세상에서 그녀는 혼자가 되어 살았다. 사람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과 단절되어, 그렇게 산 것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한때는 혜진도 열심히 살겠다 노력한 적도 있다. 닳고 닳은 뻔하디뻔한 경구처럼, 살고 싶었다. 사람답게, 평범하게. 평범한 것이 어떤 건지 이젠 알지도 못한 채 이렇게 죽게 되었지만. 하지만 그녀가 힘을 내면, 두세 배로 힘을 빼는 일이 꼭 생겨났고, 정을 주면, 두세 배로 상처받는 일이 꼭 생겨났고, 돈을 모으면 두세 배로 빚을 지는 일이 꼭 생겨났고, 행복하다고 느끼면 두세 배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일이 꼭 생겨났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꼭 그녀만 지켜보면서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야 그녀는 알았다. 그 누군가가 ‘신’이라는 작자였다는 것을. 신을 증오하는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혜진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자매님. 신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주십니다. 힘내세요.” 그렇다면 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였다. 혜진의 인내심은 처음부터 바닥조차 없다는 것을. 그녀가 고통을 잘 참아서 견디고 살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죽을 용기조차 없는 바보 병신이기 때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프지 않게 죽는 방법만 있다면 그녀는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주사 맞는 거조차 두려워 눈뜨고 맞지 못하는 그녀 같은 겁쟁이의 자살 시도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남들보다 한참이나 부족한 혜진이 쓸데없이 많이 가진 것이 수명인가 보다, 라고, 자조한 적이 있었다. 그것조차 그녀는 원망스러웠다. 이젠 그 쓸데없는 수명조차 끝이 보임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태어날 때도 반기는 이 하나 없었는데, 죽을 때에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부패할 대로 부패해 그녀가 누군지 알 수조차 없을 때나, 한참 후에나 발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바랬지만, 요즘처럼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 그런 건 불가능하겠다고 그녀는 바로 포기했다. 그녀가 평생 해온 것이 포기이니 죽는 마당에 하나 더 보탠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다. 먼지보다 나을 게 하나 없는 삶이었다. 그냥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주변은 고요하고, 좁은 창으로 넘치는 햇살이 너무나도 찬란히 비추고 있었다. 자신이 죽기에 어울리는 날씨라고 혜진은 생각했다. 이렇게 맑은 날 자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혜진은 문득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보며 자신의 불행을 반추하면, 불행한 사람들이 따사로운 햇살에 어찌 쓰러지지 않을 것인가? 언제부턴가 혜진은 햇살에서 불행의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를 신호 삼아 한 많은 삶, 자신의 끝 없는 고통과 불행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해 증오의 눈길을 던진다. 그리고 그녀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수없이 보았던 죽음 앞에서 다 내려놓고, 용서하는 성인군자같은 모습으로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녀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무엇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용서할 것도 없었지만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다면, 세상 모든것을 저주하며 죽을 거라 다짐했었다. 그랬기에 아이조차 가질 수 없었다. 저주를 퍼붓고 떠날 세상에 자신의 핏줄을 남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니깐. 그녀는 입 밖으로 소리 내 자신이 아는, 자신과 너무나도 어울리는, 부정적인, 자신의 단어들을 내뱉는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미처 끝맺지 못한 채 공허하게 방에 메아리친다. 그렇게 그녀는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남겨진 것은 차가운 침대와 그리고 그녀의 고통이 고스란히 새겨진 그녀와 꼭 닮은 방, 그리고 그녀를 갖고 논 신이 있는 이 세상뿐이다.
'나'는 '고요'다. 기억의 방에 갇혀 있던 내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고요' 하다는 것. 손에서 빛이 느껴진다. 삶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지혜로움과 마음이 부스러지지 않고 평안할 수 있도록 담담히 토닥이는 다정함이 담긴. 이런 손을 가진 사람은 오직 두 사람 내 인생의 빛 '나'의 아내와 딸. 내가 기억의 방을 헤매며 '나'를 잃어 가고 놓아가던 짧지 않은 나날 속에 아내와 딸은 무수히 이 순간을 준비했으리라. 고맙고 또 고맙다. 이 순간 함께 고요해줘서.. 이제 '나'는 '고요'다..
