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서 쓴 수기 천천히 읽기

“ 나는 못된 인물을 고사하고,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사납거나 착해지거나, 비열하거나 고상해지지도 못했고, 영웅이나 벌레가 되지도 못했다. 지금은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 하루하루 연명하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기 위안으로 스스로를 희롱하고 있을 뿐이다. (p.12) ”

“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것은 병이다. 그건 완전한 병이다. 불행한 19세기의 보통 사람이 지녀야 하는 평균적 의식수준은, 이성이 발달된 인간이 지닌 의식수준의 절반 또는 4분의 1 이하면 충분하다." p.14 "내가 선에 대해서, 그리고 '아름답고 고상한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나는 진흙탕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빨려 들어가, 그 바닥에 더욱더 능숙하게 쩍 달라붙었다." p. 15 "나의 쓰디쓴 양심의 가책은 결국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달콤함으로 환원되어 궁극적으로는 확고한 쾌감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다 쾌감, 바로 쾌감으로 변한 것이다." p. 16 "쾌감이 찾아오는 시기는 굴욕적인 자신의 존재를 잔인할 정도로 의식할 때였고, 막다른 벽에 부딪칠 때였고, 앞이 꽉 막혔는데 빠져나갈 탈출구가 딱히 없을 때였고, 탈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다른 무엇이 되려야 도저히 될 수 없을 때였고, 무엇이든 다른 것이 되어보겠다는 믿음과 여유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나 자신이 딴 사람이 될 의향이 전혀 없을 때였고, 다른 무엇이 되길 바란다 하더라도 변신할 만한 대상이 실질적으로 전혀 없어서 그냥 두 손 놓고 멍하니 있을 때였다." p. 17 "중요한 것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결론이 한결같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무엇이든 첫번째 죄인은 나라는 사실이었다." (p.18) ”

“ 생쥐인간은 (상대의) 최초의 추악한 행위 말고도 이미 여러가지 의문과 의혹같이 혐오스러운 것을 자신의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놓는다. 하나의 문제에다 미해결된 문제들을 무수히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알게 모르게 생쥐의 주변에는 숙명적인 쓰레기 더미가 쌓이게 된다. (...) 굴욕당하고 짓밟히고 조롱당한 우리의 생쥐는 지저분하고 악취 나는 그곳 지하에서 차갑고 독기 서린, 무엇보다 만성화된 오기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그는 앞으로 사십년간 자신이 당한 굴욕을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자세히 기억할 분만 아니라, 기억하는 순간마다 더욱더 부끄러운 세부사례를 덧붙이고 상상력마저 동원해 자신의 염장을 질러 분노에 빠져든다. 생쥐는 자기가 상상해놓은 것을 수치스러워하겠지만, 모든 걸 기억해내고, 모든 걸 곱씹어보고, 얼마든지 가능할 거라는 핑계로 엉뚱한 망상을 생각해내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P.21~22) 자연법칙은 일일이 당신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지 않거든요. 자연법칙은 당신의 희망사항이나 선호유무와 아무 관련이 없거든요. (p.24) ”

“ 도대체 나는 왜 나 자신을 망가뜨리고 괴롭힐까? 대답은 수수방관하고 있기가 권태롭기 때문에 객기를 부려봤으리라는 말일 것이다. 여러분이 주의 깊게 본인 자신을 직접 뜯어보면, 진짜 그렇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P.31) 타성이란 의식적인 수수방관인 셈이다.(P.32) 직접적이고 직선적인 사람들과 활동가들이 모두 적극적인 까닭은 그들이 어리석고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능력의 한계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부차적 원인들만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착각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P.32) 악한 마음을 먹으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법이다. 주저함이나 망설임 따위도 사라진다. 또한 악의를 품게 되면 대의적 명분이고 뭐고 없다. 왜냐면 악의는 명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P.32) 나는 평생 동안 시작하거나 마무리 지은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 자신을 현명한 인간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P.33) ”

