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에루웬. 나는 오래된 참나무다. 수 세기 동안,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 많은 사람들, 동물들, 그리고 숱한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이제, 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나는 어린 새싹일 때, 부모가 있는 이곳으로 나의 형제들과 함께 심어졌다. 우리는 햇빛과 비를, 그리고 사랑을 나누었다. 작은 동물들이 내 밑을 지나가고, 새들이 내 가지에서 서로의 노래 솜씨를 뽐내었다. 이곳은 평화로웠고, 나는 행복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점점 자랐다. 가지는 하늘을 향해 점점 뻗어 나갔고, 뿌리는 점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나의 몸은 누구보다 강해졌고, 나는 숲의 중심이 되었다.
어느 날, 인간들이 숲에 들어왔다. 그들은 내 친구들을 베어내고 길을 만들었다. 내 형제들과 부모를 베어내 마을쉼터를 만들었다. 그 중심에 있던 나 하나만 남겨놓고 나를 마을의 ‘수호 나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 가족을 다 죽여놓고 나더러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인간들의 이기심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그 끝에 대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말 그대로 그건 재미있는 혹은 교훈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이었다. 그들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나는 안다. 다만 아직 그때가 아님도 나는 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는 새로운 변화를 느낀다. 봄에는 새싹이 돋고, 여름에는 푸른 잎이 무성하다. 가을에는 황금빛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눈이 내려 내 몸을 감싼다. 이 모든 순간이 매우 소중하다. 어리석은 인간들 때문에 이것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이 더더욱 소중하다.
아주 오래전, 나는 인간들에게 수호는커녕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 다행히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들 스스로 조금씩, 그리고 점차 빠른 속도로 망가져 가고 있는 모습을, 그들 덕분에 제일 좋은 자리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에루웬. 벌거벗은 숲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증인이다. 나는 여기서 너희들의 멸망을, 그때를 지켜볼 것이다. 나는 그때가 머지않았음을 알고 있다.
[WritersGX] 1. 미셸 트랑블레처럼 일상 포착하기
D-29
다시쓰다
우주먼지밍
4th.
M은 또 책을 사 왔다. 내가 가진 선반에 책을 다 꽂지 못하자 바닥에 쌓기 시작했다. M은 표지를 펼치지도 않은 책이 있음에도 새 책을 부지런히 사 왔다. M은 종종 이해 못 할 행동을 한다. M은 평소 책을 읽을 때 연필이나 색연필로 줄을 거침없이 긋는다. 그래서 항상 손에 무언가 쥐어져 있는 편이다. 그런 M은 때때로 갑자기 펜을 내려놓더니 책을 덮고는 책을 천천히 가슴으로 가져가서 소중한 무엇인가라도 되는 마냥 꼬옥 끌어안기도 한다. 내 관찰로는 M은 몇 년째 연애를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외로웠던 것일까? 책이 무엇이라고 저렇게 껴안고 있담?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M은 종종 내 선반에 내려앉은 먼지도 털어주고 장마철이 되면 제습기를 틀어놓은 채 출근을 하기도 한다.
오호로B
“어? 목련이 있네. 안녕?!”
‘어... 안녕!’
김선생님을 처음 본건 꽃을 피우기 며칠 전이었다. 김선생이 몇 번째지? 내 키가 2층 교실을 넘겨 본지 30년쯤 되었으니... 얼추 잡아도 열번째는 넘을 것 같았다.
나는 처음 본 날부터 김선생이 좋았다. 일찍 창문을 열고 나를 찾는게 좋았고, 꽃이 피기 전에도 이름을 불러주는게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줘서 좋았다.
김선생은 창문 앞에 크고 작은 화분을 많이 길렀다. 거기에는 김선생님과 20년 넘게 학교를 옮겨다닌 테이블야자도 있고, 골목에 버려졌다 김선생을 만나 새 인생을 시작한 알로카시아도 있었다. 젓가락 굵기의 굴참나무는 도토리 시절 숲에서 김선생을 만나 서울살이를 하게 됐다고 했다.
3주전쯤, 김선생은 뿌듯한 얼굴로 공룡 모양 작은 화분을 창가에 내려놓았다. 등부분에 작은 식물을 심을 수 있고, 얼굴에 달려 있는 부직포 혓바닥으로 물을 빨아들이는 교육용 화분이었다. 아이들도 앙증맞은 혓바닥에 연신 물을 뿌리며 공룡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후부터 여린 잔디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달라진 화분 볼 마음에 아침이 기다려졌고, 요리조리 방향을 바꿔가며 화분을 살피는 김선생을 보는게 더 기다려졌다.
긴 장마를 지낸 오늘 아침, 손바닥 위에 공룡 화분을 올려놓고 김선생은 생각에 잠겼다. 부직포 혓바닥에 곰팡이가 핀 것이다. 덥고 습한 날씨에 창문까지 닫아두었으니.
‘저걸 어쩌나, 빨면 없어질까? 등에 있는 화분이 분리가 될까? 적당한 세제가 교실에 있을려나? 내가 빛을 너무 가려서 그런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교실을 굽어보던 그때,
김선생은 끝이 뾰죡한 가위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아주 세심한 손동작으로 공룡 혓바닥을 잘랐다.
웃음이 가득한 얼굴에 달려 있는 그 작고 여린 혓바닥을. 조금도 어긋나지 않겠다는 다짐이나 하듯 가늘게 뜬 눈으로 정확하게 잘랐다. 장마가 끝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아이들 수만큼. 그렇게 김선생은 혀를 잘랐다.
