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서 쓴 수기를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4번째 읽는 셈입니다. 학부 때 <러시아 문학> 수업에서 이 책을 처음 접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다 읽지도 못했습니다. 빛으로 가득한 지상에 익숙한 제 눈은 어두운 지하에서 쓴 수기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별이 반짝이는 밤 하늘에서 별이 아닌, 그 뒤의 시커먼 하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지하에서 쓴 수기의 첫 문장이 이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흔히들 이 수기를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으로 들어가는 서문이라고 합니다. <죄와 벌>의 첫 문단에 <죄와 벌> 전체의 내용이 요약돼 있듯, 도스토옙스키가 5대 장편에 꽂아넣은 현대 사회의 온갖 병든 인간의 원형이 바로 이 수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 책은 여러 번 읽는 걸 추천합니다. 처음, 빛에 익숙한 눈으로 읽으면 수기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손 가는 대로 마구 휘갈겨 쓴 것처럼 보입니다. 의미가 담긴 글이 아니라 맥락 없는 문장 모음으로 읽힙니다. 지하의 어둠에 비출 때야, 비로소 문장 하나하나를 이어주는 그 무언가가 보입니다. 밖에 있다가 처음 지하에 들어가면 온통 어둠 뿐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이 어둠에 적응하고 지하의 형태가 눈에 들어오듯.
오늘부터 다시 조금씩 읽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께도 추천합니다.
*한국에서 이 책은 여러 제목으로 번역됐습니다. 원어 제목은 '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인데, 영어판 번역이 똑같은 형태로 직역 번역이더군요. 'Notes from Underground'
지하에서 쓴 수기 천천히 읽기
D-29
지하생활자모임지기의 말
지하생활자
나는 병자다...... 나는 못된 인간이다. p.9
『지하에서 쓴 수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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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
“ 나는 못된 인물을 고사하고,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사납거나 착해지거나, 비열하거나 고상해지지도 못했고, 영웅이나 벌레가 되지도 못했다. 지금은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 하루하루 연명하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기 위안으로 스스로를 희롱하고 있을 뿐이다. (p.12) ”
『지하에서 쓴 수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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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
“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것은 병이다. 그건 완전한 병이다. 불행한 19세기의 보통 사람이 지녀야 하는 평균적 의식수준은, 이성이 발달된 인간이 지닌 의식수준의 절반 또는 4분의 1 이하면 충분하다." p.14
"내가 선에 대해서, 그리고 '아름답고 고상한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나는 진흙탕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빨려 들어가, 그 바닥에 더욱더 능숙하게 쩍 달라붙었다." p. 15
"나의 쓰디쓴 양심의 가책은 결국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달콤함으로 환원되어 궁극적으로는 확고한 쾌감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다 쾌감, 바로 쾌감으로 변한 것이다." p. 16
"쾌감이 찾아오는 시기는 굴욕적인 자신의 존재를 잔인할 정도로 의식할 때였고, 막다른 벽에 부딪칠 때였고, 앞이 꽉 막혔는데 빠져나갈 탈출구가 딱히 없을 때였고, 탈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다른 무엇이 되려야 도저히 될 수 없을 때였고, 무엇이든 다른 것이 되어보겠다는 믿음과 여유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나 자신이 딴 사람이 될 의향이 전혀 없을 때였고, 다른 무엇이 되길 바란다 하더라도 변신할 만한 대상이 실질적으로 전혀 없어서 그냥 두 손 놓고 멍하니 있을 때였다." p. 17
"중요한 것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결론이 한결같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무엇이든 첫번째 죄인은 나라는 사실이었다." (p.18) ”
『지하에서 쓴 수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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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
“ 생쥐인간은 (상대의) 최초의 추악한 행위 말고도 이미 여러가지 의문과 의혹같이 혐오스러운 것을 자신의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놓는다. 하나의 문제에다 미해결된 문제들을 무수히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알게 모르게 생쥐의 주변에는 숙명적인 쓰레기 더미가 쌓이게 된다. (...)
굴욕당하고 짓밟히고 조롱당한 우리의 생쥐는 지저분하고 악취 나는 그곳 지하에서 차갑고 독기 서린, 무엇보다 만성화된 오기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그는 앞으로 사십년간 자신이 당한 굴욕을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자세히 기억할 분만 아니라, 기억하는 순간마다 더욱더 부끄러운 세부사례를 덧붙이고 상상력마저 동원해 자신의 염장을 질러 분노에 빠져든다. 생쥐는 자기가 상상해놓은 것을 수치스러워하겠지만, 모든 걸 기억해내고, 모든 걸 곱씹어보고, 얼마든지 가능할 거라는 핑계로 엉뚱한 망상을 생각해내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P.21~22)
자연법칙은 일일이 당신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지 않거든요. 자연법칙은 당신의 희망사항이나 선호유무와 아무 관련이 없거든요. (p.24) ”
『지하에서 쓴 수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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