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보르헤스 읽기] 『알렙』 후반부 같이 읽어요

D-29
나는 생각했다. ‘난 패배를 기뻐하고 있어 그것은 내가 아무도 모르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처벌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야.’ 또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난 패배를 기뻐하고 있어, 그것은 끝이고 난 너무 지쳐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난 패배를 기뻐하고 있어.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며,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행위들과 무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고, 단 하나의 실제 행위를 비난하거나 개탄하는 것은 우주를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이야.’
알레프 111-11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마지막으로 제 사족이자 사견입니다. 세계전집시리즈의 ⟪픽션들⟫의 뒤표지에 홍보 문구로 이 단편에 나오는 한 구절이 인용돼 있습니다. "나는 내일이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래에 다가올 세대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될 것이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하지만 이 말은 보르헤스의 발언으로 쓰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소설 속에서 나치의 부역자인 오토 디트리히 추어 린데가 했던 발언을 작가로서 보르헤스가 자신의 작업을 칭송하는 말처럼 쓴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고문기술자임과 동시에 살인자로 처형될 운명에 처한 한 인물이 사형 당하기 직전에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가 부도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한 말도 부도덕하니 쓰지 말라는 수준의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소설 속 화자의 입을 빌려서 뱉은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저 부분만 떼어서 보르헤스가 자신을 칭송한 말인 것처럼 홍보문구를 쓰는 게 올바른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뒤표지에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이라는 문구와 함께 삽입돼 있는 것을 보니, 더욱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몇 발자국만 더 건너 뛰어도 기이한 상황을 마주치게 될 겁니다. 그런 식이라면, 한 한국 영화에서 부패한 언론사 주필을 연기했던 한 중견 배우의 이름을 걸고서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라는 홍보 문구를 쓰는 것도 허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리도 없습니다. 소설적 허구와 현실의 관계를 묻는 것과 그 둘을 의도적으로 혼동하고 특정한 목적하에 호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가 보르헤스의 작업이라면, 후자는 ⟨독일 레퀴엠⟩에 나오는 오토 디트리히 추어 린데의 작업이니까요.
제가 이거 ‘웃긴다’라고 생각한 지점이 말씀하신 자기 정당화, 유리함, 잘난 면만 기술하는 부분이었어요. 잘 정리해 주신 덕분에 저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런 인물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quentin 님에게 저도 늘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보르헤스가 이 작품을 쓴 의도가 뭘까요? 설마 나치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요.
나치의 1인칭으로 픽션으로 재현하는 것과 나치의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영화 ⟨한나 아렌트⟩를 보셨나요? 거기서 보면 한나 아렌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해는 용서가 아니다.' 악의 내면을 이해하는 것은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고 악행을 용서하는 것도 아니라고요. 악을 이해하는 것은 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남은 사람에게 남겨진 의무라고요. 한번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재밌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은 전형적인 악인이라고 보긴 어렵고 어떤 면에서는 보르헤스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기는 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섬세하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치가 니체의 책 속에서 나치적인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니체를 폄훼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요. 각종 사이비 교주들도 성경적인 베이스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가치가 훼손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합니다.
