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르헤스 읽기] 『칼잡이들의 이야기』 2부 같이 읽어요

D-29
중요한 것을 망각한다는 것은 때로는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만, 결국은 슬프고 쓸쓸한 일인 것이 분명하니 희생자라는 번역이 제가 보기에도 더 적절해보입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결투~] 일전에 보르헤스도 본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보르헤스는 충분히 장편으로 쓸 수 있는 이야기도 단편으로 그냥 써 버리고 마는 과감한 재주를 지닌 사람 같습니다. 이 작품도 재밌게 읽었는데요, 화단과 화가의 이야기였지만 여타 예술 창작 분야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보르헤스가 일평생 글을 쓰면서 받았던 이런저런 비판, 혹은 비난에 대한 자신만의 작은 답변처럼 읽혔습니다.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보르헤스는 일평생 몇 가지 주제를 반복하거나 변주하는 식의 작품을 썼던 걸로 유명합니다. 또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현학취스럽다거나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으며, 나아가 지나치게 반복적이거 자폐적이라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작품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아르헨티나의 모순된 정치 현실을 작품에서 반영하지 않았다고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몇 가지 공감되는 지적이나 비판도 있긴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 자신이 속한 정치 현실에 무심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작가가 반드시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작품으로써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는 부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라고 봐요. 외려 그런 비판을 가하는 쪽이야말로, 보르헤스가 만년에 확보한 영향력과 그 커다란 스피커에 편승하여 자신들에 유리한 정치적 발언을 종용하는 셈법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비판되어야 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모든 유명인과 자기 스피커를 지닌 공인들에게, 그들이 자신이 속한 정치 현실에 무심하다고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데, 과연 누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기성 언론이나 업계 사람들이 '요즘 젊은 세대는 무력하며 탈정치화 돼 있다'고 황당한 (진단을 가장한) 비난을 가하는 것과도 이와 궤를 같이 합니다. 보르헤스도 마찬가지라서, 그런 의견에 대한 섭섭함은 이 단편집의 서문에서도 드러납니다.
나는 내 이야기들이 설복시키고자 하기보다는 마치 ⟪천일야화⟫처럼 즐거움이나 감동을 주기를 바란다. 물론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해서 솔로몬적인 관념을 좇아 내가 상아탑에 갖히겠다는 뜻은 아니다. 정치 문제에 관한 나의 입장은 세상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나는 보수당에 입당했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일종의 회의주의적 관념의 표현이었다. 아무도 나를 공산주의자라거나, 민족주의자라거나, 반유태주의자라거나, ⟨검은 개미단⟩의 지지자, 또는 ⟨로사스⟩의 지지자라고 평하지 않았다. 나는 세월이 흐르면 우리에게 정부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감춘 적이 없다. 심지어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도.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내 문학 작품에 이입되는 것은 허용치 않았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74쪽, ⟨서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결투] 얘기를 이어나가 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20세기 보르헤스가 처한 상황과 매우 흡사합니다. 끌라라 글렌까이른과 마르따 삐사로가 그림을 그리면서 현실과 화단에서 듣는 말들은 매우 익숙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늘 작품 활동을 하는 이들의 주변을 그림자처럼 어슬렁거립니다.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도 없이요. 1960년에 심사위원들이 "국제적 수준에 이른 두 화가"를 두고 누구에게 1등상을 주어야 하는지를 놓고 토론을 벌인 끝에, 얼결에 후보에도 없던 끌라라에게 1등상을 수상하는 과정은 창작 분야에서 '상'을 두고 벌어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보여줍니다. 끌라라가 수상석에서 했던 발언(“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 질서와 실험 사이에 충돌은 없으며, 전통은 실험의 세속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역시 어떤 의미로 매우 안전하며, 또 안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감상 포인트입니다. 그럼에도 끌라라와 마르따는 그런 통속적인 자리, 외부의 비판과 무관하게 죽는 날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고자 하는 작품 활동을 지속합니다. 그 점에서 두 사람은 진정한 라이벌입니다. 서로를 해치지 않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길을 달리면서도, 서로의 위치를 곁눈질로 가늠하면서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 말입니다. 실제로 라이벌(rival)의 어원은 강(river)을 사이에 두고 양안을 달리는 두 사람을 일컫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삶은 그들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좋은 라이벌이란 무엇인지, 또 좋은 대결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한편 다음과 같은 질문은 보르헤스가 살아생전에 늘 마주했던 질문이자, 답이 없는 질문입니다.