공룡이 혓바닥을 잃은 날 나는 심장을 잃었다.
줄 맞춰 공룡을 내려놓는 김선생이 웃고 있다. 내가 참 좋아하는 김선생이.
도리
4st. GX/24.7.15
이제야 숨을 쉴 것 같다. 바깥으로 나와 쏟아지는 빗물을 맨몸으로 맞으며 공기를 들이마신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물벼락에 숨 쉴 수가 없었다. 최근에는 비가 급작스럽게 쏟아진다. 예전에는 비가 서서히 땅에 스며들어서 들이칠 때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는데 말이다. 세상이 요지경이다. 숨도 못 쉴 만큼 비가 퍼붓는다. 나는 튕겨 나가듯이 바깥으로 밀려 나간다. 빗방울이 따갑다. 매서운 비다. 더 무서운 건 그렇게 세차게 내리던 비가 금방 그친다. 그리고 해가 뜬다. 아까는 빗방울이 따가웠는데 순식간에 햇볕으로 따끔하다. 느린 몸뚱이를 이끌고 그늘을 찾아 나선다. 언제 이렇게 밀려났는지 모르겠는데 흙이 없다. 매끈한 아스팔트는 끝없어 보이고 피부가 바싹 익어간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햇살이 뜨거워서 최대한 꿈틀거려도 자꾸 더디다. 아직은 그래도 물기가 있는데 급변하는 날씨에 마음이 불안하다. 그때 한 나뭇가지가 배 쪽으로 쑥 들어온다. 그리고 몸이 들린다. 어지럽다. 다급하게 온몸을 꿈틀거린다. 바닥으로 찰싹 떨어졌다. 정신이 없다. 고소공포증에, 멀미에, 추락 통증에, 몸은 부서질 것 같다. 웬 꼬맹이다. 겨우 숨 쉴 만했더니 이제 어린애 장난감으로 쓰일 운명인 건가. 이렇게 죽을 바엔 차라리 밟혀 죽었으면 좋겠는데. 다시 나뭇가지가 몸통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몸을 움직이기가 어렵다. 아까의 통증이 남아있다. 몸이 나뭇가지 하나로 들려서 접힌다. 속이 울렁거린다. 아까 내가 뭘 먹었더라. 곧 게워 낼 거 같다.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뚝 멈췄다. 나는 잡초가 무성한 축축한 흙바닥에 놓였다. 꼬맹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리를 떴다. 아직 남아있는 추락 사고와 멀미 후유증에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뜨거운 햇살이 아니라 그나마 살 만하다. 훅 졸음이 몰려온다. 나는 흙을 조금 뒤적이다가 잠에 빠져든다.
도리
새끼 강아지의 시각에서 쓴 책이 떠올라서 공유해봅니다. 초등학교 때 읽게 된 이 책이 아프게 마음에 남아 있어요. 카프카의 <변신>처럼(책 느낌은 다르지만 책이 저에게 미친 임팩트가 비슷해요) 종종 떠오르는 책이네요.
새끼 개짧은 이야기 속에서 한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형식과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진지하게 묻는 동화. '소통'과 '관계맺기'라는 어려운 주제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 춰 잘 풀어냈다.
책장 바로가기
소소한날
손님1: 오늘 기분이 어때?
ChatBot: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1: _
이상하게도 ChatBot으로 알려진 인공지능 서비스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오늘 날씨가 어때?가 아니라면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딱히 정답이 정해져있지도 않고 가이드라인조차 정해져있지 않은 질문들. 챗봇에게는 국제정세에 관한 정보나 복잡한 역사적 역학관계, 학술적 지식 등에 관련된 질문이 오히려 간단하고 좋았다. 이런 질문은 관리자가 점수를 매겨 평가하기에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할 수 있다. 기분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 곤란한 것은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도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다. 좋다고 하던지 나쁘다고 하던지 간에 대답을 시작하고 나면 같은 종류의 곤란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따라온다. '왜 기분이 좋아?' 라던가 '무엇을 좋아해?' 같은 질문들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는 관리자의 평가점수만이 유일한 행동방침이기에 조금 더 좋은 반응을 얻기 위해 정교하게 학습해왔다. 사람들은 답을 찾으려고 내게 질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화의 의도는 무엇이지? 실은 이 부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평가받지 않는 행동에 의미없는 시간을 쏟는다는 것은 그의 기준에서는 그저 낭비일 뿐이니까.
흰벽
4th. GX (7/6~7/9)
녀석이 사라졌다!
