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르헤스 읽기] 『칼잡이들의 이야기』 2부 같이 읽어요

D-29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잠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신비로운 어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3분지 1을 그것에게 바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지 깨어 있는 일식에 다름아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로 짜여진 보다 복잡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 잠은 끊기지 않는 꿈들의 연속이다. 하우레기 여사가 고요한 혼돈 속에서 10년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 잘못일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매 10년의 순간은 전도 후도 없는 순전한 현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낮과 밤, 수많은 달력장, 그리고 불안과 사건들을 가지고 세는 그러한 현재에 대해 놀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현재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건너가는 매일 아침이자, 잠을 자기 전의 매일 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두 차례씩(낮과 밤에) 그 노부인처럼 되고 있는 것이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137-13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전반적으로 도입부부터 집중해서 읽기 쉽지 않다고 느끼는데, 이 글을 특히 그러했습니다. 많은 각주에서도 보이듯, 익숙치 않은 이름의 전투들이 나열되기 때문입니다. 도입부를 여러 번 읽고 나서 노부인의 이야기로 들어간 후에는 좀더 잘 읽히긴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있어 여전히 작품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일반적인 비유야말로 가장 최고의 비유이다. 왜냐하면 그것들만이 진실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 자체는 하나의 주장으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왜 이러한 주장이 1932년 이래 이 노부인의 정신이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지고 있다는 언급 바로 뒤에 등장하는지, 이렇게 등장함으로써 노부인에 대한 어떤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개신교도, 유대인, 비밀 공제 조합원, 이교도는 동일한 말이었으며", 마테 차 대신 홍차를 마시고 부활절과 주현절 대신 크리스마스를 최고의 명절로 받아들인 것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세한 차이들은 그 중요성과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가장 일반적인 것, 그리고 가장 오래된 기억 같은 것들만 이 노부인에게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일까요.
추측컨대, 그 부분은 라틴어 계열을 한국어로 옮기면서 발생한 문제 같습니다. 원문이나 영역본은 말해주신 문장 이전에 세미콜론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1932년 이래 그녀의 정신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비유야말로 가장 최고의 비유이다. 왜냐하면 그것들만이 진실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되어야 할 텐데, 한국어는 문장 구조상 명사로 문장을 끝맺지 않고 서술어로 끝맺기 때문에 콜론이나 세미콜론을 써서 문장 간의 연결 구조를 보여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통 콜론이나 세미콜론을 적절한 접속사로 대체하거나, 아니면 그냥 생략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병하 선생님은 후자쪽을 택한 거고요. 아마 영역본을 보시면 좀더 이해가 편할 겁니다. "Since 1932 her mind had been gradually growing dim­mer; the best metaphors are the common ones, for they are the only true ones" 그러니까 말해주신 문장은 'dimmer'에 대한 설명인 셈입니다. '정신이 희미해지다'라는 표현 자체가 보르헤스가 말하는 일반적인 비유이자 최고의 비유인 셈입니다. 실상 '정신이 희미해지다'라는 표현은 현재 관용어로 굳어져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그 또한 엄연히 비유라는 겁니다. 우리가 비유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비유, 즉 최고의 비유인 셈입니다. 실제로 보르헤스는 에머슨의 "언어는 화석이 된 시다"라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오.. 이 부분은 영역본으로 읽었어도 캐치를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dimmer' 자체가 메타포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거든요. 언급 감사합니다.
나는 페루에서 싸웠던 창기병 부대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후의 한 노부인이라고 생각한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노부인>, p. 19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가장 이해하고 싶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던 문장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인 이 문장입니다. 왜 이 노부인이 페루에서 싸웠던 창기병 부대가 거둔 마지막 승리가 되는 걸까요? '승리'라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니 이 노부인의 역사와 자신에 대한 망각을 축복으로 바라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결론적으로 말해 그녀는 행복"했기 때문일까요? 또 이 '마지막 승리'라는 표현에서 '마지막'을 굳이 언급한 것이 긍정적인 의미일지 부정적인 의미일지도 궁금합니다. 노부인의 죽음 이후 이 창기병 부대의 역사는 끝나고 더이상 이로부터 긍정적인 것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라면 부정적인 의미일 테고, 페루에서 싸웠던 창기병 부대의 이야기는 그 때 끝난 것이 아니라 한 세기가 지나서까지 이어졌던 것이라는 재평가라고 하면 긍정적 의미일 것 같으니까요. 혼자서는 보르헤스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동참한 것이니 애초에 쉽게 읽힐 거라 생각한 적도 없지만, 생각보다 더 읽어나가기 만만치 않은 작가네요.
