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인생책> 한은형 소설가와 [위대한 개츠비] 함께 읽기

D-29
앗! 한은형 소설가님의 질문에 저도 비슷한 답을 쓰려고 왔다가 russist님의 답글을 보고 순간 '동감!' 했어요.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닉이라는 화자를 선정하고, 닉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게 이 이야기에 힘과 매력을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개츠비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해서 <위대한 개츠비>를 썼더라면 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거라고도 생각하고요.
저는 이 말을 '겸손하게 살아라.'라는 아버지의 조언처럼 들렸어요. 유리한 입장이란 뭘까? 다양한 조건이 있겠지요. 물질적 풍요도 있고, 정신적 여유도 있고... 네게 주어진 입장에 감사하며 살아라는 뜻일까요? 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동기와 결과를 다 알지만, 타인의 행동은 눈에 보이는 결과만 보고, 그 뒤에 있는 성장 배경이나 동기를 알 수 없으니,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충고 아닐까요?
이 '유리한 입장'이란 게 뭘까라고 살면서 생각하는 날들이 많습니다. 저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 제가 유리한 입장에 있을 때 등등 여러 상황에서 이 말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럴 만한 여유가 있을 때에 그러지만요.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의 또다른 변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불행한 이들은 제각각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이걸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정의내리는 건 위험하다. '유리한 입장'에 관해서는 다소 기계적인 해석이지만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준상류층 집안이라는 계급적인 입장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반대로 계급적인 한계와 컴플렉스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제이 개츠비와 대비되는 부분일 거 같고요. 한편 열림원의 김석희 님 번역은 이렇더군요.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말이다.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해라." 원문을 찾아보니 현재 완료 시제를 쓴 걸로 봐서 이 '타고났다'는 뉘앙스의 의미도 나쁘지 않은 해석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In my younger and more vulnerable years my father gave me some advice that I’ve been turning over in my mind ever since.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 one,’ he told m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한은형 소설가님 말씀대로 닉 캐러웨이의 성격은 첫 문구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함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객관적인 관찰자,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로서는 딱이군요. 데이지는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닉에게 데이지가 그럽니다. '“오빠,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르고 지내고 있어요. 친척인데도 말이에요. 오빠는 제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잖아요.” 닉이 대답하죠. “아직 전쟁터에서 돌아오기 전이었으니까.” “정말 그렇군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대꾸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오빠, 그동안 난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모든 일에 아주 냉소적이 되었죠.”' 저는 이 장면을 읽고 데이지가 약간 철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결혼식에 왜 안 왔냐고 힐난조로 묻지만 정작 캐러웨이는 목숨을 내건 전쟁터에 있었는데 말이지요. 이스트에그의 대저택에 사는 데이지가 힘들다면, 월세 80불에 웨스트에그에서 세 사는 닉은 어쩌라는 걸까요? 1장에서 4명의 주인공이 다 등장하는군요. 물론 개츠비는 끝에 나와 미스터리한 모습을 잠깐 드러낼 뿐이지만요. 점점 흥미진진해지네요. 2장도 기대됩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어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안녕하세요. 세 번째 날입니다. 1장에서 닉은 먼 친척 동생인 데이지,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넌, 데이지의 친구 베이커를 만나게 됩니다. 데이지는 천진한 유머와 따뜻함이 있으면서 흥분을 잘하는 돌발적인 성격입니다. 데이지는 닉에게 말합니다. 닉이 한 떨기 장미, 순수한 장미 같다고요.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닉은 말합니다. "그녀에게선 사람을 흥분시키는 따뜻함이 흘러나왔다."(29쪽) 이렇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잊지 못할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나요?
누군가가 내게 해준 잊지 못할 이야기... 아, 아득한 느낌이 드는 말들이 몇 마디 떠오르네요... 아, 그때 그런 얘기를 했었지... 어쩌면 누군가는 데이지처럼 즉흥적으로 지나가며 한 말인데, 제가 오래도록 붙들고 의미부여를 한 말도 있겠네요. 괜히 혼자 설레고 좋아했던 말들... 부끄러워 더 쓰지는 못하겠어요. ^^
저는 이 부분을 자신에게는 장미와 비슷한 점이 조금도 없었다는 내용의 닉의 독백이 이어지고 있어서 데이지의 즉흥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장면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한은형 님이 다시 짚어주신 뒤에 이어지는 닉의 독백을 보면 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데이지의 한 마디가 닉에게는 제법 오래 기억에 남았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더군요. 잊지 못할 한 마디의 모멘트는 살면서 몇 번 있었던 거 같긴한데, 이건 어쩐지 이런 익명의 공간에서조차 비밀로 감춰두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오늘 과제는 패스하겠습니다.
