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GX] 1. 미셸 트랑블레처럼 일상 포착하기

D-29
경비원 현씨는 최부녀에게서 그렇게 교양미 넘치던 주민대표의 말을 떠올렸고 또 그렇게 특수학교 설치가 백지화되면서 매일 왕복 4시간을 차를 몰아 아이를 돌봤던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여전히 최부녀는 경비원 현씨 앞에서 열분을 토하고 있다. 날은 덥고 구름 한점 없다. 그렇게 퍼붓는 이와 무념무상 우두커니 서있는 이를 지켜보던 한 무리의 고양이들. 대여섯 마리 정도 되어보이는 그 고양이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현씨는 고개를 돌려 고양이들을 바라본다. 자신의 웅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현씨를 인식한 최부녀도 고양이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순간의 정적, 그리고 후두둑. 마른 하늘에서 빗방울이 나리기 시작한다. 고양이들이 제일 먼저 자리를 뜬다. 그 모습을 보던 최부녀도 고양이의 갸르릉 거림같은 소리를 내고는 바삐 가던 길을 간다. 경비원 현씨, 하늘한번 쳐다보고 빙긋 웃는다. "그럼, 수고하소. 난 퇴근할라니까." 비가 쏴아 내린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오늘도 정신 없는 출근길에 올랐다. 평소처럼 움직였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도로는 나의 기분과는 달리 꽉 막히기 시작했고, 그 덕에 나는 가까스로 9시 출근을 찍었다. 그 덕에 그래도 지각은 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역시 오늘 나의 기운이 좀 좋은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전 내내 바쁜 일이 없어서 조금은 졸기도 하고 조금은 스트레칭도 해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왔을 때, 갑작스럽게 호출을 받고 미팅에 들어갔다. 점심시간 10분 전이었다. 배가 고파서 숨을 참고 있었는데, 앞으로 진행될 미팅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 주변인들의 작은 화이팅모션에 어설프게 감사합니다라는 뻣뻣한 미소와 함께 미팅룸으로 들어갔다. 영문도 모른 채 들어간 미팅에서는 갑작스럽게 나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내 위에 앉았고, 그 덕에 나는 클라이언트의 질문 속으로 같이 빨려들어갔다. 아는 선에서 답을 하고는 있으나, 정신없는 질문 속에서 내가 살펴보지 못한 프로젝트의 특이점이 있을까 등 뒤로 땀을 흘렸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 넋이 빠져 회의실에서 나왔지만, 어쩌다 클라이언트와 점심까지 동행하게 되어 옷이 마를 틈이 없었다.
작년 전남편과 함께 왔던 병원에 혜선은 혼자 앉아 있었다. 이제는 그년과 함께 올 테지 하는 생각이 들자 다시 속이 쓰렸다. 하여튼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놈이라니까. 벌써 여러 달 괴롭히고 있는 병증 때문에 먹는 것도 시원스럽지 못해 회식 자리 같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아마도 스트레스일 거야. 흔한 병명으로 약만 주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자꾸 기운이 떨어지고, 가끔은 걷는 것조차 버거운 날들이 이어지자, 혜선은 어쩔수없이 반차를 내고 가장 가깝고 오기 싫었던 병원에서 외로움과 걱정의 힘 싸움에 끼인 채 통상적인 검사를 마쳐야만 했다. "찍어놓은 결과로 보면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화면을 보시면 이 부분입니다. 길이를 재보니까 3센티미터가 조금 넘네요. 일단 추가로 검사를 해서 결과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크기가 크다고 해서 다 암인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징후가 좋지 않으니까, 검사는 꼭 하시는 게 좋습니다. 검사날짜는…."의사가 화면에 띄워놓은 화면에 둥그런 부분을 가리키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다. 