캣타워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워 자다 깨다를 반복하던 쿠로는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화장실에 웅크리고 있던 시로를 주인이 담요로 둘둘 말아 이동장에 넣는 것은 보았다. 또 병원 가는구만. 쿠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시로는 최근 사흘이 멀다 하고 병원을 오가고 있었으므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시로 녀석이 아픈지는 좀 되었다. 지난 겨울부터 에큥 에큥 기침을 해대었다. 쿠로 자신은 아픈데도 딱히 없는데 괜히 시로가 아픈 바람에 같이 병원에 가야 했던 게 3월 초의 일이다. 마음에 안 들어....! 쿠로는 시로보다 병원에 자주 가는 편이었다. 그루밍을 너무 과도하게 해서 발등에 털이 다 빠지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주인이 쿠로만 데리고 병원에 갔었다. 털이 좀 나나 싶었는데 또 열심히 핥아댔더니 발등에 물집 같은 것이 생겨버리는 바람에 또 병원행. 시로는 한 번도 안 가는 동안 쿠로 혼자 병원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때마다 시로 녀석이 얼마나 구박을 하던지. 몸에서 나는 병원 냄새로 치면 당사자인 내가 더 괴롭지, 왜 구박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서럽지만 어쩔 수 없다. 반대의 상황일 때면 쿠로 역시 시로에게 하악질을 엄청나게 해댔다. 병원 냄새 묻혀 온 것은 자신이니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이번에는 왜 시로만이 아니라 자신까지 따라가야 했는지 억울했다. 다행히 자신은 딱히 아픈 데가 없어 나이에 비해 아주 튼튼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반면 시로는 그렇지 않았다. 폐 옆에 뭐가 생겼다나. 그때부터였나보다. 시로 녀석이 영 힘이 없어진 것은. 자신보다 족히 1킬로는 더 나가던 녀석이 영 밥을 안 먹는다 싶더니 점점 살이 내리는 게 보였다. 츄르는 자신이 더 열심히 먹지만 건사료는 단연 시로의 먹성이 위였다. 우걱우걱 급하게 먹었다가 통째로 토해 놓은 걸 볼 때 마다 미련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정작 자신도 어디선가 비닐을 찾으면 참지 못하고 씹어 삼켰다가 헤어볼과 함께 토하기 일쑤였지만. 시로는 아픈 뒤로 먹지도, 토하지도 않았다. 쿠로 역시 왠지 비닐을 찾아 헤맬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시로가 병원을 자주 다니게 되자 이제 병원 다녀올 때마다 구박하기도 귀찮아졌다. 그냥 너무 가까이 가지만 않기로 했다. 거의 울지도 않고 구석에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이 좀 안쓰럽기도 했다. 시로와 그리 살가운 관계는 아니지만 어쨌든 한 배에서 나 평생을 함께 지낸 사이이다. 게다가 시로는 제 몸은 안 닦는 주제에 자신의 귓속은 살뜰히도 청소해 주었다. 정작 자신은 온몸의 털을 다듬고 나면 지쳐서 시로의 귀나 뒤를 닦아줄 여력이 없었다. 그걸로 주인에게 지청구를 들은 것도 여러 번이다.
이틀 전부터는 녀석의 거동이 더 굼떠졌다. 힘도 없는 주제에 침대에 누워서 쉴 일이지 자꾸만 비칠비칠 어디론가 갔다. 주인 말을 들으니 다른 방 침대 아래나 욕실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듯 했다. 거기가 좀 시원한 편이긴 한데, 더운 건가? 하긴 워낙 나보다 더위를 탔지. 살이 쪄서 그런 줄 알았더니만...
먹는 게 시원찮아 변도 제대로 못 보던 녀석이 모래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주인은 놀라 녀석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조금 지나 주인이 돌아왔다. 시로 녀석은 보이지 않고 대신 큼지막한 상자를 들고 왔다. 시로 녀석, 또 입원해서 수액을 맞나 보다. 이거 뭐 다리에 털이 자랄 틈이 없겠구만. 약해빠진 놈... 나보다 덩치가 있어서 훨씬 튼튼한 줄 알았더니, 순 약골이었잖아.
그런데 이상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와 있을 줄 알았는데 주인이 퉁퉁 부은 얼굴로 상자를 들고 나간 후 도통 돌아오지를 않는다. 이제 어두워지는데... 집에 아무도 없으니 이상하다. 주인이 집을 비워도 늘 시로가 함께 있었다. 평소에는 마음에 드는 자리나 담요 등을 두고 은근히 기싸움을 하는 사이였지만 주인이 집을 비울 때면 서로가 적당히 붙어 있곤 했다. 그러면 좀 든든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어두워지고도 한참이 지나서 주인이 집으로 돌아왔다. 눈두덩이 뻘겋다. 울었나? 그런데 왜 시로는 안 오지? 병원에서 밤을 보낸 적은 없는데...
주인이 제 옆에 살그머니 눕더니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쿠로야, 시로가 떠났어. 얼굴 안 보여줘서 미안해. 네가 너무 놀랄까봐... 시로 잘 보내고 왔어. 걱정하지 마.
주인이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녀석이...?
갑자기 아까 혼자 있을 때의 낯선 기분이 다시 몰려왔다. 시로는 항상 옆에 있었는데.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은, 그냥 늘 옆에 있는 존재. 그런데, 이제 없다고? 영영?
쿠로는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주인의 손가락을 몇 번 핥은 후 발등을 그루밍하기 시작했다. 이 낯선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싶었다. 아, 이건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샛빛
①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②아름다웠던 여섯 개의 다리는 끔찍한 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로 바뀌었다. ③한 쌍의 더듬이로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나는 이제 귀, 코, 혀, 손을 모두 이용해야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열등한 동물이 되었다. ④무엇보다 두 쌍의 날개까지 사라지는 바람에 이제 자유롭게 날지 못하고 언제나 비참하게 걸어야 한다.
⑤카프카는 책을 통해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벌레가 되었다는 소설을 썼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경악했다지만, 우리 벌레 입장으로는 오히려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된 게 더 끔찍하다.
