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르헤스 읽기] 『칼잡이들의 이야기』 2부 같이 읽어요

D-29
해당 부분은 한번 다시 볼 필요가 있네요. Andrew Hurley의 영역본에서는 "The two knew how to fight⏤the knives, I mean, not the men, who were merely their instruments⏤and they fought well that night."라고 옮겼습니다. 원문을 보면, "Las dos sabían pelear — no sus instrumentos, los hombres — y pelearon bien esa noche."라고 돼 있습니다. 제 판단에는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 쪽으로 기울기는 합니다. 영역본은 너무 갔다(?)고 볼 여지가 있어서요. 제가 스페인어에 조예가 없어서 제대로 된 판단이 어렵기는 하네요.
물건은 인간보다 오래간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으며, 그들이 서로 다시 만나게 될지 누가 알랴.
칼잡이들의 이야기 <만남>, p. 1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그보다 오래전에 시작되었던 또 다른 이야기의 끝이었다. 마네꼬 우리아르떼는 둔깐을 죽이지 않았다. 싸운 것은 사람들이 아닌 무기였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손이 자신들을 흔들어 깨울 때까지 한 진열장에서 나란히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그것들이 깨어났을 때 몸을 움찔거렸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아르떼의 손이 떨렸던 것이리라. 그래서 둔깐의 손이 떨렸던 것이리라. 그 둘은 싸우는 방법을 알았다. 기구들이 아닌 두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둘은 멋지게 싸웠다. 그들은 긴 시골길들을 따라 서로를 찾아다녔고, 이미 가우초가 먼지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뒤에서야 서로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의 무기 속에서는 인간적 원한이 잠든 채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12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후안 무라냐~] 개인적으로 어디 다녀와야 했습니다. 컴퓨터를 들여다 볼 환경이 아니어서 늦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진도를 따라잡아 보겠습니다😅 작중 후안 무라냐는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팔레르모 지역을 누비던 칼잡이 중 한 명입니다. 후안 무라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이후, 에밀리오 뜨리빠니의 이모이자 후안 무라냐의 부인인 플로렌티나는 모종의 이유로 다락방에 칩거합니다. 후안 무라냐는 살아생전 포악무도했던 인물로서 여러 후일담 속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나'인 에밀리오 뜨리빠니는 꿈에서 그를 인디오의 형상으로 그려봅니다. 후안 무라냐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혼재해 있던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상황에서 일견 토착적인 것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여집니다. '나'가 꿈에서 본 후안 무라냐가 품 속에 지니고 있었던 '콘도르의 발톱'이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콘도르는 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하는 특산종으로서 맹금이며, 오래전부터 라틴아메리카의 해방 영웅을 기리는 유명한 상징물로 활용돼 왔으니까요. 특이하게도 그는 '발톱'이긴 합니다.
나는 이모부를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그를 인디언 같은 모습에, 건장하고, 숱이 적은 콧수염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 상상하고 있었지. 우리들은 거대한 채석장과 무성한 잡초들을 가로질러 남쪽을 향해 가고 있었지. 하지만 그 채석장과 잡초는 또한 테임스 거리이기도 했어. 꿈속에서 해는 중천에 떠 있었어. 후안 이모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지. 그는 고갯마루의 전망대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더군. 그는 윗도리의 가슴 근처께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어. 단도를 꺼내려고 하는 순가이 아닌 그것을 숨기는 것 같은 자세로 말이야. 그가 아주 슬픈 목소리로 내게 말하더군. 나는 아주 많이 변했단다. 그가 손을 끄집어냈을 때 내가 본 것은 콘도르의 발톱이었어. 나는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지.
칼잡이들의 이야기 12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그가 '발톱'이라는 것을 왜 특이한 것으로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결국 발톱이라는 것은 가장 공격적인 부분이라 생각되어 후에 '단도'가 되어버린 무라냐에게 잘 어울린다고 느꼈거든요.