황병하 선생님의 마지막 문장에 오역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페루에서 싸웠던 창기병 부대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후의 한 노부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일 겁니다. 제가 보기엔, "창기병 부대가 거둔 마지막 승리" 부분을 "창기병 부대의 마지막 희생자"로 고치는 게 괜찮을 겁니다. 원문은 "última víctima"라고 돼 있으니까요. ‘마지막 희생자(última víctima)’를 ‘마지막 승리(última victoria)’로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근데 황병하 선생님께서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오역도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누군가의 승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뜻하기도 하니까요. victory는 라틴어 victoria에서 파생했고 victim은 라틴어 victima에서 파생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vi-'라는 라틴어 접두사는 많은 경우 힘이나 폭력과 관계된다고 하니까요. 물론 아무리 그래도 '희생자'로 적는 게 원래 의도일 겁니다.
중요한 것을 망각한다는 것은 때로는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만, 결국은 슬프고 쓸쓸한 일인 것이 분명하니 희생자라는 번역이 제가 보기에도 더 적절해보입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결투~] 일전에 보르헤스도 본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보르헤스는 충분히 장편으로 쓸 수 있는 이야기도 단편으로 그냥 써 버리고 마는 과감한 재주를 지닌 사람 같습니다. 이 작품도 재밌게 읽었는데요, 화단과 화가의 이야기였지만 여타 예술 창작 분야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보르헤스가 일평생 글을 쓰면서 받았던 이런저런 비판, 혹은 비난에 대한 자신만의 작은 답변처럼 읽혔습니다.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보르헤스는 일평생 몇 가지 주제를 반복하거나 변주하는 식의 작품을 썼던 걸로 유명합니다. 또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현학취스럽다거나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으며, 나아가 지나치게 반복적이거 자폐적이라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작품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아르헨티나의 모순된 정치 현실을 작품에서 반영하지 않았다고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몇 가지 공감되는 지적이나 비판도 있긴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 자신이 속한 정치 현실에 무심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작가가 반드시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작품으로써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는 부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라고 봐요. 외려 그런 비판을 가하는 쪽이야말로, 보르헤스가 만년에 확보한 영향력과 그 커다란 스피커에 편승하여 자신들에 유리한 정치적 발언을 종용하는 셈법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비판되어야 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모든 유명인과 자기 스피커를 지닌 공인들에게, 그들이 자신이 속한 정치 현실에 무심하다고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데, 과연 누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기성 언론이나 업계 사람들이 '요즘 젊은 세대는 무력하며 탈정치화 돼 있다'고 황당한 (진단을 가장한) 비난을 가하는 것과도 이와 궤를 같이 합니다. 보르헤스도 마찬가지라서, 그런 의견에 대한 섭섭함은 이 단편집의 서문에서도 드러납니다.
나는 내 이야기들이 설복시키고자 하기보다는 마치 ⟪천일야화⟫처럼 즐거움이나 감동을 주기를 바란다. 물론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해서 솔로몬적인 관념을 좇아 내가 상아탑에 갖히겠다는 뜻은 아니다. 정치 문제에 관한 나의 입장은 세상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나는 보수당에 입당했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일종의 회의주의적 관념의 표현이었다. 아무도 나를 공산주의자라거나, 민족주의자라거나, 반유태주의자라거나, ⟨검은 개미단⟩의 지지자, 또는 ⟨로사스⟩의 지지자라고 평하지 않았다. 나는 세월이 흐르면 우리에게 정부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감춘 적이 없다. 심지어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도.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내 문학 작품에 이입되는 것은 허용치 않았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74쪽, ⟨서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결투] 얘기를 이어나가 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20세기 보르헤스가 처한 상황과 매우 흡사합니다. 끌라라 글렌까이른과 마르따 삐사로가 그림을 그리면서 현실과 화단에서 듣는 말들은 매우 익숙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늘 작품 활동을 하는 이들의 주변을 그림자처럼 어슬렁거립니다.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도 없이요. 1960년에 심사위원들이 "국제적 수준에 이른 두 화가"를 두고 누구에게 1등상을 주어야 하는지를 놓고 토론을 벌인 끝에, 얼결에 후보에도 없던 끌라라에게 1등상을 수상하는 과정은 창작 분야에서 '상'을 두고 벌어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보여줍니다. 끌라라가 수상석에서 했던 발언(“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 질서와 실험 사이에 충돌은 없으며, 전통은 실험의 세속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역시 어떤 의미로 매우 안전하며, 또 안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감상 포인트입니다. 그럼에도 끌라라와 마르따는 그런 통속적인 자리, 외부의 비판과 무관하게 죽는 날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고자 하는 작품 활동을 지속합니다. 그 점에서 두 사람은 진정한 라이벌입니다. 서로를 해치지 않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길을 달리면서도, 서로의 위치를 곁눈질로 가늠하면서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 말입니다. 실제로 라이벌(rival)의 어원은 강(river)을 사이에 두고 양안을 달리는 두 사람을 일컫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삶은 그들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좋은 라이벌이란 무엇인지, 또 좋은 대결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한편 다음과 같은 질문은 보르헤스가 살아생전에 늘 마주했던 질문이자, 답이 없는 질문입니다.
