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작가의 <산 자들>을 읽으며 생각을 나눠봐요.

D-29
그녀는 자신들이 마분지로 만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강기슭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p.122 「현수동 빵집 삼국지」, 장강명 지음
그 아가씨도 처음 자기네 회사에 면접 볼 때에는 그런 태도가 아니었을걸? 성격이야 싹싹하지 않았다고 해도 최소한 근태는 나쁘지 않았을 거야. 그걸 자기가 망친 거지. 지각해도 아무 말 않고, 손님 접대를 안 해도 아무 말 않고, '불쌍한 애'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아무 지적도 안 했지? 그러니까 애가 그렇게 된 거야. 사람들이 다 자기나 나 같지 않아. 어떤 사람들한테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동기를 부여해 주고 자세를 교정해 주고 질책을 해 줘야 돼. 자기는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그걸 안 한 거지."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1부 자르기 / 알바생 자르기 p24, 장강명 지음
이 부분을 읽으며 만일, 알바생 성혜미가 싹싹한 성격이었다면 달랐을까? 생각해 봅니다. 알아서 손님이 오면 커피도 타고, 직원들에게 친근하게 대하며, 출근도 늦지 않고, 은영에게도 싹싹하게 굴며 일도 잘 한다면.... 하지만, 한 달 월급 165만원의 언제든 잘릴 수 있는 알바생.... 거의 2년이 다 되어 가는 긴 시간 동안 한 회사를 다니면서도 성혜미는 그곳에 정을 붙일 수 없었다면, 이건 성혜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아이유)이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보험료 미지급 건으로 요구한 금액이 고작 150만원이라니...ㅜ.ㅜ 을이 갑이 되기는 너무도 어렵지만, 을이 조금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병, 정으로 떨어지는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요. 한 달 월급 165만원에 싹싹함까지 요구해도 되는 건지 생각해볼 문제네요. 을이 조금만 방심하면 병, 정으로 떨어지는 사회… 너무 와닿고 소름 돋네요 ㅠ
싹싹한 성격이었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상황의 본질은 고용한지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하는데, 성혜미의 업무 자체가 정규직으로 고용한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대목에서 <미생>의 '장그래'가 떠올랐던 것 같아요. '장그래'는 싹싹한 성격에, 업무성과도 있었지만 결국 정규직이 되지 못했죠.
아~ 장그래! 상황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장그래나 성혜미, 이지안은 정규직 전환이 될 수 없었던 거네요. 이 고요한 현충일 아침 부터 입안이 씁니다.
정신없이 몰입해서 읽다보니 저는 오늘 퇴근길에 완독했는데, 곱씹을만한 대목이 많았던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2부의 주제는 싸우기인데, 싸움의 양상이 대부분 '을' 대 '을'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어제 흰벽님과 나누었던 이야기와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돌이켜보면 현실세계에서도 '갑'과 '을'의 갈등보다는 '을' 대 '을'의 갈등이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기생충>에서도 결국 주된 갈등은 '부자' 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대 '가난한 사람'의 양상이었던 것 처럼요.
완독 축하드려요! 다 읽으셨더라도 한 편씩 다시 곱씹으며 생각 나눠주시면 좋겠어요 ㅎㅎ
저는 한 때 작가를 꿈꾸다 생계문제로 현재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터라, 3부에 나오는 <음악의 가격>에도 적잖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오늘 밤은 <음악의 가격>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도입돼서 수입이 줄어들 때 음악하시는 분들은 충격이 컸겠네요." 나는 행사 전 대화 주제를 꺼냈다. "그렇지도 않았어요. 그 전에도 버는 돈이 많지 않았으니까요. 폐허 위에 폭탄이 터져 봤자 폐허잖아요. 음원 다운로드로 한 달에 10만원 벌다가 스트리밍으로 2만원 벌게 되면 벌이가 8만원 줄었다고 느끼지, 수입이 80퍼센트 감소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죠. 1억 벌던 분 연봉이 2000만원으로 주는 거랑은 다르죠. 그래서 그렇게 다들 별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언제 배부른 적 있었느냐 하면서.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p.306, 「음악의 가격」, 장강명 지음