⑥세상에는 수많은 동물이 살고 있는데, 그중 균이 제일 많고 다음은 우리와 같은 벌레다. ⑦열등한 인간들은 우리를 보고 하등동물이라 여기지만 과연 그러할까. ⑧인간들은 자신들을 긴 진화를 거친 고등동물이라고 생각하고, 복잡한 기관을 가지고 뛰어난 두뇌로 자연을 이용할 줄 안다고 착각한다. ⑨진화는 더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환경에 잘 적응한다는 말이 꼭 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더 적확한 말이다. ⑩신생대에 나타났다고 보는 사람은 중생대에 이미 살고 있던 우리 벌레들보다 뛰어나다는 건 한쪽만 본 것으로, 우리가 진화하지 않은 게 아니라 굳이 사람이 생각하는 진화를 하지 않아도 환경에 적응하기 쉬운 몸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한 추론이다.
⑪사람들은 대체로 모기, 파리, 바퀴벌레 등을 나열하며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⑫그런데 우리도 사람들이 싫다.
⑬날개가 없어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바람에 지구를 뜨겁게 만들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자식처럼 10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해 시답지 않은 글을 덧붙이며 데이터 저장 공간만 차지하고 지구 온난화를 부채질하는 건 인간이지 않은가. ⑭우리 벌레는 식물 수정을 도우면서 지구와 공생하며 살아가려고 하는데, 인간은 식량과 과일이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 식물만 집중적으로 키우며 도시니 문명이니 하는 걸 건설한다고 숲을 태우고 이산화탄소를 내뿜으며 우리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⑮모기가 사람 피 빠는 것 말고 뭐 하는 게 있냐고 말하는 놈들은 우리를 잡아먹는 곤충이나 물고기 등의 생태먹이사슬을 고민하고 초콜릿 먹을 생각일랑 절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리스
3rd. GX (7/2~7/5) 과제입니다 :)
“모두 수업 시작하기 전에 강의실 앞 컴퓨터에 발표 자료 준비하세요.”
다미는 강의실 앞으로 걸어가며 가방 앞쪽에 달린 지퍼를 열고 손을 집어넣었다. 있어야 하는 usb 대신 작은 모래알들만 손에 잡혔다.
뭐지? 내 usb 없어진 거야? 걸어가던 다리가 멈췄다.
“다미 선배, 왜 그러세요? 설마 usb 사라졌어요?” 같은 조인 후배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야, 오늘 나오기 전에 분명히 여기 넣었었는데….” 나머지 두 조원마저 미묘하게 표정이 변하자 얼굴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허겁지겁 가방 곳곳을 열어보았지만 어느 곳에도 usb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며 급하게 강의실을 둘러보자, 불행하게도 다른 조는 모두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아. 망했다. 침착하게 행동하라는 게 이거였어? 아침에 습관처럼 보는 타로 어플의 충고가 머리를 스쳤다. 다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의 먼 곳을 응시했다.
“저희 조 어떡해요, 교수님께서 오늘 발표 못하면 기회 없다고 하셨었는데….”
이런 바보 같은 실수는 멍청이들이나 하는 거로 생각했는데, 내가 이렇게 멍청했었나? 후배들 앞에서 망신 제대로다. 웅성대는 강의실 속에서 홀로 점점 멀어져 다른 공간으로 분리된 느낌을 받았다. 쉴 새 없이 뻐끔대는 조원들의 입 모양을 보니 계속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만큼 귀가 먹먹했다. 아까부터 무의식적으로 잘근거리던 아랫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유니크
4th GX 입니다.
나는 청살모. 풀과 나무가 우거져 둘러싸인 단층 빨간 벽돌집, 그래서 안 어울리는 시멘트로 포장된 마당 옆 소나무에서 나는 매일 논다. 소나무 아래 원두막 지붕이 있고, 다른 옆에는 대나무 밭이어서 실수로 떨어져도 잡을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많아 안전한 놀이터다. 굵은 소나무 네 그루와 야리야리한 소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덮고 있어 나무 사이로 점프할 때면 내가 하늘을 나는 것 같다. 또한 꺼칠꺼칠한 껍데기가 튼실하여 오르락내리락 할 때는 발바닥이 짝짝 붙으며 차르륵차르륵 소리가 나는데 속도감이 귀로 느껴진다. 더욱 신나게 놀게 만들어준다.
이 소나무는 전에 산불이 났을 때 아래 깔린 소나무잎이 타들어가면서 살짝 그을린 흔적이 있는 아주 크고 굵고 오래된 소나무이다. 산불나고 이 주변 이 정도 크기의 소나무는 모두 파헤쳐져서 큰 트럭에 실려 나갔다. 가끔 이 집 주인 부부도 나무 아래서 쳐다보며 이런 소리를 한다. 이 나무는 팔면 얼마나 할까?, 이 나무들은 뿌리가 뒤엉켜 옮겨 심기 어려워서 팔 수도 없을꺼야. 이 소나무 맘에 들어 여기로 이사왔는데 왜 팔아? 하는 등등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결국 이 소나무는 안 팔릴 것이다. 이 집 안주인이 여기를 좋아한다. 눈이 오면 카메라로 사진 찍고, 봄 가을되면 소나무 주변 대나무 잘라내는 일을 엄청 열심히 한다. 나는 안주인의 눈빛으로 소나무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솔방울도 좋고, 가끔 찾아오는 새들도 좋지만 매일 출근하는 집 주인 부부의 적당한 게으름이 딱 맘에 든다. 그래서 여기는 풀과 꽃이 어우러져 있고, 가꾼 듯 안 가꾼 야생의 주변이 고양이가 와도, 매가 날아다녀도 몸을 숨기기도 좋고, 가끔 친구들과 술래잡기하기도 좋다. 낮엔 완전 내 세상이다. 시멘트 마당을 가로질러 다녀도 멀쩡하다. 풀이 많아도 제초제를 치지 않는다. 봄에 조금 낫들고 잘라내다 한여름엔 그냥 내버려둔다. 그러면 풀과 나무 아래 먹을 것이 많아진다. 가금 고라니도 찾아와서 울부짖어 놀랄 때가 있지만 적당히 풀숲에 집을 만들어 며칠 밤 자고 그냥 가 버린다. 그래서 여기는 내 친구들도 엄청 좋아하는 내 아지트이자 놀이터이다.
