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나눔] 여성살해,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 필리프 베송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D-29
기만적인 의문들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나는 또 무엇을 놓쳤을까? 어떤 사실을 알게 될까? 내 발 밑에 뚫린 구렁텅이는 얼마나 더 깊어질까? 그런데 나는 어떻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88,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한달 후,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오는 데 동의했다. 무슨 이유로 부모님이 화해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과했고,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이제 어머니를 의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믿어주는 척 했다. 어머니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혼과 가정, 가족, 집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리라. 그랬던 어머니가 "다시 떠나기로 결심" 한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106,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해결책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머니는 아무죄가 없었기에 아버지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바로잡을 것도 없고, 내보일 증거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진짜 죄인이라도 된 듯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약속하고 맹세했다. 어머니는 그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았고, 절대로 그만두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113,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나는 몸을 떨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남자를 더 좋아한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했던 날도 생각나." 어느 일요일 봄 날, 어머니는 거실에서 다림질을 하고 나는 한가로이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다 불쑥 말해버렸다. "레오에 대해 얘기했던 거 기억나? 그 애를 사랑하는 것 같아." 물론 오래전부터 고민해온 이야기였다. 사랑한다고 하면 커밍아웃이 더 잘 받아들여질 거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 어머니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허공에 다리미를 들고 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다림질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몇 초면 충분했다. 어머니는 “사랑에 빠지는 건 좋은 거야"라고 말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130,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어머니가 감히 저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고, 얼마나 절망했고,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상상해보았다. 도움을 구걸하러 오기까지 말이다. 공권력에 기대어 시련이 끝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보잘것없는 종이를 손에 쥐고 결국 사형집행인에게 돌려보내진 어머니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을 그리다가 나는 울음이 터졌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155,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은지 물었을 때 답이 없다면 그 사람은 괜찮지 않은 거야."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177,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그는 레아가"별로 협조적이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정기 상담을 제안했다. 그는 동생에게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프로작, 어머니와 같은 약이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190,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무거운 마음으로 힘겹게 읽는 중입니다. 모든 것을 목격한 레아가 계속 눈에 밟히네요. 물리적인 폭력을 당한 건 엄마이지만, 그걸 옆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레아는 정신적인 폭력을 당했다고 생각해요. 한사람의 죽음으로 그 사람을 둘러싼(혹은 그 사람과 연결된)세계가 파괴되지요. 그래서 표지가 더 눈에 띄는 것 같아요. 어떤 물체가 산산이 부서진듯한, 조각난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진 모습. 부서지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춤과 산책을 좋아했던 세실 모랑을 떠올려보면 표지 속 이미지가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36장까지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그 와중에 어머니의 장례식까지 준비해야하는 남매가 안스럽습니다. 관을 고르는 과정에서 레아는 엄마가 튀는 걸 싫어했으니 간소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도 긴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이 사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극인 까닭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을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아직 미성년자인 레아의 양육자가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점이었어요. 거기다 정말 화가 나는 부분은 아버지라는 사람은 끝까지 아버지이자 남편이기를 포기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해 두 아이를 원고로 만들어 재판까지 끌어들이려고 하다니. 사실 어머니는 1년 전 헌병대를 찾아와 아버지의 심각한 가정폭력을 신고했었으나 어머니의 상태가 겉으로 드러난 상처 하나 없었기 때문에 상황이 위급하지 않다고 판단해 작성된 고소장은 방치된 채 아무런 후속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죠. 베르디는 어머니의 신고 내용이 매우 모호했고, 구타라고만 하고 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며 변명하는데요,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는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나 사건을 수사하는 베르디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치정이 아닌 사회적 사건으로 보아야 했다. 우리는 비극으로 끝난 부부 싸움이 아닌, 지속적인 폭력과 공포가 어디로 치닫는지에 관해 말해야 했다. 살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내세우며 지배하려는 한 남자의 욕구에 관해 말해야 했다. 눈이 먼 사회를 말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에 이름 붙이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203,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나는 아빠를 사랑했는데 아빠는 왜 우리 삶을 망가뜨렸어요?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217,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마음이 부글부글거립니다. 속상하고 화나요.
어머니는 남편의 구타, 가정폭력, 가스라이팅을 "그런일" 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고백하지 않은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이북 62p,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동생은 어머니의 말에 수긍했고 구렁텅이를 숨기면서 "그런일" 이라고만 말한 것이다. 그런일이라는 표현이 많은것을 숨기기 좋은 가까운 가족마저도 문제시 여기지 않게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버린것은 아닌것인지 생각해볼 문제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날 밤 레아는 "오빠랑 엄마를 보고 있는데 너무 좋았어. 공연보다 더 좋았어"라고 말했다. 동생의 고백에 눈물이 터졌고, 곧바로 닦았다. 동생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은 카레페를 만들면서 엄마가 오빠 크레페 뒤집는 걸 도와줬을 때야." 나는 곧바로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순간들이었다. 그 순간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128p,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이 남자는 아내가 자기에게 속하고,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자유를 되찾지 못하게 할 확실한 방법으로 아내를 살해했습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210p,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예전에 어른들이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폭력은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쉽다고... 그 한 번의 선을 넘는다면 어느 조직이든 학교나 가정, 모임도 마찬가지고 폭력 단체가 돼 버리죠.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에서 폭력이 시작되는 순간 그건 시작이 아니고 끝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이러한 현실 도피의 결과는 분명 참담할 터였다. 그럼에도 당분간 우리가 기댈 것은 회피와 기피뿐이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183쪽,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단 몇 초 만에 어린 시절이 망가진 아이들. 피비린내와 구타의 기억을 안고 자라는 아이들. 울지 않고는 소리 내 '엄마'를 말할 수 없고, 전율하지 않고는 '아빠'를 말할 수 없게 된 아이들 말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190쪽,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끔찍한 사건을 목격했기에 레아가 보일 수밖에 없는 증상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한 비극이 일어났을 때, 남겨진 자녀 특히 미성년자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즉각적이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당사지들은 회피와 기피를 원할지라도, 화자의 말처럼 그러한 방식은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테니 말이죠. 앞으로 레아가 더 나빠지지 않을지 심히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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