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조용한데
죽으면 이렇게 조용한데, 죽어버릴까.
목숨이 붙어 있는 그 전날까지
인간들은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탁 죽어버리면
세상이 정말로 너무 조용해지는 것이다.
“아, 이런 암흑의 세계, 너무 좋아.”
삶과 죽음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삶과 죽음이 한순간인데 그 격차가 너무 크네.
온갖 잡동사니 소음의 세계와 완벽한 침묵의 세계라니.
죽음으로 인해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인간들은 일제히 그 입을 다물고 더 이상은
나에게 잔소리를 멈춘다.
들을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도 놀랄 것이다.
“아, 너무 반응이 없는데, 마치 벽 보고 혼자 떠드는 것 같잖아.”
자신도 너무 겸연쩍은 것이다.
그는 자기 생각을 실컷 나에게 주입 중이었는데.
그는 다시 좀 서운했다가 다른 만만한
대상자를 찾아 눈을 번득거린다.
댄스 댄스 댄스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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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소설에서는 그게 무슨 유행인지 대화 내용을 따옴표로 감싸지 않는다. 좀 안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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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를 읽고 든 생각
사람을 알기 전에는 조금이라도 그에 대해 일러두기를
미리 보는 게 좋은 것 같다.
잘못하면 실수하고 그걸 고려 안 하고 자기입장에서만
한 얘기로 다시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이구나.”라고
그가 결론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겐 앞으로 자기 얘기를 안 할 것이고
마주치기조차 꺼릴지도 모른다.
처음이면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그걸 갖고 자기식으로 해석해 자기 관점에서
그를 자기 생각의 틀에 집어넣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처음 하는 이야기는 일러두기 삼아 그냥
가만히 듣고 있는 게 가장 좋은 대화법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런 내가 그의 곁에 있으면 뭔가 편하고
자신이 제자리를 잡은 것 같고, 나와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 이성복은 말한다.
“약한 사람일수록 말을 강하게 한다.”
모든 성숙은 유연과 통한다.
누구나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자기가 마르게 태어났으면 남들도 다 이렇게
마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는 말라서 앉기에 여러 자세를
맘대로 취해 앉을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자세로는
자기는 앉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내게 당연한 게 남은 당연하지 않고,
남에게 당연한 게 나는 당연하지 않다.
“아, 나 같은 사람은 내가 유일하구나.”를 깨닫고
세상은 나와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구나,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자기가 재벌 3세면 운이 좋은 것이고, 찢어지게
가난하고 불우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남과 비교되기
시작해 자신은 이 세상과 아울리지 않게
태어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미용이 그랬다.
미용처럼 대개는 다시 살아도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다.
거의 운명적인 것인데, 이걸 그래도 의미를 두려면
뭔가 자기 삶에서 자기만의 소중한 걸 캐야 하는데,
미용은 그걸 글로 한다.
남들도 자기만의 뭔가 상위 1%가 아니라면
상대적 위화감(Incongruity)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것에 의미를 두는 뭔가를 각자 찾아내는 게
자기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법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에서 미용이 그랬고, 그 글을 재서에게 읽히려고
재서의 대학사 컴퓨터에 글이 담긴 USB를 일부러 꽂아두었다.
미용은 자기의 삶을 글로 표현했고 자기를 이해해주고
자기 얘기를 들어줄 것 같은 사람으로 재서를 선택한 것이다.
재서는, 미용에게 평화를 주고 세상은 교정에 떨어지는 분홍
복사 꽃잎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다.
미용은 자기의 불우한 삶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렇지만 미용은 그 선생에게 찾아가 따지려고도 했다)
자기 삶을 글로 정리했고 그것을 자기가 맘에 두고 있는
재서에게 읽도록 한 것이다.
자기를, 주어진 운명에 그냥 내맡긴 게 아니고, 자기가
그 운명을 주도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글은 삶의 결핍을 보완하면서 그 내적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수단일 수 있다.
미용은 죽지 않고 꼭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깊이 있는 위대한 작품은 또한 그런
굴곡진 삶과 함수 관계다.
골짜기가 깊으면 능선도 하늘로 치솟는다.
글로 승화(Sublimation)해 재서라는 인물에게 읽힘으로써
자기 인생도 글을 통해 업그레이드시키려 한 것이다.
초월(超越) 단계를, 한겨레 신문 한 칼럼에서 읽었는데,
미용은 글을 통해 자아를 실현했고 재서를 통해
자기 삶을 초월(Beyond)한 것이다.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의 자아실현을 넘어 6단계,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초월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걸 위해 미용은 오늘도 내일도 자기 글을
계속 써나갈 게 분명하다.
손정수 문학평론가는 이 소설에 대한 작품론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 안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상처를 밖으로 내보낸 미용의 이야기는 재서를 넘어 독자에게도 흘러 들어와 위안과 격려를 전하는 한편, 소설의 새로운 존재 방식에 대한 사유를 일깨우고 있다.”