예술가는 토착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술가는 지역의 생태계를 무시해 버리거나 도외시해 버릴 수 있는 걸까? 예술가는 사회적 성향을 띤 문제들에 대해 무감각해도 되는 걸까?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외침에 자신의 목소리를 첨가시킬 수는 없는 걸까? 등등.
칼잡이들의 이야기 14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업무 일정 때문에 한동안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얼른 따라가 보겠습니다. 개인적 관심사 때문인지 저는 이 이야기를 보르헤스에 대한 이야기보다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변화하는 예술 사조의 이야기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가 미술에 대한 소양 혹은 취미를 상당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즐거워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수월하게 읽었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사조는 마치 음악이 소리들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듯 그것의 자매인 그림 또한 우리의 눈에 비치는 사물들의 색깔과 형태를 재현하고 있지 않은 다른 어떤 색깔과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주장했다고 생각한다. 미술 비평가 리 캐플란은 부르주아들을 화나게 했던 그 사조의 그림들이 이슬람 또한 동의하는 인간의 손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갈파했었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결투> p. 20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모든 미학적 혁명은 무책임하고 쉬운 것에 대한 유혹을 싹틔웠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결투> p. 20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 질서와 실험 사이에 충돌은 없으며, 전통은 실험의 세속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칼잡이들의 이야기 <결투> p. 20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상을 받은 클라라가 감사 인사로 한 이 말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한 안전한 말이기도 하지만 매우 공격적인 말이 돨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실상 전통을 수호하는 이들은 전통 밖으로 나가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경계할 때가 많지만, 실험이 반복되고 보편화되고 그렇게 세속화되면 결국 그게 전통이 되어버리니까요. 자신의 작품이 구상도 아니고 제대로 된 추상도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던 클라라의 입장에서 발화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화단의 이분법법적 구도가 허상임을 짚어내는 이 발언은나름의 항변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 다른 결투] 가우초들의 결투가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단편입니다. 무겁게도 읽을 수 있고 가볍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 목이 잘린 다음에 경주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됐는데, 당시 포로을 처리하는 익숙한(?) 처형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서 한번 언급한 기억이 있는데, 19세기 가우초들은 내란기에 군벌의 일부로 동원되어,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독립에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동원되었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희생되었으며, 이후 가우초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별다른 대우를 받지도 못하고 부랑자 계급으로 전락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일견 우스꽝스러운 처형 장면은 당시 가우초들이 정치적 격랑기에 겪었던 일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형 장면을 읽으면서 영화 ⟨아포칼립토⟩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정복자들은 무수한 궁수를 배치해놓고 마야의 포로들을 풀어주면서 달려서 화살을 피해 살아가 보라고 합니다.
아포칼립토마야 문명이 번창하던 시절, 평화로운 부족 마을의 젊은 전사 표범 발은 가족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잔인한 전사로 구성된 침략자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부족민을 학살하고 젊은 남녀를 그들의 왕국으로 끌고 가는 일이 발생한다. 표범 발은 이 혼란 속에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깊숙한 우물에 숨긴 채 자신은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죽음과 마주친 위기 상황에서 겨우 탈출한 표범 발은 우물 속에 숨겨둔 가족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적들의 집요한 추적은 계속된다.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손길이 조금씩 다가오는 가운데, 표범 발은 도리어 적들을 향해 기상천외한 공격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 글을 읽기에는 제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듯 싶습니다. 목 잘린 이들의 달리기에 대한 자세하다 할 만한 묘사가 없는데도 그 아이디어 자체가 너무 섬뜩하게 다가와서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전쟁에 동원된 가우초들 역시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동물을 죽이는 데 이력이 난 그들에게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는 부분은, 군인으로서의 삶 이 어렵지 않았다는 근거로 제시되지만 오히려 이들이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전쟁에 임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날 전투에서 이기면 콜로라도 당원 하나를 넘겨달라고, "그 때까지 한 번도 사람의 목을 잘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다"고 말했던 카르도소가 바로 그 전투로 인해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된 부분도 너무 끔찍합니다. 목을 자르는 일, 목이 잘리는 일이 너무 가볍게 다루어지고 가볍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더 끔찍한 것은 이들의 목을 자르고 달리기를 시키는 일이 "모두가 충분히 시에스타를 즐길 수 있도록" 4시로 연기되었다고 언급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낮잠보다도 덜 중요하고 더 사소한 일이 누군가의 목을 자르고 달리기를 시키는 일이었다는 것이 너무 참혹하게 느껴져서 어쩌면 보르헤스가 이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다른 이야기들이 있었더라도 이 잔혹한 이미지를 뚫고 저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기도합니다.
