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글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전엔 여행작가들이 자기 자랑을 하며 사람들이
안 가는 데를 여행하고 와서 글로 자랑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여행하고 별 희한한 곳을
다 갔다 온다.
그래 자랑의 희소가치가 사라졌다.
개나 소나 다 가는 해외여행이다.
지금 한국은 여행 붐이고 코로나로 인한 보복 여행이다.
안 갔다 오면 자기만 헛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빚을 내고라고 해외여행을 나도 나도 간다.
한 마디로 그냥 유행에 뒤처져 대화에서
자기만 초라해지기 싫은 것이다.
진짜 여행하고 싶어 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냥 갔다 왔다고 자랑하려는 게 많다.
그러나 여행이 아닌 순수한 글을 쓰는 작가는
그 희소가치가 엄청나다.
그 누구도 글을 안 읽어 글이 형편없다.
글은 어느 정도 글을 읽고 또 지금도 읽으면서 써야
자기만의 생각이 만들어지는데 그게 안 되니
아무나 글을 쓰는 세상이라도 아무나 그런 글이
안 나오는 것이다.
글을 안 읽고 그냥 나이만 먹어 생기는 가치관이나
개똥철학은 어디서나 흔히 듣는 생각의 조각들에 불과하다.
자기 게 아니라 남의 것을 여기저기서 엿듣고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
생각이 이러니 좋은 글이 나올 수가 없다.
댄스 댄스 댄스
D-29
Bookmania
Bookmania
작가는 그저 쓰는 게 제일 잘하는 거다
작가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게 제일이다.
돌아다니면 안 된다.
자기 생각이 안 만들어진다.
상상력이 고갈된다.
주객이 전도된다.
그저 작가는 책상에 앉아 읽고 생각하고 써야
진짜 작가이고 그 사람은 계속 쓸 수 있다.
그게 아니면 그는 이제 글이 쓰기 싫어진 것이다.
딴생각을 하는 것이다.
젯밥에 눈이 먼 것이다.
자기 정체성(Identity)이 이동한 것이다.
그럼 이제 작가라고 하면 안 되고
자기가 지금 하고 싶은 것, 하고 있는 것을 하는
그런 사람으로 소개해야 한다.
그럴듯해 계속 작가라고 하면
다른 작가들을 욕 먹이는 거다.
글의 질이 떨어져 그렇다.
이젠 당연히 에너지가 여기저기 분산되어
글에만 매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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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자들은 요즘 술은 잘 먹는데 술잔을 아무 앞에서나 돌려 먹는다. 왜 그러나? 그거 어른 앞에서만 하는 거 아닌가. 술은 먹지만 아직은 좋게 보이려는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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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사물을 여러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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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쓰려면 갖춰야 할 것
꾸며서 어렵게 그럴듯하게 쓰려고 하면 안 된다.
남처럼 멋있게 쓰려고 덤비면 금방 질린다.
그건 결국 자기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 자기 게 아닌 건 도중에 힘이 빠진다.
신이 나서 써야 글이 앞으로 쭉쭉 나간다.
오로지 자기 것을 써야 한다.
자기를 드러내는 글이어야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우선이면 금방 지친다.
뭔가 결국 논리가 엉키게 된다.
그냥 지금 자기 수준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된다.
자기 글 수준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본래 자기 문체(Literary Style)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글이 향상되게 된다.
억지로 꾸미지 말고 지금의 느낌을 그대로
종이와 화면에 옮겨라.
지금의 그 생각과 느낌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글은 엉망일지 몰라도
적어도 결국 해냈다는 생각은 들게 된다.
내성적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면 도움이 된다.
어차피 글은 혼자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체험한답시고 자기 성격에도 안 맞는 활동을 하면
에너지가 분산되고 방전되어 글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다.
체험은 글에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해도 절대 늦지 않다.
특히 글쟁이 기질이 있는 인간은 이걸 꼭 고수해야 한다.
자기 성격대로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서 쓰면 된다.
글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모든 걸 글 쓰는데 수렴시켜야 한다.
자기 글이 블랙홀이 되어 자기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야 한다.