“ 인간은 자기의 이익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너저분한 짓을 한다고. 인간을 계몽해 그에게 제대로 된 진짜 이익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면 그는 곧바로 너저분한 짓을 중단하고, 착하고 고상한 사람이 된다고. 왜냐하면 계몽되어 자신의 진짜 이익을 깨닫게 된 나머지 선행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알다시피 아무도 자신의 이익에 고의로 반하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선을 행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이다." (P. 38) 우선, 지난 수천년 동안 인간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위해 행동했던 때가 도대체 얼마나 되었나?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이익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면서 고의로 그 이익을 팽개치고 위험이 도사린 엉뚱한 길로 달려들곤 했다. 누가 강요하거나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마치 지정된 길이 싫어서 암흑 속의 험난하고 고된 길을 더듬거리면서도 고집스럽게 뚫어보려는 심산 같았다. (P.39) 이 친구는 어떤 일을 착수하게 되면 즉시 이성과 진리의 법칙에 의거해 앞으로의 행동계획을 화려하고 명료하게 여러분에게 설명할 것이다. 더욱이 그는 정상적인 인간의 진짜 이익에 관해 여러분에게 열변을 토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정확히 십오분 후에, 외부의 어떤 돌발변수가 아니라, 그의 모든 이익을 팽개치도록 강하게 충동질하는 내면의 변수로 인해 느닷없이 엉뚱한 행동을 보여준다. (P.40) 도대체 문명이 우리의 무엇을 착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문명은 인간에게서 오로지 감각만 다면적으로 발전시켰을 뿐, 그 이상 해놓은 것이 분명 아무것도 없다. 감각의 다면성을 계속 발전시키면, 인간은 아마 유혈 속에서 쾌락을 찾게 될 것이다. (...) 여러분은 가장 교묘한 학살자들이 거의 대부분 가장 문명화된 신사들이란 사실을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 적어도 문명 덕분에 인간이 과거보다 더 많은 피를 요구하지 않는다 해도, 피를 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과거보다 더 사악하고 추악해졌음이 틀림없다. (P.41) 어떤 인간을 막론하고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길 좋아하지, 이성과 이익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어긋나는 길을 갈망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러한 갈망을 아주 당연히 받아들이는 존재다. 자신만의 욕구, 제멋대로 보일 수 있는 심한 변덕, 때로는 광기에 근접하는 듯한 환상,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간과했던 가장 유리한 이익이다. 이익은 어떤 식으로든 분류가 불가능하며, 언제나 체계니 이론이니 하는 것들을 몽땅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다. (P.46) *1부 7장 ”