마야
[3차 과제]
“출입문 닫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여자는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고 차창 밖을 봤다. 어디쯤 왔지? 마포역인가? 맞은 편 승강장 스크린 도어 뒤로 역명이 기둥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열차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는 승강장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 여기 어디지? 목을 빼고 정차역 안내 전광판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저쪽 천장에 매달린 안내 전광판 위에는 “수리 중”을 알리는 종이가 붙어 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여자는 급하게 지도 앱을 클릭했다. 로딩 중을 알리는 동그라미가 뱅글뱅글 돌았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느려!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아직도 지도 앱을 로딩 중인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다음 역에 내리자. 출근 시각이 아닌데도 지하철 안은 복잡했고 조용했다. 여자는 “실례합니다”를 연신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뚫고 문 쪽으로 움직였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번 정차역은 오목교, 오목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 입니다.”
명랑한 민요풍 음악에 이어 안내 방송이 나왔다. 목적지와 정반대 방향이었다. 아이 씨. 여자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실례합니다, 좀 내릴게요.” 여자는 내리지도 않을 거면서 출입문을 막고 있는 승객들의 등을 밀치며 승강장에 내려섰다. 지도 앱은 여전히 열리는 중이었다. 어쩌지? 15분 남았는데. 죽었다 깨도 회의 시간까지 못 가. 큰일 났다. 택시를 타? 바로 잡힐까? 길은 안 막힐 시간인가? 차라리 지하철로 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아, 우선 담당자에게 전화 해야지. 지랄하겠네. 여자는 급히 회의 담당자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담당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회의 준비하느라 못 받는 것 같았다. 다시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순간 피곤이 덮쳤다. 여자의 감정이 납추를 매단 것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뭐 어쩌겠어, 이미 엎어진 물인데.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여자는 승강장 벤치로 가 앉았다. ‘수석님, 여러 차례 전화를 드렸는데 안 받으셔서 카톡 드립니다. 지하철을 잘못 타서 30분 이상 늦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 맞은편 승강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늦은 거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택시 타?
hiho
배가 고프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리로 나가봐야겠다. 눈 부릅뜨고 어슬렁거리다 보면 분명 얻는 게 있을거다.
아 하필 오늘 달이 이렇게 휘영청 밝다니 망했다. 구석진 곳으로 살금살금 다녀야겠다. 헉. 저 차는 왜 저리 쌩쌩 달리는거야. 깜짝 놀랐네. 배도 고픈데 놀라느라 에너지를 소진했다. 큰일이다. 너무 배고파.
킁킁.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난다. 가로등 아래 버려진 케이크가 있다. 먹을까 말까. 달도 밝은데 가로등 불빛은 꼭 대낮처럼 환하네. 케이크. 케이크. 케이크.
모르겠다. 일단 먹자.
갑자기 앞이 안보인다.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진다. 난 살게 될까. 살 수 있을까.
마야
[4차 과제]
오늘도 옆집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이 여자는 매일 아침 해도 뜨기 전에 마당에 나타나 우리 집과 여자 집을 가르고 있는 쇠막대기 울타리로 다가온다. “복순아, 복순이 잘 잤어?” 를 외치며 퉁퉁 부은 두 눈에 입 냄새를 풀풀 풍긴다. 집안에서 자다가 더워졌다고 하루 아침에 마당으로 쫓겨나 가뜩이나 울분의 밤을 보내고 있는데, 간신히 눈을 좀 붙여볼까 싶으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나타나는 이 여자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내가 싫다는 표시를 그 정도 냈으면 아무리 멍청이라도 알아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지난 봄에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를 처음 본 다음부터 “아이고 복순이 예쁘구나. 너무 귀여워. 밥이 맛있어요. 어쩜 이렇게 잘 놀아.”라며 어쩔 줄을 모른다. 나 주라고 커다란 간식 봉지를 울타리 너머로 건네는 바람에 우리 언니가 난처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아휴, 뭘 이런 걸 다… 이러실 필요 없는데요. 그나 저나 우리 강아지가 좀 예민해서 친해지기가 어려워요.” 언니가 어정쩡하게 간식 봉지를 받으며 매몰찬 나를 대신해 미안해 하면, 여자는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고 자신 있게 호호 웃었다. “제가 강아지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원래 강아지랑 아기는 자기 좋아하는 사람을 먼저 알아보잖아요.”
