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르헤스 읽기] 『칼잡이들의 이야기』 2부 같이 읽어요

D-29
나는 그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루과이로 갔고, 거기서 마부가 되었지요. 여기로 돌아와서는 토지를 샀구요. 산 뗄모는 항상 평화로운 동네였었지요.
칼잡이들의 이야기 10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서로 다른 '용기'의 충돌이라는 독해에 저도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가 수록된 책이 집에 없어 아직 읽지 못했지만 루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이미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당신의 평온한 삶을 망치겠다는 건가요?"라는 말에서 후아레스의 (이전과는) 변화된 생각이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분별없는 시비꾼을 보며 "마치 거울이나 된 듯 나 자신을 보았고, 그것은 내게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이 변화가 쉽게 되돌려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변화에 대해, 자신의 생각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월의 흐름이 필요하지요. 그날 밤 내게 일어났던 일은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옳겠지요.
칼잡이들의 이야기 p. 15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시간의 흐름과 축적 속에서 어떤 일들을 이해하게 해 주는 문장들을 좋아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만남] 쭉 따라서 읽기에 무리 없는 이야기입니다. 과거, 칼싸움으로 정당하게 결투를 벌였던 가우초들의 삶이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적 구성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역사였음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쓰여진 단편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이 단편도 앞서 다룬 ⟨비열한 사람⟩과 ⟨로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할 수 있는 얘기들이 많습니다. 지난 세기,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가우초의 삶을 빼놓고 얘기하기가 어렵습니다. 드넓은 팜파스를 누비던 가우초들의 유목적인 삶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미국식 카우보이와 같은 낭만과 향수를 불러옵니다. 가우초들은 19세기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독립에 커다란 역할을 했고 또 강력한 군벌의 일부로 활동한 적도 있지만, 이후 가우초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하층 계급의 부랑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가우초들은 유럽적인 것들이 밀려들면서 점차 축줄되는 처지에 놓였던 존재들로서, 지난 세기의 혼란한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입니다. 과거의 가우초들이 보여줬던 정당한 결투의 증거인 '단도'에는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정념이 적층돼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의지가 깃드는 정령처럼, 그것들은 진열장에서 인간을 숙주삼아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보르헤스는 언젠가 가우초식 칼싸움이 재현된 밤의 의뭉스러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보르헤스는 후일 은퇴한 경관 호세 올라베 씨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가 가우초들의 삶을 단순히 "빈민가에 살던 칼잡이들의 삶"으로 폄하하는 것을 듣고서 자신이 목격한 바를 들려주고자 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날 밤 결투와 단도에 얽힌 비화를 알게 되고, 보르헤스는 자신이 목격한 칼싸움이 단순히 당사자의 치기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하고 마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싸운 것이 아니라 무기에 얽힌 가우초들의 정념이 시대를 가로질러서 자신을 구현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목의 만남이란 사람 간의 그것이라기보다 무기와 그 무기에 얽힌 시대적 의지였던 셈입니다.
어찌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어찌 보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가우초'라는 집단 자체가 다소 낯설었는데 이야기들에 반복적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고, 가우초들의 삶이나 그들의 결투가 의미심장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낯설었습니다. 특히나 보르헤스가 목격한 칼싸움에 무기에 얽힌 가우초들의 정념이 개입했다는 것이 신비롭고 마술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맞지만, 당사자들의 치기 역시 저에게는 크게 보여서, 그들의 치기 어린 싸움을 미화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 '그 둘은 싸우는 방법을 알았다. 기구들이 아닌 두 사람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둘은 멋지게 싸웠다'의 중간 문장이 오역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을 우리아르테와 둔칸이라고 이해했고, 그 앞에서 '싸운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무기였다'고 말했기 때문에, 싸우는 방법을 알았던 그 둘은 '두 사람이 아닌 기구들'이 아닌가 싶었던 거죠. 다시 읽어보니 오역이 아니라 저의 오해인 것 같네요. 싸우는 방법을 알았던 그 둘, 기구들이 아닌 두 사람은 우리아스테와 둔칸이 아니라 무기 안에 깃들어 있는 원한의 주인들이었겠네요.
