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인생책> 한은형 소설가와 [위대한 개츠비] 함께 읽기

D-29
캐릭터 호감에 관한 부분은 작가가 창작 과정에서 설정한 의도에 따라 독자가 따라가기 마련이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수능 문제 답안으로 보편적인 정답을 고르라면 개츠비일 거 같긴 합니다. 호감과는 별개로 다른 캐릭터들도 충분히 설득이 되는 인물들인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이 작품이 클래식인 거겠죠.
아울러 이 작품의 주요 캐릭터들은 캐릭터아크에 있어서도 특이하네요. 작중 화자인 닉을 제외하고 나머지 캐릭터들은 고정 불변의 내정 정체성을 지니는 플랫아크의 형태를 보입니다. 불과 30대 초반의 나이에 단단하게 굳은 아집 덕분에 파멸해버리는 개츠비는 낯설기도 하지만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그 시절의 30대가 오늘날의 50대 정도의 연령대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1900년대 초반 세계의 평균 수명은 31세였고 미국의 경우도 47세였네요. 위대한 개츠비는 배경이 1922년임을 가만하면 차이는 크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평균 수명이 31세라니... 2022년의 현대인와 비교하면 1/3을 사는 군요. 인간의 하루가 고양이의 사나흘에 준한다던데 흥미롭네요. 어디서 들은 얘기로는 38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와 현대인은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거의 다를 바 없다고 하더군요. 한 세기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이런 소설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요. 시대는 바뀌어도 사람은 그대로라는 말을 통감합니다.
거의 백 년 전 작가의 글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그만큼 인간이 백 년 동안 그다지 진화한 건 아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백 년 전 한국 소설이 김동인, 염상섭 등이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다고 하더라도 대충 1920년대까진 이질감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100년 너머의 과거로 간다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스트레스 받을 거 같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열두 번째 날입니다. 4장에서 개츠비는 닉을 찾아와 자동차를 자랑합니다. "그는 잠시도 가만 있질 못했다. 항상 어딘가에 발을 구르거나 참을성 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닉이 보는 개츠비의 모습입니다. 개츠비는 닉에게 묻습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요. 개츠비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런 마음을 개츠비처럼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직접 대놓고 물어보진 않죠. 그런 면에서 개츠비는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보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자신의 그런 면을 감출 줄 모르고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좀 나이브한 인물인 것 같아요.
말씀하신 '나이브함'때문에 저는 개츠비가 나오는 대목을 볼 때마다 배를 잡고 웃었었는데요. 이번에는 다른 분들과 같이 읽으니 - 개츠비에게 공감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 제게는 닉의 아버지가 닉에게 해줬던 그 말, 그 말이 스며들지 못했나 보다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개츠비는 자꾸 닉을 형씨라고 부릅니다. 파티장에 온 모든 사람은 집주인인 개츠비를 알지만 개츠비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외울 수 없겠지요 초대장을 보낸 이웃이라해도 그러니 편하게 형씨라고 퉁치고 넘어가는 것 같은데요. 닉은 반면 파티 참석자들의 이름을 메모해두고 하나 하나 기억해냅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면에서 닉이 더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영어 원서에서는 형씨가 뭐라고 표현되는지 궁금하네요.
형씨는 Old sport 입니다. 번역할 우리 말이 마땅치 않았던 건 이해하지만, '형씨'는 오역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 하네요.
아, 그렇군요. Old sport... 개츠비의 말습관인가 봐요. 경적을 울리며 따라오는 경찰에게도 쓰는 걸 보면... 저는 형씨라는 말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거든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열세 번째 날입니다. 오늘까지 4장을 다 읽고, 내일부터 3일 동안 5장을 읽겠습니다. 4장에서 베이커는 닉에게 데이지와 결혼한 이후 톰의 애정 편력(?)에 대해 말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데이지의 삶에도 뭔가 있어야 해요.”라고. 마치 데이지도 연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베이커의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닉이 조던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쫓기는 자와 쫓는 자, 바쁘게 뛰는 자와 지쳐 버린 자가 있을 따름이로다." 그때 조던이 한 말이죠. "그리고 데이지한테도 자기 삶이 있어야 해요." 톰은 신촌초부터 부인을 두고 다른 여자들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네요. 데이지의 삶이 공허하다면 그 허무함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하겠지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열네 번째 날입니다. 5장에서 개츠비는 데이지와 꿈에 그리던 재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이지가 너무 늦는다며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아직 약속 시간이 되기 전인데요. 개츠비의 마음이 어땠는지 그려지시나요?
불쌍한 개츠비! 비는 쏟아지고, 초라한 닉의 집은 성에 안 차고... 어쩌면 좋을까요. 네, 공감할 수 있어요.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다면, 실패할 일도 없고 마음을 다칠 일도 없다.' 5년간 쌓아온 거탑이 한방에 무너지면 어떡하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 이해가 갑니다. 가련해서 어떡하나요.
저는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으면서 한 번도 개츠비가 안쓰럽다고 생각하지 못했었거든요. 좀 웃기고, 이상하고, 괴팍하다고 생각했었는데요. 미키타임 님의 시선을 빌려 보니 그렇게도 보여요. 개츠비를 다시 보게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열다섯 번째 날입니다. 개츠비와 데이지는 드디어 만납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개츠비는 셔츠를 하나씩 던지면서 자랑합니다. “엷은 리넨 셔츠, 두꺼운 실크 셔츠, 고급 플란넬 셔츠가 떨어질 때마다 개켜졌던 자국이 펴지며 가지각색으로 테이블 위를 덮었다.” 그러던 중 데이지는 왈칵 울음을 터트립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를 본 적이 없다면서요. 셔츠를 던지며 자랑하는 개츠비, 그걸 보며 우는 데이지, 이들은 어때 보이나요?
저도 이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를 본 적이 없어 슬퍼진다는 데이지의 말을 듣고... 이게 울 일인가 싶었는데요. 흥하리라 님 글을 읽고 다시 이 대목을 보니 자신의 비참한 결혼 생활이 떠올라 가뜩이나 울고 싶은 데이지 앞에서, 개츠비가 셔츠 자랑을 하니 눈물을 터뜨린 게 아닐까 싶네요. 사람들은 책이나 옷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을 전시합니다. '어때? 나 이런 사람이야.' 그런데 개츠비는 "영국에서 옷을 사서 보내 주는 사람이 있어요. 봄 가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물건을 골라서 보내오지요."라고 말합니다. 나라면 굳이 말하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냥 본인의 높은 안목으로 골랐다고 해도 멋있을 것 같은데... 개츠비는 이런 취향을 갖는 것보다, 돈으로 취향을 살 수 있다는 것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아요.
네, 흥하리라 님 덕에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 듯합니다. 흥라리나 님의 혜안에, 그 혜안을 알아봐주신 미키타임 님의 혜안에 저도 함께 깊어지는 느낌입니다. 가난해서 데이지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개츠비 입장에서는, "봐! 나 이렇게 이제 돈도 벌었고, 이런 것들도 가지게 되었어!"라고 말하는 부분인 것처럼도 보이네요.
그냥 생각나는대로 적어보건데 미키타임님, 메롱이님, 은형작가님 말씀을 더불어 듣게되니 더 풍성해지는 느낌입니다. 그 때 그 시절에 개츠비한테 딱 부족했던 돈을 이제는 갖게 되었으니…(하지만 그 때 개츠비가 풍족했다 치더라도 개츠비-데이지 커플이 어찌되었을지와는 무관하게) 데이지는 허탈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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