분명 괜찮다고 하면서도 의사는 한결같이 혜선의 눈을 피하고 있음을 깨닫자, 그 이후부터는 의사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알았다고 몇 번쯤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지만, 어느새 진료실 앞 간호사와 대화하고 있었다. "검사날짜는 언제가 편하신가요?" 정확히 며칠로 이야기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었고,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밖이 어두웠다. 저녁인지 밤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저녁 먹을 시간은 지난듯했다. 아니 시간이 멈춘 것인지 정신없이 흐른 것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조차 아는 사람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혜선이 떠올린 것이라고는 한동안 회사에 다니기는 힘들 것이고 그래도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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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의 일과는 매우 규칙적이었다. 첫 번째 알람 소리에 깨어나서 두 번째 알람 소리가 들릴 때까지 씻고, 세번째 알람 소리와 네 번째 알람 소리 사이에 구운 식빵 두 조각, 잘 익은 달걀 프라이 한 개, 껍질 채 먹는 사과 반쪽을 먹고, 다섯 번째 알람이 울리면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작은 작업실을 구해서 출, 퇴근을 하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 두고 혼자 일하기 시작하면서 꾸준한 수입을 위해 시작한 규칙적인 생활이지만 그런 생활이 잘 맞았던지 몇 년을 그렇게 보냈는데. C는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노려보며 화를 삭이는 중이었다. 자면서 배터리 충전하는 것을 잊어버려 휴대폰이 꺼져서 다섯 개의 알람 모두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닐 때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면 지각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동료들과 했었는데 정말 너무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보니 벽에 걸린 시계가 10시를 지나고 있는 게 아닌가. 화가 사그라들자 그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한 건 허탈함이었다. 특별히 늦게 잠에 든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똑같은 시간에 잠이 들었는데 알람 소리 없이 잠에서 깰 수 없었다고? 지난 몇 년간 똑같이 깨어났으면 알람 소리 없이도 깰 수 있어야하는 거 아냐?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알람 소리에 맞춰서 움직였던 것이 몸에 남아있지 않다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은 생각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누우니 햇빛이 닿는 발끝이 따뜻하게 달아오르자 C는 괜히 발가락을 한 번 꼼지락 거렸다. 뭐... 하루 쯤은 괜찮지 않나. 몇 년 동안 열심히 쉰 나에게 내 몸이 신호를 보낸 건 아닌가. 하루 정도는 늦잠 자고 일을 쉰다고 해서 당장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래 이렇게 된 김에 오늘 하루는 늘어지게 쉬어보자. 기지개를 쭉 편 채 대자로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렇게 잤는데도 불구하고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아, 그래도 충전은 해야지.