해당 부분은 한번 다시 볼 필요가 있네요. Andrew Hurley의 영역본에서는 "The two knew how to fight⏤the knives, I mean, not the men, who were merely their instruments⏤and they fought well that night."라고 옮겼습니다. 원문을 보면, "Las dos sabían pelear — no sus instrumentos, los hombres — y pelearon bien esa noche."라고 돼 있습니다. 제 판단에는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 쪽으로 기울기는 합니다. 영역본은 너무 갔다(?)고 볼 여지가 있어서요. 제가 스페인어에 조예가 없어서 제대로 된 판단이 어렵기는 하네요.
물건은 인간보다 오래간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으며, 그들이 서로 다시 만나게 될지 누가 알랴.
칼잡이들의 이야기 <만남>, p. 1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그보다 오래전에 시작되었던 또 다른 이야기의 끝이었다. 마네꼬 우리아르떼는 둔깐을 죽이지 않았다. 싸운 것은 사람들이 아닌 무기였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손이 자신들을 흔들어 깨울 때까지 한 진열장에서 나란히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그것들이 깨어났을 때 몸을 움찔거렸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아르떼의 손이 떨렸던 것이리라. 그래서 둔깐의 손이 떨렸던 것이리라. 그 둘은 싸우는 방법을 알았다. 기구들이 아닌 두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둘은 멋지게 싸웠다. 그들은 긴 시골길들을 따라 서로를 찾아다녔고, 이미 가우초가 먼지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뒤에서야 서로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의 무기 속에서는 인간적 원한이 잠든 채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12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후안 무라냐~] 개인적으로 어디 다녀와야 했습니다. 컴퓨터를 들여다 볼 환경이 아니어서 늦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진도를 따라잡아 보겠습니다😅 작중 후안 무라냐는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팔레르모 지역을 누비던 칼잡이 중 한 명입니다. 후안 무라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이후, 에밀리오 뜨리빠니의 이모이자 후안 무라냐의 부인인 플로렌티나는 모종의 이유로 다락방에 칩거합니다. 후안 무라냐는 살아생전 포악무도했던 인물로서 여러 후일담 속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나'인 에밀리오 뜨리빠니는 꿈에서 그를 인디오의 형상으로 그려봅니다. 후안 무라냐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혼재해 있던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상황에서 일견 토착적인 것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여집니다. '나'가 꿈에서 본 후안 무라냐가 품 속에 지니고 있었던 '콘도르의 발톱'이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콘도르는 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하는 특산종으로서 맹금이며, 오래전부터 라틴아메리카의 해방 영웅을 기리는 유명한 상징물로 활용돼 왔으니까요. 특이하게도 그는 '발톱'이긴 합니다.
나는 이모부를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그를 인디언 같은 모습에, 건장하고, 숱이 적은 콧수염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 상상하고 있었지. 우리들은 거대한 채석장과 무성한 잡초들을 가로질러 남쪽을 향해 가고 있었지. 하지만 그 채석장과 잡초는 또한 테임스 거리이기도 했어. 꿈속에서 해는 중천에 떠 있었어. 후안 이모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지. 그는 고갯마루의 전망대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더군. 그는 윗도리의 가슴 근처께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어. 단도를 꺼내려고 하는 순가이 아닌 그것을 숨기는 것 같은 자세로 말이야. 그가 아주 슬픈 목소리로 내게 말하더군. 나는 아주 많이 변했단다. 그가 손을 끄집어냈을 때 내가 본 것은 콘도르의 발톱이었어. 나는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지.
칼잡이들의 이야기 12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그가 '발톱'이라는 것을 왜 특이한 것으로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결국 발톱이라는 것은 가장 공격적인 부분이라 생각되어 후에 '단도'가 되어버린 무라냐에게 잘 어울린다고 느꼈거든요.
