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보르헤스 읽기] 『알렙』 후반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 이 단편 전체를 현실의 파편들을 주워서 개연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던레번과 언윈 각각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 단편이야말로 보르헤스가 추구하는 '직선 속에서 무한한 원주의 일부를 보는 것', 시적인 상상력과 수학적인 엄밀함의 조합이 아닐까 합니다. 현실에서 일견 허무맹랑하게 들릴 법한 조상의 신화를 흡수하는 시인 던레번, 그리고 그런 조상 신화 속에서 더 개연있는 탐정소설의 구조를 보는 수학자 언윈은 우연히 친구가 된 것이 아닐 겁니다. 표면적으로 던레번이 언윈에게 들려준 신화를 언윈이 수정해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당초 던레번이 신화적 사실을 현실로 끌어왔다는 점 자체를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현실의 우리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던레번과 언윈, 전자의 이야기와 후자의 이야기의 차이를 살펴볼 수는 있겠습니다. 신화적 이야기는 크든 작든 교훈적인 구조를 띠는 것 같습니다. 반면 소설은 교훈성 너머에서 어떤 인간성의 일면을 증거합니다. 만일 언윈이 수정한 후자의 이야기가 전자의 그것보다 더 개연 있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언윈의 이야기가 아븐 하캄 알 보크하리의 내면을 설득하는 데 더 집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개연성'은 무엇인지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개연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단정할 수 없지만 대개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태'라고 나옵니다. 정의 자체가 두루뭉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개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태'를 받아들이는 정도 역시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과거에는 신화였던 이야기의 구조가 오늘날에는 소설인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은 옳은 인생을 살기보다 (자기가 판단하기에) 좋아 보이는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신화가 주는 비교적 경직된 교훈성에서 떨어져 나와, 소설에 등장하는 작고 소소하고 때론 추악하기까지 한 인간에 매혹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인 던레번의 이야기에서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는 자기 탐욕과 두려움에 눈이 멀어 신하를 죽이고 그런 신하의 유령에게 복수당한다는 일견 교훈적인 결말을 맞습니다. 그러나 수학자 언윈은 그 이야기에서 신하였던 사이드의 내면과 행적을 봅니다. 그리고 '탐욕'이 아닌 왕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나아가 그러한 감정을 실행하기 위한 현실의 정교한 '밀실살인' 장치를 봅니다. 던레번에게는 신화적 계시였던 것이, 언윈에 이르러서는 소설적 암시가 되고 있습니다. 탐욕이 아닌 증오와 공포, 왕과 신하라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왕이자 신하가 되는 혼재된 정체성의 문제,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나는 내 노예에게 사막의 정면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와 사이드는 지쳐 잠들고 말았지요. 그날 밤 나는 뱀 떼에게 사로잡히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잠에서 깨었어요. 내 옆에서는 새벽의 햇살을 받으며 사이드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내 피부에 거미줄이 스쳤는데, 그것이 내게 그런 꿈을 꾸게 했던 겁니다.
알레프 16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탕진한 건 아니야." 언윈이 말했다. "이교도의 땅에 벽돌로 지은 커다란 원형의 함정을 세우는 데 투자된 거야. 왕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기 위해서 말이야. 만일 네 추측이 옳다면, 사이드는 탐욕 때문이 아니라 증오와 공포에서 그 일을 했던 거야. 그는 보물을 훔쳤지만, 나중에 보물이 자기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중요한 것은 이븐 하캄이 죽는 것이었어. 그는 이븐 하캄으로 위장했고, 이븐 하캄을 죽였고, 마침내 이븐 하캄이 되었어." "그래, 맞아." 던레번이 동의했다. "그는 죽어서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되기 전에, 언젠가 자신이 왕이었거나 왕인 것처럼 위장했던 사실을 기억할 떠돌이였어."
알레프 17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미스터리들은 단순해야만 해. 포의 잃어버린 편지를 떠올려 봐. 아니면 장윌의 닫힌 방에 대해 생각해 봐.” “아니면 복잡해야겠지.” 던레번이 대답했다. “우주를 떠올려 봐.”
알레프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저도 시인과 수학자 간의 티키타카(이렇게 부르면 너무 가벼워지려나)가 인상깊었습니다. 마지막에 수학자 언윈이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면서 (오히려) 미노타우르스를 가져오는 부분에서 보르헤스의 교묘함에 무릎을 탁!
나는 무언가를 깨우치고서 그 생각을 수정했어. 그리고 너의 황당한 ‘사실’들을 잊고 보다 사리에 맞는 것을 생각하기로 선택했어.” “말하자면 집합 이론이나 차원의 공간 같은 것이군.” 던레번이 말했다. “아니야.” 언윈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크레타 섬의 미로를 생각했어.
알레프 자기 미로에서 죽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 매우 짧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에 등장하는 "이상한 책들을 많이 읽은" 교구 목사가 설교대에서 말했다는, "미로를 세웠다는 이유로 하느님이 벌을 내린 어느 왕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 이븐 하캄은 교구 목사를 찾아와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전에 던레번이 말한 '미스터리가 신의 소관이라면 그것을 푸는 것은 인간의 손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일견 뒷받침하는 일화로 읽히기도 합니다. 미로는 실재하는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미로는 미스테리이자 신의 의뭉스러움 자체입니다. 신이 미스테리한 성격을 띤다기보다는, 신과 신성이 미스테리 자체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생각에 비추어 보면,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반신성적인 행위일 수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왕와 아랍의 왕의 태도는 대비됩니다. 바빌로니아의 왕이 신성을 흉내내어 미로를 인위적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훗날 화를 입었다면, 아랍의 왕은 사막이 다름 아닌 상징으로서 미로임을 알고서 바빌로니아의 왕을 사막에 내버려둠으로써 진정한 미로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이처럼 아랍의 왕과 바빌로니아의 왕이, 사막으로서 미로와 건축물로서 미로가, 상징과 구조물이, 신성과 반신성이, 신위와 인위가, 삶과 죽음이, 끝으로 '풂'과 '가둠'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를 묶었던 끈을 풀어 주었고, 그를 사막 한가운데 남겨 두었다. 그곳에서 바빌로니아의 왕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었다. 영원히 죽지 않으실 '그분'과 영광이 함께하기를.