* 2024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조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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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국 소설을 직접 읽는 게 낫다. 일본 소설은 번역을 거쳐 그 원본이 좀 왜곡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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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뭐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여자는 뭔가, 그러면서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어머니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이제 와서 궁금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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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기가 한 일, 이룬 일을 하는 후배나 자기가 관심을 갖고 하는 일을 자기가 바라는 바대로 이룬 사람에게만 칭 찬을 한다. 나머진 그냥 겉으로만 하는 듣기 좋은 소리에 불과하다. 진실은 그렇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그러나 또 인간이기에 속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인간적인 예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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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과 그들이 만드는 세상을 다루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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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인간의 욕망까지 학습한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욕망도 학습한다면 지금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까지 똑같이 학습(Learn)할 것이다.
그게 바로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범죄도시 4에서도 말한 것처럼, 가진 자는 더 가지려는
욕망(Desire)이 있어서 인간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단지 자기 것을
지키려 할 뿐,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며
자기 욕망대로 더 가지려 할 것이다.
이런 인간의 바람직하지 않은 욕망을 그대로
인공지능이 학습한다면 그들도 더 가지려고
인간을 공격할 것이다.
인간이 자기들보다 더 많은 걸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에겐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을 더 늘리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욕망까지 학습하라고 명령받았다.
그들도 인간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 명분 쌓기조차 학습 받는다)
더 가지려는 욕망의 작용으로 인간과의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적을 스스로 만들며 멸망을 자초한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 욕망은 끝이 도대체 어딜까?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범죄도시 4에서, 단순한 주인공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어둡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더 가지려는 인간의 욕망을 빌런은
정확히 지적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가벼운 농담엔
관객이 웃지만 빌런의 지적엔 자기 치부이기 때문에
웃음이 나올 수 없다.
더 가지려는데 있어, 이 둘 사이에 차이점도 있다.
빌런을 두둔하는 게 아니지만, 그들은 아예 드러내놓고
더 가지려고 해 다행히 일망타진되었지만 안 보이게
더 가지려는, 진짜로 더 많이 가진 자들은
은밀하게 우리 것을 빼앗아 더 가진다.
전자는 그게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
척결되었지만 후자는 우리가 빼앗겼는지도 모르게 야금야금
빼앗아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들은 척결은커녕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긴다.
인간은 뭔가 감정이나 생각이 있어 자기만의 옳은
생각을 학습해 머리에 축적한다.
주변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든다.
그러면 그게 그에겐 진리가 된다.
다른 인간도 자기처럼 자기 진리를 따라야 하고 안 따르면
따르게 만들려고 한다.
따르게 만드는 것도 그에겐 진리(Justice)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고 자란 환경 때문에
그 진리가-겨우 편견에 불과하지만-다른 인간들과
당연히 같지 않다.
다른 인간들은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가지고 상대를 개조하려 한다.
상대는 물론 따르지 않는다.
그도 그가 믿는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이런 자기 편견을 가진 인간들의
환경에서 인간과 똑같이 자라 그 진리, 즉 편견을
똑같이 학습한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 사는 인간들이
자기 진리를 안 따르니까 따르게 하려고 지금 인간끼리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인공지능도 학습된 진리, 편견을 가지고
다른 편견을 가진 인간들과 인공지능을 공격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욕망을 학습한다면 그 욕망대로
인간을 공격할 것이다.
이게 인간의 욕망이었고, 그는 그대로 그걸 학습했으니까.
인간의 더 가지려는 욕망과
다른 편견과는 더불어 살지 못하는 욕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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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강박
둘이 있는데 상당히 어색해 자꾸 말을 붙이려 하고
배려가 상당히 부족한 질문을 함부로 던지고
그래도 뭔가 부족하니까 남을 공격하는 말을
일부러 마구 꺼낸다.
자기 생각으로 남의 생각과 행동, 현 모습을
멋대로 평가해 난도질한다.
이때 그는 상대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다.
그저 상대가 자기와 안 맞다, 고 생각해 그러는 것뿐이다.
얻어맞을 게 두려워 미리 선수를
치는 방어기제의 작용이다.
같이 있는 게 자연스럽지 않아
자기 역할을 구현하기 위한, 수행하기 위한 것을
굳이 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다.
그보다 그냥 아무 대화가 없으나 그 모습이 자연스럽고
뭔가 평화로운 모습이 있는데 이들은
둘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시간을 즐길 뿐이다.
자기 역할을 굳이 할 필요가 없어 그렇다.
이런 모습은 친한 친구 사이거나 오래된 부부에게서
많이 보인다.
그 관계가 생경하고 자연스럽지 않으면 각자
자기 역할을 과시하며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안달이다.
그 광경을 멀리서 보고 있으면 주변에 감도는 공기가 사납고
시퍼런 날이 되어 남의 눈을 찌르려 한다.