저도 큰 틀에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가우초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조금 달리 보이기도 합니다. 가우초는 당시 정권에서 군벌의 일부로 동원되여 라틴아메리카의 특정 지역의 해방에 큰 힘을 보태주었습니다만, 후일 그들의 정치적 공적은 축소되고 가우초는 한갓 부랑자 계급으로 전락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쓰고 나서 내팽겨쳐진 칼, 커다란 상징물의 발톱으로 축소된 그들로 보이기도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적절하면서도 뒷맛이 개운치는 않은 것 같아요.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결국 발톱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말단이니가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후안 무라냐] 이전에 다뤘던 작품들과 비슷하게, ⟨후안 무라냐⟩ 역시 유럽적인 것이 적극 유입되는 아르헨티나 지역 특유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에서 "외국놈"으로 칭해지는 집주인 루체시 씨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민자이며, 그가 끝내 살인되는 것도 오랜 갈등을 일면으로 보여줍니다. 참고로 번역본에서 "외국놈"으로 옮겨진 단어의 원문을 찾아보면 "그링고(gringo)"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토착민들이 외인을 부르던 멸칭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굳이 대응되는 단어를 찾자면 "양키"쯤 될까요.) 소설에서 플로렌티나 이모는 흔히 말하는 '다락방 여자'로 칩거하면서 후안 무라냐의 단도를 숭배하고 그의 의지를 대리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보르헤스는 이번 소설집에서 역사적인 맥락을 특히 부각하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의지가 계승되고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징물로서 '단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썰'과 비슷한 의뭉스러운 형태의 얘기들은 그 사건의 진위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또 좋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단도에 얽힌 후안 무라냐의 의지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건 당시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칼잡이로 죽을 수밖에 없던 악당들이 스스로 망각될 것을 알면서도 자기보다 더 큰 어떤 것에 작은 흠집이라도 내고자 했던 무용한 시도가 아닐까 합니다.
홀로 과부가 된 채 자신의 남편, 자신의 우상을 그가 자신에게 남긴 그 잔인한 물건, 그의 활약상이 담겨 있는 그 무기와 혼동했던 여자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하나의 상징, 아니 많은 상징들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후안 무라냐는 어린 시절 내가 걸어다녔던 길을 지나다녔고,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을 것들에 대해 알고 있었고, 죽음을 맛보았고, 그 뒤 단도가 되었고, 이제 기억 속의 한 단도가 되었고, 내일은 망각,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망각으로 변할 그런 사람이었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12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나로서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또 그렇게 믿는다는 사실이지.
칼잡이들의 이야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보르헤스가 "썰"들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특히 그것이 비극적인 일인 경우에는 더욱 더, 그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새겨 넣어 기억의 색채를 바꾸는 일이 중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노부인] 이 단편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둔 채, 알려지지 않은 독립 투사의 자손들의 삶이 망각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마리아 후스디나는 독립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마리아노 루비오 대령의 둘째 딸입니다. 그녀는 독립 투사였던 아버지가 살아생전 세웠던 공을 별달리 인정받지도 못하고 후대에 이르러서 기억되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마지막 인물처럼 묘사됩니다. 그녀의 삶은 특별히 비극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느 한 구석에 놓인 식물처럼, 또 한밤에 깃드는 조용한 수면처럼 망각됩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서 쓰러진 나무가 어떠한 소리를 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독립 투사의 자손들의 삶 또한 그러합니다 . 후스띠나 집에서 벌어진 떠들썩한 파티는 그녀의 삶이 끝끝내 기억되지 못할 것임을 예견하는 기념비적인 행사입니다. 각종 언론과 유명인이 참석한 파티 자리는 실로 아무것도 기리지 않음을 가리기 위한 휘장막임이 밝혀집니다. 강한 서치라이트가 사물의 윤곽을 흐리듯 말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잠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신비로운 어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3분지 1을 그것에게 바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지 깨어 있는 일식에 다름아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로 짜여진 보다 복잡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 잠은 끊기지 않는 꿈들의 연속이다. 하우레기 여사가 고요한 혼돈 속에서 10년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 잘못일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매 10년의 순간은 전도 후도 없는 순전한 현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낮과 밤, 수많은 달력장, 그리고 불안과 사건들을 가지고 세는 그러한 현재에 대해 놀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현재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건너가는 매일 아침이자, 잠을 자기 전의 매일 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두 차례씩(낮과 밤에) 그 노부인처럼 되고 있는 것이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137-13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전반적으로 도입부부터 집중해서 읽기 쉽지 않다고 느끼는데, 이 글을 특히 그러했습니다. 많은 각주에서도 보이듯, 익숙치 않은 이름의 전투들이 나열되기 때문입니다. 도입부를 여러 번 읽고 나서 노부인의 이야기로 들어간 후에는 좀더 잘 읽히긴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있어 여전히 작품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일반적인 비유야말로 가장 최고의 비유이다. 왜냐하면 그것들만이 진실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 자체는 하나의 주장으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왜 이러한 주장이 1932년 이래 이 노부인의 정신이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지고 있다는 언급 바로 뒤에 등장하는지, 이렇게 등장함으로써 노부인에 대한 어떤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개신교도, 유대인, 비밀 공제 조합원, 이교도는 동일한 말이었으며", 마테 차 대신 홍차를 마시고 부활절과 주현절 대신 크리스마스를 최고의 명절로 받아들인 것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세한 차이들은 그 중요성과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가장 일반적인 것, 그리고 가장 오래된 기억 같은 것들만 이 노부인에게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일까요.