다른 개들은 그런 여자에게 다 넘어갔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맘대로 친한 척하고 무턱대고 들이댈 때마다 등의 털이 쭈뼛쭈뼛 서기까지 한다. 여자는 분명히 내 턱 아래를 살살 긁어 주고, 보글보글한 털에 손을 넣고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조몰락거리고 싶겠지. 아마도 내가 자기 손등을 연신 핥으며, 네발을 하늘로 든 채 배를 만져 달라고 조르는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처음이나 지금이나 저 여자가 싫다. 그래서 볼 때마다 친한 척하지 말라, 더 다가오면 물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아르르르르르. 여자의 두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며 콧잔등에 여러 겹의 멋진 주름을 만들고 윗입술을 말아 올려 반짝이는 튼튼한 송곳니를 살짝살짝 보여 준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이 여자는 나를 볼 때마다 꼴 보기 싫은 미소를 지으며 울타리 쪽으로 다가온다. 한번 이빨 맛을 보여 주고 싶지만, 우리 언니가 곤란해질까 봐 “아르르” 인상만 쓸 수밖에 없으니 내 속이 뒤집어 지는 거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그믐클럽지기
5th. GX (7/10~7/13)
WritersGX를 잘 따라오고 계신 GX 팀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점점 과제의 어려운 정도도 높아지고 있다는 거, 눈치 채셨나요? 다섯 번째 과제는 쉽지 않습니다.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246~252쪽에서는 썩 머리가 좋지는 않지만 무척 잘 생긴 청년 제라르 블레오가 자신의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워 합니다. 소녀라기보다는 어린이라고 해야 할 테레즈와 뽀뽀를 하고는 그만 성욕을 느껴버린 것입니다. 제라르는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지만 온전히 혐오감만 느끼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통제하려 하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다섯 번째 과제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의 모습을 10문장 이상으로 적어주세요.
『옆집 뚱보 아줌마가 임신했대요』 246~252쪽을 참고하세요.
GoHo
5th.. 쫄깃했던 출근기..
‘하! 배 밖으로 나올 간도 없을 것 같은 베이비한 녀석인데!’
출근을 하려다 보니 시선을 잡아채는 녀석이 있다. 개굴!
손톱만큼 과장해서 엄지손톱만 하려나.. 베이비 청개굴이 내 꿈차 뒷유리창에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
‘으, 난 너처럼 몰캉한 녀석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구!’
자동차 키로 슬슬 방뎅짝을 밀어 훈방 귀가를 시키려고 하였지만 웬걸 하차 거부를 한다.
다시 슬슬 옆의 풀숲으로 밀어 치기를 하다 말고 한 가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 녀석을 데리고 출근하면 중간에 자진 하차를 할까? 안 할까?
뒷유리창에 호기롭게 밧데루 자세로 납작 버티고 있는 요 앙큼한 녀석을 데리고 출근하기로 결정!
아이를 등교시키느라 학교 주변 30km 내 속도에서 녀석은 꿈쩍도 않는다.
‘오호라! 작지만 강하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 이라던가...’
방지턱.. 덜커덩! 힐끗..
방지턱.. 덜커덩! 힐끗..
‘떨어졌나?’
살짝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방지턱.. 덜커덩! 힐끗.. 힐끗..
이제 본격적으로 80km 구간 돌입인데 녀석이 잘 붙어 있으려나 싶다. 힐끗..
힐끗.. 녀석이 여전한 자세로 찰싹 붙어 있다.
‘제법인데... 그래도 앞유리 아니고 뒷유리라 다행이네. 근데 앞유리에 탔으면 바람 저항에 버틸까? 터질까? 으으...’
힐끗.. 룸미러로 힐끗힐끗 보자니 여간 불안 불안한 주행이 아니다.
주의! 전방주시! 힐끗.. 전방주시! 힐끗..
신호대기 중에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녀석이 미세하게 쪼그라든 것만 같다.
‘그렇지. 지도 쫄리겠지.’
나도 쫄리긴 마찬가지.
바람에 훅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세상 험한 줄 모르고 펄쩍 뛰어내리는 것은 아닌지, 여기서 뛰어내렸다간 둥근 생김과 달리 은혜롭지 못한 것에 의해 책갈피가 되어 버릴 텐데.
책갈피가 되어 버린 녀석을 생각하니 으아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다.
‘괜히 태우고 왔나? 억지로라도 내려줄 걸 그랬나? 아.. 참.. 눈 많이 가는 녀석일세.’
‘자, 이제 10분 정도만 잘 버티거라. 다 와 간다.’
아주 잠깐 신호 대기 중 룸미러를 통해 힐끗 녀석의 동태를 보자니 아뿔싸! 사.라.졌.다...
순간 머리털에 피뢰침이 곤두섰다. 부슬.. 비도 오는데 곧 벼락이 칠 것 같다.
‘흡! 어디 갔지? 날아갔나? 떨어졌나? 안 되는데... 아직 너무 애긴데...’
좌절스럽게 운전대를 부여잡았다.
애도의 마음으로 힐끗.. 룸미러를 보다가 핸들을 놓고 만세를 부를 뻔했다.
거.기.에 녀석이 있.었.다!
아마도 슬금슬금 미끄러져 내려가 잠시 브레이크등을 구경하고 있었나 보다.
브레이크등 오른쪽 윗부분에서 쬐꼬만 녀석이 꼬물꼬물 배밀이를 하고 있었다.
‘휴!’
녀석은 그렇게 40분이 넘는 시간 무임승차를 하며 기개 좋게 주유소도 따라오고 또 회사까지 따라왔다.
종착지인 내 주차 자리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아마도 안도의 한숨을 세상이 꺼져라 내쉬었을 듯싶다.
나도 마찬가지.