최초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은자신이 불사신이라고 믿게 된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또 다른 결투> p. 21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인생에서 처음 경험했던 커다란 패배 전에는 저 역시도 스스로를 불사신이라,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과야낄~] 조금 늦게 올립니다. 이번 모임을 진행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서 일정을 지키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리네요. 그래도 한번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과야낄⟩은 보르헤스의 만년의 스타일이 응축돼 있는 정말 좋은 단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특하게도 보르헤스는 이 작품에서 조셉 콘래드의 소설 ⟪노스트로모⟫에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인 아베야노스 박사를 등장시키고, 박사의 오래된 원고에서 역사적 사건인 '과야낄 회담'에 관한 서신이 등장했다는 상상력에서 픽션을 출발시킵니다. 역사적 배경을 지닌 허구적 작품을 빌려온 뒤, 다시 그 안에서 자신만의 역사적 상상력을 펴는 식으로 이중의 픽션을 전개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베야노스 박사의 원고에서 발견했다는 허구의 서신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영웅인 볼리바르 장군이 아르헨티나의 국민 영웅 산 마르띤 장군에게 보냈다는 설정입니다. 한편, 과야낄 회담에서 볼리바르 장군과 산 마르띤 장군이 나눴던 대화는 역사적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러한 보르헤스적 상상력이 틈입할 여지가 생겨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과야낄 회담에 대해서는 다음 첨부 링크를 참고하세요. ([네이버 지식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17333&cid=62121&categoryId=62121) 소설에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 서신의 역사적 중요성을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인지하고 출간하기로 결정합니다. '나'는 아르헨티나의 국가역사학회의 회원이자 역사학자로서 독립전쟁에 참여한 바 있는 조부를 둔 인물이며, 학회의 만장일치 결정으로 서신의 출간과 관련한 일을 담당할 적임자로 추천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출간 관련해서 교육부 장관과 면담 일정을 앞둔 상태에서 장관으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듣습니다. '나'가 적임자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남부의 엘수르 대학교에서 짐머만 박사를 천거했다는 것입니다. 장관은 '나'가 나서서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전개되어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고, 하는 수 없이 '나'는 짐머만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게 됩니다. 여기서 짐머만 박사의 이력 또한 독특한데, 그는 나치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유태계 역사학자입니다. 한때 카로타고의 유태인 공화국을 유태인의 적이었던 로마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에 비판적인 논조의 에세이를 썼고, 또 나치 독일 체제에서 '현대 국가의 수장이 익명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당시 부역자였던 마르틴 하이데거에 의해 공개적인 반박을 받고서 독일을 떠나왔습니다. 먼저 말하면, 이 소설은 '나'가 짐머만 박사를 설득하러갔지만 되레 그에게 설득되고 역사학자로서 글쓰기를 관두기로 결정하게된 하룻밤의 이야기를 회고록 형식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한 역사가의 반성기이자 역사가로서 절필하게 된 계기를 나른하게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 있으면서도 무슨 '역사의 증인'을 함부로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서술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담담히 돌아보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감동을 줍니다.
노스트로모 1모더니스트 조지프 콘래드의 작품. 항구 도시 술라코에서 반복되는 내전과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정치 지형도과 신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도래 등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물욕 앞에 좌절하는 노스트로모의 발자취를 좇는다.
노스트로모 2모더니스트 조지프 콘래드의 작품. 항구 도시 술라코에서 반복되는 내전과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정치 지형도과 신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도래 등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물욕 앞에 좌절하는 노스트로모의 발자취를 좇는다.