추측컨대, 그 부분은 라틴어 계열을 한국어로 옮기면서 발생한 문제 같습니다. 원문이나 영역본은 말해주신 문장 이전에 세미콜론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1932년 이래 그녀의 정신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비유야말로 가장 최고의 비유이다. 왜냐하면 그것들만이 진실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되어야 할 텐데, 한국어는 문장 구조상 명사로 문장을 끝맺지 않고 서술어로 끝맺기 때문에 콜론이나 세미콜론을 써서 문장 간의 연결 구조를 보여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통 콜론이나 세미콜론을 적절한 접속사로 대체하거나, 아니면 그냥 생략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병하 선생님은 후자쪽을 택한 거고요. 아마 영역본을 보시면 좀더 이해가 편할 겁니다. "Since 1932 her mind had been gradually growing dim­mer; the best metaphors are the common ones, for they are the only true ones" 그러니까 말해주신 문장은 'dimmer'에 대한 설명인 셈입니다. '정신이 희미해지다'라는 표현 자체가 보르헤스가 말하는 일반적인 비유이자 최고의 비유인 셈입니다. 실상 '정신이 희미해지다'라는 표현은 현재 관용어로 굳어져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그 또한 엄연히 비유라는 겁니다. 우리가 비유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비유, 즉 최고의 비유인 셈입니다. 실제로 보르헤스는 에머슨의 "언어는 화석이 된 시다"라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오.. 이 부분은 영역본으로 읽었어도 캐치를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dimmer' 자체가 메타포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거든요. 언급 감사합니다.
나는 페루에서 싸웠던 창기병 부대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후의 한 노부인이라고 생각한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노부인>, p. 19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가장 이해하고 싶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던 문장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인 이 문장입니다. 왜 이 노부인이 페루에서 싸웠던 창기병 부대가 거둔 마지막 승리가 되는 걸까요? '승리'라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니 이 노부인의 역사와 자신에 대한 망각을 축복으로 바라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결론적으로 말해 그녀는 행복"했기 때문일까요? 또 이 '마지막 승리'라는 표현에서 '마지막'을 굳이 언급한 것이 긍정적인 의미일지 부정적인 의미일지도 궁금합니다. 노부인의 죽음 이후 이 창기병 부대의 역사는 끝나고 더이상 이로부터 긍정적인 것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라면 부정적인 의미일 테고, 페루에서 싸웠던 창기병 부대의 이야기는 그 때 끝난 것이 아니라 한 세기가 지나서까지 이어졌던 것이라는 재평가라고 하면 긍정적 의미일 것 같으니까요. 혼자서는 보르헤스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동참한 것이니 애초에 쉽게 읽힐 거라 생각한 적도 없지만, 생각보다 더 읽어나가기 만만치 않은 작가네요.
황병하 선생님의 마지막 문장에 오역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페루에서 싸웠던 창기병 부대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후의 한 노부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일 겁니다. 제가 보기엔, "창기병 부대가 거둔 마지막 승리" 부분을 "창기병 부대의 마지막 희생자"로 고치는 게 괜찮을 겁니다. 원문은 "última víctima"라고 돼 있으니까요. ‘마지막 희생자(última víctima)’를 ‘마지막 승리(última victoria)’로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근데 황병하 선생님께서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오역도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누군가의 승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뜻하기도 하니까요. victory는 라틴어 victoria에서 파생했고 victim은 라틴어 victima에서 파생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vi-'라는 라틴어 접두사는 많은 경우 힘이나 폭력과 관계된다고 하니까요. 물론 아무리 그래도 '희생자'로 적는 게 원래 의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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