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르헤스 읽기] 『칼잡이들의 이야기』 2부 같이 읽어요

D-29
저는 여기서 산티아고가 후회하지 않는 것은 '그 비열한 사건들의 진상', 즉 자신의 밀고일 뿐 '페파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자신의 밀고를 '비열한 사건'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비열한 사람'이라고 간주하는 것 자체에 이미 후회가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 '후회가 계속되는 한 죄 또한 계속되는 거라 해야겠지요'라는 말에서 산티아고가 페라리에게 여전히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해서요. (어쩌면 이 구절 역시 다른 번역을 만나면 다르게 이해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나다). 사실 산티아고가 밀고 자체를 후회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가 어머니의 바람처럼 '건달' 짓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산티아고를 억지로 참여시키려 하는 상황이었으니 자칫하다가는 그들의 공범죄가 될 테니까요.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경찰들의 원한으로 페라리가 목숨을 잃는 것은 산티아고가 예상치 못했던 불운한 결과였을 테니, 산티아고는 이후 다른 방식으로 (페라리가 맞이할 위험을 줄이는 방식으로) 그 패거리에의 협력을 피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적으면서 보니 이 작품에서 경찰과 신문들 또한 비열하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로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 제가 게을러서 모임에 신경을 못 썼네요! 대화는 차차 나누도록 하고, 소설 먼저 얘기해보겠습니다. 이 단편은 ⟪불한당들의 세계사⟫의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와 같이 읽으면 좀더 이해하기가 편합니다. 이전 모임에서 한번 다룬 적 있으니, 시간이 있으면 한번쯤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에서 로센도 후아레스는 자신에게 결투를 걸어온 '새장수' 프란시스꼬 레알의 요청을 어쩐지 응하지 않고 유유히 가게를 빠져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 단편에 이르러서 우리는 왜 로센도 후아레스가 그날 밤에 결투에 응하지 않았는지를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얘기하자면, 로센도 후아레스는 가우초 시대를 살아가는 칼잡이들의 향수와 낭만에 공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무용함을 미리 감지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가 가우초 시대의 낭만과 향수를 '대리'하는 형태로라도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로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는 그러한 낭만과 향수에 대한 일종의 반동을 보여줍니다.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장밋빛'이란 피가 낭자한 모퉁이에 대한 낭만적 묘사입니다. 그와 동시에 칼잡이들의 결투로 대변되는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모퉁이를 돌아서 어디론가 떠나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암시하는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한당들의 세계사보르헤스는 동서고금의 불한당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그것들을 다시 썼다. 사기꾼, 갱,엉터리 구세주, 여자 해적 등등 세계의 악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항상 그 누구도 진보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요. 어쨌든 모든 사람은 자신이 태어날 적합한 곳을 가지고 있는 법이지요.
칼잡이들의 이야기 100-10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로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 로센도 후아레스가 젊었을 시절에 가르멘티아와 결투를 벌인 것으로 볼 때 로센도 역시 그가 속했던 시대의 분위기에서 처음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훗날 가르멘티아를 죽인 것이 발각되고, 경찰서장의 회유를 받게 되면서부터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이후 로센도는 모론으로 가서 당시 공권력의 비호 아래서 아르헨티나의 모순된 정치 현실에 깊이 연루되고, 모종의 현실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 현실이란 유럽적인 것을 지향하는 아르헨티나의 정치 현실 아래서 토착적인 것이 청산되는 구체적인 실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로센도 후아레스는 더 이상 전설적인 가우초 모레이라의 신화를 마냥 좇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카프카의 말대로 이야기에 몰두한다는 것은 현실에 눈감는 한 방식이기도 하니까요.) "수도와 지방의 비밀조직에서 총애받는 선거 참모"가 된 로센도의 변화는 그의 지인인 루이스 이랄라와 나눴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루이스 이랄라는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을 또 다른 비밀조직의 간부에게 빼앗겼습니다. 루이스 이랄라는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느끼고서, 단도를 이용한 결투를 벌임으로써 훼손된 명예를 되찾고자 합니다. 로센도 후아레스는 그를 말리면서 그런 결투를 벌인다고 해서 얻는 득보다 실이 훨씬 더 많을 것임을 상기시킵니다(“당신이 그를 죽이고 감옥으로 가든지, 그가 당신을 죽이고 당신은 차카리타 공동묘지로 가든지”). 하지만 루이스 이랄라는 결투를 벌인 끝에 죽임을 당합니다. 로센도 후아레스는 그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런 결투가 투계장에서 닭들이 발버둥치며 벌이는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에 잠깁니다. 