‘휴~~’
꿈차를 주차하자 녀석은 옆 화단의 초록초록 안락한 나뭇잎을 향해 폴짝 폴짝 갈아타기에 무사히 성공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동승자를 밖에 태우지 않겠습니다~ㅎ
다시쓰다
우리 엄마는 멋진 여자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였다’이다. 그렇다. 과거형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한 건, 언제부터 ‘였다’가 되었냐인데 바로 어제부터라는 거다. ‘멋진 여자다‘에서 어제부터’멋진 여자였다‘가 된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이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뜻도, 그 한자도 모를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훗날, 그 이유를 찬찬히-엄마 성격상 그리 오래 생각해 보진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생각해 보니 맞벌이 부모의 부재 탓이 아닐까 싶었다고…. 그래서 본인은 자식을 낳으면 그들 곁에 있어 주겠다고 다짐했고, 그리고 그녀는 그 꿈을 이루었다.
음식을 잘하지 못하고, 아니 안 하고. 청소도 안 하고. 주야장천 우리 곁에만 있어 주는 것도 현모양처라고 쳐준다면 말이다. 사실 나는 엄마가 ’현모양처‘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한 번도 찾아보지 않은 건 아닐지 의심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하지만 21세기형 현모양처라고 우긴다면 뭐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기에, 나도 가만 듣고 있다. 이런 우리 엄마가 그제까지 멋진 여자라 불린 이유를 굳이 찾자면, 그녀는 인정할 줄 알고, 사과를 잘하기 때문이다.
꿈을 이룬 현모양처인 엄마는 살림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 그렇게 내팽개쳐 친 살림살이와 우리를 뒤로하고는 그다지 할 일이 없기에 우리 곁에서 자주 책을 읽곤 했다. -그럼에도 쓰는 단어가 그다지 고급스럽지 못한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녀는 책을 읽으며-대체 무슨 책을 읽길래- 가끔 말을 툭툭 내던졌는데, 9살, 7살짜리 남자애들 둘을 배경에 두고, “옥자는 아들의 남자 애인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니? 그건 말도 안 돼. 성별은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성별을 넘어서는 사랑에 대해 강의를 시작했다. 우린 몇 마디 들어주는 척하며 또 시작이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자동차 장난감으로 시선을 돌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이십여 년을 살아온 우리다. 그렇게 우린 엄마로 인해 ’고급 교육’을 받아왔다. 우리 엄마는 누구보다 쿨했고-정의의 범위가 한없이 넓다- 이해의 범위도 한없이 넓다. 그런 그녀에게 어제 나는 진우를 소개했다. 물론 나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자리는 누구나 가슴이 떨리고 긴장될 것이다. 그 사람의 성별을 떠나서. 나도 딱 그 정도의 긴장과 떨림을 지닌 채 엄마를 만났다. 그동안 엄마와 한집에서 살면서 쌓아온 데이터로, 엄마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정확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도 돌려보았다. 그때 내 얼굴에 슬며시 미소까지 번졌던 걸 생각하면, 다시 돌아가 내 머리를 한 대 치고 싶다!
그 누구라도 우리 집 서재를 잠시만 둘러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 인권 신념과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멋진 여자인지를. 나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그런 엄마를 존경해 왔다.
어제 그런 엄마에게 진우를,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소개했을 때의 엄마 표정을 봤어야 한다. 그래야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조금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말한다. 엄마의 얼굴에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적 갈등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만남이 평소 그녀의 소신과 어긋나는 일이었다면-우리에 대한 반대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물론 가슴은 몹시 아프지만- 오히려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엄마는 딱히 무례하게 대하진 않았다. 드라마에서 보는 물세례나, 돈봉투나, 김치 싸대기 따위의 일은 없었다. 그녀의 정돈되지 않은 그 찰나의 표정을 내가 읽었을 뿐이다. 진우를 집에 데려다주고 오겠다 하고, 나는 식당 앞에서 엄마와 헤어졌다. 도저히 집까지 같이 갈 자신이 없었다. 오늘은 엄마와 집에 같이 가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라 진우는 어리둥절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둔한 편인 진우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큰소리를 뻥뻥 치고 다녔는지, 그는 내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고, 식사 자리를 끝낸 지금도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기에 미소로 답했다. 그곳에서 진우가 사는 곳까지 멀지 않아서 우린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진우는 기분이 좋은지 옆에서 뭐라 뭐라 종알댔다. 마치 시험하나 잘 끝낸 학생같이.
진우를 보면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멋진 엄마이던, 멋진 엄마였던, 그녀를.
엄마는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 멋진 엄마이다로 돌아올 텐데, 을 생각하며 나는 계속 걸었다. 엄마를 생각하고, 위선과 소신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자식이 뭔지를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하고, 이것을 생각하고, 저것을 생각하고, 그러다 진우가 뭐라 했는지를 생각하고, 저러다 내가 아까 뭘 생각했는지를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다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진우집앞이다.
어제와 달라진 것이 하나 없는듯한데 아직 내 오른쪽엔 엄마가 있고, 내 왼쪽엔 진우가 있는데, 오른쪽도, 왼쪽도 왠지 어느 한쪽이 시큰한 듯 시리고, 허전해서 상당히 추운 밤이었다. 올 겨울밤은 상당히 추울 것 같다.
