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보르헤스 읽기] 『알렙』 같이 읽어요

D-29
그쵸··· 현실에서 이런 일을 만나면 분통 터질 겁니다🥲 모쪼록 이번 모임도 수고하셨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 다른 죽음~] 전반부 모임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정말 멋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리 수고하셨다고 인사 드립니다😆 사소한 잡담으로 시작하자면, 최근에 본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강연이 떠오릅니다. 그는 철학으로 깨달을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세상은 언어로 종속돼 있지만 언어는 진실의 표현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객관적 주장에는 주관적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과학적 사실을 포함한 진실은 세상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으며, 외려 진실은 타인에 의해 확인되어야 하는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근원적 한계로 인해 '유일한' 진실에 다가갈 수 없고, 다만 각자의 주관성에 매몰돼 있으며, 그리하여 오직 타인을 통해서만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죽음⟩에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한 개인의 역사란, 누군가의 망각 위에 또 다른 망각을 포개는 지난한 행위이고, 그 망각의 연쇄고리를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안에서 이해하고 말하려는 욕망의 산물 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본격적으로 본문 얘기를 해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페드로 다미안을 둘러싼 여러 사람의 기억이 얽히고, 그에 따라 각각이 서로 모순되는 현실들로 갈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주장/증언을 시간순으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 페드로 다미안은 엔트레리오스의 괄레과이 출신입니다. 그는 1904년 우루과이 혁명 당시 아파리시오 사라비아를 추종하여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맹히 싸웁니다. 이후 귀향하여 1946년 죽는 그날까지 조용히 여생을 살았습니다. 이는 화자인 보르헤스가 페드로 다미안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과 지인인 파트리시오 가논을 비롯한 주변 정황을 통해서 구성한 삶입니다. (2) 페드로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 참가하긴 했으나 사실은 겁쟁이처럼 도망쳤습니다. 고향에서 40년 간 은둔하듯이 살았던 것은 전투에서 도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죄책감 속에서 1946년 죽었습니다. 이는 마소예르에 전투에 참가했던 디오니시오 타바레스 대령의 기억을 통해서 구성한 다미안의 삶입니다. (3) 얼마간 시간이 흘러, 보르헤스는 후안 프란시스코 아마로 박사와 함께 타바레스 대령을 재회합니다. 아마로 박사의 기억에 의하면 페드로 다미안은 1904년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감하게 선봉으로 진격하다가 적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타바레스 대령은 어쩐 일인지 아마로 박사의 증언에 공감하면서도, 과거에 자신이 말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4) 한술 더 떠서, 소설 초반부에 1946년 다미안의 부고 소식을 전해주었던 보르헤스의 친구, 파트리시오 가논조차 '다미안이 누구더냐'고 묻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어서 얘기해보면, (1)과 (2)에서 모두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 참가했고, 이후 엔트레리오스로 귀향하여 조용한 여생을 살다 1946년에 죽습니다. 하지만 그 세부 내용은 조금 달라서 (1)에서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2)에서 다미안은 겁쟁이처럼 도망쳤음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3)에 이르러서 다미안은 1904년 마소예르 전투에서 전사했음이 밝혀집니다. 요약하면, (1)과 (2)는 같은 현실을 공유할 수 있지만, (1)과 (3), (2)와 (3)은 같은 현실을 공유하지 못합니다. 죽은 시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4)로 인해서 앞선 사실 관계를 따지려던 보르헤스의 모든 수고가 의뭉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각각의 사실 관계는 서로 모순됩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과 망각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그 각각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하나를 택하면 나머지 것들은 모두 거짓이거나 불완전한 기억, 망각의 산물이 됩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보르헤스는 서로 모순되는 세계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추측을 채택합니다. 