예술가는 토착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술가는 지역의 생태계를 무시해 버리거나 도외시해 버릴 수 있는 걸까? 예술가는 사회적 성향을 띤 문제들에 대해 무감각해도 되는 걸까?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외침에 자신의 목소리를 첨가시킬 수는 없는 걸까? 등등.
칼잡이들의 이야기 14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업무 일정 때문에 한동안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얼른 따라가 보겠습니다. 개인적 관심사 때문인지 저는 이 이야기를 보르헤스에 대한 이야기보다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변화하는 예술 사조의 이야기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가 미술에 대한 소양 혹은 취미를 상당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즐거워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수월하게 읽었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사조는 마치 음악이 소리들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듯 그것의 자매인 그림 또한 우리의 눈에 비치는 사물들의 색깔과 형태를 재현하고 있지 않은 다른 어떤 색깔과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주장했다고 생각한다. 미술 비평가 리 캐플란은 부르주아들을 화나게 했던 그 사조의 그림들이 이슬람 또한 동의하는 인간의 손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갈파했었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결투> p. 20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모든 미학적 혁명은 무책임하고 쉬운 것에 대한 유혹을 싹틔웠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결투> p. 20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 질서와 실험 사이에 충돌은 없으며, 전통은 실험의 세속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칼잡이들의 이야기 <결투> p. 20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상을 받은 클라라가 감사 인사로 한 이 말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한 안전한 말이기도 하지만 매우 공격적인 말이 돨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실상 전통을 수호하는 이들은 전통 밖으로 나가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경계할 때가 많지만, 실험이 반복되고 보편화되고 그렇게 세속화되면 결국 그게 전통이 되어버리니까요. 자신의 작품이 구상도 아니고 제대로 된 추상도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던 클라라의 입장에서 발화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화단의 이분법법적 구도가 허상임을 짚어내는 이 발언은나름의 항변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 다른 결투] 가우초들의 결투가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단편입니다. 무겁게도 읽을 수 있고 가볍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 목이 잘린 다음에 경주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됐는데, 당시 포로을 처리하는 익숙한(?) 처형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서 한번 언급한 기억이 있는데, 19세기 가우초들은 내란기에 군벌의 일부로 동원되어,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독립에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동원되었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희생되었으며, 이후 가우초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별다른 대우를 받지도 못하고 부랑자 계급으로 전락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일견 우스꽝스러운 처형 장면은 당시 가우초들이 정치적 격랑기에 겪었던 일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형 장면을 읽으면서 영화 ⟨아포칼립토⟩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정복자들은 무수한 궁수를 배치해놓고 마야의 포로들을 풀어주면서 달려서 화살을 피해 살아가 보라고 합니다.
아포칼립토마야 문명이 번창하던 시절, 평화로운 부족 마을의 젊은 전사 표범 발은 가족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잔인한 전사로 구성된 침략자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부족민을 학살하고 젊은 남녀를 그들의 왕국으로 끌고 가는 일이 발생한다. 표범 발은 이 혼란 속에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깊숙한 우물에 숨긴 채 자신은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죽음과 마주친 위기 상황에서 겨우 탈출한 표범 발은 우물 속에 숨겨둔 가족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적들의 집요한 추적은 계속된다.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손길이 조금씩 다가오는 가운데, 표범 발은 도리어 적들을 향해 기상천외한 공격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 글을 읽기에는 제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듯 싶습니다. 목 잘린 이들의 달리기에 대한 자세하다 할 만한 묘사가 없는데도 그 아이디어 자체가 너무 섬뜩하게 다가와서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전쟁에 동원된 가우초들 역시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동물을 죽이는 데 이력이 난 그들에게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는 부분은, 군인으로서의 삶 이 어렵지 않았다는 근거로 제시되지만 오히려 이들이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전쟁에 임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날 전투에서 이기면 콜로라도 당원 하나를 넘겨달라고, "그 때까지 한 번도 사람의 목을 잘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다"고 말했던 카르도소가 바로 그 전투로 인해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된 부분도 너무 끔찍합니다. 목을 자르는 일, 목이 잘리는 일이 너무 가볍게 다루어지고 가볍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더 끔찍한 것은 이들의 목을 자르고 달리기를 시키는 일이 "모두가 충분히 시에스타를 즐길 수 있도록" 4시로 연기되었다고 언급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낮잠보다도 덜 중요하고 더 사소한 일이 누군가의 목을 자르고 달리기를 시키는 일이었다는 것이 너무 참혹하게 느껴져서 어쩌면 보르헤스가 이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다른 이야기들이 있었더라도 이 잔혹한 이미지를 뚫고 저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기도합니다.
최초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은자신이 불사신이라고 믿게 된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또 다른 결투> p. 21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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