한나 아렌트독일계 유대인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가 1960~1964년까지 겪었던 실화를 다루었다. 한나는 나치 전범인 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내용을 보며,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한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가족, 유대계 커뮤니티와 사상계 등 모든 사람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사회적 반감과 살해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한나 아렌트. , 에 이은 강인한 실존 여성 인물 3부작의 완성!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베로에스의 탐색~] 이 단편은 실존했던 무슬림 철학자 이븐 루시드, 라틴어로는 아베로에스로 번역되는 인물을 내세운 픽션입니다. 굳이 한마디로 정리를 하자면, 이 단편은 모든 번역에 내재한 실패 가능성('번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 '그럼에도 어떻게 실패로써 번역이 성공하는가?')을 탐구하는 단편입니다. 단편 그 자체로 꽤 복잡한 구성을 취하는 데다가 주해자(The Commentator)로서 아베로에스라는 인물을 잘 모르면 그냥 지나칠 법한 세부 사항도 많습니다. 차근차근 설명을 해보겠지만, 저도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아니어서 틀린 내용이 있을 수도 있으니 코멘트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한국일보에 기고된 김정명의 [이슬람 문화기행]을 보시면, 이븐 루시드(라틴어로는 아베로에스)에 관한 배경 설명이 잘 나옵니다. 라파엘로 그림 ⟨아테네 학당⟩에서는 서양을 대표하는 지성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토론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그중 한명으로서 무슬림 철학자인 이븐 루시드가 등장합니다. 그림에서 그는 피타고라스의 공책을 훔쳐보는 자로 묘사됩니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흔히 암흑기로 묘사되는데요, 이 시기에 유럽은 막강한 교회의 권위에 눌려서 이성(理性)의 활동에 제약이 많았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이 유럽에서 명맥을 이어나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슬람 쪽으로 활로가 뚫렸습니다. 8세기 압바스 왕조를 기점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양한 저서들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번역이 활성화되면서 아랍권은 그리스 철학에 매료되었고 이후 12세기에 이르러서 이븐 루시드의 주해서로 절정을 이룹니다. 이븐 루시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주해서를 통해서 당대 최고의 연구 권위자가 되었고, 너무 유명해서 그를 간단히 '주해자'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라파엘로의 그림 속에서 이븐 루시드는 피타고라스의 공책을 훔쳐보는 간악한 이처럼 묘사됩니다. 비록 그가 주해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을지라도 그의 업적은 그리스 철학에 크게 의존하며, 그 업적을 베껴쓰고 주석을 단 것에 불과하다는 당대의 인식이 라파엘로의 그림에 투영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생각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븐 루시드가 그리스의 업적에 기대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해자로서 그 위대함이 반감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 베껴쓰는 행위, 즉 원전을 필사하고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겨적고 해설을 다는 행위야말로 종교적인 찬양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 철학의 아랍 번역서와 이븐 루시드의 주해서 덕택에, 유럽인들은 암흑기 동안 잊혔던 그리스 철학을 훗날 회복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니까요. 그리하여 진정 유럽적인 것은 없으며, 오늘날 유럽인들 자랑하는 냉철한 이성에 바탕한 철학과 과학은 아랍적인 것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습니다. 한편, 이븐 루시드는 이성적 성찰을 목적으로 삼는 철학서와 계시의 내용을 담는 종교 경전이 동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저서를 쓰기도 했다고 알려집니다. 철학서와 경전 모두 진리를 추구하되, 그것을 표현하는 양상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 종교적 계시 안에 있으므로 이성을 진리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이슬람의 교리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는데요, 이에 맞서 이븐 루시드는 이성과 계시는 모두 동등한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는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븐 루시드의 주장과 당시 보수적인 코란 학자들의 행태는 본 단편인 ⟨아베로에스의 탐구⟩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평생 코란만 들여다본 신학자들은 세계 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경이를 목격한 아불카심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은근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출처: [한국일보] 아테네 학당 속 이방인 철학자, 중세 유럽을 깨우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3212081323776