자기 생각과 행위의 중심, 결국 향하는 곳은
바로 집필(Author)이어야 한다.
책을 사랑하고 그래서 자꾸 읽고 생각하고 쓰면
글을 꾸준히 멈추지 않고 쓸 수 있다.
책에 기우는 정성을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한다.
열 일 다 제쳐두고 글을 중심에 둬야 한다.
우선 글을 쓰고 읽고 가만히 멍때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책을 그 무엇보다 사랑해야 한다.
텍스트를 맹신하고 활자 중독에 빠져야 한다.
급기야는 책의 글자들을 쓰다듬고 그 글을 쓴 저자의
마음속으로 침윤해 거기서 나는 책의 내음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지경까지 이르러야 한다.
책이 종교가 되어 믿음을 갖고 자기를 전부 거기에 의탁하고
구원받은 것을, 남을 위해 다시
초월(Transcendent) 재생산해야 한다.
결국 하다가 책이 너무 좋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존재이어야 한다.
책은 내 운명!
나는 책에 대한 고마움으로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매일, 절을 세 번씩 한다.
이게 내 운명이다, 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실 또 다른 곳으로 샜다가 결국 글로 돌아오는
자신을 몇 번이나 목격했기 때문이다.
글에 대한 재능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렇지만 이게 안 되면 안 되고 그냥 글이 좋아 못 쓰지만
자기에 대한 만족과 그것으로 인한 내부의 고통을 쏟아낸
것에 대한 후련함 같은 게 작용해 멈추지 못한다.
성숙된 작가는 너무 글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
비슷한 걸 하지만 그도 실은 마치 운명처럼 글을 받아들여
그 자리까지 온 거지만 생활에서 거의 한 게 없어 힘들어
후배들에게 그런 소릴 하는 것이다.
자기나 후배도 그게 운명임을 알지만 그래도 걱정되고
아끼는 마음에서 자기처럼 삶의 고달픔에
노출될까 봐 걱정되어 하는 소리다.
글에 대해 열악한 우리나라 환경도 한몫하고 있다.
만약 그 성숙된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그렇게 글의
환경이 열악한 것도 아니고, 작가로서 성공했고 작가를
알아주는 분위기라면 그런 소리까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척박한 독서 환경 탓에 그 후배가 자기처럼 힘들게
살 것 같으니까 그런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먼저 겪은 자로서 그의 앞날을 축복하면서도 걱정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길이지만 이런 건 조심하라고
미리 귀띔하는 것이다.
그래도 마치 운명(Destiny)처럼 받아들이고 거기에 매진해야
자기도 거기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뭔가
책으로 자기만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임을 그런 말을 하는 선배 작가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자기에게서 만들어진 생각이 아니어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걸 갖고 글을 쓴다.
그럼, 그게 한계라서 슬럼프가 찾아오면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 상태엔 자기 생각이랄 수도 없지만,
생각이 고갈되어 나오는 게 더는 없기 때문이다.
밑천이 바닥난 것이다.
그러다가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이 서로 섞이고 현실과 이상과
내 생각과 책의 내용이 혼합되어 드디어
자기만의 생각이 만들어지고 영감(Muse)이 떠오르면서
드디어 자기 생각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멈추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임계점(Critical Point)을 넘어선 것이다.
마치 샘물처럼 생각이 마구 솟아나는 것이다.
이제 순수한 자기 생각들만 적어나가고
(남의 생각도 자기화된다.)
컴퓨터 화면과 종이에 글이 넘친다.
글자의 용언 어미나 체언 조사조차 자기 것이 된다.
생각을 담을 그릇이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
“아니, 표절을 왜 하지?”
그냥 자기 생각을 이렇게 마구 쏟아내기도 벅찬데.
글로 좀 유명해지니까 초심을 잃고 글보단 다른 활동을
많이 하게 되고 또 독자와 주변에서 요구하는 것이
많아져 표절(Plagiarism)할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뭔가 그에 걸맞는 걸 계속 쏟아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글에 몰입할 여유가 안 되어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한마디로 글 쓸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글을 계속 쓰려면 다른 것보다 글에 우선을 둬야지
딴 곳에, 글보다 눈이 먼저 돌아가게 되면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책을 계속 읽어야 계속 쓸 수 있다.