장난 아니잖아?! 긴장되고 두근거리는 마음에 아이스 아이스티만 쭉쭉 들이키고 있다. 평소에 즐겨 가던 문방구에 경찰들이 와 있고, 심각한 표정으로 문방구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경찰과 이야기 하고 있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도망쳐서 그 맞은편 카페에 와버렸다. 누군가가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걸까? 아니면 또 다른 일이 있으려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방구에 경찰들이 올 일은 누가 물건을 훔치는 일밖에 없지 않나? 본인은 잘못한 일이 없긴 하지만, 엄마가 노트와 필기구를 사라고 준 돈을 가지고 아이스티를 사 먹는 일은 아무래도 잘못한 일이 맞긴하다. 하지만, 엄마도 너무 단 건 안돼! 하면서 커피를 마시는 걸 생각하면, 나도 아이스티를 마시고 싶다구! 하는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또, 엄마가 마시는 커피대신에 색이 비슷한 걸 마시는 거니까, 나도 한 발 양보한 거 아닌가? 사실은 나도 그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 아, 이따가 집 가서 뭐라고 하지…? 에라, 모르겠다. 일단 아이스티가 맛있으니까! 이따 집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경찰들이 와서 어쩔 수 없이 못 샀다구 하면 엄마도 봐주지 않을까?!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했던가. 벚꽃이 핀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중간고사 시작이 먼저 일까. 하기야 그런걸 따져 보았자 무슨 소용이랴. 시험공부나 하면 그 뿐인걸. 벌써 막학기다. 이제 더 이상 미루고 뭐 할 것도 없다. 이제 이번 학기만 지나면 더 이상 학생신분으로 버틸 수도 없다. 여름이 지나면 직장인이거나 백수거나 둘 중 하나의 신분이 되겠지... 시험공부도 지긋지긋해서 중도 공용컴퓨터실에서 무의미하게 사이트들이나 뒤적거리다 방학인턴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덜렁 쓰고는 온라인 제출을 해버렸다. 그렇게..중간고사도 지나고 기말고사를 앞두고..아..이제 드디어 내 인생의 마지막 시험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때... 띠링 하고 문자가 왔다. '응.?이렇게도 인턴 합격이 되는 거였나.' 싶었지만 백수가 되느니 인턴으로 가자는 생각에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먼 타지로 가고만다. 교수님과 랩실 선배들은 "너...가... 강춘남씨인가요?" 라며 당황스러워 한다. 교수님과 고참 랩 선배들은 이력서에 열심히 하겠다는 한 줄만 달랑 쓰는 놈은 별 생각없는 놈인가 보다 싶어 여름방학동안 시료채취도 하고 운전도 하고 무거운 시료도 들었다 놨다 해줄 놈인가.. 싶어 뽑았다며... 160도 안되는 체구가 작은 여학우 강춘남을 보고 당황해 한다.
3rd. GX(7/2~7/5) 과제 제출합니다. 주말 오후였다. 남편에게 딸을 맡겨두고 홀가분하게 혼자 장을 보러 마트에 다녀온 지현은 무거운 장바구니를 주방에 내려놓고 물 한 잔으로 갈증을 달랬다. 그리고는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휴대폰이 없어진 걸 깨달았다. 순간 심장이 가쁘게 뛰면서 몸에 열이 올랐다. 중요한 개인정보나 업무 연락, 가족들과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들 때문이 아니었다. '세븐 보이즈.' 지현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인 세븐 보이즈의 사진과 영상이 전부 휴대폰에 담겨 있었다. 그것들은 아무도 모르는 지현만의 보물이었다. 가족과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그 흔한 응원봉 하나 간직하지 못한 지현이었다. 플랭카드도 부채도 슬로건도, 심지어 손바닥만한 포토카드도 가지지 못했다. 오직 사진과 영상뿐이었다. 그걸 위해 지현은 항상 휴대폰을 저장공간이 제일 큰 모델만 샀고, 그것도 부족해 외장 메모리카드도 썼다. 식은땀이 났다. 지현은 급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언제 제일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썼더라?' 마트에서 장을 볼 때 딸 아이가 과자를 사다 달라고 전화했던 기억이 났다.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면 그 후다. 지갑과 차키를 챙겨 들고 다시 집을 나서는 지현에게 남편이 물었다. "어디 가?" 지현은 신발을 대충 발에 꿰며 외쳤다. "휴대폰 좀 찾아 올게!"