이 추측을 (a)라고 부르면, (a) 울리케 폰 쾰만은 (1)과 (3)을 양립시킵니다. 페드로 다미안은 1904년 마소예르에서 전사했지만, 귀향하고자 하는 영혼의 강한 열망 덕분에 신은 40년 간 그를 고독한 그림자로 살도록 '잠시'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조금 복잡해집니다. 울리케 폰 쾰만의 추측을 생각하면서 보르헤스는 두 개의 텍스트, 두 명의 인물을 떠올립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신학자인 피에르 다미아니(Pier Damiani)와 단테의 ⟪신곡⟫ 천국 21편에 나오는 피에트로 다미아노(Pietro Damiano)입니다. 보르헤스가 떠올렸다는 ⟪신곡⟫의 두 시행은 “Poca vita mortal m'era rimasa /quando fui chiesto e tratto a quel cappello”으로 추측되는데, 영역본으로는 “Not much of mortal life was left to me /when I was sought for, dragged to take that hat”입니다. (여기서 hat은 추기경의 모자를 의미합니다. 단테에 따르면, 피에트로 다미아노는 주님의 종으로서 추기경이 되었으나 모든 성직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들어가 평범한 수사로 일생을 마감하고 천국에 이른 인물입니다.) 정확한 사실은 알기 어렵지만, 단테의 피에트로 다미아노는 11세기 신학자 피에르 다미아니를 연상시키며, 보르헤스에 따르면 그는 '신이 한때 존재했던 것을 존재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요약하면, 보르헤스는 울리케 폰 쾰만의 초자연적 추측에서, 단테의 피에트로 다미아노와 11세기 신학자 피에르 다미아니를 떠올리고, 이 두 인물을 통해서 다시 피에르 다미안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추측합니다. 보르헤스의 추측을 편의상 (b)로 부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b) 보르헤스는 (2)와 (3)을 양립시킵니다. 1904년 피에르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서 도망쳐서 엔트레리오스에 숨어 살며, 언젠가 설욕할 그 날을 위해 전생(全生)을 가다듬습니다. 마침내 1946년, 다미안은 죽음 직전의 정신착란 상태에서 1904년의 마소예르로 가고, '그리스식 꿈의 그림자' 속에서 비로소 용맹하게 싸운 끝에 전사합니다.
역사 1)을 말살하고 역사 2)로 대체하는 과정의 시차에서 발생한 혼란을 화자/작가가 목격해버리고 만 것이군요. 하지만 진실을 곧이 곧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픽션으로 완성되었기에 특별대우를 받았고요. 전후 관계를 꼼꼼이 따져야해서 살짝 복잡한가 싶었지만 역시 두 번 읽어서 해결했습니다. 두 판본으로 교차해 읽으니 이해하기가 더 편했네요.
과거를 변경시키는 것은 단지 사실 하나를 바꾸는 게 아니다. 그것은 무한으로 펼쳐져 있는 그것의 결과들을 폐기시켜 버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해 본다면 이러하리라. 그것은 바로 두 개의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알렙 11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아 저는 요즘 총기가 떨어지는지 이런 소설은 여러 번 안 읽으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두 판본이 있다는 게 이럴 땐 좋은 것 같아요! 항상 모임 꼬박꼬박 참여해주셔서 감사해요! 또 뵐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 다른 죽음] 보르헤스는 이런 식의 추측이 "두 개의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서, 의도치 않게 현실에서 혼란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합니다. 현실에서 페드로 다미안에 관한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나 목격담이 서로 상충하거나, 더 이상 그를 기억할 수단이나 사람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이런 "두 개의 세계 역사"에 동반하는 혼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르헤스의 추측/상상이 지니는 특별한 점이 도드라집니다. 그것은 바로 (a)와 (b)로 이루어진 두 가지 추측이 일종의 픽션의 세계에 속하며, 픽션의 세계란 상식적인 세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추측은 당연히 이런 초자연적인 추측을 배제할 것입니다. 타바레스 대령과 아마로 박사의 증언을 늙은이의 오락가락하는 정신이나 망각 탓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상식'에 따르면, 1904년에 전사한 다미안과 1946년에 죽은 다미안이 전혀 다른 이름을 지닌 두 인물이구나 동명 이인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픽션은이런 상식을 염두에 두되, 상식에 매이지 않습니다. 사실에서 출발하되 사실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뭇사람들이 혼동과 망각을 말하면서, 별개로 치부하거나 미치광이의 헛소리라 부를 만한 사건들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를 봅니다. 보르헤스로 추측되는 '나'는 현실의 논리를 따져서 '있을 법한 현실'을 채택하고 나머지를 모두 폐기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의 논리를 넘어서 모순되는 것이 양립하는, 그리하여 '어떠한 것도 가능한 픽션'을 봅니다. 