저도 큰 틀에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가우초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조금 달리 보이기도 합니다. 가우초는 당시 정권에서 군벌의 일부로 동원되여 라틴아메리카의 특정 지역의 해방에 큰 힘을 보태주었습니다만, 후일 그들의 정치적 공적은 축소되고 가우초는 한갓 부랑자 계급으로 전락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쓰고 나서 내팽겨쳐진 칼, 커다란 상징물의 발톱으로 축소된 그들로 보이기도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적절하면서도 뒷맛이 개운치는 않은 것 같아요.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결국 발톱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말단이니가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후안 무라냐] 이전에 다뤘던 작품들과 비슷하게, ⟨후안 무라냐⟩ 역시 유럽적인 것이 적극 유입되는 아르헨티나 지역 특유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에서 "외국놈"으로 칭해지는 집주인 루체시 씨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민자이며, 그가 끝내 살인되는 것도 오랜 갈등을 일면으로 보여줍니다. 참고로 번역본에서 "외국놈"으로 옮겨진 단어의 원문을 찾아보면 "그링고(gringo)"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토착민들이 외인을 부르던 멸칭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굳이 대응되는 단어를 찾자면 "양키"쯤 될까요.) 소설에서 플로렌티나 이모는 흔히 말하는 '다락방 여자'로 칩거하면서 후안 무라냐의 단도를 숭배하고 그의 의지를 대리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보르헤스는 이번 소설집에서 역사적인 맥락을 특히 부각하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의지가 계승되고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징물로서 '단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썰'과 비슷한 의뭉스러운 형태의 얘기들은 그 사건의 진위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또 좋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단도에 얽힌 후안 무라냐의 의지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건 당시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칼잡이로 죽을 수밖에 없던 악당들이 스스로 망각될 것을 알면서도 자기보다 더 큰 어떤 것에 작은 흠집이라도 내고자 했던 무용한 시도가 아닐까 합니다.
홀로 과부가 된 채 자신의 남편, 자신의 우상을 그가 자신에게 남긴 그 잔인한 물건, 그의 활약상이 담겨 있는 그 무기와 혼동했던 여자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하나의 상징, 아니 많은 상징들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후안 무라냐는 어린 시절 내가 걸어다녔던 길을 지나다녔고,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을 것들에 대해 알고 있었고, 죽음을 맛보았고, 그 뒤 단도가 되었고, 이제 기억 속의 한 단도가 되었고, 내일은 망각,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망각으로 변할 그런 사람이었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12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나로서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또 그렇게 믿는다는 사실이지.
칼잡이들의 이야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보르헤스가 "썰"들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특히 그것이 비극적인 일인 경우에는 더욱 더, 그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새겨 넣어 기억의 색채를 바꾸는 일이 중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노부인] 이 단편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둔 채, 알려지지 않은 독립 투사의 자손들의 삶이 망각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마리아 후스디나는 독립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마리아노 루비오 대령의 둘째 딸입니다. 그녀는 독립 투사였던 아버지가 살아생전 세웠던 공을 별달리 인정받지도 못하고 후대에 이르러서 기억되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마지막 인물처럼 묘사됩니다. 그녀의 삶은 특별히 비극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느 한 구석에 놓인 식물처럼, 또 한밤에 깃드는 조용한 수면처럼 망각됩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서 쓰러진 나무가 어떠한 소리를 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독립 투사의 자손들의 삶 또한 그러합니다 . 후스띠나 집에서 벌어진 떠들썩한 파티는 그녀의 삶이 끝끝내 기억되지 못할 것임을 예견하는 기념비적인 행사입니다. 각종 언론과 유명인이 참석한 파티 자리는 실로 아무것도 기리지 않음을 가리기 위한 휘장막임이 밝혀집니다. 강한 서치라이트가 사물의 윤곽을 흐리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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