게다가 어떤 사건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 사건의 행위자로서의 위치를 떠나 목격자, 즉 그것을 보고 나서 들려주는, 이제는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16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과야낄] 약간 샛길로 빠지면, 보르헤스는 짐머만 박사와 일견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그 계보에서부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혼재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의 혈통이라고 할 수 있는 할아버지와 영국인 할머니를 둔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에서 나고 자라서 일찍이 영어를 배웠고 유럽의 문화를 적극 흡수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안의 이방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아르헨티나 안에서 토착적인 것, 전통적인 것을 생경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겁니다. "1970년대에 누가 빨레르모 또는 로마스의 교외에서 전세기 말에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할 것인가? 겉으로는 믿을 수가 없게도 경찰의 행세를 하며 사소한 일화들까지 밝혀내려 했던 세심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마르띤 피에로가 ⟨뼈 마대⟩가 아닌 ⟨뼈 자루⟩라고 말했을 것이라 지적하고, 그리고 부당한 것일 게지만 우리의 문학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어떤 말이 회색 얼룩 무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오류라고 비판한다." ⏤77쪽, ⟨서문⟩ 중. 서문에서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국민 서사시인 ⟪마르띤 피에로⟫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 세부사항이 터무니없다고 지적하는 현실을 자신도 알고 있음을 넌지시 비칩니다. 하지만 오히려 작품 안에서 라틴아메리카의 토착적인 것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행태야말로 라틴아메리카의 실상을 바로보지 못하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보르헤스는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소설 속에서 '나'와 짐머만 박사가 나누는 대화만 봐도 그렇습니다. 보르헤스는 생전 동서양의 각종 이야기들을 두루 섭렵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런 보르헤스에게 ⟪마르띤 피에로⟫에서 드러나는 세부사항의 미흡함은 단점이 아닌 서사시에서 소설로 이행하는 흐름에 있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서사시와 달리 인물의 내면을 통해서 그 외부세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소설적 원형을 보여주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세부사항의 미흡함이 도드라져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역사적 전통으로서 현실과 그런 현실을 재현한 문학 작품이 다른 체계에 속해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앞서 인용문에서 보르헤스가 화자의 입을 빌려 얘기했던 것처럼 한 사건의 행위자를 떠나서 그 사건의 발화자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지난 세기 가우초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현재에 이르러 가우초를 얘기하는 것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이런 세부사항의 '오류'의 문제, 토속적인 색채의 재현과 관련한 논박 과정은 ⟨과야낄⟩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짐머만 박사가 '나'의 서재에서 후닌 전투를 논하며 후아레즈(Juárez) 대령이라고 말하자 ‘나’는 수아레즈(Suárez)라고 정정해줍니다. 하지만 이후에 '나'는 짐머만 박사가 의도적으로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져듭니다. 그러면서 짐머만 박사는 '나'의 서재에 꽂혀 있는 쇼펜하우어의 전집을 보면서, 고국 독일로부터 도망쳐 온 이유가 "한 미친자의 몸 속에 들어 있는 바로 그 역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대화의 흐름이 아이러니한데, '나'는 짐머만 박사에게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독일의 그것보다 관대하다고 만족스럽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국의 역사는 '자국민의 위치'에서 쓰여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모순적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대화가 진행될 수록 '나'는 자신이 모순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닿게 됩니다. 이 단편을 읽다 보면, 왜 많은 작가가 자신을 망명자로서 규정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페루의 독립 문제, 나아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문제를 다뤘던 과야낄 회담을 바라보는 입장 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중 짐머만은 과야낄 회담을 "볼리바르 장군의 문제"라고 했다가, '나'를 의식하고서는 "산 마르띤 장군[의 문제]"이라고 정정합니다. 그러고 나서 짐머만은 '나'의 고정된 입장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볼르바르 장군의 서신을 산 마르띤 장군의 그것으로서 확립하려고 이미 결정 내린 상황에서, '나'가 개입하고 서술하려는 역사란 이미 자신이 꿰찬 자리를 다시 한번 확립하는 행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즉, 짐머만은 한 명의 역사가가 역사적 사건을 다루기에 앞서 역사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성찰해보지 않는다면 그가 쓰는 역사란 대체 무슨 소용인지 묻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 끝에서 '나'가 사임을 표하는 편지를 작성해서 짐머만 박사에게 전달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며, 나아가 스스로 위치를 자각하고 반성한다는 점에서 퍽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이후 '나'는 역사가로서 절필을 다짐합니다. 원문의 마지막은 불어로 돼 있는데요, “Mon siége est fait”는 직역하면 “내 자리는 만들어졌다” 정도가 될 겁니다. 일종의 관용어로서 '당신의 의견은 불필요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추세라지만, 여기서는 '자리가 고정된 역사가'로서는 역사를 쓸 자격이 없음을 자각하고 포기한다는 중의적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탁월한 마무리가 아닌가 합니다. '나'와 짐머만 박사가 나눈 이 하룻밤의 대화는 여전히 역사적 베일에 가려져 있는 과야낄 회담에서 볼리바르 장군과 산 마르띤 장군이 나눈 대화에 대한 보르헤스적 상상력, 그 역사적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들이 단지 볼리바르 장군이 쓴 것이라고 해서, 모든 진실을 그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볼리바르 장군이 그 편지의 수신자를 속이기 위해 썼을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그 자신이 속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구요. 