저는 이제 <대기발령>을 읽었습니다. 알바생을 자르는 방법과 정직원을 자르는 방법은 확연히 다르네요. 하지만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그 본질은 같다는 생각입니다. "쇼 미 더 머니라며. 돈만 준다면 얼마든지 시킬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아니지. 그건 인간의 위엄이나 품위에 관계된 일이지. 자기가 돈이 있다고 남의 존엄을 무시하면 안 되지. 그게 갑질이잖아." p79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면, 그 사회는 폭력적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대기발령을 읽으며 남편과의 대화에서 생각이 많았어요. 남편이 ‘그런데 회사는 처음에 대안도 제시했고, 대기발령이라는 게 욕하고 때리는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더 영세한 회사들애는 그런 프로세수도 없잖아.’라고 하죠. 그러다가 스타맨님이 인용하신 위의 대화를 한 후 연아가 ‘그럼 대기발령은? 그건 옳은 일이야?‘라고 하니 아무말도 못해요. 그 부분에서 저는 욕하고 때리지 않을 뿐 아무 일도 주지 않고 복도에 앉혀놓는 대기발령이 존엄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어쩌면 그저 조금 더 우아하고 덜 노골적인 방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인권이 보장되는 게 아니러 교묘한 방법으로 침해되는 것이 현대사회인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직장인의 입장에서 가장 몰입할만한 파트는 역시 1부인 자르기였던 거 같아요. <대기발령>에서 보여지는 회사의 태도와 방침은 을의 입장에서 울화가 치밀게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회사의 태도에 대해 강경하게 행동하기보다 그저 수동적인 태도로 순응하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더 답답함을 느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나가면 내게는 자리가 생기지 않을까'하는 잔머리로 눈치 게임을 벌이는 작중 인물들을 보며, 저것이야 말로 어쩌면 정말로 사측이 원했던 그림이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보는 내내 죄수의 딜레마가 떠올랐습니다. 결국 회사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처음부터 회사의 처우에 강하게 반발하며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거나, 아니면 차라리 나가면서 회사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걸 최대한 받아내는 길을 택했다면, 작중 인물들의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든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외려 새들이 날 때 상당한 기쁨을 맛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너무 어린 새나 늙은 새, 다친 새는 날 수 없다. 많은 새들이 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때는 한정되어 있다. 놓칠 수도 있었던 잠재력을 깨닫고 목적에 맞게 쓴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 아닐까? 행정실장이 된 옛 교무 교감이나, 유체 이탈 화법을 쓴 학생 교감을 보며 내가 왜 이마를 찌푸렸는지, 이제는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잠재력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행정실장과 학생 교감은 날지 않는 새들 같았다. 마지막으로 날아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를 비둘기들이었다.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p.377-378,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 , 장강명 지음
저는 오늘 장강명 작가의 에세이집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읽었는데, 군데군데 '산 자들'이 언급됩니다. 장강명 작가가 정말 작정하고 쓴 작품이었구나... 싶어요. 저는 이 소설집 전에 읽은 장강명 작가의 소설이 '열광금지, 에바로드'와 '한국이 싫어서'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 독특하고 재밌는 소설을 쓰는 작가다, 정도로 인식했는데 '산 자들'을 읽고 인상이 확 바뀌었었거든요. 제가 꾸준히 작품을 따라 읽고 있지 않아서 몰랐지만 작가 입장에서도 분기점?이 되는 소설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얼른 마저 읽고 몇 년 전에 읽었을 때는 정리하지 못했던 소감을 좀 정리해두고 싶어지네요.
저는 흰벽님과는 반대로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읽고 나서 <산 자들>을 읽게 된 케이스입니다. 그 전에 장강명 작가의 작품은 단편으로 드문드문 읽은 정도고, 소설집으로 읽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네요. 저도 그 전까지 장강명 작가에 대한 이미지는 독특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는 인상이었는데, 이번을 계기로 살짝 다르게 보게 된 거 같습니다. 다음 번엔 단편 말고 장편도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날카로운 통찰이 있는 작가같아요.
저도 지금 갑자기 필 받아서 도서관에서 장강명 작가의 책을 잔뜩 빌려 왔는데요, 장편소설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하나네요. 이번에 빌려온 책 다 읽고 나면 '재수사'도 읽으려고 벼르고 있어요. 장강명 소설 읽기 모임 같은 거 만들어도 좋을 것 같네요 ㅎㅎ
모임 만드시면 꼭 참가 신청 하겠습니다. 함께 읽어요 ^^
만일 읽는다면 무엇부터 읽고 싶으세요? 1. 출간순 2. 역 출간순 3. 단편-장편 순 (혹은 그 반대, 혹은 교차로) 4. 소설과 에세이 번갈아가며 등등 여러 방법이 있을 거 같네요 ㅎㅎ 저는 일단 지금은 ‘미세좌절의 시대’와 ‘산 자들’을 동시에 읽고 있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과 ‘팔과 다리의 가격’도 빌려놓은 상태랍니다~
저는 1번 출간순에 한표 던집니다. ㅎㅎ 장강명 작가의 성장과정(?)을 순차적으로 보고 싶어지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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