이븐 샤라프의 무의미한 운율에 놀란 그는 어느 정도 근거를 가지고, 옛날 사람들과 『코란」에 모든 시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혁신을 위한 소망을 무식하고 허세적인 것이라고 비난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것은 그가 옛것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레프 12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베로에스의 탐색] 이어서 얘기하면, 단편에서 아베로에스는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었고, 그에 관한 주석을 내놓았지만 그 원어를 알지는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아베로에스를 가로막고 있던 것은 작품의 난해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리아어와 그리스어를 모르는 채로 "번역본에 대한 번역에 관해 작업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아베로에스가 일종의 비극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시학⟫에서 비극(τραγωδι'α)과 희극(κωμηδι'α)이라는 단어를 여러차례 접하면서도 그 의미를 몰라서 고심하는 장면은 극도의 아이러니임과 동시에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려는 이가 번역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상황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합니다. 한 연구자의 말을 빌리자면, 번역이란 모국어라는 감옥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행위이며, 나아가 번역 불가능성을 실감하면서도 그것을 가능케 하려는 노력의 총체입니다. 여차저차해서 어떤 단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고 하더라도, 그 단어가 현상의 특수한 면면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아불카심이 세계 곳곳을 돌며 각종 경이를 보았더라도 그것을 말로 전달하기 어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가령 벵골의 달은 예멘의 달과 똑같지 않음에도, 그것을 똑같은 단어로 묘사해야 하는 것이다”). 단연코 이 단편의 백미는 아베로에스가 파라치의 집에서 여러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들일 겁니다. 이 저녁 식사의 대화는 '비극'과 '희극'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아베로에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몇몇 코란 학자들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놀라움을 보았다고 말하는 아불카심을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 그를 은근히 몰아붙이자, 아베로에스와 시인 압달리말리크가 아불카심을 거들며 변호해주기도 합니다. '모든 책의 어머니로서 ⟪코란⟫'과 자식으로서 다른 책들의 관계, 결코 표현될 수 없는 경이로운 광경, 언변을 갖춘 변사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통해서 이야기를 '보여주는' 중국식 연극, 완전히 다른 두 대상 사이에서 같음을 발견하는 시적 은유와 그 쇄신······ 이 모든 소재들이 '비극'과 '희극'의 의미를 추측하는(번역하는) 과정에 대한 또 하나의 메타포처럼 작용합니다. 그 결과, 아베로에스는 "찬사를 비극이라고, 풍자와 저주의 말을 희극이라고" 파악하기에 이릅니다. '아베로에스의 탐색'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책의 어머니를 운운하며 평생 코란을 들여다본 학자들이 정작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놀라움을 직접 목도한 아불카심을 은근히 폄훼하는 모습에서는 모종의 희극성이 느껴지고, 이런 저녁 나절의 풍성한 대화에도 불구하고 종내에는 학자들이 코란에 모든 시가 들어 있으며, "혁신을 위한 소망을 무식하고 허세적인 것이라고 비난"하며 옛것에 대한 찬사로 마무리하는 모습에서는 모종의 비극성이 느껴집니다. 소설의 말미에서도 말하듯, 보르헤스는 아베로에스의 탐색이 애당초 실패할 기획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한 언어에서 표현 가능한 것이 다른 언어에서는 도저히 표현 불가능한 것이 되는 상황을, 이 짧은 단편의 저녁 식사를 통해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번역이 실패하는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번역의 불가능성을 전달하기에 성공하는 아이러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배경지식을 소개해드리면, 이 단편의 제사에 나오는 역사가 르낭은 ‘아불 왈리드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이븐 루시드’라는 무슬림 철학자의 이름이 ‘벤라이스트’, ‘아벤리스’, ‘아벤 라사드’, ‘필리우스 로사디스’라는 이름을 차례로 거쳐, ‘아베로에스’라는 유럽 이름으로 정착되는 데만 해도 1세기가 걸렸다고 썼다고 합니다.
"아리스투(아리스토텔레스)는 찬사를 비극이라고, 풍자와 저주의 말을 희극이라고 이름 붙였다. 『코란」과 이슬람 사원에 있는 『무알라카』에는 훌륭한 비극과 희극들이 가득하다."
알레프 12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간만에 머리 굴려야하는 단편이 등장했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누는 말들이 복잡해서 한참 들여다 봤네요. 닫혀있는 세계의 아베로에스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비극과 희극의 의미와 한정된 자료를 통해 애써 재구성해보려던 화자와 대칭을 이루는 모양입니다. (한동안 그리스 비극을 조금 들여다봤는데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뜻하는 희비극의 의미가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과 살짝 다르긴 합니다만) 결론은 또다시 작가가 말하는 작가의 이야기인 것 같네요. 음…한 번 더 읽고 오겠습니다.
저도 처음 읽으면서 저녁 식사의 대화에서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또한 내가 아베로에스를 믿는 걸 그만두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사라진다.)
