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나눔] 여성살해,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 필리프 베송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D-29
그렇지요..
제가 어릴 때 본 근대 극에서는 아버지가 딸을 걸고 도박을 하는 일이 흔했어요 아버지가 뭔가 잘못하거나 망하면 아내와 딸이 그 부속물로 잡혀가는 일이 흔했고요 나라를 빼앗기거나 도적 떼가 침입했을 때 아내와 자녀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는 모습이 비장한 가장의 각오이자 유일한 선택으로 표현되기도 했지요 아내와 자녀에게도 자신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있거늘, 아버지와 동등한 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아 벌어진 일이겠죠 요즘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고 어머니가 그것을 묵인하는 일이 예전보단 덜해졌겠지만,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어머니와 자녀가 전전긍긍하거나, 아버지의 언어폭력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경우는 아직도 적지 않을 것 같아요 (물론 어머니가 자녀에게 언어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버지=가장이 가정경제를 책임짐과 더불어 가족구성원을 소유하는 느낌과는 다르니까요) 아버지가 집안의 어른이라 예의를 지킨다는 허울 좋은 명제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부모든 자녀든 예의와 존중은 서로 지키는 것이니까요
완독했습니다. 읽으면서 정작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던 부분은 48장부터였습니다. 졸지에 부모를 다 잃은 두 남매와 딸을 잃은 할아버지가 겪어야할 고통은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식물처럼 살아가는 레아의 퇴원은 기약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이 고통을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이 떠안아야하는 건지... .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에 무거움이 더 큽니다.
이 정체와 무기력 때문에 나는 우리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자기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레아를 보다가 세상은 우리를 그저 부수적 피해자로만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눈에 띄어서도, 목소리를 내어서도 안 되는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말 없는 투명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거부했다. 나는 파괴된 우리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글을 쓴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236,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나는 그 눈빛을 안다. 그것은 세상을 보지 않는, 내면을 향한 눈빛이었다. 동생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고, 내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창가 가까이 다가가서 본, 공포에 질린 동생의 눈빛을 보고 알았다.p44"
동생에 전화를 받고 도착한 나는 동생을 마주합니다. 엄마의 마지막을 지켜본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는 장면인데, 폭력에 영혼이 무너진 어린 소녀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폭력'은 내가 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목격하는 것도 큰 상처를 남긴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폭력의 현장도 그렇고 가정폭력도 그렇고요...
이번에도 우리 어머니가 죄인이었다. 충분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죄, 멍과 상처로 뒤덮이지 않은 죄. 헌병대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거나 도입부 진술만 기록한 것, 가장 기본적인 직감이 부족했던 것은 죄가 될 수 없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152,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할아버지는 우리가 "다시 자리 잡을 거"라고 예언하기까지 했다. 나는 이 말에 흔들렸다. 그 말은 예전의 삶을 되찾아야겠다는 시도를 암시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예전의 삶은 되찾을 수 없고, 순진함은 끝났고, 태평함도 끝났고, 더 나은 운명에 대한 희망도 끝났고, 그저 언젠가는 충격에서 벗어나, 상처를 안고 부족한 대로 그럭저럭 살아가려고 노력하기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218,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대한민국은 존속살해에 대한 가중처벌이 있을 뿐 배우자, 비속(자녀 등)을 살해한 경우에 대한 명칭과 처벌에 대한 법적 언급이 없다고 들은 적 있어요.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여성 살해에 대한 법관, 경찰의 태도나 일부 주변인의 안일한 판단 등 데 작품의 배경이 된 프랑스의 상황도 국내 상황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보이는데 법 상황은 어떤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헌병대 소위는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었지만 - 이제는 순순히 인정했다 -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 "신고 내용이 매우 모호했습니다. 모친께서는 구타라고만 하고 더 자세히 밝히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우리 어머니가 죄인이었다. 충분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죄, 멍과 상처로 뒤덮이지 않은 죄. 헌명대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거나 도입부 진술만 기록한 것, 가장 기본적인 직감이 부족했던 것은 죄가 될 수 없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설명을 덧붙일수록 죽은 사람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꼴이었다. 가장 순진하게, 그래서 가장 잔인하게 레아가 대꾸했다. "그럼 당신들이 제대로 일했다면 우리 어머니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뜻인가요?"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은지 물었을 때 답이 없다면 그 사람은 괜찮지 않은 거야." 그러나 그는 다시 묻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나는 생각했다. 열세 살에 프로작을 복용하는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그렇다. 레아는 빌어먹을, 아직 어린아이였다). 단 몇 초 만에 어린 시절이 망가진 아이들. 피비린내와 구타의 기억을 안고 자라는 아이들. 울지 않고는 소리 내 '엄마'를 말할 수 없고, 전율하지 않고는 '아빠'를 말할 수 없게 된 아이들 말이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끔찍한 사건 후 남겨진 아이들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부모가 세상의 전부일 나이에 부모로 인해 세상을 등지게 되는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또 우리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네 이 책으로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아이들을 그저 부수적 피해자가 아니라 제대로 목소리가 주어져야 하고 지원해줘야 한다는 걸 절감했어요.
주인공은 꿈을 내려놓고.. 여동생은 어머니가 먹던 프로작을 처방받고 사라지고.. 이 모든 것이 자기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 때문에 초래되다니.. 게다가 이미 경고의 징후가 여러 차례 나타났는데 모두 무시되고 묵살되어 결국엔 이런 비극까지 이르다니.. 너무 안일한 사회기관들의 대처가 가장 화가 나네요.. 이러니까 결국 피해자들이 신고하거나 이런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게 되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가라앉는 레아, 그리고 관심을 가진다고 가졌지만 결국 레아가 자주 잊어버리고 늦게 제출하는 건 몰랐던 할아버지와 나. 그 모든 게 일부로 만든 상황이 아님에도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나의 최선을 다해 남은 사람들과 이겨내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음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어려운 시간을 더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무거워졌습니다.
이 남자는 아내가 자기에게 속하고,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210,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사실,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겪었던 트라우마도 사라질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다. 충격이 가한 폭력은 이상하게도 온전히 남아 있었고 악몽도 줄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221,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자기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레아를 보다가 세상은 우리를 그저 부수적 피해자로만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P. 236,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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