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인생책> 한은형 소설가와 [위대한 개츠비] 함께 읽기

D-29
토레이 파드마저스키의 <전략적 UX라이팅>에 보면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을 잊을 수 있지만, 그 순간에 느낀 감정은 절대 잊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훗날 닉의 입장에선 산만하게 내뱉었던 데이지의 말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에 느낀 감정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안녕하세요. 네 번째 날입니다. 1장에서 닉은 베이커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족감에 꽉 차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웬만하면 나는 찬사를 보내게 된다.” 닉은 톰 뷰캐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옛날보다 더 심해진 자족적 행위도 그에게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듯 열변을 토하는 그의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슬픈 구석이 있었다.” 자족감이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자족감이란 무엇인가요.
자족감은 자신에 대한 만족감 혹은 자신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톰은 대학교 운동선수 시절 이후에는자기과시의 순간이 없어지면서 점점 초조해지고 그래서 더 과장적으로 행동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네, 저도 그렇게 느끼며 읽고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자족감'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독자가 느끼기에 톰은 자족감이 별로 없는 사람인 것 같거든요. 뭔가를 성취해야 사람이 자족감을 가질 수 있을 텐데요, 톰에게는 주어진 것이 많고 그 주어진 것들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고, 뭔가를 계속(여자를 계속 바꾼다든가 하는 것들) 갈망하는데, 역설적으로 공허해서,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어딘가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해요.
자족감은 양날의 검 같아요. 물질적 조건으로 보아 가진 게 적은데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하고 만족하고 사는 건 쿨해보이는데요. 더 노력해도 좋을 사람이 톰처럼 '재산도 있고, 명성도 있고, 부인도 있고, 애인도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라고 하는 건 공허하게 보이네요. 소설가님의 질문으로 저를 다시 돌아봅니다. 고맙습니다!
네, 정해져 있습니다. 제가 두 번째 올린 글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자족감'이라는 워딩이 낯설어서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국문 어휘력이 부족해서 저는 이런 단어를 처음 들어본 거 같아요. 베이커에 관해 언급하면서 활용한 단어는 self-sufficiency이고 닉에 대해 언급한 단어는 complacency이더군요. complacency가 좀더 부정적인 뉘앙스 같긴 한데 그러고보니 저는 영문 어휘력도 부족하네요. "Almost any exhibition of complete self-sufficiency draws a stunned tribute from me." "There was something pathetic in his concentration, as if his complacency, more acute than of old, was not enough to him any more." 자족감은 코어 근육 같은 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근육이 팔 할 정도 있을 거 같고, 나머지 이 할은 후천적인 단련으로 획득되는 근육이 있을 거 같아요. 코어 근육이 생기면 그때부터 관절과 근육이 제자리를 찾게 되고 잘 아프지 않습니다. 칼이나 총을 맞아도 단단한 복근 덕분에 내장이 덜 다칠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코어 근육"이라는 말이 매우 신선한데요. 코어 근육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키우지 못하는 날들인데, 이 말이 제게 화두 같네요.