“어... 저... 아직 새끼라고... 56일이라고..” “네, 새끼 맞습니다. 54일이요.” 거구의 사육사가 안고 온 건 개다. 협회에서 보내온 사진에는 앙증맞은 몸에 까만 코를 가진 강아지가 있었는데. 내 손 안에서 꼬물꼬물 거리며 첫 인사를 나눌꺼라는 상상은 심장이 내려 앉는 소리와 함께 깨져버린다. 54일만에 저 크기라면 일년이 지나면? 아무리 키우자고 우겼어도 안된다고 했어야하는데.. 내가 나 때문에 미쳐. 더 늦기 전에 말해야 한다. 6시간 차 타고 온게 뭐가 중요한가. 새끼가 저만하니 더 크면 송아지만해질게 뻔한데. 쟤를 어떻게 아파트에서 키우겠나? 이렇게 큰 개를 키우느냐며 집으로 찾아오는 주민들 모습이 그려진다. 관리사무소에서도 전화 오겠지? 짖는 소리 때문에 위아래집에서도 인터폰 올게 뻔해.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멀미를 하는 것 같다. ‘여기까지 와서 정말 죄송한데... 저희가 못데려 갈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거야. 데려갔다가 도로 갖다주는 것보다는 지금 말하는게 강아지를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이지. 아이도 생각했던 것보다 큰 강아지를 보고 당황했으니까 내가 운을 떼면 인정할거야. 마음을 다잡고 사무실 안에 있는 아이를 본다. 아이는 미리 지어 온 이름으로 연신 강아지를 부른다. “너 이게 네 이름인지 어떻게 알아? 신기하다, 왕 커서 왕 귀여워. 그지?” 저건 그냥 큰게 아니야. 세상에는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있고 감당 못하는 크기가 있는거야. 저건 감당할 수 없는 크기다. 뉴스에 나온 개물림 사고가 귀에서 들리는 것 같다. 쟤가 커서 막 사납고 으르렁 거리면 나도 강형욱 불러야 하겠지? 상담비도 되게 비싸다던데...누구라도 물면? 아, 못살아. 꼼꼼하게 크기를 체크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다. 나는 항상 이 모양이다. 생각은 많이 하는데 진짜 중요한 생각은 안해서 일을 망친다. 말하자. 데려가면 진짜 돌이킬 수 없으니 말하자. “저기... 강아지가 좀....” 아.. 왜 목구멍에 문이 있단 말이냐. 울고 싶다.
3rd. 3. 회식을 가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덧 퇴근시간이다. 회식 장소는 오후 늦게 공지가 되었다. 차를 타기엔 애매한 거리였고 술을 마셔야 할 수도 있기에 다들 차는 버리고 걸어갈 예정이라 한다. 우리 팀은 팀장을 포함해 열 명로 구성되어 있다. 새로 온 팀장은 가장 나이가 많은 팀원보다 나이가 어렸다. 팀장은 업무처리 능력은 뛰어났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아래 직원을 말 그대로 아랫사람 다루듯 했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B는 평소엔 순한 성격이었지만 술을 마시면 사람이 변했다. 팀장 앞에서는 표를 안 냈지만 나를 데리고 담배를 피울 때는 종종 팀장 험담을 했다. 나는 맞장구도 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무튼 오늘 회식엔 팀장과 50대 중반에 접어든 그 B도 함께 참석했다. 1차에서 삼겹살과 소주를 마시고 2차는 미혼 직원들이 머물고 있는 회사 기숙사에서 간단히 캔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나이가 가장 어렸고 미혼이었던 나의 방이 2차 회식 장소가 되었다. 한편 B는 1차 때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소주만 마셔댔다. 내 방으로 걸어가는데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B가 나지막이 욕설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것도 팀장에 대한 욕을…… 그리고 사건이 벌어졌다. 내 방에서 찌그러진 빈 캔맥주들이 나뒹굴 즈음 B가 팀장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야 이, XXXX야 네가 팀장이면 다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 n 살이나 많은데 그따위로 나한테 말하면 안 되지”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B를 손절해야하나. 평소 B와 담배를 함께 폈던 내게 불똥이 떨어지면 어떻나. 나는 팀장 낯빛만 살폈다. 그런데 평소엔 그렇게 거침없이 팀원들을 대하던 팀장이 이상하게도 조용한 것이다. 팀장은 B의 욕설을 듣기만 할 뿐 받아치지는 않았다. 