모르긴 몰라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룻밤의 '정당한' 결투에 목숨을 거는 행태야말로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로센도 후아레스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잠시 설명하자면, 로센도 후아레스가 살았던 20세기 초반의 아르헨티나 남미 대륙은 유럽적인 것과 남미적인 것이 혼재하던 역동적인 공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과거의 전설적인 가우초 신화 속을 살며 하룻밤의 칼싸움에 명운을 걸었던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유럽적인 것으로서 남미적인 것을 갈음하며 결투 따위는 무용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편, 이전 단편인 ⟨비열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과거 시대의 '용기'와 새 시대의 '용기'가 상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장수 프란시스꼬 레알은 로센도 후아레스에게 호기롭게 결투를 청하며 그의 용기를 시험하지만, 이제 더 이상 로센도 후아레스에게 결투로써 용기를 증명하는 일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로 결투에 응하지 않고 마을을 유유히 떠나는 것이야말로 로센도 후아레스가 생각하는 또 다른 의미의 용기를 발휘하는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이 단편을 로센도 후아레스가 과거의 낭만과 향수를 저버리고 세속으로 타협하고 찌들어간 한 인물의 이야기로만 소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복하지만, 20세기 초반의 아르헨티나 정부는 유럽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토착적인 것과 유럽적인 것이 혼재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인물들은 각자가 살아갈 현실을 채택하고, 그에 걸맞은 용기를 발휘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자연히 어떤 현실을 채택하느냐에 따라서 발휘해야 할 용기의 양상도 달라졌으며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용기'가 상충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단편 ⟨비열한 사람⟩과 ⟨로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이에 더해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는 전혀 다른 얘기처럼 보이지만 비슷한 대결 구도를 보여줍니다. 한쪽에서는 본토의 낭만적인 가우초 신화를 좇는 프란시스꼬 페라리와 프란시스꼬 레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유럽적인 삶의 방식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산띠아고 피쉬바인과 로센도 후아레스가 있습니다. 누군가(프란시스꼬 페라리)에게는 비겁하고 비열한 행위가 다른 누군가(산띠아고 피쉬바인)에게는 제게 처한 현실에 뿌리내리기 위해 채택한 용기일 수 있고, 또 누군가(프란시스꼬 레알)에게는 낭만적인 행위가 또 다른 누군가(로센도 후아레스)에게는 무용한 행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나는 그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루과이로 갔고, 거기서 마부가 되었지요. 여기로 돌아와서는 토지를 샀구요. 산 뗄모는 항상 평화로운 동네였었지요.
칼잡이들의 이야기 10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서로 다른 '용기'의 충돌이라는 독해에 저도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가 수록된 책이 집에 없어 아직 읽지 못했지만 루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이미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당신의 평온한 삶을 망치겠다는 건가요?"라는 말에서 후아레스의 (이전과는) 변화된 생각이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분별없는 시비꾼을 보며 "마치 거울이나 된 듯 나 자신을 보았고, 그것은 내게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이 변화가 쉽게 되돌려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변화에 대해, 자신의 생각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월의 흐름이 필요하지요. 그날 밤 내게 일어났던 일은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옳겠지요.
칼잡이들의 이야기 p. 15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시간의 흐름과 축적 속에서 어떤 일들을 이해하게 해 주는 문장들을 좋아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만남] 쭉 따라서 읽기에 무리 없는 이야기입니다. 과거, 칼싸움으로 정당하게 결투를 벌였던 가우초들의 삶이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적 구성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역사였음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쓰여진 단편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이 단편도 앞서 다룬 ⟨비열한 사람⟩과 ⟨로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할 수 있는 얘기들이 많습니다. 지난 세기,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가우초의 삶을 빼놓고 얘기하기가 어렵습니다. 드넓은 팜파스를 누비던 가우초들의 유목적인 삶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미국식 카우보이와 같은 낭만과 향수를 불러옵니다. 가우초들은 19세기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독립에 커다란 역할을 했고 또 강력한 군벌의 일부로 활동한 적도 있지만, 이후 가우초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하층 계급의 부랑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가우초들은 유럽적인 것들이 밀려들면서 점차 축줄되는 처지에 놓였던 존재들로서, 지난 세기의 혼란한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입니다. 과거의 가우초들이 보여줬던 정당한 결투의 증거인 '단도'에는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정념이 적층돼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의지가 깃드는 정령처럼, 그것들은 진열장에서 인간을 숙주삼아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보르헤스는 언젠가 가우초식 칼싸움이 재현된 밤의 의뭉스러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보르헤스는 후일 은퇴한 경관 호세 올라베 씨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가 가우초들의 삶을 단순히 "빈민가에 살던 칼잡이들의 삶"으로 폄하하는 것을 듣고서 자신이 목격한 바를 들려주고자 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날 밤 결투와 단도에 얽힌 비화를 알게 되고, 보르헤스는 자신이 목격한 칼싸움이 단순히 당사자의 치기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하고 마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싸운 것이 아니라 무기에 얽힌 가우초들의 정념이 시대를 가로질러서 자신을 구현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목의 만남이란 사람 간의 그것이라기보다 무기와 그 무기에 얽힌 시대적 의지였던 셈입니다.