알레프 13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한편, 이 단편이 번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세계전집시리즈의 번역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 단편은 르낭의 제사 "비극이란 빌려 온 예술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라······."라고 돼 있는데, 이 문장의 원문은 “S'imaginant que Ia tragedie n'est autre chose que l'art de louer”입니다. '빌려 온' 대신에 '찬양'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비극이란 찬양[찬사]의 예술에 다름없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라······."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130쪽 마지막 문단에서도 한 문장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나는 연극이 무엇인지 감지하지도 못한 채 희곡이 무엇인지 상상하려고 했던 아베로에스를 상상해 보고자 했던 아베로에스가 르낭과 레인, 그리고 아신 팔라시오스의 짧은 글 몇 개 이외에 다른 자료들 없이 아베로에스를 상상해 보고자 했던 나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이 문장의 영역본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I felt that Averroes, trying to imagine what **a play** is without ever having suspected what **a theater** is, was no more absurd than I, trying to imagine Averroes yet with no more material than a few snatches from Renan, Lane, und Asin Palacios."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제가 **로 표시한 a play와 a theater라는 단어인데, 송병선 선생님의 번역에서는 각각이 '희곡'과 '연극'으로 번역돼 있습니다. 이 부분을 원문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Sentí que Averroes, queriendo imaginar lo que es **un drama** sin haber sospechado lo que es **un teatro**, no era más absurdo que yo, queriendo imaginar a Averroes, sin otro material que unos adarmes de Renán, de Lañe y de Asín Palacios. 각각에 해당하는 단어는 다시 un drama와 un teatro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은 '연극'과 '극장(연극/희곡)'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문장은 앞뒤로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실재와 허구를 지칭하는 명사가 대구를 이루도록 번역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 "극장[실재]이 무엇인지도 의심하지 않고서 연극[허구]이 무엇인지 상상하려고 하는 것은 르낭과 레인, 아신 팔라시오스의 단편적인 글 조각들[실재]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아베로에스[허구]를 상상하려고 했던 나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정성스런 각주네요.
언어를 또는 문화를 가로지르는 이해understanding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베로에스가 바로 창 밖에서 아이들이 이슬람교의 아잔을 흉내내는 놀이를 하는것을 보았음에도 - 이것이야말로 아불카심이 저녁시간에 들려주는 '연극/공연'이라는 것과 유사한데 말이지요 - 아불카심의 설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놀이를 보기 전에 "우리가 찾는 것은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역설적이었어요. 우리 언어나 문화에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지, 과연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은 할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저작을 연구하는 아베로에스와, 아르헨티나의 소설가가 쓴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저작을 연구하는 아랍인에 대한 소설을 한국어로 읽고있는 제 자신이 겹쳐보였습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내 마음대로 소설을 읽다가도 어디선가 한 군데 이 언어와 시간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으로 통하는 구절이 하나라도 있으면 기뻐지는 것이 소설읽기인 것 같습니다.
오, 저는 이 댓글 읽으면서 아이들이 노는 놀이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충분히 연극/공연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버튼이 언급했던 그 신, 그러니까 황소를 만들겠다고 했다가 들소를 만들었던 그 신이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을 느꼈다. 나는 이 작품이 나를 비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내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것을 쓰고 있는 동안 과거에 나였던 사람의 상징이라고 느꼈고,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이 되어야만 했고, 내가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를 써야만 했으며, 그렇게 무한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내가 아베에로스를 믿는 걸 그만두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사라진다.)
알레프 13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보르헤스의 단편집들을 꾸준히 읽어나가면서 느껴진 어떤 답답함의 실체는 뭔가 했는데, 대화가 거의 없다는걸 자각했습니다. 대부분 화자 한 명이나 고립된 존재, 주석, 어딘가에 쓰인 글들로 두 명 이상의 대화가 거의 등장하지 않더라구요. 오랜만에 대화를 만나 청량함을 느꼈습니다.
청량함이라는 멋진 표현에 동의합니다😃 아마도 보르헤스의 소설은 다른 소설들과 달리 인물을 설득하기보다는 세계관 자체를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한 인물이 말하는 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인물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라는 말에 비춰보면, 대화체를 쓴다는 것은 한 사람, 나아가 한 캐릭터를 직간접적으로 설득하는 일이니까요. 보르헤스의 단편들에서는 캐릭터를 앞세운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메타 구조에서는 언제나 배면에 존재하는 화자의 존재가 더 드러나게 마련이니까요. 이런 점이 호불호를 불러오는 게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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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덕후, 박산호 번역가가 고른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3!
[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① <위대한 유산>[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② <올리버 트위스트>[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③ <두 도시 이야기>
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앨리슨 벡델 - 펀 홈시무라 타카코 - 방랑소년 1저메이카 킨케이드 - 루시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내셔널 갤러리 VS 메트로폴리탄
[도서 증정] 저자이자 도슨트인 유승연과 함께 읽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500일>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
🎬영상과 독서를 함께 해요.
[NETFLIX와 백년의 고독 읽기]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IMF외환위기 다시 보기1]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어요.영화 <로기완>을 기다리며 <로기완을 만났다> 함께 읽기"사랑의 이해" / 책 vs 드라마 / 다 좋습니다, 함께 이야기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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