팀장의 얼굴이 저점 붉어지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런데 그때 우리 팀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C가 팀장을 따라나갔다. 솔직히 팀장은 B보다 C를 막 대했었다. 내일 아침 사무실 분위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3rd. GX/24.7.16 퇴근했다. 오늘도 뻔하고 지루한 일상이었다. 거래처에서 오는 전화를 받고, 작업을 하고 메일을 보냈다. 틈틈이 친구한테 오는 카톡에 답장했고 네이버에 뜨는 기사를 읽었다. 하루 종일 앉아 있었더니 점심때 먹은 게 소화가 안 돼서 더부룩하다. 6시가 되자마자 빠르게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선다. 날이 어둡다. 겨울 저녁은 금세 밤이 되어버린다. 별일 없이 보낸 헛헛한 일상에 괜히 울적하다. 이런 날들이 좋은 거라고 누가 그러던데. 나는 의미 없이 하루를 흘려보낸 게 뭐가 좋은 건가 싶다. 다른 친구들은 더 열렬히 공부하고 직장을 찾고 아니면 더 좋은 회사로 이직 준비를 한다. 나는 욕심만 있고 능력이 없다. 노력할 의지도 없다. 별 볼 일 없는 평균 이하의 삶이 내 인생이라는 게 허무하다. 근거도 없이 나는 조금 특별할 줄 알았다지.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다. 집에 가자. 버스를 타야 한다. 정류장에 못 보던 아저씨가 의자에 앉아 있다.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술에 취한 건지 졸린 건지 모르겠다. 나는 먼발치서 그 아저씨를 보고 있다. 내가 정류장에 가도 괜찮을까. 아저씨는 의자에서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더니 김이 서린 안경을 벗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아저씨를 지켜봤다. 위험해 보이면 그 전 정거장으로 걸어가서 버스를 타야겠다. 오늘 별일 없다고 불평했더니 퇴근길이 귀찮아졌다. 아저씨는 가만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어깨를 들썩거린다. 흐으윽. 뭐지? 곧이어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당혹스럽다. 우는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대체로 당황스러운데 상대는 일면식 없는 낯선, 중년 남성이다. 나는 무섭다. 안쓰러운 마음보단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예상보다 납작한 나의 연민에 당황하면서 머리로 빠르게 시나리오를 짜본다. 누가 죽었나? 부모? 아니면 아내가? 큰 빚을 진 걸까. 무언가 잃어버린 거 같은데.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저씨의 울음소리는 야생 동물의 울음소리 같아서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그때 버스가 왔다. 나는 서둘러 정류장 근처로 가 버스를 붙잡는다. 버스에 올라가고 빈자리에 앉는다. 나는 재빠르게 창밖으로 아저씨의 모습을 훑어본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고 아저씨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곧 버스가 출발한다.
3rd. GX (7/2~7/5) 하릴없이 누워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던 재순은 무거운 몸을 끙차 일으켰다.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겠다 싶었다. 오늘은 밭에 마늘쫑을 솎으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아침 나절부터 비가 와서 틀려먹었다. 테레비가 고장나서 뉴스를 못 본 지 사흘째, 비 소식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재순은 스마트폰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른다. 그냥 전화를 받거나 거는 데에만 쓸 뿐, 날씨 하나 확인할 줄을 모른다. 재순이 늘 무능하다고 타박하는 남편이 이런 면에서는 훨씬 나았다.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붙들고 앉아 있는 꼴이 보기 싫어 잔소리를 해댔지만, 막상 남편이 자리를 비우자 스마트폰을 보고 날씨를 알려주는 이가 없어 불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어제부터 집을 비웠다. 