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보르헤스 읽기] 『알렙』 후반부 같이 읽어요

D-29
나는 기다란 현관보다 조금 커다란 그 비좁은 마당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어.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문턱의 남자] '나'에게 노인은 물결이 깎은 조약돌, 혹은 시대에 걸쳐 짧고 예리해진 금언처럼 "작고 반들반들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사라진 글렌케언의 행방을 묻자 노인은 어쩐 일인지 과거의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서 지금 도시에서 벌어진 한 소요 사태에 관한 에피소드입니다. 당시 혼란한 인도의 한 도시에 영국 여왕이 임명한 재판관이 파견되었는데, 그가 법을 앞세워 무자비한 폭군처럼 군림했던 탓에 백성들이 그를 붙잡아다 재판에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때 재밌게도 여왕의 재판관을 재판하는 재판관으로 동네의 광인이 선출되었다고 노인은 말합니다. 백성들은 운명이 그들에게 현자를 금지한다면 남은 선택지는 바보밖에 없다고 하면서, 재판관을 재판할 재판관으로서 광인을 임명한 것입니다. 문턱의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폭군이었던 재판관은 사형을 선고 받고 죽임 당합니다. 이야기 속 사형된 재판관의 이야기는 '나'가 찾는 글렌케언의 현재 행방을 암시합니다. 노인의 외양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역사라는 조류는 서로 들쭉날쭉 다르게 보이는 사건들도 비슷하게 작고 반들반들한 모습으로 바꾸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목해봐야 할 점은 노인이 앉아 있던 자리가 문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19세기 식민지와 20세기의 힌두스탄이, 폭군이었던 재판관과 글렌케언이, 미치광이와 현인의 판결이 바로 노인이 쭈그리고 앉았던 문턱에서 만납니다. 그렇다면 문턱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이 드나드는 과거의 통로가 아닐까요. 문턱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역사적 조류가 뻗어나가는 통로이지만, 그곳은 늘 노인과 같은 자들이 문지기처럼 그 앞을 지키면서 이전 시대와 지금 시대가 미묘하게 닮아 있음을 표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흔한 금언과 강가의 물결로 세공된 세월의 조약돌은 이렇듯 보르헤스의 야화 속에서 조우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본 모임의 마지막 단편 ⟨알레프⟩로 찾아뵙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알레프~] 마지막 단편이자 표제작입니다. 대략 두 달 간 다들 수고하셨다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이론적이고 사변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작품처럼 읽히지는 않았고, 단순하면서도 보르헤스 자신의 세계관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인상만 말하면 ⟨알레프⟩는 ⟨자히르⟩의 다른 쓰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잘 알고 지내던 한 여성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도 닮았고, 관통하는 메시지도 큰 틀에서는 유사한 지점이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다만 ⟨알레프⟩는 ⟨자히르⟩와 달리 잘 쓰인 단편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의뭉스러운 디테일이 곳곳에 녹아 있어서 즐거운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보르헤스와 베아트리스 비테르보의 관계인데요, 그녀에 대한 보르헤스의 집착이 이 단편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집착이 과거의 연인을 향한 감정인지 짝사랑의 감정인지는 명료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베아트리스와 그녀의 사촌인 다네리의 관계도 의뭉스럽긴 매한가지인데요, 보르헤스가 알레프 속에서 본 "베아트리스가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에게 보낸 음탕하고 믿을 수 없으며 상세하게 쓴 편지"의 내용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보르헤스가 다네리에게 반감을 가지는 이유를 단순히 이런 것들으로 설명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분명 다네리는 보르헤스가 그토록 집착하는 베아트리스를 접하는 일종의 통로라는 점도 눈여겨 볼 부분입니다. 알레프를 정확히 '무엇'이라고 지칭하기는 어렵지만 그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은 많습니다. 그것은 세계 전체를 들여다보는 작은 열쇠 구멍이자, 신의 미스터리를 보여주는 해결책이 없는 해결책, 모든 것으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알레프가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알레프'라는 작은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역설에 봉착합니다. 언어는 선형적임에 반해 알레프는 "모든 것들이 서로 겹치거나 투명하지도 않게 동일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글은 순차적이며 선형적인 매체입니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갑니다. 