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혼자 읽기

D-29
그 사이에 백신 반대 진영에 또 한 가지 나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유해의 증거》를 쓴 데이비드 커비가 “자살골”을 넣은 셈이었다. 2005년 한 회의적인 블로거와 논쟁을 벌이던 커비는 티메로살 이론을 간단히 검증해볼 방법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최근 몇 년간 캘리포니아주의 자폐증 발생률을 추적해보는 것이었다. 자폐증 발생률이 떨어지고 있다면 티메로살 이론이 맞는 것이었다. 2000년대 초부터 백신 제조사들은 대부분의 어린이용 백신에 티메로살을 사용하지 않았다. 새로운 밀레니엄에 태어난 어린이들은 백신을 통한 메틸수은 노출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폐증 역시 줄었을 것이었다. 커비는 자칭 시민 케인이라는 블로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2007년까지 3~5세 어린이 중 자폐증 진단이 감소하지 않는다면 자폐증-티메로살 가설에 치명타가 되겠지요.” 마침내 마감 시점인 2007년이 되었지만 캘리포니아주의 자폐증 유병률은 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올라갔다. 다시 일 년이 지나자 유병률은 더욱 높아졌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2장 추악한 진실,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즉시 오티즘 스피크스 웹사이트에는 밥과 수잰의 퉁명스러울 정도로 간결한 성명서가 올라왔다. “케이티 라이트는 오티즘 스피크스의 대변인이 아닙니다. 우리 딸의 개인적 견해는 우리의 견해와 다르며, 오티즘 스피크스가 꾸준히 추구하는 목표를 대표하지도 반영하지도 않습니다. 오티즘 스피크스는 그녀와 데이비드 커비의 인터뷰를 사전에 알지도 못했고 동의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케이티의 말에 모욕감을 느꼈을 많은 사람들을 언급하며, 세대에 관계없이 활동가들의 노력을 높게 평가한다고 단언했다. 마지막 줄은 이렇게 끝맺었다. “저희 딸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이런 사실을 오해하셨을 소중한 자원봉사자들께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3장 거대한 사기,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하지만 《뉴욕타임스》 기사가 보도된 후에는 점점 분위기에 발맞추기가 어려웠다. 오래도록 소모적인 논쟁이 이어진 탓에 훨씬 급박한 일에 쓸 수 있는 연구비와 노력이 헛되이 낭비되고 있었다. 더욱이 한때 자취를 감추었던 감염병들이 다시 유행한다는 보고가 쏟아졌다. 부모들이 백신을 기피하는 추세가 명백한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상당히 타당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2004년과 2005년 연속 백일해 환자가 갑자기 세 배 증가하여 2만 5,000명을 넘었다. 이런 추세는 멈추지 않았다.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한 캘리포니아주에서는 2010년에 9,000건의 증례가 보고되었고, 10명의 유아가 사망했다. 1947년 이후 가장 높은 숫자다. 한편 미국 전역에서 홍역이 다시 유행하여, 2014년에는 20년 만에 가장 높은 발생률을 기록했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3장 거대한 사기,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백신 논란의 와중에 오티즘 스피크스는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선한 원칙과 과학의 충돌을 겪었다. 양극단의 지지층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격차를 좁히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예방접종의 “입증된 효과”를 지지한다는 강령을 지닌 그들은 어느 누구의 비위도 거스르지 않으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동시에 백신이 혹시라도 유해할지 모를 가능성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천명했다. 어느 쪽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태도가 양쪽을 모두 소외시키는 결과를 빚었던 것이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3장 거대한 사기,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005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잘못된 행성>이 어떻게 그렇게 빠른 지지를 얻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알렉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온라인에서는 (아스퍼거인들이) 말하는 방식이나 틀에 박힌 버릇에 대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채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회적 압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과 관련된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눈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눈썹을 치켜세운다든지, 억양을 미묘하게 변화시키는 등 순간순간의 비언어적 소통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아스퍼거 공동체에 속한 사람에게 그런 식의 소통은 항상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2005년경에 이르러 인터넷에서 하나의 표현양식으로 자리잡은 텍스트를 통한 대화는 <잘못된 행성> 사용자들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신호에 애를 먹었던 사람에게 인터넷은 해방구였다. 채팅창에서는 누가 아스퍼거인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4장 당사자의 목소리,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하지만 갑자기 템플 그랜딘이 수천 명 나타난 것 같았다. 그들 모두 <잘못된 행성>과 다른 인터넷 사이트는 물론 아스퍼거인 모임과 학회에서 대화에 뛰어들었다. 