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의 어머니는 1971년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여 자살한다.
소망 없는 불행
D-29
정성언모임지기의 말
정성언
나는 소개란에 쓸 문장을 고르다 페터 한트케로 시작하는 문장을 지우고 주어를 그의 어머니로 바꿨다.
자살이라는 사건에 있어 주어가 행위자 본인이 아니면 누가 되어야 하냐는 물음이 들어서였다.
따지고보면 '소망 없는 불행'은 한트케의 어머니가 아니라 한트케의 관점에서 확인된 그의 어머니를 이야기하지만, 나는 문장과 현실의 간극을 줄이려는 오래된 버릇을 꺼낸다.
한트케는 문학이란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언어로 서술된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정성언
케른텐에서 발행되는 신문 《폭스차이퉁》 일요일 자 부고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토요일 밤 A면 (G읍)의 51세 가정주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
『소망 없는 불행』 p.9,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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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언
“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지금 막 체험한 것을 이해시킬 수도 전달할 수도 없다는 감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래야만 그 체험에서 느낀 끔찍함이 의미 있고 실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소망 없는 불행』 p. 10,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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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언
어머니의 죽음 이후 바르트는 일기를 쓴다.
'10.31.
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문장을 통해 얼개를 맞추어 문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무엇은 더 나아지나 더 나빠지나. ('무엇'이라는 자리에 정말 무얼 넣어야 할까? 대상, 현상, 실재? 오늘은 확실하게 '한트케와 바르트 각각의 어머니'를 그 자리에 놓으면 되겠지만 그 다음은?)
쉽게 생각을 멈추고 싶다면 문학은 문학만을 위한다는 말만 하면 되겠지만, 문학이 읽히는 이유가 그게 전부일까
정성언
한트케 역시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정성언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어느 대학 연합 독서토론 동아리에 가져갔다. 그리고 방금 기억난 꿈을 이야기라도 하듯이 페터 한트케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말했다.
정성언
“ 만약 <이야기는 ...... 로 시작되었다> 라고 서술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것이 꾸민 것처럼 보일 것이며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사사로운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당히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낼 이야기를 전하게 될 것이다. ”
『소망 없는 불행』 p.1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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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언
이야기는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과 똑같은 곳에서 50여 년 전에 태어나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그 지역에 쓸 만한 땅은 교회나 귀족 지주의 소유였다.
『소망 없는 불행』 p.1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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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언
한트케가 어머니의 역사를 (개인의 역사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이야기하는 내용을 나 자신의 언어로 요약하고 싶지만 내 시도는 계속 나의 어머니를 이야기하게 되는 결과로 대체된다.
정성언
개인의 역사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한트케는 어머니의 배경을 이야기하는 몇 페이지 동안 어머니와 그 이전 세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설명한다.
농노, 머슴, 소유할 수 있게 된 토지, 1920년대의 대공황, 저축, 세계 대전, 그리고 한트케의 어머니는 여자로 태어난다. 한트케의 어머니는 이러한 사회적 조건 아래 놓였다.
(애도일기 14p
- 당신은 분명 여자의 몸이 어떤 건지 알 수 없으시겠지요!
- 나는 병들어서 죽어가는 내 어머니의 육체를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역사라는 말을 생각하면 한 사람이 역사 위에 서있는 모습이 소유격 아래 연상된다.
하지만 역사는 개인이 감당하기에 무거운 단어다.
정성언
나는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소망 없는 불행과 함께 읽는 중이다. 아마 틈틈이 인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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