들어가는 게 많아 어디에 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굴 통해 대화로 배출할 수도 있고 혼자 조용히 글로
배출할 수도 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글에 그게, 다 표가 난다고 한다.
뭔가 깊이가 있는 글 같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물을 보는 다양하고(Diverse) 독특한 관점을 갖는다고 한다.
글을 계속 읽으면 계속 투입되니까 그 배출을 위해서라도
글을 멈추기 힘든 것이다.
글의 방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냥 마구잡이로 닥치는 대로 쓸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결국 이 글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목표나 이상(Ideal)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 방향이 없으면 배가 산으로 가고, 결국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에 발을 들여놓고 있지만 자기가
추구하는, 현실에선 잘 변하지 않고. 견지하는 방향이
있어야 배가 난파되어도 다시 수습해 그 목표했던 곳으로
갈 수 있지 않겠나.
그래야 죽을 고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이처럼 현실에 살면서도 감히 잘 훼손되지 않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그런 이상향을 향해 그 글이
나아가야 글을 계속 멈추지 않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현실에서 그 이상이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글에선 그걸 이룰 수도 있다.
아마도 현실에서 꼭 이루고 싶은 이상이 있는데
잘 안 되어 글로나마 그걸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아마도 이래서 글을 쓰는 것인지도, 그래 멈추지 않고
쓸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자기만의 이상을
글에서나마 이루기 위해.
그게 사막에선 나침반, 망망대해에선 등대 역할을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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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더 오래 같이 산 여자를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자기가 더 살며 받은 게 많아 그런 것이다. 여자가 더 사회성이 좋아 결국 그렇게 된 것이다. 냉정히 말하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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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방송 되고 있는 드라마나 예능에서 여자가 섹시하면 중년 남자는 아 저 여 자 섹시하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는 중년 남자가 버젓이 있어도 맘대로 아, 섹시하다, 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느낀 성적인 말을 중년 남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성희롱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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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애를 잘 안 났는다. 너무 애들 키우기가 겁나기 때문이다. 그래 낳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낳아 거기서 산다. 우리나라는 애 안 낳는 사람만 살고 애를 낳는 사람은 이민을 간다. 한국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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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
상대를 더 알려고 한다.
좋으니까 더 알려고 하는 것이다.
아니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그렇게 된다.
그에 대한 모든 게 궁금하다.
그에 대한 거라면,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결국 그에 대한 모든 걸 알게 되어
그에 대해서 빠삭하게 된다.
그를 따라 하게 된다.
그는 나를 들뜨게 하면서 긴장이 섞인 기분 좋음을 선사한다.
그가 뭔가 신기하고 베일에 싸여 신비롭기 때문이다.
(아직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이렇게 따라 하는 건 무의식적으로 하는 거라
자기는 그걸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상대는 눈치챌 수 있다.
그만의 특징과 개성을 떠올리고 미소 짓는다.
가만히 혼자 멍때리고 있을 때,
그의 모습과 말투, 특유의 버릇이 내 머리에서 재연된다.
그 순간, 나는 미소를 짓게 되고 행복이 나를 감싼다.
그는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
그의 기분에 내가 좌우되고 그와 사이가 멀어지면
주변 사람에게도 안 좋게 대한다. 이제 사이가 좁아져
그와 자주 만나면 상관없는 남에게도 내가 잘하게 되어
남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과한 내 서비스를 받는다.
좋아함을 당하는 당사자는
그가 특별히 비호감이 아닌 한, 가까이해 보는 게 좋다.
그는 내가 좋으니까 툭하면 나를 칭찬할 거고
(나의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으므로
디테일하게 꼭 집어서 칭찬한다.