이런 상태로 길을 걷다간,
“혹, 도를 아십니까?”라며 개량 한복을
입은 사람이 다가올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굳이 자기 역할을
구현하려고 해서 그렇다.
역할 강박이다.
자기 역할 안 해도 좋으니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
자기 역할을 하겠다고 대드는 것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자존감이 낮아
상대가 자기를 무시하시나 않을까, 하며
자신이 이렇게 대단한 인간이란 걸
강한 어조로 발설한 천박함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를 굳이 선전하려는 억지스러운 발현에 불과하다.
그렇게 되면, 의도와는 반대로 자기에 대한
상대의 이미지는 추락한다.
오래된 부부 모습이 좋은가.
아니면, 불륜으로 만나 서로에게 뭔가 자꾸 보여주겠다며
눈에 거슬리는 오버하는 행동이 좋은가.
어느 게 더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나?
자기 역할을 굳이 구현하겠다며 남에게 자꾸
자기를 봐달라고 하지 말자.
불쌍하고 불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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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청률만 생각하지 마라
여자들도 나쁜 여자가 많을 텐데
나쁜 인간들은 다 남자로 표현되는 게
요즘 한국 드라마 다.
아마도 여자들이 많이 시청하고
그들의 눈 밖에 나면 시청률을
담보할 수 없어 그럴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같은 인간인데 전부
나쁜 인간들은 남자들이 거의 다다.
여자를 나쁘게 표현하면 바로 반응이 오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남자는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지만.
하여간 요즘 한국에선 남자들이 동네북이다.
처음엔 여자도 나쁘게 나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오해이거나 결국 여자들은 좋은 사람으로 바뀐다.
남자들은 그 반대다.
처음엔 좋은 사람으로 나오지만 나중엔 그 본색을 드러내거나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쁘고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
너무 뻔한 결말인 것 같아 방송국의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인다.
리얼리티에서 왜곡이 심하다.
돈과 광고 수주, 시청률 경쟁만 생각해서
이렇게 시청자 의도만 따라가면 한국 드라마도
반드시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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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석가가 예수보다 더 좋다. 나는 노력하면 석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나 보고 자기 종이라고 한다. 요즘, 아니 지금까지 그 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속도 좁다. 자기 외엔 모두 배척한다. 그러나 석가는 누구나 다 아우르는 포용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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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엔 어리고 좀 이상하고 신비한 소녀가 나온다. 그녀는 반드시 주인공에게 호기심이 동해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게 소년은 반드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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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특히 여자자 뭔가를 골똘히 응시하고, 아니면 멍하니 의미 없이 보고 장시간 있을 때는 그녀에게 좋은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뭔가 좋지 않는 게 있었거나 있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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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글에 보면 따옴표에 마침표를 반드시 찍는 경우도 있고 안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은 책 내용 내내 지켜진다. 그리고 따옴표 중에 형식적으로 하는 대화는 따옴표를 다른 문장과 함께 그냥 쓴다. 그러나 중요한 따옴표가 있는 대화는 줄바꾸기를 하고 강조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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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나 문학동네 글꼴은 비슷한 것 같다. 이 출판사들의 책을 읽어 익숙해지고 문학사상 등 다른 출판사의 글을 읽으면 그 글꼴 때문에 안 읽을까, 할 때도 있는데 읽다보면 그 글꼴도 익숙해져서 계속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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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아나운서들이 하는 말은 가능하면 순수 우리말을 쓰려고 하는 것 같다. 86을 말할 때 아나운서들은 여든여섯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그냥 팔십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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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드는 이성이 등장인물로 등장하면 그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호기심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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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여자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호기심이 있다. 이것으로 글을 쓰는 것이지도 모른다. 하긴 모든 남자가 여자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글을 쓰는 인간이라면 그것을 갖고, 아니 그것으로 계속 글을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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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요가 좋다
나는 휴가를 잡아도 넉넉하게 잡는다.
이왕 쉴 거면 느긋하게 쉬고 싶은 것이다.
여행을 이틀 할 것 같으면 나흘 정도로 잡는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아무 목적도 없이
그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마치 홍상수 감독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우연히 누굴 만나면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고
그 둘은 술을 마신다. 대화도 중요하거나 심각한 건 없고
그냥 살아가는 대화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한가하고 약간 권태롭게 슬슬 뭔가 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자꾸 여행하고 싶은 곳은 세상에서 가장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이 모인 남에게 간섭 안 하고,
누가 되는 것을 꺼리는 일본으로 가는 것이고,
한국이라면 관광지도 아닌 경북 청송이나 봉화
같은 곳을 한적하게 마치 산책하듯이 거니는 것이다.
숙소도 숙박객이 별로 없고 북적거림이 없는
고요한 곳에서 쉬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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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이지 않은 인간이 정권을 잡으면 자기 이익대로 국가기관을 맘대로 주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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