이 한계는 구체적인 물성을 지닌 책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데요, ⟨후기⟩에서 보르헤스는 다네리가 그의 장시(長詩) ⟪아메리카의 편린들⟫ 시리즈의 첫 책을 출간했다고 전합니다(다네리는 무수한 '처음'만 반복합니다). 공교롭게도 출판사의 이름은 '프로쿠스토(Procusto)'입니다. "지구의 모든 것을 시로 표현하겠다고 작정"한 사람의 시는 쓰여질 수도 없을 뿐더러 온전한 형태의 출판물을 낼 수 없을 겁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책이 일정 부분 그렇습니다. 책의 내용과 출판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신체의 일부를 자르거나 억지로 늘려서 침대에 맞추었다는 신화 속의 강도 프로크루테스의 행위가 떠오릅니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생각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알레프의 본성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그것의 이름에 관한 것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그 이름은 성스러운 언어의 첫 번째 글자이다. 내 이야기에 나오는 구체에 그 이름을 적용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카발라 신비주의에서 이 글자는 엔 소프, 즉 무한하고 순수한 신성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면서 하급 세계가 상급 세계의 거울이자 지도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들 말한다. ⟪집합 이론⟫에서 알레프는 초한수들의 상징이며, 그 숫자들 속에서 전체는 전체의 일정 부분보다 크지 않다. 나는 다음의 사실을 알고 싶었다. 즉, 카를로스 아르헨티노가 그 이름을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모든 지점들이 수렴되는 또 다른 지점에 적용된' 그 이름을 그의 집에 있던 알레프가 드러낸 셀 수 없이 많은 책들 중의 하나에서 읽었던 것일까?
알레프 21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그는 ‘알레프’란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알레프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보르헤스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듯한 파울로 코엘료의 이 책들도 흥미로워 보이네요.
알레프<연금술사> <브리다>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2011년 신작. 작가의 길에 들어선 지 20여 년이 훌쩍 넘은 파울로 코엘료의 세계를 아우르는 동시에, 자신의 근본으로 회귀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 코엘료의 고국인 브라질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헝가리 등 20여 국에서 출간되어 출간 첫날 즉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변함없이 코엘료 신드롬을 일으켰다.
오 자히르<연금술사>,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2005년 최신작 <오 자히르>가 출간됐다. 이란에서 하루에 8만5천 부가 팔려나갔으며, 프랑스에서는 1주일 만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이탈리아에서 출간 1개월 만에 42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한 화제작이다. '소유하고 싶고 자유롭고 싶다'-사랑의 두 얼굴을 빛나는 성찰로 그려낸 소설.
서두에 어떤 것을 잔뜩 설명해놓고 이어서 좀 엉뚱한 듯 한 이야길 늘어놓다가 서두에 늘어놓은 이야기와 연결하는 보르헤스 특유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라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읽었습니다. 알레프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장황해서 ‘이게 뭐야’하다가도 알고보면 미리 다 설정을 깔아둔 덕분에 ‘아…’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네리의 장시가 처음 등장할 땐 탐탁치가 않았는데 다 쓸모가 있었던 것이고요. 구성이나 소재 면에서 자히르를 떠올리게 한다는 말씀은 저도 동의하게 되네요. 끝까지 다 읽은 보르헤스의 단편인데 같이 읽고 의견을 교환한 덕에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게 읽어서 다행입니다. @russist 님의 발제에 준하는 상세한 기록에 많이 의지했습니다. 이제 저는 슬슬 픽션들을 읽어볼 터인데…알레프만큼 쉽게 읽히진 않겠죠? ㅎㅎ
어렵지 않게 읽었다면 다행입니다:) 픽션들도 천천히 읽어보면 참 재밌을 거예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알레프] 보르헤스도 말하듯, 다네리의 작업은 그의 작시법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시법이 찬사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는 것"에 있습니다. 어떤 작품을 쓰고서 그 작품이 왜 위대한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다네리의 모습은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후에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다네리의 오랜 집이 헐리게 될 위험에 처하자 다네리는 지하실에 있는 '알레프'의 존재를 털어놓게 되고, 비로소 보르헤스는 다네리가 왜 그러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알레프는 다네리에게 일종의 전지함을 가져다주는 '처음'입니다(알레프 'א'는 히브리 문자와 페니키아 문자의 첫 번째 글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네리에게 전지함을 줬을 뿐 전능함을 주지는 못합니다.