칭찬은 남에게서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거나
태어나 처음 듣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나 때문에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나의 자존감은 높아지고 나에게 도움만 줄 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나를 기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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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을 믿을 수 없다. 그냥 보여주기식으로 시끄러움을 잠재우고 너희는 떠들어라 나는 내 길을 간다고만 고수하고 있다. 전혀 믿음이 안 간다. 이런 인간이 집권할 때 전쟁이라도 나면 나만 개죽음당하는 거다. 이런 인간을 누가 도우려 하겠나. 아무 기대도 안 한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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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유명한 작가의 글에서 더 많은 걸 얻는다
차라리 안 유명하고 이름이 안 알려져야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내키는 대로 써도 제재를 덜 받는다.
남들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유명하면 알아서 자기 검열과 사회적 검열을 해서
그저 무난한 글이 되어 개성이 없어
어디서나 흔히 보는 글이 되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차라리 남들이 잘 모르는 작가라야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 더 개성적이고 독특하고
사회적 검열을 안 거쳐 위험하지만 뭔가 색다르고
흔한 글이 아닌 돈 값하는 글이 될 수 있다.
쓰는 사람도 맘대로 써서 속이라도 시원하고
뭔가 성취감이 들고 독자도
새로운 생각을 접하는 계기가 된다.
글엔 유명해서 좋을 게 없는 것 같다.
그래 겁이 나서 픽션만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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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타의 에세이를 못 읽는 것은 대부분은 뻔한 글만 있어 실망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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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소소하고 일상을 즐거는 것 같다.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으면 나라일에 관심이 적은 것 같다. 개인의 영향력이 거의 없어 그런 것 같다. 중국인이 자기만 알고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건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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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가는 한가로이, 슬슬, 느긋하게, 조용히, 서서히, 여유롭게, 돈 걱정 없이, 예금은 아직 꽤 남아 있다. 어슬렁어슬렁, 방에서 뒹굴며, 풀밭에서 뒹굴며, 긴장 풀기, 경비로 처리, 몸의 힘을 빼기, 적막하다 이런 말들을 좋아하고 그래 잘 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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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이름 같은 게 생각이 안 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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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보면 북반부가 넘치가 더 크고 대개는 더 잘 산다. 남반부는 덩치가 작고 가난한 나라가 많다. 특히 동남아나 남미, 아프리카 나라만 들어도 우선 가난하고 후진국이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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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걸 좋은 거로 대개는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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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동물적인 것을 맘대로 생각하고 또 그걸 거리낌없이 표현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의 동물적인 허영이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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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 조직의 가치가 옳은 것만은 아니다
군이나 검찰, 의사 같은 꽉 막히고 닫힌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 거기서
흐르는 게 최선이고 마치 진리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걸 그대로 갖고 사회에 나가면 멘붕이 올 수도 있다.
사회는 그 조직에 흐르는 진리와는 다른 원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 조직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을
사회는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의 성숙화에 걸림돌만 된다.
그걸 모르고 마치 한평생 그 조직에서만 있을 것처럼,
즉 미래가 아닌 현재에만 충실했다가는 나중에 공중에
붕 떠 아무것도 아닌 나를 발견하고 극심한 혼란을
빠질 수도 있다.
그 조직 속에서만 통용되는 것만 갖고 마치
그게 전부인 양 살면 엄청난 부작용이
자기를 기다릴 수 있다.
한 가지만 아는 인간이 더 큰 조직의 지도자라도 되면
독선과 아집(Stubborn)으로 조직 전체가
헤어나기 어려운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
이번에 훈련소에서 또 사고가 났는데,
이게 군에서 사고가 잦은 이유다.
거기에 흐르는 정서와 질서가 마치 가장 중요하고
가장 따라야 할 가치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솔직히 군은 명분은 자기를 적으로부터 지키는 거라고
하지만 인간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
거기서 더 나은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 합리화해도
전쟁에서 사람을 더 많이, 효과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밥만 먹으면 연습하고 그걸 연구하는 곳이다.
까놓고 말해,
인간 세상에서 하루빨리 사라질수록 좋은 조직이다.
유곽이나 집창촌처럼 필요악(Necessary Evil)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도 인간 세상의 모순이 존재한다.
나는 서슬 퍼렇던 전두환 집권 시, 군에 가서
각을 빳빳이 세운 빨간 모자를 쓴 시커먼
군 간부에게 “너희는 자기를 사람으로 여겨선 안 된다.