고향 땅에 무슨 도로가 들어오는지 가족묘를 이장하게 되어 일가 친척이 모여 의논을 한다고 했다. 재순은 차를 오래 타는 것이 힘들어져 가지 않았다. 다만 시부, 시모를 이제 와서 화장해 납골당에 모시자는 의견에는 결사 반대였다. '아랫집이야 납골을 하든 말든 우리는 안 되여! 대대손손 짐이여 그게!' 매사에 본인 의사도 없이 남들 하자는 대로 넙죽 그러마고 하는 이놈의 남편이 혹시라도 납골 쪽으로 의견을 모아오면 그때서야 직접 나설 참이었다. 어쨌든 오늘 저녁에는 남편이 돌아올 예정이므로 된장찌개라도 끓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재순은 양푼과 숟가락을 들고 장독대로 갔다. 새로 꾸민 장독대가 재순은 퍽 마음에 들었다. 각기 된장, 간장, 고추장을 담은 독이 늘어선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했다. 다음주에 딸네가 오면 된장과 고추장을 줘야 하니 따로 담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된장독을 열었다. 어라....? 눈썰미가 매서운 재순은 금세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된장이 줄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여? 나가 된장을 펐던가? 나이가 들면서 건망증이 심해져 딸이 치매검사를 예약해 줄 정도로 매사를 깜빡해버리는 재순은 순간 어제쯤 자신이 된장을 퍼두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된장이 너무 많이 줄어 있었다. 게다가 재순은 항상 장을 푸고 난 후 잘 다독여두는 편인데 지금 된장의 모양새는 재순이 맵시있게 다듬은 것과는 영판 달랐다. 하이고, 이게 무슨 일이꼬? 도대체가 영문을 알 도리가 없어 재순은 혼자 중얼대며 일단 된장을 적당히 푸고 잘 다독인 후 뚜껑을 덮었다. 요상허네... 분명 누가 손을 댄 거 같은디.... 대관절 누가... 재순은 머리를 요모조모 굴리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내가 누구한테 된장을 줬던가? 아니지, 아니야. 그러면 내가 퍼줬을 텐디 저 된장 모양새가 절대 그게 아닌디... 재순이 아픈 어깨와 무릎으로 고생고생 메주콩을 삶고 메주를 빚고 말려서 만든 된장이다. 이번 된장은 유독 잘 되어 신이 났었다. 그런데 그 된장을 누가 저렇게... 모양새도 그렇지만 양이 줄어든 것도 상당했다. 재순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기 도대체 무슨 일이꼬... 아따... 재순은 당장이라도 남편을 불러서 된장의 행방을 찾아내라고 닦달하고 싶었다. 이눔의 남정네, 왜 이리 늦는 기고! 재순은 갑자기 불쑥 화가 치밀었다. 볼일 마치고 퍼뜩 올 일이지 또 어디서 꾸물대고 있노! 모든 것이 마뜩찮았다. 기껏 푼 된장을 부엌에 대충 던져두고 재순은 다시 드러누웠다. 밥 할 의욕이 싹 사라졌다. 라면이나 끼려먹든가! 재순은 팔을 베고 누워서 다시금 곰곰 된장 생각에 골몰했다. 된장 도둑이다! 누가 훔쳐간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뭐죠...! @흰벽 님 재밌잖아요! 된장 도둑이 누구인지, 어쩌다가 된장을 훔치게 된 건지 너무 궁금합니다. 이거 후속작 써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허허 일단 쓰긴 했는데...;; 된장도둑의 사연은 무엇일까요....??
2nd. GX (6/28~7/1) 참여입니다. 요즘은 아파트 단지 내에 산책하는 강아지를 자주 마주친다. 오늘도 한 강아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채 3kg도 나가지 않는 아주 조그만 말티즈이다. 일년 전 저세상으로 떠난 우리 루루가 생각난다. 우리 루루도 딱 저만했었다. 루루는 남편이 암으로 떠난 10년 전, 딸아이가 나에게 선물한 강아지였다. 난 지난 10년간 루루와 단둘이 살았다. 남편을 보냈을 때보다 루루를 잃은 상실감과 외로움이 더 크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나 스스로도 이 상황이 생경한 것을 말티즈 주인에게 말을 걸고 말았다. “아이고 우리 루루랑 똑같이 생겼네, 작년에 루루를 보냈거든요. 이런 강아지를 보면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요” 벤치에 앉아 제 강아지와 쉬고 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내 신세 한탄을 한참동안 늘어놓고 말았다.