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집이 헐리게 되어서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알레프를 활용해서 시를 쓰는 것만 봐도 전지함과 전능함이 서로 연결되지 못함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시라는 사회적 관점에서는 무능한 일에 매달리는 데 그 전지함이 허비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알레프로써 시를 썼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국가 문학상에서 '2등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보르헤스적인 유머입니다. 이 알레프가 시인에게 주어졌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해보세요!) 알레프는 어떤 시상에 사로잡힌 시인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네리가 사로잡혀 있는 시심(詩心)의 핵심이 알레프로 형상화 돼 있다고 해도 될 겁니다. 다네리는 놀랍게도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특권으로 인식합니다.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우치다 다쓰루 선생은 작가들은 자신에게만 주어진 목소리, 일종의 계시를 듣고서, 그것을 작품 형태로 구현하기 위해서 애쓴다고 말합니다. 작가들은 알레프와 같은 전(前)미래적인 환상 속에서 '앞으로 있게 될 풍경'이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적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베아트리체를 평생 사모한 단테, 베아트리스의 기억에 사로잡힌 보르헤스, 알레프에 빠져 있는 다네리는 그 점에서 다들 '하나'에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몰두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단 한 명'에 대해서 얘기해보려 합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단편 초입이나 말미에 꼭 편지를 쓰는 듯, 자신의 지인의 이름을 붙입니다. 이런 장치는 작품이 꼭 한 사람을 위해서 쓴 것 같은 친숙함을 불러옵니다. 위대한 대중연설가는 연단에서 대중에게 호소하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려보세요. '국민'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이 대개 선동가에 불과한 것을 생각해보세요. 보르헤스는 단 한 명에게 호소함으로써 모두에게 호소하기에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어느 정도로 성공했느냐 하면, 작품이 세계 각국에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반대편에 있는 여기 한국에도 닿을 정도니까요. 마지막으로 보르헤스가 한 강연에서 나눴던 대담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세계 문학사와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노년의 목소리를 담은 기록으로 1976년과 1980년에 한 인터뷰 열한 개를 모은 책이다. 시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대한 담담한 회고뿐 아니라 말년에 이른 보르헤스의 문학, 창작, 죽음에 대한 견해까지 담고 있다.
반스톤: 지난 60여 년 동안 당신의 교우 관계는 어땠나요? 보르헤스: 불행히도 친구들을 생각할 때면 난 작고한 친구들을 떠올린답니다. 아직 살아 있는 친구들도 몇 명 있긴 해요. 물론 이 나이가 되니 사실상 동년배의 친구는 없어요. 누구를 탓하겠어요? 탓할 사람은 없어요. 나는 오래전에 죽었어야 해요. 그런데 아직도 인생이 좋은 일을 만들어주는 군요. 내가 여기 미국에 있고, 여러분과 함께 있으니까 말이에요. 반스톤: 당신은 대부분의 명성을 경멸하고, 심지어 자신의 책들도 하찮게 여기잖아요. 보르헤스: 맞아요. 반스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아주 우호적인 집단의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있어요. 이들에게 당신의 지식을 공유하는 느낌이 어떤지 말씀해주세요. 보르헤스: 난 이들에게 얘기하고 있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 각자에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군중이란 것은 환상이에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윌트 휘트먼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여기에 각자 개인으로 함께 있는 게 맞지요?" 우리는 각자 독립적으로 있는 거예요. 당신과 나로서 말이에요. 여기서 '당신'은 개인을 나타내는 거예요. 군중을 나타내는 게 아니에요. 군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심지어 나 자신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군중은 환상⟩, 13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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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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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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