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04.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D-29
@소피아 님, 김진주(가명) 씨 방송 언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진주 씨의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얼룩소) 읽고 나서 리사 배럿의 논의를 따라서 이런 글을 하나 써봤어요.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이토록 뜻밖의 뇌 과학』도 참고했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해에 도움이 되시라고 조금 길게 남겨봅니다.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의 500일간의 투쟁기이자, 대한민국의 모든 범죄피해자들을 위한 생존 매뉴얼. 범죄피해를 완벽히 피할 방법은 없다. 다만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게 백신을 맞듯, 이 책을 읽고 나면 범죄피해를 당했을 때 더 잘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은 예측하고 구성하며 행동한다. 당신은 당신 경험의 설계자다.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8장,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최호영 옮김
우선 뇌에서 평생에 걸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개념을 잡아야 한다. 인간의 뇌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변한다. 뇌에서 일어나는 이런 변화는 ‘세부 조정(tunning)’과 ‘가지치기(pruning)’라는 두 과정의 결과이다. 세부 조정은 뇌를 구성하는 특정 신경 세포의 연결을 강화하는 과정이다. 가지치기는 반대다. 사용하지 않은 신경 세포의 연결은 약해지고 사라진다. 책 읽기 습관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즐겼던 사람이라면 그것과 관계된 신경 세포의 연결은 강화한다. 반면, 요즘처럼 어렸을 때부터 유튜브나 게임과 같은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환경에서는 책 읽기와 관계된 신경 세포의 연결은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 그 자리는 대신 유튜브나 게임과 같은 영상 콘텐츠에 최적화한 신경 세포의 연결이 차지할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전자가 빚어낸 태아의 뇌(본성)는 그 자체로는 허점투성이다. 그 뇌는 세상과 만나면서 햇빛과 같은 자연(빛의 자극이 있어야 시력을 담당하는 신경 세포의 연결이 강화한다)부터 양육자(부모)가 주도하는 육아까지 다양한 요인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을 찾아간다.
특히 성장할 때, 그러니까 어렸을 때의 뇌가 받은 영향은 어른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심지어 수정 후에 엄마 자궁 안에서 태아 상태로 있을 때도 뇌는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엄마의 영양 상태, 심리 상태를 비롯한 온갖 요인이 고스란히 태아의 뇌가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데에 영향을 준다. 뇌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수십 년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중요하다. (…) 어린 뇌는 세계에 연결된다. 배선 지침이 풍부한 사회적 세계를 포함해 아이들의 뇌를 건강하고 온전하게 성장시키기 위한 세계를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99쪽)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본성(유전)과 양육(환경)의 이분법 따위가 설 자리는 없다. (1976년에 나온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같은 책이 비판적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전과 환경은 “서로 너무 격렬하게 얽혀 있어서 본성이나 양육 같은 별개의 이름으로 불러봐야 소용이” 없다. 뇌는 “양육이 필요한 본성”이다.
이렇게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전해진 유전, 그렇게 전해진 본성이 제대로 양육될 수 있도록 돕는 태아와 어린 시절의 환경과 같은 외부 요소를 강조하다 보면, 이런 식의 편견이 생기기 쉽다. 그렇다면, 전과 18범이었던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는 본성과 양육 같은 외부 요인 때문에 범죄자가 된 것이 아닐까? 범죄는 사회 탓으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물려준 (또 다른 뇌 과학자 게리 마커스(Gary Marcus)의 표현을 빌려서 비유하자면, 최종 출판된 결과물과는 크게 다른) “책의 초고” 상태와 비슷한 태어날 때의 뇌도, 어렸을 때 양육자(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은 뇌도, 이 글을 읽고 있는 10대 후반이 된 당신의 뇌와는 아주 크게 다르다. 적어도 10대부터는 누구와 어울릴지, 어떤 행동을 선호할지(쉬는 시간에 책을 읽을지 운동하면서 땀을 흘릴지 게임을 할지, 담배나 술과 같은 중독으로 이끄는 기호품을 탐닉할지 말지), 어떤 환경(교실에서 공부할지, 거리를 배회할지)에 자신을 맡길지 등은 바로 당신의 선택이다. 그런 크고 작은 선택은 뇌의 변화를 이끌고, 그런 뇌의 변화가 쌓인 게 바로 지금의 당신이다. “오늘의 행동은 내일 뇌가 내놓을 예측이 되며, 그 예측은 자동으로 당신이 앞으로 할 행동을 이끈다. 따라서 당신에게는 새로운 방향으로 예측하는 뇌를 길어낼 자유가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당신이 져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두가 폭넓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구에게든 어느 정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123쪽)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한 사람의 범죄자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어린 시절의 양육 환경, 청소년기의 또래 집단 등 넓게 보면 외부 요소라고 할 만한 것이 분명히 영향을 준다. 하지만, 최소한 10대부터는 그런 외부 요소를 때로는 거부하고 수용하면서 하나의 범죄자 정체성을 만드는 데에는 그 당사자의 책임도 있다. 어린 시절의 양육 환경이 나빠서 이미 10대에 범죄자 정체성이 뇌에 또렷이 각인된 상태라면 어떨까. 설사 그렇더라도 뇌는 변한다. 자기에게 범죄가 아닌 다른 자극을 주는 친구와 어울리고,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훈련한다면 뇌도 바뀌고 그에 따라 자기의 정체성도 바뀐다. 1992년에 태어나서 10대 초반부터 시작한 온갖 범죄로 전과 18범이 된 것도 모자라서 얼굴도 모르는 여성을 모욕하고 죽기 직전까지 폭행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최소한 10대 이후에는 여러 차례 자기 선택으로 범죄와 거리를 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자기 범죄자 정체성을 차곡차곡 쌓은 데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이런 사고 실험은 어떨까.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와 일란성 쌍둥이가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일란성 쌍둥이라서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적 성향은 일치한다. 엄마 뱃속에 태아 환경도 똑같다. 어린 시절의 양육 환경도 비슷하다. 하지만, 10대 때부터 둘은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의 쌍둥이 형제는 가해자와 다르게 폭력과 거리를 뒀다. 이런 다른 선택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 그는 가해자와는 달리 경찰이 될 수도 있다. 일란성 쌍둥이지만 한 명은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처럼 수많은 전과의 범죄자가 되고 다른 한 명은 그런 범죄를 단죄하는 경찰이 되는 기막힌 일이 소설이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하다. 범죄의 책임이 최종적으로 그 사람에게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선택을 위한 근거는 어디에서 마련돼야 하는 건지.. 가 의문입니다. 그 쌍둥이 형제의 어린 시절의 비슷한 양육환경(경제적, 사회적)이라 하더라도 보고 배우는 것(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이 없다면 선택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거든요. 미안한 상황이 생겼을 때 자존심 때문에 사과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 아이들은 '어떻게'를 잘 모르더라고요. 잘못한 건 알겠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것 역시도 경험으로 예측해야 행동으로 표출되는 건데 .. 이렇게 되면 결국은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거라는 의견으로 기울게 되는 걸까요. 운명론적으로 원래 그렇게 되게 돼 있었어.. 아.. 정말 싫어하는 결론이긴 해요.