네, 들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메롱이 님께 떠오른 그 순간이 있다면, 그래도 행복한 기억이 아닐까라고 여겨 봅니다. 이런 순간들로 인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2장이 시작하며, 닉은 톰을 따라 시내로 가는 길에 톰의 정부인 윌슨 부인을 만납니다. 피츠제럴드는 이번에도 작중 인물이 읽는 책의 소개를 통해 성격을 암시합니다. ​ '나는 조용히 거실에 앉아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읽었다. 내용이 형편없어서였는지 아니면 위스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얘기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 각주를 보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은 로버트 키블이 쓴 대중 소설인데,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을 '아주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평했군요. 작품 속에 가져와 이렇게 대놓고 뒷담화를 하는 걸 보니 정말 그 소설이 마음에 안 들었나봐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부도덕한 소설은 어떤 작품인건지... ^^ ​ 개츠비 얘기는 슬쩍슬쩍 도시전설처럼 나오는군요. 아웅,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는 언제 나오는 거야? 작가가 독자를 상대로 밀당을 제대로 해주시는 걸요?
토레이 파드마저스키의 <전략적 UX라이팅>에 보면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을 잊을 수 있지만, 그 순간에 느낀 감정은 절대 잊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훗날 닉의 입장에선 산만하게 내뱉었던 데이지의 말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에 느낀 감정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안녕하세요. 네 번째 날입니다. 1장에서 닉은 베이커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족감에 꽉 차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웬만하면 나는 찬사를 보내게 된다.” 닉은 톰 뷰캐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옛날보다 더 심해진 자족적 행위도 그에게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듯 열변을 토하는 그의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슬픈 구석이 있었다.” 자족감이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자족감이란 무엇인가요.
자족감은 자신에 대한 만족감 혹은 자신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톰은 대학교 운동선수 시절 이후에는자기과시의 순간이 없어지면서 점점 초조해지고 그래서 더 과장적으로 행동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네, 저도 그렇게 느끼며 읽고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자족감'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독자가 느끼기에 톰은 자족감이 별로 없는 사람인 것 같거든요. 뭔가를 성취해야 사람이 자족감을 가질 수 있을 텐데요, 톰에게는 주어진 것이 많고 그 주어진 것들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고, 뭔가를 계속(여자를 계속 바꾼다든가 하는 것들) 갈망하는데, 역설적으로 공허해서,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어딘가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해요.
자족감은 양날의 검 같아요. 물질적 조건으로 보아 가진 게 적은데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하고 만족하고 사는 건 쿨해보이는데요. 더 노력해도 좋을 사람이 톰처럼 '재산도 있고, 명성도 있고, 부인도 있고, 애인도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라고 하는 건 공허하게 보이네요. 소설가님의 질문으로 저를 다시 돌아봅니다. 고맙습니다!
네, 정해져 있습니다. 제가 두 번째 올린 글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자족감'이라는 워딩이 낯설어서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국문 어휘력이 부족해서 저는 이런 단어를 처음 들어본 거 같아요. 베이커에 관해 언급하면서 활용한 단어는 self-sufficiency이고 닉에 대해 언급한 단어는 complacency이더군요. complacency가 좀더 부정적인 뉘앙스 같긴 한데 그러고보니 저는 영문 어휘력도 부족하네요. "Almost any exhibition of complete self-sufficiency draws a stunned tribute from me." "There was something pathetic in his concentration, as if his complacency, more acute than of old, was not enough to him any more." 자족감은 코어 근육 같은 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근육이 팔 할 정도 있을 거 같고, 나머지 이 할은 후천적인 단련으로 획득되는 근육이 있을 거 같아요. 코어 근육이 생기면 그때부터 관절과 근육이 제자리를 찾게 되고 잘 아프지 않습니다. 칼이나 총을 맞아도 단단한 복근 덕분에 내장이 덜 다칠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코어 근육"이라는 말이 매우 신선한데요. 코어 근육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키우지 못하는 날들인데, 이 말이 제게 화두 같네요.
톰의 애인 머틀은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합니다. 이렇게 말하죠. “내가 (그이에게) 미쳐 있었던 건 막 결혼했을 때뿐이야. 하지만 곧 아차, 실수했구나 하고 깨달았지. 그 작자는 결혼식 때 예복을 빌려 입고도 나한테 입도 뻥긋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느 날 그 인간이 집에 없을 때 옷 임자가 옷을 찾으러 온 거야. ‘아, 그게 댁의 양복이었나요? 전 처음 듣는 얘기거든요.’ 내가 물었지. 난 양복을 그에게 내주고 나서 드러누워 오후 내내 엉엉 울었어.” 사랑은 오해로 시작해 이해로 끝난다던가요? 돈많은 척 연기한 윌슨은 머틀에게 외면을 당하는데요. 과연 개츠비는 위대한 갑부라는 배역을 소화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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