사실 참여한 사람 중 일부는 한 번도 제대로 아스퍼거라는 진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 “고기능 자폐증”이란 진단을 받은 적은 있었다. DSM에 수록된 진단명은 아니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이 알려지기 전까지 임상의사들 사이에 널리 사용된 용어다. 전형적 인물이 바로 템플 그랜딘으로 자신의 웹사이트에 스스로를 “고기능 자폐증”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여기서 “고기능”이란 말은 자폐성향이 뚜렷하지만 최소한 평균 수준의(종종 그 이상의) IQ와 말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결국 “고기능 자폐증”이란 아스퍼거 증후군과 매우 비슷하게 들렸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4장 당사자의 목소리,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짐 싱클레어를 비롯한 사람들이 신경다양성이란 철학을 설파하면서 반박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중심원리는 자폐증을 갖고 사는 것(신경다양성 지지자들이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자폐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인간으로 존재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매우 건전하고 아무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논리적 귀결은 훨씬 논쟁적이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데 무슨 완치가 필요한가? 그러니 자폐증 역시 완치 따위는 필요 없다. 자폐인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자폐를 없애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5장 신경다양성,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스스로 자폐인이었기 때문에 네이만은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대해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공개적으로 그에게 맞서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네이만이 논쟁에서 조금도 기가 죽지 않는 타입이기도 했지만, 자폐인이란 사실을 명예로운 훈장처럼 여기고 자신과 동료들이 심한 편견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대놓고 논쟁을 벌여서 이로울 것은 없었다. 네이만은 딱 맞는 시점에 ASAN을 출범시킨 셈이었다. 자폐증을 단순한 발달장애가 아니라 신경학적 차이로 봐야 하며, 따라서 “모든 자폐인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존재”라는 주장은 성적 정체성의 폭넓은 차이를 인정하기 시작한 문화 속에서 훨씬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5장 신경다양성,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신경다양성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성소수자 권리옹호 캠페인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네이만과 자신이 자폐인임을 밝힌 지지자들을 “개방적 자폐인”이라고 불렀다. 그 말에는 네이만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속이 좁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 숨어 있었다. 네이만이 종종 논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명망있는 단체는 공연히 그와 논쟁을 벌여 무지몽매하다는 인상을 줄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인터넷 채팅방과 블로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그를 깎아내린 것도 사실이지만, 정작 네이만의 가장 큰 표적인 오티즘 스피크스는 다소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며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응수하지 않았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5장 신경다양성,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자폐인으로서 미시시피주의 작은 지역공동체에서 산다는 것은 많은 점에서 축복이었다. 모든 것이 친숙하고, 예측 가능하며, 조용하고, 안전했다. 포레스트는 삶의 속도가 느리고, 시끄러운 소음이 거의 없으며, 오늘의 삶이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소도시의 삶이 그렇듯 포근한 인간관계가 촘촘히 얽혀 있었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그저 아는 정도 이상으로 잘 알았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6장 행복한 사람,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포레스트가 낙원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곳에도 가난과 물질남용과 정치적 쟁투와 범죄가 있었다. 몇 년에 한 번쯤은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했으며, 1970년대 들어 한때 매력이 넘치던 도심은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행복을 찾기 위해 꼭 낙원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포레스트에서 도널드는 그가 다르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 고향 사람들 속에서 살았다. 그들이 개의치 않았으므로 그 역시 두려움이나 조롱이나 잔인한 행동에 시달리지 않았다. 사회적 부족함이 주목받지 않을수록 그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덜 중요해졌으며, 그의 장점과 능력은 계속 발달하고 확장되었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46장 행복한 사람,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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