나는 늘 건넌방에서 할머니와 잤다. 그 새벽에도 할머니와 같이 자다가 웅얼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창호지 방문 앞에 앉은 구부정한 등이 보였다. “너를 앞세우고 나서 사는 것이 재미가 없다. 그래, 집집이 애 두셋 어릴 때 잃는 일이 보통이던 시절이지. 하지만 다 키운 자식은 아니야. 그렇게 자식을 보내면 그저 목숨이 붙어 있어 밥을 넘기고, 몸을 움직이는 거지. 남들은 나보고 복이 많단다. 네 동생들 다 서울 가서 떵떵거리며 살고, 팔십 넘도록 혼자 밥해 먹을 기력이 있고 돈 걱정 안하니 이렇게 좋은 팔자가 어디 있냐고들 하네.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무서운 남편, 산더미 같은 농사일, 남은 자식 먹이고 입히느라 한없이 고단했던 시간은 그렇다 치고, 전생에 무슨 업보를 지었는지 그 대가로 다 키운 자식을 앞세웠는데? 다들 모르겠지. 어떻게 알겠어. 병석에 누운 너를 봐야 했던 몇 년 그리고 너 보내고 수십 년 동안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그 세월 동안 나는 늘 늦가을 해가 진 강가에서 혼자 마냥 차가운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것 같아. 춥고 갈 데도 모르겠고. 그런데 이제는 좀 쉬고 싶구나. 이제 많이 늙어서 서 있을 힘이 없어.” 들릴 듯 말 듯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던 할머니가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큰아버지에게 전하는 가슴 속 넋두리는 어둠 속에서 또렷했다.
아.. @마야 님.. 눈물 나게 하시네요..
@GoHo님, 그렇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nd. GX (6/28~7/1) 과제입니다 :) “진순자 할머님?” “네, 왔습니다.” “아유, 어떻게 하루도 안 빼놓고 오세요? 쉽지 않은 일인데 대단하세요.” “노인네가 집에서 할일이 뭐 있겠어요. 여기 와서 한줄이라도 쓰는 게 낙인데.” 순자는 오래되어 흐물거리는 천 필통에서 연필 한 자루를 꺼냈다. “그래, 오늘은 주제가 뭔가요?” “어르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짧게 써주시면 돼요.” “내 젊은 시절이라…” 순자는 복지센터에서 일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특히 처음 어르신을 상대로 한글 수업을 하던 장면이 스쳤다. 노인들을 가르치는 일은 고되기만 할 뿐 보람차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 노인들보다 자신이 더 나이가 든 것 같았다. 얼핏 눈앞에 있는 글쓰기 강사와 젊은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지만 곧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충청도 소재의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사회복지사로서 일했던 그녀는 직업 탓인지 늘 스스로를 봉사심이나 이타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겼다. 주말마다 유기견센터나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봉사하는 몇몇 동료들의 모습을 볼 때면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도 30년이나 일했으니, 인내심은 꽤 대단했어.’ 남들은 중간에 그만두기도 한다는데, 한번을 쉬지 않고 일한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순자는 연필을 다시 잡으며 제목을 적어내려갔다. ‘나는 생계형 사회복지사입니다.’
①한 남자가 하늘을 본다. ②그는 허탈하다. ③마음이 아프다. ④보고 있는 사람이 되려 안쓰러워한다. ⑤담담하지만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⑥풀이 죽어 있다. ⑦옆에서 누가 달래도 소용이 없다. ⑧학교 다닐 때 문제만 내고 풀이는커녕 답조차 말해주지 않는 선생님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다. ⑨글쓰기 훈련을 하고 있는데 이곳도 다르지 않다. ⑩문제만 낼 뿐 풀이과정이나 예시, 답은 없다. ⑪그냥 알아서 하는 거다. ⑫그게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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