저는 리사 배럿의 '개인의 책임'에 대한 주장이 아주 오래된 '자유 의지'를 둘러싼 논쟁에도 돌파구를 마련할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죄가 사람 탓이다, 사회 탓이다, 심지어 뇌 탓이다, 이런 논쟁에도 유의미한 발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물론 그들의 뇌가 유해한 환경에 맞게 배선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개념 체계를 더 낫게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여성들 자신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책임의 형태다. 때때로 책임이란 당신이 사태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뜻한다. ” 여기서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 또한 책임의 한 형태라는데 공감이 갔는데.. PTSD 등의 치료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 같고 또 한편 가해자들 또한 자신이 '감정'의 피해자나 '사회/교육/양육'의 피해자가 아닌 주도적인 설계자이자 책임을 가진 주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근거가 될 것 같아요. Blank slate는 없지만 그 위에 쓴 것을 계속 지우고 다시 쓰는 주체는 결국 점차 성장해가면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니까요.
당신이 구성하는 모든 경험은 일종의 투자다. 그러므로 현명하게 투자하라. 당신이 미래에 다시 구성하고 싶은 경험을 가꾸어라.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9장,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최호영 옮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수천 년에 걸친 전쟁 자체가 본질주의에 의해 오염되어 있었다. 양 진영 모두 단 하나의 강력한 힘이 뇌를 조형하고 마음을 설계할 것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이 힘은 고전적 견해로는 자연, 신, 그리고 진화였고, 구성적 견해로는 환경과 문화였다. 그러나 생물학적 메커니즘이든 문화든 한 가지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8장, 320쪽,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최호영 옮김
당신의 뇌가 예측과 구성을 바탕으로 작동하고 경험을 통해 재배선된다면, 오늘 당신의 경험을 바꿈으로써 내일의 당신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8장, 326쪽,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최호영 옮김
문화충격입니다 무지개는 당연히 일곱빛깔인줄 알았는데 ㅠㅡㅠ
고쳐졌겠지만 오탈자 체크입니다
8장까지 따라잡았습니다. 안그래도 역사 속 감정에 대한 각자 차이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있었는데 8장에서 딱 나오네요. 역사는 승자의 이야기에 새삼. 매우 흥미롭습니다. 더불어 요즘 얼굴경영학과던가... 쟈철 탈때 광고가 뜨던데 8장서 나오는 연구 이야기 보면서 생각 나더군요.
9장은 진짜 실용적인 팁들로 가득하네요. 명상이나 불교에 대해 언급한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또는 영적으로spiritually 깨우친 지식과 과학적인 근거가 딸깍 맞아들어갈 때 느끼는 쾌감이 있었어요. 내가 집에서 우울해서 처져있으면 동네 슈퍼가서 대파 한 단 얼른 사오라며 억지로 밖으로 나가게 심부름을 시키시던 엄마의 지혜에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ㅎㅎ ㅡ 마음에서 내키지 않더라도 일어나서 이리저리 움직여라!
ㅋㅋㅋ 엄마의 지혜... 저도 배워야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모시모시 10장 '뇌의 잘못된 예측이 내 몸을 망친다'는 더 실용적입니다. 오늘 목요일(4월 18일)과 내일 금요일(4월 19일)은 10장을 나눠서 읽습니다. 10장은 건강 실용서 같은 느낌이라서 어려운 장이 아니라서 단숨에 읽어도 무방합니다. 뒤따라오시는 분들이 있어서 여유 있게 진행하는 일정입니다. 9장, 10장은 우리 일상생활에 활용할 만한 팁이 정말 많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이 분야를 취재해온 기자로서 덧붙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9장 재밌게 읽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잘 읽히는 듯요~ 8장에서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조금 불편했는데, 9장 10장 읽어가고 있는데 이런 내용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설득력이 있네요. "불행하게도 현대 문화는 당신의 신체 예산을 엉망으로 만들도록 설계되었다."(330쪽) "다양한 경험의 수집가가 되라. 새로운 옷을 시험하듯이 새로운 관점을 시험하라."(337쪽) "당신의 개념 체계를 비틀고 당신의 예측을 바꿈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미래 경험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실제로 당신의 ‘자기’를 바꿀 수 있다.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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