“ 언젠가 우리의 욕구와 변덕의 공식들을 제대로 찾아낼 때, 다시 말해 그 욕구와 변덕이 무엇에 달려 있는지, 즉 우리 내면의 어떤 법칙에 따라 그게 발생하여 어떻게 확산되고, 상황에 따라 지향점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아낼 때, 즉 이 모든 것을 알려주는 진짜 수학 공식을 발견할 때, 인간의 욕구는 아마 즉각 멈춰버릴 것이다. 아마가 아니라 분명 중단될 것이다. 인간의 욕구가 공식에 의해 조정되는 거라면 누가 그런 욕구를 충족하려 하겠는가? 더욱이, 인간을 움직이는 공식이 규명되는 순간 인간은 피아노 건반과 같은 존재로 변해버리거나 그와 유사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소망과 의지와 욕구가 없는 인간이 피아노 건반이지, 진정 인간이란 말인가?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끊임없이 버릿속에 새겨둘 것은 자연은 어떤 순간,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봐야지,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봐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성이란 그저 이성에 불과하며, 인간의 지적 능력을 만족시키는 데 그칠 뿐이다. 반면 욕구는 삶 전체의 표출이다. 이를테면, 이성뿐만 아니라 가려운 데를 긁는 생리적 행위까지 인간의 삶을 표출하는 행위다. 물론 이러한 표출 속에서 우리의 삶이 초라해 보일 때가 종종 있지만, 그래도 그게 삶이다. 딱 한가지 경우에 인간은 고의로,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심지어는 해로운 것, 멍청한 것, 심지어는 극히 미련한 것을 바랄 때가 있다. 바로 의무에 구속되어 어쩔 수 없이 현명한 것만 원해야 하는 경우보다, 아주 우매할지언정 자신이 원하는 권리를 얻기 위해서일 때다. 신사 여러분! 어리석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우리의 선택이 어떤 때는 지상의 그 무엇보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라. 특히 우둔하고 변덕스러운 행위가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고, 유익함이 의미하는 우리의 합리적 상식을 뒤집는다 해도, 우리에게 유리한 혜택을 그 무엇보다 많이 안겨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처럼 부조리한 행위가 어떤 경우에 처하든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우리의 인격과 개성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괴물처럼 배은망덕한 존재다! 인간은 기가 막힐 정도로 배은망덕하다. 나는 인간은 두 발로 걸어다니는 배은망덕한 존재가 인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라고 생각할 지경이다. 전세계의 역사에 관한 모든 것을 어떤 식으로든 말할 수 있다. 단지 정형화되지 않는 상상력에 의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무엇이든 토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이것이 합리적이다라고 단언하는 것만큼은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하여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잠자고, 과자 먹고, 계속되는 세계사에 탐닉하게 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못하게 해보라. 그때 인간은 배은망덕한 속성과 악의 때문에 여러분에게 혐오스러운 짓을 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달콤한 과자조차 포기하고 가장 파멸적인 쓰레기, 가장 비경제적이고 무모한 짓을 자발적으로 원하게 된다.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모든 것에 파멸적이고 환상적인 자신의 씨앗을 뿌리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지, 오직 스케줄에 따라 제한된 연주를 해야 하는 자연법칙의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인 자신에게 확인해주기 위해, 환상에 가까운 자신의 꿈과 극히 속물적인 우둔함을 지탱해나가길 바라고 있다. 먹고살 재원이 없으면, 파괴와 혼란을 야기하고 온갖 고통을 궁리해내며 여전히 자기 고집만 부리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온 세상에 저주를 퍼부어댄다. 그런데 저주를 퍼부어댈 줄 아는 존재가 오직 인간뿐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여러분은 혼돈, 암흑, 저주 등 이 모든 것까지 공식에 의거해 계산해낼 수 있다. 이렇게 사전에 계산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불합리한 모든 것을 차단하면 이성이 우위에 설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온다면 인간은 이성을 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러리라고 믿고, 거기에 대한 내 말의 책임을 지겠다. 왜냐하면, 내 생각으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사실상 매 순간 자기는 건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인간은 온몸을 까발리고 야만성을 드러내는 행위까지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P55까지) ”

“ 그것은 논리의 법칙일 뿐 결코 인류의 법칙이 아니다. (P.57) 2X2=4라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의 시작이 아닐까. 적어도 인간이라면 왜 그런지 2X2=4라는 공식을 항상 두려워했으며, 나 역시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 인간이 오직 이러한 수학 공식을 찾는 데 전력을 쏟고, 그러기 위해 대양을 항해하며 목숨을 건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것을 찾아내지 않을까 왠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원하던 공식을 찾아낸다면 더는 찾아야 할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디로 가야 되나? 그와 비슷한 목적을 달성할 때마다 인간에게는 무언가 어색한 것이 감지된다. 인간은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그 목적에 완전히 도달하길 꺼려한다. (P.59) 수정궁에서 고통은 무의미하다. 고통이란 의심이며, 부정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통용되는 수정궁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인간은 파괴와 혼돈이라는 진짜 고통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인간이 의식을 갖게 되는 까닭은 바로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두에서 의식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불행이라고 단언했다. (P.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