그냥 국가의 병력 자원에 불과하다.
여기서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눈도 깜박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기 어린 충혈된 눈으로 하는 말을 듣고
‘아, 여기서 살아나가야 한다.’ 하고 속으로 다짐하며
혹독한 훈련에 임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회와 단절되고 폐쇄된 그 속의 사람들이,
뭔가 모두 악에 받쳐 있고 조교나 중대장 간의 기 싸움에서
애꿎은 훈련병만 희생(Sacrifice)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그런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이번 훈련병의 사망도 자기들이 지키려는 것에서
서로 밀리지 않으려다 한 사병이 희생되고 그 부모에게도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그게 대관절 뭐라고 사람 목숨과 바꾸나.
그러니 그곳에서 내세우는 가치가, 외부나 일상생활에서도
똑같이 통용되는 거라고 할 수 있겠나?
그 조직에만 묻혀 그게 전부인 양, 거기에만 얽매여 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시야(Sight)가 좁아 그것만 보며 살기 때문이다.
겉으로 내세우는 거 말고,
그 조직이 실질적으로 왜 세워졌는지 그걸 보며
조직 생활을 해야 한다.
자기와 전혀 안 맞고,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으면 나와야 한다.
거기서의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나와서도
그것에 모든 걸 적용하려고 하니 여기저기서
사달과 말썽 나는 것이다.
사회와 세상은 그 가치의 원리로 돌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하철은 시민을 안전하고 신속히 이동시켜주는
서비스라서 안심은 되지만 말이다.
지하철이 내세우는 모토가 부정적인 게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전엔 박정희나 전두환이 거기 출신이라 해서
지방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좀 하는 애들은 너도나도
서울대로 갈까, 육사로 갈까, 고민했는데-나는 공부를 못해
그럴 리는 없지만(그러나 모의고사에서 고문(古文)을 포함해
국어는 전교에서 항상 1등을 놓친 적이 없다)-육사를
갔더라면 지금 정체성의 혼란(Perplexity)으로
얼마나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있을까?
Bookmania
내가 시골로 가서 글을 쓰려는 이유
시골은 공기가 깨끗하고 주변이 조용(Still)하다.
글쓰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
독서, 집필, 사색에서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곳이 최고다.
시골은 혼자 외로이 남과 만나기 쉽지 않고
남들과 괜한 일로 엮일 일이 잘 없다.
글은 대부분 혼자 하는 작업이라 이런 조건이면 금상첨화다.
시골은 어둠을 간직하고 밤이 밤답게(Dark)
눈부시지 않아 잠을 제대로 잘 잘 수 있다.
편안한 숙면은 글 집중도에서 최고의 역할을 한다.
119에 실려 가 내 목숨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
시골에서 때가 되면 죽고 싶다.
이건 곧 자연의 순리에 순응(Conformation)하는 것이다.
자연의 순리가 아닌-인술(仁術)이 아닌-돈만 들어간
의료 서비스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생명이 고무줄처럼 늘어지면 몸이나 정신 상태,
삶의 질이 떨어져 글도 그렇게 된다.
이렇게 되기 전에 글도 생명도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
글에서 내가 추구하는 바도, 인간은 모두 자연의 일부이므로
때가 되면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글에서 쓴 것을 실천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한 걸 하다 죽었으면 더 좋겠다.
아스팔트가 아닌 시골 황톳길을 느긋하게 맨발로 걷고 싶다.
계절의 변화를 바로 알고 산과 들, 시냇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풀꽃 내음,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자연을 품은 바람을 맞이하고 싶다.
시골의 이런 풍경(Landscape)에서 그에 비례해
좋은 글도 나온다고 본다.
비정기적으로 시골 도서관에서 독서 모임을 갖고 싶다.
진짜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같은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을 심층 토론하고 싶다.
그러다가 기분이 내키면 뒤풀이로 술도 한잔하면서
색다른 견해(Perspective)들을 각자에게서 듣고 싶다.
술의 세계와 맨정신의 세계는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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