어찌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어찌 보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가우초'라는 집단 자체가 다소 낯설었는데 이야기들에 반복적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고, 가우초들의 삶이나 그들의 결투가 의미심장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낯설었습니다. 특히나 보르헤스가 목격한 칼싸움에 무기에 얽힌 가우초들의 정념이 개입했다는 것이 신비롭고 마술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맞지만, 당사자들의 치기 역시 저에게는 크게 보여서, 그들의 치기 어린 싸움을 미화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 '그 둘은 싸우는 방법을 알았다. 기구들이 아닌 두 사람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둘은 멋지게 싸웠다'의 중간 문장이 오역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을 우리아르테와 둔칸이라고 이해했고, 그 앞에서 '싸운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무기였다'고 말했기 때문에, 싸우는 방법을 알았던 그 둘은 '두 사람이 아닌 기구들'이 아닌가 싶었던 거죠. 다시 읽어보니 오역이 아니라 저의 오해인 것 같네요. 싸우는 방법을 알았던 그 둘, 기구들이 아닌 두 사람은 우리아스테와 둔칸이 아니라 무기 안에 깃들어 있는 원한의 주인들이었겠네요.
해당 부분은 한번 다시 볼 필요가 있네요. Andrew Hurley의 영역본에서는 "The two knew how to fight⏤the knives, I mean, not the men, who were merely their instruments⏤and they fought well that night."라고 옮겼습니다. 원문을 보면, "Las dos sabían pelear — no sus instrumentos, los hombres — y pelearon bien esa noche."라고 돼 있습니다. 제 판단에는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 쪽으로 기울기는 합니다. 영역본은 너무 갔다(?)고 볼 여지가 있어서요. 제가 스페인어에 조예가 없어서 제대로 된 판단이 어렵기는 하네요.
물건은 인간보다 오래간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으며, 그들이 서로 다시 만나게 될지 누가 알랴.
칼잡이들의 이야기 <만남>, p. 1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그보다 오래전에 시작되었던 또 다른 이야기의 끝이었다. 마네꼬 우리아르떼는 둔깐을 죽이지 않았다. 싸운 것은 사람들이 아닌 무기였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손이 자신들을 흔들어 깨울 때까지 한 진열장에서 나란히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그것들이 깨어났을 때 몸을 움찔거렸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아르떼의 손이 떨렸던 것이리라. 그래서 둔깐의 손이 떨렸던 것이리라. 그 둘은 싸우는 방법을 알았다. 기구들이 아닌 두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둘은 멋지게 싸웠다. 그들은 긴 시골길들을 따라 서로를 찾아다녔고, 이미 가우초가 먼지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뒤에서야 서로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의 무기 속에서는 인간적 원한이 잠든 채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12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후안 무라냐~] 개인적으로 어디 다녀와야 했습니다. 컴퓨터를 들여다 볼 환경이 아니어서 늦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진도를 따라잡아 보겠습니다😅 작중 후안 무라냐는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팔레르모 지역을 누비던 칼잡이 중 한 명입니다. 후안 무라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이후, 에밀리오 뜨리빠니의 이모이자 후안 무라냐의 부인인 플로렌티나는 모종의 이유로 다락방에 칩거합니다. 후안 무라냐는 살아생전 포악무도했던 인물로서 여러 후일담 속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나'인 에밀리오 뜨리빠니는 꿈에서 그를 인디오의 형상으로 그려봅니다. 후안 무라냐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혼재해 있던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상황에서 일견 토착적인 것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여집니다. '나'가 꿈에서 본 후안 무라냐가 품 속에 지니고 있었던 '콘도르의 발톱'이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콘도르는 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하는 특산종으로서 맹금이며, 오래전부터 라틴아메리카의 해방 영웅을 기리는 유명한 상징물로 활용돼 왔으니까요. 특이하게도 그는 '발톱'이긴 합니다.