역사가이시고, 사려가 깊은 분이시니까 미스터리는 우리의 작품이 아닌 우리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선생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칼잡이들의 이야기 16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마가복음] 성경의 ⟨마가복음⟩을 레퍼런스 삼고 있는 패로디 소설입니다. 알다시피 마가복음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나서 부활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발따사르 에스삐노사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인물로, 아버지의 교육 방침 아래 영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으며 유럽적 교육과 사고방식에 더 익숙합니다. 아마 대학에서 에스삐노사가 보여준 과묵함이라는 것도 유럽적인 사고방식을 내면화한 그가 자신의 조국을 열등하게 인식한 탓에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성정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에스삐노사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머리에 깃을 꽂고 다닌다고 생각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미국인들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들처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도 높은 건물들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만 봐도 그러합니다. 우연히 에스삐노사는 로스 알라모스에 있는 한 시골 농장의 저택에서 여름 동안 머무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막연히 글로써 접했던 원주민의 삶을 사는 이들을 만납니다. 바로 구뜨레 식구들인데요, 전형적인 인텔리인 에스삐노사는 무뚝뚝하며 원주민의 삶을 살고 있던 그들과 거의 대화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서재에 무심히 꽂혀 있는 책들을 꺼내어 읽어주거나 그것에 대해 물어도 구뜨레 식구들은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구뜨레 식구의 조부 세대는 스코틀랜드에서 19세기에 일꾼 신분으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와서 원주민들과 결혼한 이들로서, 그들은 19세기 말부터 글쓰는 법을 거의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에스삐노사가 우연히 서재에서 영어로 된 오래된 성경을 발견하고 ⟨마가복음⟩을 낭송해 보는데, 구뜨레 식구들이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들은 마치 핏속에 성경의 말씀이 흐르기라도 한다는 듯이 성경을 낭독하는 소리에 반응하고, 이후부터 에스삐노사의 행동을 마치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행적을 보기라도 한 듯 대합니다. 이때부터 에스삐노사는 ⟨마가복음⟩ 속에서 핍박받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의 행적을 고스란히 따르기 시작합니다. 에스삐노사는 이미 구뜨레 가족에게 일종의 작은 예수가 되었고, 급기야 태풍이 몰아치던 밤에 구뜨레의 딸을 범하기에 이릅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보르헤스 특유의 아이러니가 돋보입니다. 구뜨레 가족은 지난 밤의 일은 묻지 않고 에스삐노사에게 ⟨마가복음⟩의 의미를 묻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거라면, 그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도 구원되느냐는 것입니다. 에스삐노사는 평소처럼 그러하다고 자비로운 예수처럼 말하고, 에스삐노사의 바로 그 답변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능욕해도 되는 이유가 되어버립니다. 여담이지만 소설에 재밌는 사실 관계가 숨겨져 있는데요, 바로 소설 속 에스삐노사가 서른 셋이었고 공교롭게도 예수가 죽은 나이와 동일하다는 겁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브로디의 보고서~] 황병하 선생님의 각주를 보면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걸리버 여행기⟫를 참조한 단편입니다. 늘 그랬듯, 작품의 출처를 밝히는 식의 기사도 소설 특유의 클리셰로 시작합니다. 보르헤스는 친구가 구해준 ⟪천일야화⟫의 번역본에 끼워져 있던 정체불명의 보고서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아베르딘 출생의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데이비드 브로디가 영어로 적은 것인데, 일전에 출판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오지를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했던 신실한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원고의 최초 발견자로서 무미건조한 영어와 라틴어가 혼재된 그것을 스페인어로 옮겼다고 전합니다. 보고서의 형식은 ⟪픽션들⟫에 나오는 가상의 행성인 '틀뢴'을 설명하는 방식과 약간 흡사합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형식 일부를 가져와서 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걸리버 여행기⟫ 또한 리처드 심슨이라는 사람이 레뮤얼 걸리버라는 오랜 친구의 원고 뭉치를 전달 받고서 그것을 자신의 나름대로 편집해서 출간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걸리버 여행기⟫의 맨 앞부분에는 (설정상) 걸리버가 이 책의 출간되고 6개월이 지난 뒤, 이 책의 발행인인 리처드 심슨에게 보낸 항의 편지가 수록돼 있습니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이 책의 강한 풍자성 때문에 자신이 되레 공격받거나 활동이 위축될 것을 염려했던 것 같아요. 레뮤얼 걸리버의 항의 편지를 수록해서 리처드 심슨이 자신의 마음대로 특정 부분을 축소하거나 과장했음을 명시하면서, 향후 예상되는 비판이나 몇 가지 우려되는 반응에 대한 답변을 내놓고 있습니다. 뭐가 됐든, 스위프트는 이 책 속의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현실에서 이 책이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그것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 책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데 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풍자문학의 대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의 환상적인 모험담을 통해 당대의 정치사회와 인간 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스위프트는 “이 작품의 의도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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