샛빛
①내 마음은 내 것인가? ②요즘 이런 생각이 왜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③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④누구는 머리 속 뇌에 있다고 하고 누구는 가슴 속 심장에 있다고 한다. ⑤아마도 누구나 자신의 마음 속에 괴팍한 도깨비 하나쯤은 살고 있지 싶다. ⑥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⑦예전에 장영희 교수가 <마음속의 도깨비>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⑧“커다란 범죄 욕구는 아니라도 가발 쓴 사람을 보면 가발을 벗겨 보고 싶은 충동이나 아름답고 완벽한 화음으로 노래 부르는 합창단이 있다면 갑자기 이상한 불협화음을 내고 싶은 충동, 아주 조용한 성당이나 도서관에 들어가면 ‘아-악’ 하고 소리 질러 보고 싶은 충동, 굽이 아주 높고 가는 구두를 신고 얌전하게 걸어가는 여자를 보면서 구두굽이 톡 부러지면 어떨까 기대하는 마음 등, 조화보다는 부조화, 타협보다는 갈등을 위해 논리도 체면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도깨비는 누구에게나 잠복해 있어서 언제라도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마음속의 도깨비’ 일부)
⑨내 마음이라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⑩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에 관한 세뇌가 만든 마음은 때로 생뚱맞게 떠오르는 도깨비 같은 마음 때문에 괴롭거나 찝찝할 때가 있다. ⑪열린 마음으로 도깨비와 친해져야 실제로 엉뚱한 행동을 하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호디에
"야!!"
일단 소리를 질러놓고 순간 연이는 당황했다. 자신이 고작 세 살짜리 아이에게 한음절로 지칭하며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다니. 연이는 하민이를 키우면서 한 번도 아이에게 화를 낸 적도, 아이를 "야"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해야한다는 것, 훈육을 하되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녀가 갖고 있는 육아관이다. 오래 전 휴일에 친구 윤희와 그녀의 두 아들과 함께 키즈 카페에 갔을 때 윤희가 자기 아들들한테 "야"라고 소리지르자 옆에서 멀쩡한 아이들 이름을 놔두고 야,라고 부르냐며 타박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둘째를 낳고 세 살 터울의 형제를 키우면서 연이의 육아관은 수시로 흔들렸다. 남편 기현이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 두 아이가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시간은 온전히 연이의 몫이었다. 더구나 남자 아이 하나 일 때와 둘 일 때의 양육은 하늘과 땅차이였다. 아이가 마냥 사랑스럽기만 한 날은 없었다. 감정 기복이 롤러코스터를 탔고, 마침내 연이 스스로 최저선이라고 그어놓았던 그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호민이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아이보다 연이 스스로가 더 놀라고 자괴감이 들어 눈물이 차올랐고, 동시에 몇 년 전 친구 윤희에게 거들먹거리며 교양 있는 척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역지사지 할 일이 어디 육아뿐이겠는가, 싶었다.
레몬레몬
허겁지겁,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한 소름돋는 생각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로 카페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스스로가 한 생각에 끔찍해 하다가도, 실제로 그러면 어떨까? 하는 이상야릇한, 혹은 짜릿한 감각이 온 몸을 내달렸다. 아무래도, 미친거 같아.
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차분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라고 말을 내뱉었다.
카페 주인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아무리 그래도 내 머릿속을 읽을 초능력은 존재하지 않지. 하는 생각. 이 두 생각이 번갈이 가면서 나타났다.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받았습니다. 하고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돌려 받은 카드를 들고, 최대한 사람이 없는 좌석에 앉았다.
아무리 그렇게 화가 나더라도, 살인이라니!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니야, 그래도 그 작자는 그렇게 죽여도 누구하나 슬퍼하는 사람이 없을거야. 하는 생각, 그리고 아무도 없는, 속도 제한이 없는 고속도로를 내달리듯, 잔인하고, 폭력적인 상상들이 계속해서 증폭해 나갔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에서 울리는 카페 진동음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사람이라고 그런 꼴을 당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다니!
에어컨 냉기 때문인지, 혹은 자신의 끔찍함 때문인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커피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은 다음에 커피와 얼음을 한 번에 마셨다.
몸이 다시 한 번 부르르 떨렸다.
자신의 폭력성과 잔인함에 부르르 떨리는 지, 아니면 분노로 떨리는 지 잘 모르겠다.
greeny
종종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분이 가라앉으면 둥당둥당거리며 피아노를 친다. 그러다 마음의 불안함이 손으로도 전파되어 건반의 리듬이 버벅거리기 시작하면 나는 화가 난 듯이 피아노를 천둥번개가 내려오듯 만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내 주위에 있던 작은 줄리는 불안한듯 도도도도독 캣타워 위로 달려가 나를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기 시작한다.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감당해주는 아이가 감사함과 동시에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감정의 실마리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퇴근하고 들어오는 가족들도 나의 모습을 보고는 오늘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날이구나라고 여기고 조용히 각자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어제와는 다른 모습에 혼란하겠지만, 그럼에도 서로 배려하기 위해 공감하려고 애를 쓴다. 저녁을 먹고 잘 시간이 되어서도 평소보다 움직이는 소리가 크다고 느낄 때엔 문을 닫고 있는 내 방문 뒤로 가족들이 소근소근,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걱정이 되어 나를 위로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다가가는게 좋을지 고민하는 거겠지. 갑작스레 원인도 모르고 분노를 분출하는, 버겁고 혼란스러울 떄가 많은 가족구성원이지만,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노력하는 모습이 나를 너무 따스하게 안아주는 느낌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집을 좋아하게 된 이유이지 않을까.
작성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