알레프 17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바빌로니아에서 당신은 내게 수많은 계단과 문과 벽으로 만들어진 청동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하려고 했소. 이제 전지전능하신 알라신께서 당신에게 내 미로를 보여 주도록 허락하셨소. 그곳에는 올라갈 계단도 없으며 힘들게 열어야 하는 문들도 없고, 돌아다녀야 할 진저리 나는 복도들도 없으며 당신의 길을 막을 벽들도 없소.
알레프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전 단편에서 나온 설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단편 간의 상호참조성도 흥미로운 장치이고, 마지막 장면에서 사막을 미로로 제시하면서 닫힌 미로와 열린 미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으면 머릿속에서 새로운 연결이 막 생겨나는 느낌이 들어요.
혼돈에 이르게 하고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인간이 아닌 신만이 지닌 고유의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알레프 17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앞 작품의 후속작이군요. 단편집을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종종 이렇게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들을 만나면 정말 즐겁더군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기다림~] 누차 말하게 됩니다만, 일견 슴슴한(?) 이런 작품이 더 좋게 읽힙니다. 나른하면서도 이상한 역동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어요. 도망자와 추격자가 합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반복되는 작품 유형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얘기할 만한 구석이 풍부합니다. 개인적으로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본은 명료하지 않은 문장이 많아서 송병선 선생님의 번역을 추천합니다. 그래도 특정 문장만큼은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이 압축적이고 은유적인 맛이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랬습니다. 이 작품은 자신을 쫓는 남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익명의 도망자 이야기입니다. 익명의 도망자는 과거에 "지하 세계의 비극적인" 일에 몸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마지막까지도 그의 이름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감상 포인트였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독해하자면, 익명의 도망자는 애당초 살아갈 수 없는 삶, 추격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장했다는 이유로 죽는 것처럼 읽힙니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죽게 된다는 도플갱어 괴담과도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이 단편의 제목이 '기다림'인 것에 저는 주목하고 싶습니다. '익명의 도망자가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냐?' 하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소설은 다양하게 말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가 이름을 묻자 그는 비야리라고 대답했다. 그 이름을 댄 것은 비밀스러운 도발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이제는 정말로 느끼지 않게 된 굴욕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 이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자기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이름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적의 이름을 채택하는 것이 교활한 책략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문학적 실수에 유혹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알레프 17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소설을 읽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예술 작품 속의 인물로 보지 않았다.
알레프 기다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그’와 ‘비야리’가 계속 혼동되는 게 재밌네요. 짧은데 결코 단순하지 않은 게 역시 보르헤스의 마력이구나 싶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기다림] 마지막에 이르러서 도망자와 추격자는 하나로 겹쳐지고, 한쪽이 이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지워버립니다. 익명의 도망자는 여러 해 동안의 도피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추격하는 사람을 떨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로 추격자에 사로잡혀 있는가 하면, 숙박하는 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비야리'라고 대답할 정도입니다. 아마 그때부터 익명의 도망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죽어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로 비야리가 자신을 찾아왔음에도 익명의 도망자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중간 부분에서 화자는 도망자가 그저 현재 속에서만 살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권태가 행복인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이 "개보다 더 복잡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장면에 이어서, 그가 심각한 치통을 느끼고서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공포에 휩싸이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이 부분에서 익명의 도망자가 이미 죽은 유령과 같은 삶을 살고 있으며, 어떤 실재감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오랜 도망 생활 때문에 자신을 추격하는 추격자에 너무 몰두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을 뿐 아니라 추격자의 정체성으로 대체되었고, 시간은 오직 현재만을 살아가는 개의 그것이 되었으며, 삶은 영화 같은 꿈 혹은 환영과 비슷한 그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비야리를 참칭한 남자는 몽롱한 마술에 잠긴 채 비야리의 총구에 피어오르는 포연처럼 흩어집니다. 어느덧 모임도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내일 하루 22일은 쉬고, 모레 뵙겠습니다😃
여러 해 동안 고독하게 지내면서, 그는 기억 속의 모든 나날이 똑같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지만, 감옥이나 병원에서 보내는 날이 아니더라도 놀랍지 않은 날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과거에 은둔 생활을 했을 때는 날짜와 시간을 세려는 유혹에 굴복했지만, 이번 은둔 생활은 달랐다. 어느 날 아침에 신문이 알레한드로 비야리의 죽음을 전하지 않는 한,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비야리가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은 하나의 꿈이었다. 그런 가능성에 그는 불안해했다. 그것이 위안처럼 느껴질지 아니면 불행처럼 느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레프 17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총탄이 그를 지워버렸을 때 그는 그러한 마술 속에 있었다.
알렙 19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가 그런 마법의 상태에 있을 때, 총탄 소리가 그를 지워버렸다.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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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앨리슨 벡델 - 펀 홈시무라 타카코 - 방랑소년 1저메이카 킨케이드 - 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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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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