미련이 가득 남기에, 주마등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미련이 가득나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아쉬워 하는 구나. 하고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직, 나는 젊은가? 라고 생각하자면, 충분히 젊다고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나는 늙은 것인가? 라고 생각을 하면, 충분히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이 든다. 젊고 늙음은 죽음 앞에서 소용이 없다고 누군가가 말을 했다. 젊게 죽어가는 청춘의 인물들이 몇몇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본인의 이름만이 떠오른다. 아직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라고 생각이 들다가도, 이렇게 고통많은 삶, 지금 끝내는 게 가장 좋을 지도. 라는 생각이 든다. 이때까지도 이렇게 모순되는 생각들이라니, 자신의 삶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일들, 어영부영하게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지나갔다. 아, 이래서 주마등이구나. 라고 다시 한 번 깨달아, 헛웃음이 났다. 아니, 헛웃음이 났다고 생각했을 뿐, 실제로는 웃을 힘 조차 없었다. 눈을 감고 싶지 않아도 감겨오고, 주위의 소리는 듣고 싶어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완전한 죽음이구나. 과정이 어영부영 했어도, 끝은 완전하니, 이걸로 조금은 만족할지도.
어느 순간 눈앞에 까맣게 변했다가 하얗게 변하기를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냥 피곤해서 정신을 잠시 놓았나보다. '와, 회사에서 제정신인가.. 진짜.... 미쳤나보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아니, 이 정도면 쉬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면, 시간이 차츰차츰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쌓이는 시간 속에서 고요하게 나 혼자 평온한 느낌이다. 어느 누구도 나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다. 나 혼자 노이즈캔슬링을 끼고 있는, 아니 어쩌면 그냥 소설 속에 나오는 유령이 된 느낌이었다. 왜지, 설마 내가 죽었나? 설마, 그러겠어. 이렇게 생생한데.
침대 옆에는 그가 간병인용 간이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손목에 감겨있는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병동의 밤은 고요하고 답답해서 이렇게 눈이 떠지게 되면 항상 열려있는 창이 그리웠다. 혼자서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탄지가 얼마나 됐지. 뜬 눈에 수액주머니 여럿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보행보조기로 걸을 수 있을 때는 걸리적거려 귀찮았던 것들조차 창밖의 풍경을 떠오르게 했다. 병원에 갇혀산지 몇달은 된 것만 같다. 기운내서 퇴원하겠다고 걷기 운동을 하루에도 몇번을 걸었는지 모른다. 이쪽 복도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걷고 나면 큰 대형창 너머로 바쁘게 달리는 사거리의 차들이 보이곤 했다. 이 시간이면 몇대 없겠지. 그래도 병원 천장보다는 나아. 그녀는 몸을 돌리기조차 힘들어지고 나서 깔게 된 욕창방지용 에어매트를 손끝으로 꼬집어 보았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쥐려고 해도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세상 역시 흘러내리는 듯 눈물이 쏟아졌다. 병세를 진단받을 때에는 적어도 5년은 더 살거라 믿었다. 어머니 제가 5년 정도 밖에 더 못산대요 하며 울먹이며 통화하자 그녀의 시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리셨다. 그게 고작 5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평생 살면서 수술 한번을 해보지 않았는데... 이십년을 꼬박 바쳐온 건강보험료가 아까워서 올해 초에는 그마저 해지해버릴 정도로 건강했던 그녀였다. 어금니에 힘이 실렸다. 억울하다. 불공평해 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이런 끝인줄 알았다면 그렇게 참고 살지 않았을텐데. 사십년을 참으면서 기다렸던 창밖을 한걸음도 걷기 전에 예고조차 없이 다가온 끝없는 밤이 두려워 베개끝이 한없이 축축해 지고 있었다.
3일 남았다. 아프다. 곧 다시 죽을 것이다. 72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 먹고 싶은 과일을 마음껏 먹는다. 사랑했던 사람, 사랑할 사람 가리지 않고 사랑을 나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한다. 1분. 누구 말대로 이제 소풍을 끝내야겠다. 나의 주를 믿으며, 가서 나도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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