나는 이모부를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그를 인디언 같은 모습에, 건장하고, 숱이 적은 콧수염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 상상하고 있었지. 우리들은 거대한 채석장과 무성한 잡초들을 가로질러 남쪽을 향해 가고 있었지. 하지만 그 채석장과 잡초는 또한 테임스 거리이기도 했어. 꿈속에서 해는 중천에 떠 있었어. 후안 이모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지. 그는 고갯마루의 전망대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더군. 그는 윗도리의 가슴 근처께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어. 단도를 꺼내려고 하는 순가이 아닌 그것을 숨기는 것 같은 자세로 말이야. 그가 아주 슬픈 목소리로 내게 말하더군. 나는 아주 많이 변했단다. 그가 손을 끄집어냈을 때 내가 본 것은 콘도르의 발톱이었어. 나는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지.
칼잡이들의 이야기 12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그가 '발톱'이라는 것을 왜 특이한 것으로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결국 발톱이라는 것은 가장 공격적인 부분이라 생각되어 후에 '단도'가 되어버린 무라냐에게 잘 어울린다고 느꼈거든요.
저도 큰 틀에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가우초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조금 달리 보이기도 합니다. 가우초는 당시 정권에서 군벌의 일부로 동원되여 라틴아메리카의 특정 지역의 해방에 큰 힘을 보태주었습니다만, 후일 그들의 정치적 공적은 축소되고 가우초는 한갓 부랑자 계급으로 전락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쓰고 나서 내팽겨쳐진 칼, 커다란 상징물의 발톱으로 축소된 그들로 보이기도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적절하면서도 뒷맛이 개운치는 않은 것 같아요.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결국 발톱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말단이니가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후안 무라냐] 이전에 다뤘던 작품들과 비슷하게, ⟨후안 무라냐⟩ 역시 유럽적인 것이 적극 유입되는 아르헨티나 지역 특유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에서 "외국놈"으로 칭해지는 집주인 루체시 씨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민자이며, 그가 끝내 살인되는 것도 오랜 갈등을 일면으로 보여줍니다. 참고로 번역본에서 "외국놈"으로 옮겨진 단어의 원문을 찾아보면 "그링고(gringo)"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토착민들이 외인을 부르던 멸칭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굳이 대응되는 단어를 찾자면 "양키"쯤 될까요.) 소설에서 플로렌티나 이모는 흔히 말하는 '다락방 여자'로 칩거하면서 후안 무라냐의 단도를 숭배하고 그의 의지를 대리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보르헤스는 이번 소설집에서 역사적인 맥락을 특히 부각하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의지가 계승되고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징물로서 '단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썰'과 비슷한 의뭉스러운 형태의 얘기들은 그 사건의 진위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또 좋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단도에 얽힌 후안 무라냐의 의지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건 당시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칼잡이로 죽을 수밖에 없던 악당들이 스스로 망각될 것을 알면서도 자기보다 더 큰 어떤 것에 작은 흠집이라도 내고자 했던 무용한 시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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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에도 벽돌책 같이 격파해요! (ft. 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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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읽기 어려운 보르헤스, russist 님과 함께라면?
(9)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부 같이 읽어요(1) [보르헤스 읽기] 『불한당들의 세계사』 같이 읽어요(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하루키'라는 장르
[Re:Fresh] 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다시 읽어요.[그믐밤] 16. 하루키 읽는 밤 @수북강녕 하루키가 어렵다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함께 읽기에이츠발 독서모임 16회차: <기사단장 죽이기> / 무라카미 하루키 저
스토리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스토리 탐험단의 첫 번째 여정 [이야기의 탄생][작법서 읽기] 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함께 읽기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함께 읽으실래요?
<책방연희>의 다정한 책방지기와 함께~
[책방연희X그믐] <책 읽다 절교할 뻔> 번외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읽기[책방연희X그믐] <책 읽다 절교할 뻔> 번외편 <내가 늙어버린 여름> 읽기[책방연희X그믐] 책 읽다 절교할 뻔
❄겨울에는 러시아 문학이 제 맛
[문예세계문학선] #01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함께 읽기[그믐밤] 8. 도박사 1탄, 죄와 벌@수북강녕[브릭스 북클럽]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1, 2권 함께 읽기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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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주에 채식 관련 책 12권 읽기 ② 채식의 배신 (리어 키스)12주에 채식 관련 책 12권 읽기 ① 채식의 철학 (토니 밀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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