톰의 애인 머틀은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합니다. 이렇게 말하죠. “내가 (그이에게) 미쳐 있었던 건 막 결혼했을 때뿐이야. 하지만 곧 아차, 실수했구나 하고 깨달았지. 그 작자는 결혼식 때 예복을 빌려 입고도 나한테 입도 뻥긋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느 날 그 인간이 집에 없을 때 옷 임자가 옷을 찾으러 온 거야. ‘아, 그게 댁의 양복이었나요? 전 처음 듣는 얘기거든요.’ 내가 물었지. 난 양복을 그에게 내주고 나서 드러누워 오후 내내 엉엉 울었어.” 사랑은 오해로 시작해 이해로 끝난다던가요? 돈많은 척 연기한 윌슨은 머틀에게 외면을 당하는데요. 과연 개츠비는 위대한 갑부라는 배역을 소화할 수 있을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다섯 번째 날입니다. 1장에서 톰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닉은 데이지가 해야 할 일은 당장 톰과 사는 집을 나가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2장에서 톰과 함께 톰의 애인인 윌슨 부인을 만나러 가게 됩니다. 닉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닉 자체가 어쩌면 모순으로 가득한 사람인 것 같아요.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고 그점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견디기 힘들거나 불편한 모임자리를 지키고 있어 본 경험은 있을 것 같네요. 저 역시 싫으면서도 '어떤 끝'을 관음하고 싶은 삐딱함 때문에 계속 남아있을 때도 있었고요. 그래서 "나 역시 위쪽을 올려다보며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변화무쌍한 삶에 매혹당하기도 하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나는 집 안에 있으면서 집 밖에도 있는 기분이었다"(56쪽) 같은 대목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저도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2장까지 다시 소설을 읽으면서 전엔 안 보였던 한가지 특징(?)을 발견했는데요. 여성 인물의 말투만 공대하는 투로 서술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주워 듣기로는 과거의 번역에서 안 좋은 사례로 남녀 사이의 위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여성 인물의 말투를 평어로 다시 고쳐서 읽으면 어떨까 싶었는데, 눈에 익은 투여서 그런지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지더군요. 제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소설을 쓰는 입장이시기도 하니 이점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니다. 부러 논란을 만드려는 것은 아니고 바람직한 논의가 됐으면 합니다.
저도 비슷한 불편함을 느껴서, 열린책들의 김영하 작가님 번역본으로 읽었어요. 데이지의 대사는 대부분 그쪽이 훨씬 생동감있개 전달되더군요
아이구 열린책들 아니고 문학동네 ㅠㅠ 수정도 안되네요 ㅠㅠ
2장에서 닉은 일요일 오후에(내일 출근해야할 지도 모르는데!) 톰 일행과 더불어 유난히 과음을 하는데, 이런 행동에 그의 기분이 반영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아래 단락에 해주신 말씀 저도 무척이나 공감합니다. 번역된 책을 보면 말씀해주신 것처럼, 남자는 여자에게 반말을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존대를 하는 그런 상황이 무척이나 많은 것 같아요. 예전에 나왔던 책일수록 그런 일이 많은 것 같고요. 저는 알아서 변환해서 읽는 편입니다. 요즘 새로 나오는 번역들, 특히 이런 부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번역가들이 많아지면서 젠더라든가 단어에 대한 감각 같은 것들이 변하고 있더라고요. 언어는 당연히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나왔던 책들은 읽으면서 당시의 상황과 의식구조를 느낄 수 있는 것 같고요. 요즘 나오는 책들은 이러한 부분들이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저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여섯 번째 날입니다. 오늘은 비가 부슬부슬 오네요. 2장에서 닉은 톰의 애인인 윌슨 부인이 옷을 갈아입은 걸 보고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고 느낍니다. “옷이 날개라더니 그 덕분에 인품마저 달라 보였다.”라면서요. 옷도 정체성의 일부인 듯합니다. 특히, 제복이 그러하고요.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옷도 정체성의 일부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 중에, 내가 만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의 교집합이 나의 정체성이 아닐까요?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도 하니까요.
옷과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의 정체성의 일부를 이룬다는 미키타임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둘 다의 공통점은, 미키타임 님의 말씀처럼 '되고 싶은 나'가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것 같아요. 오늘 제가 입었던 옷을 되돌아보며, 내일 만나기로 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크게 강조된 부분인데, 그 사람의 거주지가 정체성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망원동에 사는 사람, 목동에 사는 사람, 신림동에 사는 사람, 일산에 사는 사람, 포항에 사는 사람… 지리적 선택이야말로 별다른 설명 필요 없이 그에 대한 많은 정보 혹은 이미지를 제공하죠.
맞아요. 거주지도 정체성에 기여하는 바가 크지요. 저는 경상도에서 자라고 스무살에 처음 서울에 왔어요. 고향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서울에 와 보니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촌사람이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억울했어요. 나의 출생환경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나의 고향으로 나의 정체성을 파악한다는 것이... '경상도 남자'라는 일반적 통념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어쩌면 지금 저의 정체성은 지리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에서 빚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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