여기서 픽션의 역할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보르헤스는 다미안을 아는 가게 주인 아바로아가 죽은 이유는 다미안에 관한 모순된 기억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순된 기억이 공존하는 현실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서 죽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보르헤스는 왜 자신이 이런 모순 속에서도 죽지 않았는지 궁금해 합니다. 보르헤스는 그 이유로 '픽션'을 듭니다. 픽션이란 모순된 것의 공존이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화해는 아니지만 서로 모순되는 현실을 잠시 허용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서로 상충하는 현실을 간직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픽션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르헤스는 재밌게도 자신의 이러한 모든 추측을 의심합니다. 자신의 기억조차 의심하면서 앞서 서술한 증언들을 의뭉스럽게 만듭니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과연 사실만 있었는지, 허위는 없었을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11세기의 이탈리아 신학자 피에르 다미아니의 논문을 읽고 나서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피에트로 다미아노를 연상한 것처럼, 자신이 페드로 다미안이 아닌 인물을 페드로 다미안으로 불렀던 것은 아닌지 마지막까지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보르헤스에게 이 픽션은 이런 의심의 수단임과 동시에 그 결과입니다. 이런 픽션적인 의심만이 모순된 것의 공존으로서 존재한다는 아이러니와 함께요. 마지막으로 짚어보고 싶은 것은, 보르헤스가 초반부에 언급한 랄프 웰도 에머슨의 시 ⟨과거⟩입니다. 보르헤스의 기억에 따르면, 친구 가논이 이 시를 번역하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피에르 다미안의 부고를 전해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가논은 그런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에머슨의 시는 가논에 의해서 번역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에머슨의 시가 없는 셈 될 뿐 아니라 뒤집히기도 함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에머슨의 시 ⟨과거⟩ 전문입니다. 한국어 번역은 Claude에게 간단히 규칙을 정해서 요청했습니다.
The debt is paid, The verdict said, The Furies laid, The plague is stayed, All fortunes made; Turn the key and bolt the door, Sweet is death forevermore. Nor haughty hope, nor swart chagrin, Nor murdering hate, can enter in. All is now secure and fast; Not the gods can shake the Past; Flies-to the adamantine door Bolted down forevermore. None can re-enter there,— No thief so politic, No Satan with a royal trick Steal in by window, chink, or hole, To bind or unbind, add what lacked, Insert a leaf, or forge a name, New-face or finish what is packed, Alter or mend eternal Fact.
알렙 에머슨, The Past,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빚은 탕감되었고, 판결은 선언되었네. 퓨리스(Furies)는 물러났고, 역병은 잦아들었네. 모든 운명이 정해졌으니; 열쇠를 돌리고 빗장을 걸어라. 이제 죽음만이 달콤하리. 교만한 소망도, 짙은 실망도 죽일듯한 증오도, 들일 수 없네. 이제 모든 게 굳건하고 단단하여; 신들조차 흔들 수 없는 과거; 아다만틴의 문으로 날아가 영원히 빗장이 내리 걸렸네. 아무도 다시 그곳에 다시-들어갈 수 없네. 그토록 교활한 도둑도, 고결한 비책을 지닌 사탄도 창문, 구멍이나 틈새로 숨어들어 묶거나 끄를 수도, 벌충할 수도 없네. 한 장을 삽입할 수도, 위명(僞名)할 수도, 완성된 것을 완성하거나 새로이 할 수도, 영원한 사실을 변경하거나 수정할 수도 없네.
알렙 에머슨, 과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래서 나는 내가 과연 줄기차게 진실을 기록했는가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는다. 나는 나의 이야기 속에 허위 기억들이 게재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나는 (만일 그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뻬드로 다미안으로 불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리고 내가 그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가서 삐에르 다미아니의 논거가 그의 얘기를 구상케 해주었다고 믿기 위해서 그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알렙 11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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